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있음] 기생충 같은 영화는 역시 보고 나서 씹고 뜯고 맛보고 즐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개인적으로 그럴싸한 제목을 딱 붙인 한편의 완결된 글로써 감상을 표현하는 걸 그닥 선호하질 않아해서
다소 파편적이고 중구난방스럽게 썰을 좀 풀어볼까 합니당.
영화 본 사람들끼리 한번 씹고 뜯고 맛보고 즐겨봐요.
1. 기생충의 처음 가제는 '데칼코마니'였다.
아시다시피 처음 봉감독이 이 영화를 구상했을 때 정했던 가제는 '데칼코마니'였다고 하죠.
영화 속의 두 가족, 기택의 가족과 박사장의 가족은 데칼코마니처럼 서로 대칭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정반대로 대비되는 관계로 설정됩니다.
기택 - 망한 대왕카스테라 사업가
박사장 - 성공한 IT 사업가
충숙 - 심플 but 완력
연교 - 심플 but 연약
기우 - 첫째, 영어 잘함
다혜 - 첫째, 영어 못함
기정 - 둘째, 예술가는 아니지만 솜씨는 좋음
다솜 - 둘째 그냥 예술가 코스프레
그리고 두 가족은 서로 다른 계급, 자본가와 노동자에 속해있습니다.
봉감독은 이 유사-데칼코마니, 반전거울 같은 모습의 두 가족이 얽히고 섥히는 영화를 구상했던 거겠죠.
2. 그렇다면 왜 '기생충'이란 제목으로 바꿨을까?
미리 말씀드리지만 저는 이 의문에 대한 답을 구하는 과정이 너무나 즐거웠습니다.
처음 예고편과 시놉을 보고 저는 당연히 기택의 가족이 박사장네 가족에게 '기생'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소동극인 영화일 거라고 짐작했었습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그러지 않으셨을까 싶은데요.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정말 흥미롭게도,
이 영화는 '기생'의 행위를 놓고 펼쳐지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더군요.
기택이라는 인물을 한번 주목해봅시다.
송강호가 연기한 기택은 얼핏 봤을 땐 봉감독 영화들에서 익히 보아왔던
어딘가 어리숙하고 얼빠진 소시민 캐릭터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뜯어보면 뭔가가 조금 달라요.
그 뭔가가 조금 다른 씬들을 한번 나열해보죠.
a. 식빵 꼬다리(?)를 뜯어먹다가 테이블에 곱등이 한 마리가 있는 걸 보고 손으로 퉁겨내는 씬
b. 연막소독약이 반지하집으로 들어오는데, 다른 가족들은 기침을 하며 괴로워하지만 혼자 꿋꿋이 피자 케이스를 접는 씬
c. 박사장 가족이 캠핑을 떠나 가족끼리 잔치판을 벌이다, 충숙에게 바퀴벌레 같다는 소리를 듣고 발끈해 멱살을 잡는 씬
d. 폭우로 반지하집이 수몰되어 피신 온 체육관에서 아들 기우와 나누는 대화 씬
기택은 고정된 직업도 없이 반지하집에서 마치 벌레와 같은 삶을 살아가곤 있지만
그럼에도 벌레를 싫어하는 것처럼 묘사됩니다.
빵을 먹다 발견한 곱등이를 '에이씨' 거리며 손으로 퉁겨내버린다거나
연막소독을 하는데도 창문을 닫지 않고 소독약이 들어오게 내버려둡니다.
그와중에도 기침 한번 하지 않고 자신은 벌레가 아니라는 걸 강조하듯 꿋꿋한 척하는 태도를 유지합니다.
아내에게 발로 채이고 핀잔을 들어도 아무런 신경도 안 쓸 정도로 잡혀사는 것 같던 양반인데
바퀴벌레 같다는 말을 들었을 땐 별안간 발끈해 충숙의 멱살을 잡습니다.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란 거죠.
한편, 기택은 영화에서 백수 신세로 시작하긴 하지만 소위 '놈팽이'과는 아닙니다.
피자 케이스를 집안 가득 쌓아놓고 접는 일도 마다않고 열심히 하죠.
한때 대왕카스테라 사업도 시도해봤고
사업이 망하자 대리기사로도 뛴 경력이 있습니다.
박사장의 차를 운전할 때 내비를 끄고도 길을 잘 찾아가고
박사장의 커피가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능숙한 코너링을 보여줍니다.
무능력하다거나 게으른 사람이 아닙니다.
기택은 그냥 인생을 잘 살아보려 했는데, 일이 '계획대로' 안 풀렸을 뿐인 거죠.
자, 그러면 이제 한번 생각해봅시다.
기택네 가족은 박사장네 가족에게 기생을 했나요?
기생은 한 쪽이 다른 한 쪽으로부터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는 관계잖아요.
그런데 기택의 가족은 박사장 가족으로부터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질 않았어요.
일종의 위장취업이긴 하지만, 어쨌든 '영어 과외 선생, 미술 선생, 운전 기사, 가정부'로 취업을 한 거예요.
노동력과 서비스를 제공하고 그에 대한 반대급부를 받은 거죠. 일방이 아니라 쌍방이 교환을 한 겁니다.
그럼 이건 기생이 아닙니다. '공생'이거나 '상생'이죠.
그런데 왜 영화 제목은 기생, 아니 기생도 아니고 '기생충'일까요?
봉감독이 한 인터뷰에서 이런 얘길 했더라구요.
"영화에 기생충이 나오지는 않는다. 의사도 생물학자도 나오지 않고. 어떻게 보면 비유적인 표현인데 나쁜 비유다. 세상 누가 기생충이란 소리를 듣고 싶고, 또 누구를 기생충이라고 부르고 싶겠나. 글자 하나만 바꾸면 ‘상생’, ‘공생’에서 모든 형태의 리스펙트가 없어지고 말의 뉘앙스가 곤두박질친다. 한쪽 사이드를 비난하는 일방적인 관계가 되는 거다. 그 곤두박질칠 위기에 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movie/895470.html#csidx0112011e0ac442990a5023c859b9324
그러니깐 기생충이라는 건 한쪽 사이드를 비난하고 경멸하는 비유라는 건데요.
영화속에서 박사장은 끊임없이 '선'에 대한 얘기를 합니다.
자긴 선을 넘는 걸 싫어한다, 라고요.
기택이 운전을 하면서 박사장과 이런저런 얘길 나누다가
'사모님을 사랑하시잖아요'라고 얘길 했을 때 박사장 표정을 기억 나시나요?
'같잖다'는 표정으로 웃죠.
이 대목은 클라이막스 때 한번 더 반복이 되는데 그땐 아예 웃지도 않고
기분 더럽다는 표정으로 '업무의 연장선상'이라며 선을 그어버립니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 어떤 사적인 이야기는 절대 나누지 않겠다는 거죠.
공생하는 인간을 선 아래 존재로 한정하고 같은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박사장은 반복해서 '기택의 냄새'를 경멸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봉감독이 이 냄새에 대한 레퍼런스로 조지오웰을 참고한 게 아닌가 추측하고 있습니다.
조지오웰의 <위건부두로 가는 길>에 바로 이 '하층민의 냄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대충,
피부색, 도덕성, 기질, 종교적 차이에 대한 혐오는 극복이 가능하지만
'입냄새'가 나는 상대에 대한 혐오는 극복 불가능하다.
노동자들에 대해 '냄새나는 더러운 존재'라고 교육받는 것은 대단히 해로운 일이다.
라는 내용입니다.
캠핑을 취소하고 돌아온 박사장이 기택의 냄새에 대해 뒷담을 까는 걸
테이블 밑에 숨은 채로 들었을 때 기택은 분노했을 겁니다.
(심지어 자기 가족들은 그 납작한 테이블 아래에 관짝에 놓인 시체마냥 누워있는데
박사장 부부는 푹신한 쇼파에 누워 기택을 경멸하는 것도 모자라
성행위를 하며 모욕감을 줍니다.)
박사장 부인 연교도 아들 생일 파티 준비를 위해 장을 보러 나가는 길(혹은 돌아오는 길?)에
기택에게 나는 냄새에 불쾌한 반응을 보이죠.
결정적으로, 기정이가 칼에 찔려 쓰러지는 순간에조차
박사장은 그런 건 안중에도 없다는 듯 다급히 차키를 넘기라고 하고
또 차키가 처절하게 싸우는 중이던 충숙의 몸에 깔리는데
(수정 : 차키가 깔린 게 문광 남편의 몸이었는지 충숙의 몸인지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나네요ㅠ)
그 살벌한 와중에도 박사장은 차키를 집어들고 코를 막죠.
결국 봉감독은 기생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한쪽 사이드(자본가 계급)가 다른 사이드(노동자 계급)을 벌레, 기생충으로 경멸하는
그런 시대의 풍경을 보여주기 위해 영화를 찍었던 겁니다.
기생충이라는 제목도 그래서 붙여지게 된 것이구요.
집으로 돌아와 영화를 복기하며 처음 가졌던 그 의문에 대한 답을 풀어가는 과정은 정말 즐거웠고,
풀어낸 답과 홀로 마주하게 됐을 때 정말 씁쓸했습니다.
이런저런 썰을 좀 풀어보다 보니 글이 정말 쓸데없이 너무 길어져버렸네요.
아직 얘기하고 싶은 부분이 많이 남았는데요ㅎㅎ..
나머지 썰은 기회가 되면 더 풀도록 하고,
이제 다른 분들 얘기를 들어봐야겠습니다.
추천인 9
댓글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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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지금 약간 말꼬리잡기나 사소한 시비 논쟁으로 흘러갈 듯한 분위기라 댓글을 더 다는 게 조심스러운데, 생물학적 개념으로서의 공생과 기생은 철저하게 양쪽 사이드가 이익과 피해를 얼마나 주고 받느냐로 구분합니다. 주고 받는 과정, 배경이나 의도랑은 무관해요...
그리고 '계약대로 한 건 아니다'라는 말도 어폐가 좀 있다고 봐요. 일단 박사장 부인인 연교가 기우와의 첫대면에서 이런 대사를 날리죠. "서류는 중요한 게 아니고." 애초에 계약 조건으로 서류를 취급하지도 않았죠. 또 뭐 영화에 근로계약서가 나오질 않으니 확인해볼 수는 없지만, 일반적으로 우리가 과외 선생님이랑 계약을 할 때 기대하는 건 공부 가르쳐주는 겁니다. 기우와 기정이가 영어랑 미술을 안 가르쳤나요.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긴 했죠. 심지어 기정은 다솜이 생일 파티 때 이벤트 도우미로도 뛰는 서비스 노동까지 합니다. 의도가 불순했을 뿐인 거지 어쨌든 기택 가족과 박사장 가족은 쌍방이 서비스 노동과 품삯을 주고 받습니다. 계약이 어찌됐건 간에, 서로에게 이익을 제공했기 때문에 생물학적 의미에서 공생 관계는 맞습니다.
말씀의 의도는 알겠습니다만, 저와 다른 맥락의 이야기를 하시니 저는 여기까지만 답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글 잘봤습니다 ^^
재밌게 잘 봤습니다ㅎㅎㅎ 봉준호 작품은 매번 해석하는 재미가 있죠

차키 집을때 박사장이 리액션 취한거 충숙이 아니라 문광 남편이였던거 같은데 아닌가요?
요즘 사회적 문제를 잘 버무린것 같아요
기업들도 분명 일할 사람이 필요해서 일자리를 주면서
노동자들을 '하찮게' 보고 (너네 말고도 일할사람 많아 라며)
반대로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노동력 + 시간 을 투자하면서
돈을 버는건데 언제 짤릴까 불안해하며 당당하지 못한(?)
왜 많은 분들이 영화 보면서 씁쓸해하는지 알겠던..

아 그래서 제가 영화를 보면서도 스스로 찝찝한 이유가 이거였군요. 노동과 돈을 주고받지만 기생이라 생각하는 상위계층.. 댓글들 보면서 여러 생각도 같이 드네요.
근데 공생상생이라고 말하기엔 최우식 박소담 둘다 사기친거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