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미의 관심사] ORFEO 특별상영회 후기
지난 목요일(5/28)에 한남동 ORFEO에서 열린 [초미의 관심사] 특별상영회에 다녀왔습니다. 선정해주신 익스트림무비에 먼저 감사드립니다.
1.
이번 상영회에 응모할 때 제 주된 관심사는 영화 [초미의 관심사]보다는, 최고 수준의 사운드를 추구하는 영화관임을 자랑하는 ORFEO라는 시설을 체험해보는 것이었습니다. 터놓고 말해서 내 돈 주고 여기 가 볼 엄두가 안 났거든요. 사운드에 둔감한 편은 아니라 한남동에 '사운드 시어터'라 자부하는 극장이 있다는 걸 익히 듣고는 있었지만, 일반 영화 상영 가격이 멀티플렉스 체인들 프라이빗 시네마 상품에 필적하는 25,000원인데 영화 한 편에 그 돈을 지불해 본 적이 없어서였습니다. 그래서 화요일에 긴급 상영회 공지가 떴을 때만 해도 영화 제목에 상관 안 하고 오로지 '오르페오'라는 이름만 보고 응모했었습니다. 그런 뒤에야 영화 [초미의 관심사]에 대해 알아보게 됐고, 어떤 의도에서 이 상영관을 콕 집어서 상영회를 잡았는 지가 바로 보이더군요. [초미의 관심사]는 이태원이라는 공간적 배경만큼이나 음악을 강조하고 싶어하는 영화였다고요.
2.
우선 상영관 환경에 대해 간단히 언급한 뒤에 작품의 이야기를 시작해보겠습니다. 처음 입장할 때는 나무 토막으로 만든 우드 티켓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가, 좌석 형태가 CGV의 컴포트 시트관과 비슷해보여서 살짝 실망스러웠으나, STEINWAY & SONS라는 상표가 새겨진 스피커들이 객석의 상하좌우전후를 포위하고 있는 걸 보고 나니 어떤 사운드스케이프를 보여줄 지 기대하게 되더군요. 그리고 그 기대는 영화의 첫 5분이 지나자마자 충족됐습니다.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간단히 설명만 하자면, 음악을 틀고 있던 방의 문이 열려있었다가 닫히자, 그 닫힌 문 너머에서부터 음악의 멜로디가 미세하지만 또렷이 들릴 정도로 사운드의 해상도가 탁월한 게 바로 체감이 되더라고요. 후술할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초미의 관심사]는 개봉일과 같은 날 발매한 래퍼 치타의 신보 [Jazzy Misfits]의 쇼케이스 역할을 하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그 역할을 하기에 ORFEO의 음향 환경은 굉장히 훌륭했고요.
3.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뛰어난 사운드가 영화의 약점을 드러내게 만드는 지점이 느껴지더군요. 한 가지 예로 영화에 여러 차례 삽입된 클래식 재즈 넘버가 하나 있는데, 이 곡이 깔릴 때마다 마치 LP판을 틀 듯 지글지글거리는 잡읍이 그대로 노출됐습니다. 극 중에서 캐릭터가 직접 턴테이블에 올리는 장면이 나온 것이 아닌 이상 가상의 배경으로서 작용할 음악이라면 이런 잡음이 없는 음원을 넣을 수 있었을 거고 또 그랬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어 고개가 갸웃거려졌습니다.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극 중 녹음실에서 녹음을 하다가 잠깐 끊는 씬에서는 AR이 깔리다가 끊기고 대사가 나오는 것으로 넘어갈 때 간과할 수 없는 소리의 분절점이 감지되기도 합니다.
4.
이제 시선을 온전히 영화 [초미의 관심사]로만 향해보겠습니다. 공간적 배경을 이태원으로 잡은 것은 두 주연을 포함해 영화 속의 모든 캐릭터 하나하나의 설정을 위해서도, 남연우 감독이 입봉작인 [분장]에 이어서 다시 한 번 성소수자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도 굉장히 성공적인 착점입니다. 그 곳이기에 존재가 자연스러운 캐릭터들로 꾸민 '진지하면서도 유머러스한(seriocomic)' 서브플롯 내지는 곁가지 이야기들이 풍성한 것은 이 작품의 최대 강점입니다. 그러나 박평식 평론가가 한줄평을 '외면하고픈 마무리'라고 끝맺었듯, 이 영화의 메인 플롯의 전개와 결말은 실망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초미의 관심사]에서 두 주연 배우가 온갖 발품을 팔며 찾아 헤매던 여정의 마침표는 (이 정도 언급조차도 스포일러가 될까 걱정됩니다만) 관객에게 웃음이나 안도감이 아닌 허망함을 줍니다. 그리고 그 끝의 허무함보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그 결말까지 다다르기 위해 영화는 관객을 의도적으로 기망하기 위한 인서트 씬을 중간중간 삽입하는 반칙을 범했다는 겁니다. 물론 위대한 걸작들 가운데에도 그런 반칙을 쓰는 케이스가 있지만, [초미의 관심사]의 반칙은 너무 노골적이고 불필요했습니다.
5.
두 주연 배우의 이야기로 들어가보겠습니다. 이 영화의 구심점은 단연코 조민수 배우입니다. 소싯적 이태원을 휘젓고 다니던 티가 풀풀 나는 분장이 어울려야 하는 동시에, 분방함과 억척스러움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러닝타임 내내 영화의 활력을 좌우하는 중년 여성 캐릭터를 이렇게 잘 소화해낼 수 있는 한국 배우는 정말 드물 겁니다. 트레일러만 보더라도 이 캐릭터의 결이 어떤 것인지 바로 느낄 수 있었고 조민수 배우가 참 제격이다라고 생각했는데, 영화를 다 보고 나서도 정말로 조민수 배우를 대체할 배우가 쉽사리 떠오르지가 않더군요. 그의 딸인 '순덕'이자 재즈 보컬 '블루' 역을 연기한 김은영 배우는 첫 연기 도전 치고는 상당히 준수했습니다. 가수도 배우만큼이나 무대에서 감정표현을 능수능란하게 할 줄 알아야 하는 이상, 좋은 가수는 대개 좋은 배우도 될 수 있다고 믿는 편이라 큰 우려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아쉬움이 없는 것은 또 아닙니다. 연기의 영역을 힘을 줘야 하는 연기와 힘을 빼야 하는 연기로 크게 둘로 나눴을 때, 전자 쪽은 군더더기 없이 자연스러운 반면, 후자 쪽은 심드렁할 때의 톤과 고까울 때의 톤 사이의 변별력이 느껴지지 않는 단조로움이 노출됩니다. 그리고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새 음반의 쇼케이스 목적으로 삽입된 것으로 보이는 가창 씬들은 비교적 긴 편인데다가 자주 등장한 탓에, 극의 리듬을 늘어뜨릴 뿐만 아니라 '배우 김은영'이 아닌 '래퍼 치타'를 자꾸 부각시킵니다. 이는 궁극적으로 [초미의 관심사]가 '배우 김은영의 영화 데뷔'가 아닌 '래퍼 치타의 영화 도전'으로 읽힐 수밖에 없게 만듭니다.
6.
그 외에도 치타에게 지어준 '블루'라는 예명과 그와 대조되는 새빨간 에나멜 코트를 조민수의 의상으로 택한 게 너무 얄팍한 선택 아니었나 하는 등의 소소하게 안타까운 지점들이 있지만, 극장가가 최악의 불황을 맞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태원이라는 공간이 근 몇 년 중에 가장 거센 손가락질의 대상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임에도 개봉을 자신있게 강행할 수 있을 나름의 무기들이 제법 갖춰진 영화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다른 작품들이 연기에 연기를 거듭하는 가운데 상대적으로 더 가혹한 상황임에도 기왕 결연히 정면돌파를 시도한 것만큼에 있어서는 충분한 보답을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건투를 빕니다.
LinusBlank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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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설이 너무 좋아서 영화 녹음할 때 들어간 잡음도 들리는 건가요?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