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자의 전성시대 (1975) 리얼리즘의 수작
이 영화는 리얼리즘의 수작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결정적인 이유에서 걸작 리스트에서 탈락한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영화에서 볼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그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고 함께 느끼기 위해서. 어떤 경우에는 타인의 고통을 즐기고 쾌락의 대상으로 삼기 위해서. 이 영화는 후자에 해당한다. 진정성 면에서 우리나라 호스테스 영화들, 신파조 영화들 맥락을 잇는다. 그 아주 미세한 이유 때문에 이 영화는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한다. 이 영화 이후 누구누구의 전성시대 같은 제목이 유행하게 되는데, 좋은 뜻에서 쓴 것이 아니다. 에로영화들에서 많이 쓰였는데 자업자득이다.
베트남전쟁에서 막 돌아온 창수라는 청년은 통행금지를 어겨 경찰서에 잡혀온 영자라는 창녀를 보고 충격을 받는다. 전에 본 적 있는 여자다. 자기가 일하던 부잣집에 식모로 들어온 참하고 얌전하던 처녀. 곁을 주지 않던 고지식한 처녀. 어쩌다가 몇년 새 이런 창녀가 되어 길거리를 헤멘단 말인가?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던 이 처녀를 받아들이지 않고 나락으로 떨어뜨려가던 서울이라는 공간이 문제다. 경제성장시대에 그 성장과 발을 맞추며 부르조아로 성장해가던 사람들도 있었던 반면에 거기 소외되어 더 나락으로 떨어져가던 사람들도 있었다. 누구도 신경쓰지 않고 소외되었던 사람들. 영자는 그들을 상징한다.
이 영화가 제대로 된 리얼리즘영화였다면 영자를 통해 이런 사회현상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영자가 바걸에서 창녀로 전락하는 과정을 관음증적인 엿보기로 관객의 쾌락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보여준다. 이것이 안타깝다. 제대로 된 걸작이 될 수도 있었을 터인데.
이런 영자를 이해해주는 사람이라고는 목욕탕 때밀이 창수뿐이다. 그런데 이해해주면 뭐하나? 창수도 소외된 가난한 사람인 것은 마찬가지인데.
때밀이 남자와 창녀 여자가 만나 서로 공감하고 동정하고 함께 외로워하는 것 말고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영자는 창녀들 사이에서도 빈곤하고 열등한 계층이다. 버스 차장으로 일하며 팔 한짝을 잃은 때문이다. 손님들도 팔 하나 없는 것을 보고 얼굴을 찡그리며 돌아선다.
창수는 속으로 울지만, 그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래서 어설프나마 의수를 달아준다. 진짜 팔처럼 생긴 의수가 아니라 통조림통과 철사로 만든 이상한 의수다.
영자는 이 의수를 달고 갑자기 손님이 폭증하여 신이 난다. 이 영화 제목인 영자의 전성시대가 이거다. 무슨 엄청난 전성시대가 아니라, 의수를 달고 손님이 많아지는 이것이 영자에게 허용된 전성시대인 것이다. 이 영화는 고도성장시대의 모순과 폭력성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원작 소설에서는 집에 불이 나 영자가 타 죽음으로써 그녀의 전성시대는 짧게 끝났다고 되어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차마 그럴 수 없었는지,
영자가 자기와 같이 장애인인 다리 저는 사람과 결혼하여 그런 대로 조촐하게 정착하였다고 되어있다. (이 다리 저는 사람으로 짧게 등장하는 사람이 이순재다.) 팔 하나 없는 여자와 다리 저는 남자가 만나 어떤 인생을
살아갈까? 영화는 영자의 미래가 앞으로 밝을 것이라 하는 그런 분위기를 내며 끝나지 않는다.
영자의 미래에는 앞으로도 괴로움과 고난이 가득할 것이라 암시하는 우울한 분위기로 끝난다. 하지만 한가지 다행인 것은,
영자는 결혼과 함께 자신의 인간성을 되찾는다. 창녀가 되기 이전 열심히 살던 영자로 돌아간다.
이 영화는 엄청 파워풀하다. 고도성장사회 소외된 사람들의 슬픔과 고독을 절묘하게 잡아낸다. 리얼리즘 영화의 걸작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래 포스터를 보라. 결국 관음증으로 떨어지고 만 이 영화의 비극을. 타인의 고통을 자기 쾌락으로 연결하고 만 이 영화의 비극을.
P.S. 코메디언 이영자가 이 영화를 패러디한 영자의 전성시대라는 프로그램을 하던데, 농담이 아니라, 이 영화 주연을 이영자가 했어도 잘 어울렸을 것 같다. 이 영화 주연인 염복순은 너무 아름답다. 때밀이 청년이 동정해서 눈물을 흘려주는 그런 여자가 되기에는.
P.S. 누가 제대로 리메이크해주었으면 좋겠다. 신파조랑 관음증 싹 걷어내고. 우리시대의 현재진행형인 이야기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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