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그리고 둘] 간략후기
2007년에 타계한 대만 출신의 거장 감독 에드워드 양의 유작이자
칸영화제 감독상 수상작이기도 한 영화 <하나 그리고 둘>을 재개봉 상영으로 보았습니다.
CGV 더스페셜패키지로 봐서 예쁘게 필름 모양으로 꾸며진 포토카드와 뱃지도 받았네요.
대만의 현대사를 조명했던 에드워드 양의 또 다른 대표작인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에 이어
대만의 현재를 조명하는 <하나 그리고 둘>은 3시간 가까운 긴 러닝타임동안
차분하고 섬세하게 이어지는 한 가족의 평범한 듯 복잡한 삶을 통해 분명한 교훈을 남깁니다.
그 교훈이란 우리들 모두가 타인에게 보이는 것과는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소년의 살인이라는 충격적 결말로 귀결되었던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의 이야기에 비해
<하나 그리고 둘>의 주인공인 가족들의 이야기는 얼핏 평범해 보입니다.
이제 갓 결혼한 사람이 있고, 몸이 편찮은 어르신이 있고, 풋풋한 사랑의 감정을 띤 아이도 있는.
그러나 평범하다고 해서 아무 근심 걱정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일에 치여 바쁜 듯 보이지만 실상은 다른 감정 때문에 바람 잘 날 없는 아버지나,
새로 이사온 이웃집 또래 소녀로 인해 사랑싸움에 휘말린 큰 딸이나,
길일에 결혼했으니 이제 운수대통할 거라고 호언장담해 놓고 안풀리는 것 투성이인 삼촌이나,
가족 구성원 한 명 한 명은 남들에게 내보이지 못할 일부를 꼭 하나 이상씩 안고 있습니다.
아버지부터 8살짜리 막내 아들까지, 가족 구성원들 중 자기 이야기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의식 불명으로 누워 계신 할머니는 아마 이 가족의 모든 이야기들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이 대만이라는 공간적 배경의 특수성이 깊게 배어 있는 영화였다면,
<하나 그리고 둘>은 시대를 공유하는 이들이라면 어느 곳의 누구라도 공감할 이야기입니다.
때를 놓쳐버린 감정이 뒤늦게 나를 다시 찾아와 매달릴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문득 내 인생이 끝나고 아무것도 없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내가 도와주고 있다고 믿었던 것이 실은 이용당하는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내가 지금 바라보고 있는 반쪽 너머의 다른 반쪽까지 보고 싶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가족 구성원들이 각기 대면하는 고뇌의 순간 속에 이처럼 우리가 살면서
반드시 맞닥뜨려야 할 다양한 질문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고민을 서둘러 해결하려 하지 않고, 문제를 섣불리 풀어내려 하지 않기 때문에
영화의 호흡은 통상적으로 정해진 러닝타임에 맞추려 가쁘게 가지 않고 침착하되 꾸준하고,
그래서 3시간 가까이 평범한 가족의 이야기가 그려짐에도 의외로 지루하지만은 않습니다.
하나의 가족, 하나의 풍경을 두고 두 개 이상의 시선이 바쁘고 고단하게 오가는 모습을 통해
<하나 그리고 둘>은 남들 눈에 보이는 것과 다른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을 반추합니다.
길지만 섬세한 호흡은 영화가 주는 이런 깨달음이 반박할 수 없는, 예외 없는 것임을 느끼게 합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의 모든 모습을 온전히 목격할 수 없기에, 그렇게 내다 보지 못한 채
불쑥 맞닥뜨리게 되는 우리의 모습에 좌절하기도 저항하기도 순응하기도 하는 우리들을 만납니다.
그러나 에드워드 양 감독은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에서도 그러했듯,
성급한 솔루션을 이끌어내기 전에 이러한 우리들의 모습을 최대한 세밀하게 들여다 보는 것만으로도
그런 세밀한 관찰을 현실에서 미처 시도해 보지 못한 우리들에게는
커다란 각성의 계기가 될 수 있음을 실감케 합니다.
'사람들이 모르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는 이 집의 막내 아들 양양은
아빠의 권유로 카메라를 들고 다니면서 만나는 사람들의 뒷통수를 찍습니다.
그 뒷통수는 대개 누군가의 얼굴을 바라보며 대화하는 우리들이 놓치기 쉬운 타인의 모습이자,
앞으로 살면서 영원히 내 눈으로 볼 수 없을 나의 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하염없이 눈물짓고 방황하는 엄마와 아빠, 누이의 모습에 비해 이러한 양양의 노력은
무척이나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보일지 모르겠으나, 영화는 어쩌면 이런 노력이
답이 안 나오는 지금 우리의 삶을 살아가고 사랑하기 위한 시작이 될지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할머니에게 선뜻 말을 걸지 못했던 양양이 마지막에서야 비로소 건네는 다짐의 말은,
세상과 삶 앞에 영원히 불완전할 우리가 품을 수 있는 그런 희망을 말하는 듯해 가슴이 저릿합니다.
어쩌면 내 원래 삶보다 2~3배는 더 많은 양의 삶을 간접 경험하게 해주는
영화라는 것을 보는 이유도 내 눈이 미치지 않는 내 삶의 다른 얼굴을 보기 위함일 것이고,
그런 많은 영화들 중에서 이 영화 <하나 그리고 둘>은 결정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에드워드 양 감독은 일부러 예쁘게 찍으려는 영화 감독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가감 없고 때로는 투박하게까지 느껴지는 그의 카메라가 그럼에도 장면장면이
허투루 흘려 보낼 수 없이 마음에 하나하나 박히는 것은, 그 장면장면마다
감독이 느끼고 있는 인생의 정수들이 들어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떤 영화는 누군가의 삶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는데, <하나 그리고 둘>이 그런 영화일 것입니다.
내가 삶을 바라보는 태도와 그 삶 안에서의 나를 다시 보게 하는 힘을 지닌 영화 같았습니다.
추천인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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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그리고 둘>을 보면 감독님의 삶을 향한 골똘한 응시를 같이 보는 기분이었어요.
그리고 영화를 보는 이유를 글에 써주신 것처럼 이보다 더할 나위 없이 잘 설명했다고 느꼈어요.
좋은 후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인생과 영화에 대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레슨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절대 느낄 수 없었던 감정 들이었죠, 한 가족의 삶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횡적으로, 각 구성원의 삶을 종적으로. 인생 영화의 한 편 입니다. :)

영화 본 지 한 달 좀 지났는데 그 때의 감동이 jimmani님 글로 다시 리마인드 됩니다,
언제나 영화로 인한 생각과 감정을 구체적으로 글로 잘 표현해주시는 것에 감탄하게 되어요.
jimmani님 후기 읽으면 영화를 꼭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ㅎㅎㅎ
스페셜 패키지에 별 생각없었는데 포토카드가 너무 예쁘네요!
과분한 말씀 감사합니다. 늘 글로 써놓고도 감정을 온전히 표현하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에드워드 양감독의 삶을 관통하는 철학들이 영화 보는 내내 생각에 잠기게 하더군요...현실과 영화..사랑과 이별 ,,
삶과 죽음,,정말 한장면 한장면 버릴게 없는 대만 영화의 걸작중 하나라는걸 느낍니다.
고령가 스포가 있어 바로 내려버렸습니다 ...

글을 읽으니 영화가 더 궁금해지네요 어서 예매해야겠습니다:)
뱃지도 포토카드도 예쁘고, 후기도 좋네요. 잘 읽었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