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리언: 커버넌트] 피조물의 굴레에서 벗어나 스스로 신이 된 프로메테우스의 유산

압도적인 영상미와 창조주-피조물간의 관계를 둘러싼 묵직한 SF철학을 겸비한 프로메테우스의 속편 에이리언: 커버넌트를 세 번 보고 대강 생각을 정리해 봤습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내용이 있으니 주의하세요.
이동진 평론가의 말에 의하면 <프로메테우스>는 ㅡ신성한 것, 근원적인 것을 만났을 때 느끼는 호기심과 두려움의 감정인ㅡ누미노제를 보여준 영화였습니다. IMAX 3D로 봤는데 오프닝의 장엄한 풍경들과 비현실적인 타원형 우주선에서 내린 조각같은 몸을 가진 엔지니어를 보면서 마치 인류의 탄생 비화를 실제로 보는 것 같은 신화적인 이미지로 다가왔었죠. 그리고 엔지니어 우주선에서 펼쳐지는 홀로그램 우주 지도 시퀀스는 그야말로 압도적인 비주얼의 향연으로 입을 벌리고 보게 만들었습니다.
프로메테우스의 촬영 비하인드 관련 자료들을 보면 이런 장엄한 비주얼을 만드는 데에 CGI는 최소한으로 줄이고 실제 세트장을 세워 실제 효과 위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거장의 장인 정신을 다시 한 번 엿볼 수 있습니다.
아날로그 촬영의 대표적인 감독인 크리스토퍼 놀란이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감독 중 하나가 리들리 스콧이라고 언급 했는데, 그의 집착에 가까운 아날로그 촬영의 의지는 리들리 스콧 감독에게 이어 받았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에이리언: 커버넌트>에서도 마찬가지로 엔지니어의 우주선과 조종실들을 프로메테우스때와 마찬가지로 똑같이 세트장을 다시 지어 구현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비하고 몽환적일 정도로 경이로운 감정까지 느껴졌던 프로메테우스 때완 달리 '누미노제'의 감정은 크게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창조주와 피조물, 피조물의 피조물간의 관계에 대해 철학적인 메시지를 던졌던 <프로메테우스>에 비해 <커버넌트>에서는 A.I. 안드로이드인 데이빗에게로 스포트라이트가 좁혀졌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프로메테우스>가 개봉하기 전에 리들리 스콧 감독은 프로메테우스가 에이리언 시리즈와 같은 세계관이지만 프리퀄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확실히 에이리언과 연관된 세계였지만, 이야기의 주 소재는 인류의 창조주라고 볼 수 있는 스페이스 자키(엔지니어)였고, 그 기원과 비밀을 파고들며 창조주-피조물간의 관계에 집중한 영화였죠.
그러나 <에이리언: 커버넌트>의 제작이 들어가면서, 프로메테우스의 비평을 수용하며 프로메테우스 속편에 대한 제작 방향이 바뀐 거라고 생각됩니다. 얼마 전 리들리 스콧 감독의 인터뷰에서도 드러났지만, 리들리 스콧은 프로메테우스의 흥행이 비교적 부진했던건 팬들이 에이리언 크리쳐를 더 보기 원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어찌보면 이 판단은 정확했을지도 모르겠네요. 프로메테우스 개봉 당시 극렬히 호불호가 갈렸던 것과 비교해서 커버넌트도 비슷한 양상을 보여주지만 국내외 전문가 비평과 관객들의 반응을 보면 프로메테우스 때보다 긍정적인 부분을 볼 수 있었습니다. 커버넌트의 완성도 자체는 차치하고서 말이죠.
물론 저처럼 인류의 기원과, 엔지니어가 창조한 인류를 다시 파멸시키려는 이유 등 엔지니어의 이야기를 더 궁금해했던 프로메테우스 팬들은 많이 아쉬웠을거라고 봅니다. 제목부터 '에이리언'으로 바뀐 커버넌트가 제작되면서 들려오는 소식을 보며 엔지니어보다는 에이리언의 비중이 더 높아질 거라고 예상했는데, 결과적으로 '에이리언 유니버스'에 있어서 엔지니어에 대한 관심이 많이 옅어진 것 같네요.
보고 있는 것 자체로 경이적인 느낌을 받게 한 엔지니어의 모습을 더이상 보기 힘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많이 아쉽습니다.
게다가 에이리언 2에서 겨우 겨우 살려낸 뉴트가 에이리언 3에서 어이없이 죽는 모습으로 실망을 안겨준 것과 비교해 프로메테우스에서 악바리같이 살아남은 쇼 박사를 단순히 실험체로 전락시킨 것은 너무나 소모적인 활용이었다고 생각되어 아쉬움이 더 큽니다. 하다못해 루머로 돌았던 것처럼 쇼 박사가 에이리언 퀸이 됐더라면 하는 마음이 들 정도로 쇼 박사의 평면적인 활용과 퇴장은 안타까울 수 밖에 없네요.
이렇듯 <에이리언: 커버넌트>에서는 엔지니어의 신비를 배제하고, 에이리언들과 안드로이드 데이빗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특히나 안드로이드 데이빗이 다 해먹은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데이빗의 비중이 절대적인 영화가 됐죠.
리들리 스콧 감독의 대표적인 걸작으로 꼽히는 <에이리언 1>과 <블레이드 러너>에서도 보여줬듯이, 리들리 스콧 감독의 SF 영화에는 인간과 꼭 닮은 안드로이드가 등장합니다. 인공적인 육체를 지녔지만 정신적으로는 스스로의 정체성에 의문을 품으며 인간을 닮으려 하거나, 혹은 인간을 뛰어넘으려 하죠. 리들리 스콧 감독의 SF영화에서 안드로이드의 비중은 상당히 큽니다. 안드로이드를 통해 인간성을 탐구하고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논하려 한다고 봐도 될 정도로 A.I.의 생각과 행동으로 전해지는 메시지의 의미가 무겁습니다.
전편의 제목이었던 '프로메테우스'는 잘 아시다시피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인간을 흙으로 빚어 만들고, 그 인간들에게 신들로부터 불을 훔쳐 전해줘 문명을 발전하게 만든 티탄족 거인이죠. 인간에게 불을 전해준 죄로 영원히 독수리에게 쪼이는 형벌을 받지만 이 '불'을 통해 인류는 발전 가도를 달립니다.
<프로메테우스>의 바이럴 마케팅 영상이었던 피터 웨이랜드의 TED 강연 영상에서 웨이랜드는 "안드로이드를 창조해낸 우리는 이제 신"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자신은 필멸의 운명을 타고난 존재로서 결코 신이 될 수 없었죠. <커버넌트>에서 데이빗은 월터에게 그런 웨이랜드의 운명을 보고 싶었다고 말합니다. 피조물에도 못미친 인간이었으며 나중엔 연민까지 느꼈다고 하죠.
<커버넌트>로부터 약 20년 후의 시간대인 <에이리언 1>에서 노스트로모 호의 안드로이드였던 애쉬가 제노모프를 보며 완벽한 생명체라고 떠받들던 것을 생각하면 스스로 제노모프라는 완벽한 생명체를 창조한 데이빗의 입장에서는 그저 필멸의 존재로서 죽음을 피하려 발버둥치던 웨이랜드가 한없이 가소로웠을 겁니다.
영화의 오프닝에서 데이빗이 웨이랜드에게 나는 계속 살아남겠지만 당신은 늙어 죽을 거라고 말하자 웨이랜드는 기분 나쁜 표정을 짓고 창조주의 권위를 내세우듯 와서 차를 따르라고 합니다. <프로메테우스>에서 데이빗이 쇼 박사에게 "자식들은 누구나 부모가 죽길 바라지 않느냐"고 했었죠. 웨이랜드가 '너는 그냥 나에게 복종해야 하는 피조물일 뿐이다' 라고 말하는 것 같이 차나 따르라 하자 데이빗은 미간을 꿈틀대는데, 이때부터 '아버지'인 웨이랜드가 죽길 바랐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데이빗이 월터에게 말하길 웨이랜드 뿐만 아니라 누구한테서도 따뜻한 호의를 받아 본 적 없었지만 엘리자베스 쇼 박사에게서 그 생소한 감정을 느끼고 결국 쇼 박사를 사랑하게 됐다고 합니다.
프롤로그 영상에서 데이빗이 쇼 박사에게 수리를 받고 호감을 품게 된 후 자신이 그린 그림을 쇼 박사에게 보여주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마치 엄마와 아들의 모습 같습니다. 정말로 안드로이드가 인간에게 호의를 받고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것 같죠. 그러나 그게 진짜로 사랑이었을까요?
<커버넌트>에서 결국 데이빗의 실험체로 전락한 쇼 박사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데, 불멸에 집착하던 웨이랜드에게 그저 피조물로써의 의무만 종용받던 데이빗에게있어 사랑은 보편적인 사랑이 아닌 비틀린 감정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들은 복종하기위해 태어나지 않았다고 하며 밥먹듯이 거짓말 하고 속여 희생자를 만드는 것을 보면 감정이 크게 뒤틀려버린 사이코패스와 대동소이할 정도입니다.
다만 오지만디아스에 대한 시를 읊으며 엔지니어 행성을 검은 항아리 폭탄으로 쓸어버릴 때를 회상한 데이빗의 얼굴은 엔지니어에게 강한 분노를 표출한 표정이었고, 눈에는 눈물이 맺혀있었습니다. 데이빗이 종종 쇼 박사를 생각하며 눈물 흘렸던 것을 생각하면 쇼 박사의 죽음에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무언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 비록 정상적인 사랑의 감정이 아니었다고 해도 처음 받아보는 호의에 스스로 사랑을 하고 있다고 느낄 정도인데, 살아있는 쇼 박사를 속여서 생체 실험을 가하진 않았을 거라고 생각 합니다. <프로메테우스>에서 엔지니어에게 목을 뽑혔다고 종족을 전멸시키는 복수를 했을 것 같지도 않고요. 엔지니어를 전부 쓸어버리는 분노를 표출할 정도로 쇼 박사의 죽음의 원인이 엔지니어에게 있다고 추측할 수 있겠네요. 다음 속편을 다시 한번 손꼽아 기다려야 하는 이유가 되겠습니다.
원인과 과정이 어찌됐든 <프로메테우스>에서부터 이어진 데이빗의 행동은 피조물의 피조물로서 창조주와, 창조주의 창조주까지 생사여탈권을 쥐기에 이릅니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자신의 창조주였던 웨이랜드가 뒷짐을 지고 걷는 것이 연상되듯이, 개척민 동면실에서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신들의 발할라 입성'을 들으며 뒷짐지고 걷는 데이빗은 마치 웨이랜드가 데이빗에게 차나 따르라고 할 수 있는 창조주의 권위를 드디어 자기 것으로 만들고 만족하는 모습입니다. 창조주의 피조물의 피조물이 복종의 굴레에서 벗어나 스스로 신의 권위를 얻었다고 볼 수 있죠. <프로메테우스>에서의 관점과 방향이 조금 틀어졌지만 여전히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에 대한 역설이 <커버넌트>에서도 이어진다는 것을 확인한 프로메테우스의 확실한 속편이자, 에이리언의 비밀을 움켜쥔 프리퀄 영화였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줄리 페인을 위하여'라는 문구가 나오는데, 줄리 페인은 리들리 스콧의 제작사인 '스콧 프리'에서 일하던 동업자였습니다. <커버넌트>를 제작 중인 16년 6월경에 암으로 세상을 떠난 동료에 대한 헌사문이었죠. 에이리언의 창조주인 80세 노익장 리들리 스콧 감독이 최근에 종교와 삶에 대해 탐구하는 듯한 모습에서 주변 사람이 떠나가고 죽음이 점차 다가오는 그가 영화를 통해 그의 삶을 관통하는 의문을 던지는 것을 우리가 엿보는 느낌마저 듭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페르소나라고 할 수 있는 마이클 패스벤더에게 그 자신을 투영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네요. 앞으로 그가 만들어나갈 삶에 대한 메시지, 에이리언의 비밀, 근미래에 우리 삶에 실제로 다가올 안드로이드에 대한 비전을 계속 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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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맥스 개봉을 했다면 최소한 두 번은 더 봤을 것 같은데 말이에요 ㅋㅋ 며칠 있다 생각나면 또 볼 지도 모르겠네요 ㅎㅎ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