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0마일, 케빈 코스트너의 자학의 시
스포 있어요.
현명한 사람들이 흔히 말하길, 세상에 제일 쓸데없는 건 바로 연예인 걱정이라고 하죠. 예, 맞습니다. 어떤 곤경이 있어도 그들은 결국 재기할것이고, 설령 재기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들보다는 훨씬 잘 먹고 잘 살겁니다. 하지만 팬에 입장에서 볼 때, 자신이 진정 사랑하는 스타가 절망과 무력감에 빠져 있는 모습을 보는 건 무엇보다 가슴 아픈 일입니다.
헐리우드의 밑바닥에서 시작하여, 배우로 승승장구하다가 수정주의 서부극의 걸작 늑대와 춤을(1990)로 아카데미를 석권하며 감독으로도 대성한 아메리칸 드림의 화신, 케빈 코스트너에게 몰락은 예상보다 빠르게 찾아왔습니다. 로빈 훗, 도둑들의 왕자(1991)의 경우 흥행은 대성공했지만 연기력 논란이 있었고, 와이어트 워프(1994)는 케빈의 전공인 정통 서부극이었지만, 반응도 시원찮았고 흥행도 별로였죠.
결정타는 모두가 한번쯤 이름은 들어본 폭망작의 대명사, 워터월드(1995)였습니다. 대규모 제작비를 투입하여 물 위에 직접 올린 대규모의 세트장은 폭풍으로 날아가 처음부터 다시 지어야했고 편집을 두고는 같은 감독이자 친구였던 케빈 레이놀즈 사이에 불화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늑대와 춤을로 이상적인 미국인 상을 제시했던 케빈 코스트너가 하와이 로케 현지에서 댄서와 바람이 나 결국 조강지처와 이혼하게 된 사건은 치명적이었습니다. 게다가 인디언 개발구역에 얽힌 스캔들까지 터지자 미디어는 신이 나서 케빈의 몰락을 실시간으로 보도했습니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지만 케빈 코스트너는 제대로 된 날개짓 한번 못하고 정상에서 나락으로 굴러 떨어졌습니다.
3000마일(3000 miles to graceland, 2001)은 이런 케빈의 몰락기에 찍은 영화입니다. 자신을 엘비스 프레슬리의 사생아라고 주장하는 주인공 머피(케빈 코스트너)가 라스베가스의 한 카지노가 주최한 엘비스 경연 대회를 이용해 부하들과 함께 엘비스로 분장하고 그 카지노를 터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됩니다. 처음엔 제법 믿을만한 보스로 보였던 머피는 계획이 틀어지자 하나 둘씩 부하들을 죽이고 돈을 혼자 차지하려고 합니다.
이 영화는 케빈을 비롯해 커트 러셀, 코트니 콕스, 크리스찬 슬레이터등 좋은 배우들이 다수 출연합니다만, 유감스럽게도 그들의 출연여부가 영화의 완성도를 담보하지는 못합니다. 당시 한참 유행하던 MTV적인 영상은 초보 감독의 엉성한 연출에 제대로 녹아들지 못하는 데다가 액션은 요란만 했지 실속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캐릭터와 캐릭터가 부딪히는 액션 스릴러인데도 배우들간의 케미가 별로입니다. 그 중 아버지와 딸 뻘 쯤 되어보이는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엮은 커트 러셀과 코트니 콕스 커플은 단연 어색함의 극치입니다.
이 와중에 케빈 코스트너는 잃어버린 돈과 자신의 엘비스 핏줄에 집착하는 사이코패스 연기를 펼치는데... 이게 당시 케빈의 상황과 맞물려 마치 자학처럼 보일 지경입니다. 예, 제가 이 글을 쓴 이유이기도 하지요.
이 영화의 액션 대부분을 책임지는 케빈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이것이 케빈의 최고 흥행작 로빈훗의 삐딱한 패러디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동료를 죽일 때 수많은 무기를 두고 굳이 활을 쏴서 죽인다던지 하는 장면들이 그렇지요. 무엇보다 케빈이 처음으로 배신하고 죽여버린 동료는 바로 크리스찬 슬레이터입니다. 바로 로빈 훗에서 로빈의 배다른 동생으로, 마지막에 로빈이 목숨을 걸고 구해내던 윌 역을 맡았던 배우죠. 로빈 훗을 좋게 기억하던 팬들이라면 여러모로 충격을 받을 만한 장면입니다.
마지막에 케빈이 경찰과 대치하다 죽어가는 장면 역시 그렇습니다. 프랭크 시나트라의 My Way가 울려퍼지며 케빈이 장렬하게 죽어가는 이 장면은 일견 멋져보이지만... 주인공은 자신이 엘비스 프레슬리의 숨겨진 자식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고 그것은 곧 그의 삶을 지탱해주는 프라이드의 근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죽을 때 울려퍼지는 음악은 엘비스의 것이 아닌 엘비스 평생의 음악적 라이벌 프랭크 시나트라의 노래입니다. 그래요. 이건 대놓고 엿먹이는거죠. 니 인생은 결국 아무것도 아니었어, 이 멍청한 놈아~라는 말을 빙 돌려서 하는 겁니다.
언터처블(1987) 이후 쭉 케빈 코스트너의 광팬이었던 저는 이 영화를 보고 그저 착잡할 따름이었습니다. 스토리, 연출, 연기 뭐 하나 좋을 게 없는 B급 영화에서 케빈이 자학에 가까운 연기를 하고 있다는 점이 씁쓸하기 짝이 없었죠. 이 영화에서 케빈 코스트너는 예전과 달리 제작도 각본도 연출에도 일체 손대지 않고 오직 연기만 했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최대 흥행작의 장면들을 비틀어서 넣은 저 우스꽝스러운 장면들은 케빈이 제작진과 사전 합의하에 연기했다는 소리인데... 본인의 커리어에도 치욕스러울만한 저 몇몇 장면들을 보고 있자면, 당시 케빈의 멘탈이 얼마나 가루가 됐는지, 자존감이 얼마나 나락으로 떨어졌는지 충분히 예상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3000마일은 졸작이되, 케빈의 팬에게는 역으로 잊혀지지 않는 그런 영화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헐리우드에서 영영 사라질 듯 보였던 케빈의 커리어는 2003년 오픈 레인지 이후 서서히 회복하기 시작합니다. 인생의 단맛, 쓴맛을 모두 맛 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진중한 무게감을 가지고 주연보다는 존재감있는 조역에서 두각을 보이는 식으로요. 대표적인 영화가 바로 2006년작 가디언이죠. 분명 애쉬턴 커쳐가 주인공인데... 보고나면 케빈만 기억에 남습니다. 맨 오브 스틸, 배댓슈(2013, 2016)와 히든 피겨스(2016)에서도 역시 그러했습니다. 두 편의 슈퍼맨 영화에서 제일 슬프고 감동적인 장면은 모두 케빈의 몫이었죠. 히든 피겨스에서 평소에는 얼음처럼 냉정하고 깐깐하기 짝이 없던 백인 상사 케빈이 흑인 주인공이 인종차별 정책으로 제대로 일을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되자마자 바로 해머를 들고 인종분리 화장실 표지를 부셔버리는 씬은 그야말로 사이다가 따로 없습니다.
확실히 케빈에게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더불어 미국 영화에는 흔치않는 엄부(嚴父)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의 무뚝뚝한 연기와 깊어지는 주름살을 보면서 우리 아버지 세대의 그것과 묘하게 비슷하다라는 인상을 받는건 저 뿐일까요. 언젠가 훗날 케빈은 미국을 대표하는 엄하지만 속깊은 아버지의 모습으로 팬들의 기억에 남을지도 모르겠네요.
PS.
1. 케빈의 필모를 보다보면 사실 가장 최악은 워터월드가 아니라 포스트맨(1997)이죠.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교체기에 나온 워터월드의 스턴트 액션 씬은 지금봐도 날 것 그대로의 생생한 느낌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바다 한가운데 금속을 투박하게 기워만든 대규모 세트장의 느낌은 요즘의 흔해빠진 CG와는 비교할수 없는 물성을 가지고 있죠. 이것이 바로 워터월드가 유니버셜 스튜디오의 인기 라이브쇼로 현재까지도 장수하는 이유일 겁니다. 무엇보다 워터월드는 폭망의 이미지와는 달리 2차 시장에서 진작에 본전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뭣보다 제가 엄청나게 애정하는 영화입니다^^)
2. 뭐니뭐니해도 케빈의 배우로서 최악의 실수(?)는 타란티노의 킬 빌에서 '빌' 역을 고사한 것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아 쓰면서도 눈물이...ㅠㅠ) 이 캐스팅만 실현되었다면 킬 빌은 무조건 제 인생작 반열에 들었을 텐데...ㅠ_ㅠ
3. 어쨌든 한동안 세상의 모진 풍파를 제대로 겪은 탓인지 이후 케빈의 인터뷰를 보면 그야말로 삶의 진리가 오롯이 담겨있는 명언의 향연입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에 혹시 지금의 상황이나 현실에 좌절하고 절망하신 분들이 있다면 아래 링크를 남겨 놓을테니 일독을 권합니다.
[현지보고] <가디언> LA 시사회 및 주연배우 인터뷰 (cine21.com)
4. 윗 글에서 언급한 엘비스와 프랭크 시나트라의 라이벌 관계가 궁금하신 분은 이 글을 참고하세요.
[라이벌열전] 프랭크 시나트라 vs 엘비스 프레슬리 | YES24 채널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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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10. 언급좀
바로 주말달립니다
제 수도꼭지 영화입니다
말씀하신 워터월드의 폭망으로 케빈이 떠들썩하게 몰락하는 걸 바다건너 한국에서도 느낄 정도라서 굳이.. 라고 생각해서...
로빈훗과 관련 있을 줄 알았으면 진작 볼 걸 그랬네요.^^
소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