영화 소울을 보고 든 생각들(스포 후기)
태어나기 전 세계, 현재 세계, 사후 세계까지 두루 다룬 픽사 영화.
단편 영화는 무난히 귀여웠다. 코로나로 이웃과 어울리면 다 같이 병들 수 있는 지금 세상에 어울리는 단편영화는 아니지만, 그런 의도는 없었다고 항변하는 듯 귀여운 표정을 지어보이는 토끼를 보고 웃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소울은 귀여움과 거리가 먼 재즈와 흑인 남성의 조합으로 시작한다. 그동안 흑인을 다루지 않던 픽사의 도약을 보여주는 포인트이지만, 예고편에 나온 동글이들이 안 나와서 조금은 실망? 당황?했다. 흑인을 전면에 내세우는 게 마케팅에 좋지 않다는 것을 픽사는 잘 알고, 나도 잘 안다. 그러기에 내가 당황한 것일 테다. 상업영화에서 흑인이 주인공인 것이 아무렇지도 않아져서 ’태어나기 이전 세계’의 동글이들도 흑인으로 그려지는 날이 언젠가 올까? 미의 기준은 언제쯤 전복되어 미디어에서의 평등이 실천될까? 픽사가 그래도 그리로 가는 길의 초입에 들어섰다는 생각을 해본다.
여하튼 영화는 주인공 조 가드너가 재즈를 사랑하고 아끼는 모습을 무난히 보여주더니 갑자기 죽인다. 그것도 귀엽게. 조 가드너는 사후세계로 가는 많은 사람들 중 유일하게 죽음과 맞서 사후세계로 가는 다리에서 뛰어내린다. (이 지점에서 흥미로운 건 사후세계- 태어나기 전의 세계- 지구 이 셋이 각각 상층- 중층- 하층의 공간으로 설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지구에서 죽으면 사후세계로 간다는 점에서 이 구조는 뫼비우스의 띠의 구조와 같고, 삶과 죽음을 반복한다는 점에서 윤회 사상을 떠올리게 한다.)
조 가드너가 뛰어내려 도착한 곳은 ‘태어나기 전의 세계’이다. 조 가드너는 갑자기 멘토가 되어 22의 불꽃을 찾아주는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세계를 관장하는 작대기(카운슬러)들이 허술하기 짝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작대기들 겉모습은 호안 미로나 칸딘스키 류의 모던 아트의 소산으로 보인다만 본인들은 양자가 어찌고 하면서 인간에게 친숙한 모습으로 보이게 했다는 나름 재밌는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일은 드럽게 못하면서.) 현대미술을 모르는 사람이 작대기들을 봤으면 뼈다구만 있는 줄 알고 놀라 자빠졌을 것이다. 어쨌든 그곳에서 살고 있는 22는 수천 년간 저명한 멘토들의 케어를 받아왔지만 불꽃을 찾지는 못했던 동글이다.(동글이 아니다. 다른 명칭 기억 안나서 막 붙였다.) 조 가드너의 열기찬 멘토링에도 역시나 불꽃 찾기에 실패한다. 22는 어떤 존재일까? 어떻게 다른 동글이들과 다른 삶을 살게 된 걸까? 영화는 이 부분에 대한 답을 주지 않는다만 왠지 어려서 죽은 존재일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된다. (지구에서 22가 여자 아이를 보고 놀랐기 때문에)
영화의 주인공은 조 가드너라는 것을 잊지 말자. 22는 지구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조 가드너의 유별남에 끌려 특별한 공간에 그를 데려간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의 토끼굴을 연상케하는 특별한 공간은 삶의 무아지경에 빠진 이들과 무아지경에 잠식된 이들이 공존하는 곳이다. 그곳에 떠 다니는 사람들은 어째 자궁 속에 떠 다니는 어린아이의 형상과 닮았다. 그렇다면 바닥에 구멍을 뚫어 지구로 떨어지는 것은 출산인 셈인가. 그곳에서 조 가드너는 지구로 돌아갈 찬스를 얻게 되지만 과정이 잘못되어 조 가드너는 고양이의 몸으로, 22는 사람의 몸으로 들어간다.
이후의 내용은 색다를 건 없다. 조 가드너의 육체를 얻은 22가 삶의 감각을 느끼게 되고, 삶의 소중함을 깨닫는다는 이야기. 조 가드너도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재즈 공연으로 성공하는 것에 연연했던 자신을 반성한다는 이야기. 그 전개가 조금 길게 그려지고 반전이나 감정의 증폭 없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실망스러웠다. 지구에 정찰 온 테리 작대기도 역시나 멍청한 짓이나 하다가 절정 부분에 갈등 하나 만들어주고 사라지는 기능적 역할만 수행한다. 영화의 주제는 일상의 아름다움을 깨닫자는 것이고 프루스트 식의 아름다운 문장 정도는 아니어도 왜 일상이 아름다운지 설득력있게 그려내야 하는데, 피아노를 치면서 부모님과의 추억을 잠깐 회상하는 것으로 조 가드너에게 일상의 아름다움을 깨닫게 하는 설정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생각이다. 오히려 아름다운 건 태어나기 전의 세계이고, 사후세계이다. 일상의 공간을 아름다운 공간으로 표현하기에 은행잎과 사탕은 조금은 부족했던 것 같다.
22가 행복해지는 것을 보면서 그래도 행복해졌다. 아무리 칼 융, 간디, 링컨 등 유명인사들이 빠삭한 이론과 정치적 올바름으로 덤벼들어도 그것을 실제로 내가 경험 하니만 못하다는 걸 몸소 증명하는 존재다. 22는 또한 순수한 존재다. 생긴 것도 어린 아이같고 매사에 불만이 많지만 툴툴 거리는 데서 그치는 귀여운 면이 어린아이 같다. 너무 많이 아는 것도 좋은 건 아닐지도 모른다. 처음 느낀 그대로의 행복을 나중에도 느낄 수 있다면 우리는 어린아이같은 순수함과 행복을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다. 22는 지구에서 느꼈던 처음의 행복의 감각을 계속해서 느끼고 유지할 수 있을까, 일상의 행복을 잃지 않고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을까, 그게 궁금해지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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