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서브스턴스> 해석/감상 | 물질과 본질 사이, 붕괴하는 정체성

※ 이 글은 다소 약한 혐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 이 글은 블로그에도 함께 기록해두었습니다. (영화 <서브스턴스> 해석/감상 | 물질과 본질 사이, 붕괴하는 정체성)
<서브스턴스>
물질과 본질 사이, 붕괴하는 정체성
1. 서두
LA 중심가의 화려한 펜트하우스,
창 밖의 야경은 저마다의 불빛을 뽐내며 밤하늘을 수놓는데, 엘리자베스는 초라하기만 하다.
그녀의 명품백들과 화려한 옷들, 유명 디자이너의 패션 아이템, 장신구, 가구들. 브랜드와 트렌드는 사람들의 욕망의 투영이고 그것을 포착하는 그녀의 안목은 뒤처지지 않지만, 오로지 자신의 몸뚱이만은 그렇지 않다.
이 화려하고 아름다운 세상에서 더럽고 추악한 것은 그녀 자신 뿐이라고 느낀다.
추악한 것은 무엇인가? 늙고 쭈글쭈글해진 육체일까, 아니면 그런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는 마음일까?
영화 <서브스턴스>는 외모지상주의가 만연한 세상 속에서 늙어가는 자기 모습을 인정할 수 없는 한 여자의 위태로운 욕망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그녀가 젊음을 되찾기 위해 선택한 '서브스턴스'라는 약물은 일시적으로 그녀에게 젊음과 찬란함을 다시 선사해 주지만, 결국 그 욕망의 끝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충격적 파국을 향해 달려간다.
2. 데미 무어의 자전적 고백
이 작품에서 나체까지 마다하지 않고 열연한 데미 무어에게 <서브스턴스>는 자전적 성찰로 보인다.
그녀는 <사랑과 영혼>을 통해 90년대~2000년대 할리우드 최고의 여배우로 등극했고, 특히 <미녀 삼총사 2>에서 당당한 비키니 몸매를 뽐내며 50대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철저한 관리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 후 호사가들에 따르면, 그녀는 20살 연하의 배우 애쉬튼 커쳐와의 결혼과 이혼 과정에서 어려운 시간을 지낸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그녀는 외모에 대한 압박과 연인과의 나이 차이에서 오는 불안감을 겪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서브스턴스>는 데미 무어 자신의 경험이 투사된 작품으로 볼 여지가 있다. 영화 속 엘리자베스의 내적 갈등이 데미 무어에게는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는 듯한 고백이었는지 모른다.
3. 바디 호러: 본질과 물질 사이
<서브스턴스>를 볼 때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영화 제목 자체에 담긴 이중적 의미다. 'Substance'는 '본질'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물질'이란 뜻도 내포한다. 본질은 어떤 존재에 관해 ‘그 무엇’이라고 정의될 수 있는 성질인 반면, 물질이란 일반적으로 감각으로 인지 가능한 대상을 말한다. 영화는 마치 이 두 의미 사이의 긴장을 탐구하는 듯하다. '서브스턴스'는 엘리자베스가 덧없이 좇았던 젊음과 아름다움이라는 피상적인 욕망의 상징이다. 그녀는 이 '물질'을 통해 자신의 '본질'을 유지하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비극적 결과를 초래한다.
이 영화가 '바디 호러'라는 장르를 택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바디 호러는 호러 장르의 하위분류로써 인간 신체의 변형이나 훼손, 붕괴를 통해 불편함과 불안감을 주는 장르다. 예컨대, 이 분야의 대가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플라이>(1986)는 순간이동 실험 도중 우연히 파리와 유전자가 섞인 과학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주인공은 초인적인 매력과 힘을 얻는 듯 하지만 점차 그의 몸은 괴물로 변신하게 된다.
바디 호러는 끔찍한 시각적 충격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매료시키기는 매력이 있다. 그것은 자신의 몸이 통제 불능 상태로 변모한다는 불안과 기형적 형태에서 오는 극단적 혐오가 되려 일탈 욕구를 자극한다. <서브스턴스>도 주인공은 통제할 수 없는 욕망으로 인해 통제할 수 없는 신체 변형을 겪게 되고, 결국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자신의 본질조차도.
4. 엘리자베스와 수는 정말 하나였을까?
기록학을 전공한 혹자에게 이 영화는 뭔가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기록학에는 기록의 무결성(Integrity)과 진본성(Authenticity)이라는 중요개념이 있다. 이들은 기록물이 기록으로서 인정되기 위한 필수 요소 중 하나이다.
먼저 무결성은 기록의 형식이나 내용이 훼손되지 않고 온전하게 유지되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 외형의 안정성을 뜻하며, 이는 기록물을 물질적 관점에서 해석한다. 진본성은 무결성을 포함하여 기록이 위조되지 않은 원래 그대로의 것이라는 걸 뜻한다. 이는 기록의 진본은 유일하게 존재한다는 전제를 내포하고 있다. 즉, 기록의 진본성은 본질적인 독자성(Identity)을 의미한다.
기록이 인간의 기억이나 가치관의 흔적이라는 점에서, 기록과 인간은 유사한 점이 있다. 기록의 무결성이 무너지면 기록으로서의 진본성을 잃듯이, 사람도 자기 인식의 기반이 흔들린다면 존재의 의미를 상실하는 것이다.
엘리자베스와 수는 끊임없이 자신의 모습을 거울을 통해 확인한다. 자기 인식은 거울에 비친 외형으로부터 시작된다. 자신과 외부의 경계를 인식하고, 눈/코/입이 다른 이들과 어떻게 구별되는지를 알아냄으로써 정체성의 기반을 형성한다.
거울 속을 본 엘리자베스는 늙어버린 자신의 육체가 더 이상 가치가 없다고 인식한다. 그래서 '서브스턴스'라는 약물을 통해 젊은 육체의 분신 '수'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수는 엘리자베스의 젊은 버전이 아니라 완전 다른 외모를 가진 육체이다. 두 개의 서로 다른 육신을 가지는 인간의 정체성은 모호해진다. 이는 마치 무결성이 손상되어 원본으로서의 진본성을 잃어버린 기록과 같다. 엘리자베스라는 존재의 고유하고 유일한 정체성이 흔들리게 된 것이다.
*** 여담으로 엘리자베스가 서브스턴스를 경험할 때 연출되는 추상적 이미지들은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데이브가 목성으로 여정을 떠나는 장면-인류가 '스타차일드'로서 새로운 진화와 새로운 정의(定義)됨-을 연상시킨다. 그래서 <서브스턴스>에서도 마치 엘리자베스가 새로운 자아로 각성하는 듯한 착각을 들게 만든다.
5. 분열된 육체와 붕괴하는 정체성
엘리자베스와 수의 갈등은 한 사람의 자기 분열과 자기 파괴의 과정이다. 본체인 엘리자베스의 늙고 추한 모습도 자신이며, 분신인 수의 이기적이고 속물적 욕망도 모두 그녀 자신의 일부다. 서브스턴스를 준 의문의 남자가 "당신은 하나다."라고 경고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다. 그러나 물리적으로 분리된 개체에 나의 의식과 정신이 있다고 쉽게 생각할 수 없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명제를 생각하면, 오직 '내가 여기 있다'라고 인식하는 의식만이 진짜 나 자신이다. 하지만 의식과 정신의 그릇인 육체가 분열되니 본질적인 정체성의 위기가 온다.
영화에서 면접관들이 "이번에는 이목구비가 모두 제자리에 있네."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면접관들의 눈은 제작자인 하비와 대중의 생각들을 반영한다. 세상은 자신들의 기준에 맞는 '가면'을 개인에게 강요한다. 가면이 의미하는 것은 외모 뿐 아니라 사회가 우리에게 책임 지우는 역할과 태도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가면 안에서도 내가 나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일까에 대한 물음이다. 안타깝게도 엘리자베스는 그런 질문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녀는 하비나 세상이 요구하고 있는 가면 그대로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 머무르고 있다. 만약 그녀가 단순 외모로 판단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의 본질을 알았다면, 그리고 자신이 충분히 사랑받을 자격이 있음을 알았다면 비극적 운명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수는 엘리자베스를 죽이고 만다. 마치 자신을 온전히 인정하지 못해서 자기파괴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수는 외형 유지에 필요했던 본체의 척수액을 공급받지 못해 신체가 붕괴되어 간다. 하필 일생일대의 기회였던 새해전야쇼 출연을 앞두고 포기할 수 없었던 수는 결국 금기를 어기고 서브스턴스를 다시 주입한다. 그 결과, 여러 개의 엘리자베스가 한 육체에 뒤엉킨 괴물 'Monstro Elisasue'가 태어난다. 이것은 분열된 엘리자베스들을 극단적으로 혼탁하게 응축시킨 결과물이다. 그것은 "네가 무엇인지 몰라서 다 준비해 봤어."라고 항변하는 듯한 서브스턴스의 응답처럼 느껴진다.
6. 물질적 풍요와 본질의 빈곤 사이에서
<서브스턴스>는 외형과 본질, 육체와 정체성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탐구한다. 기록의 무결성의 위기가 연쇄되어 진본성의 위기로 이어지듯, 엘리자베스도 그녀의 피상적인 외형에 대한 집착은 결국 자신의 본질적 정체성 붕괴로 귀결된다.
엘리자베스는 우리의 하나의 표상일 뿐이다. 화려한 외모 외에도 그녀의 욕망을 채워줬던 물질적 아이템들과 난잡한 인간관계가 그러했듯, 우리는 언제든 욕구불만을 피상적으로 과잉충족 시켜주는 풍요의 시대에 있다. 시대는 소비활동이 나 자신을 정의하는 듯한 착각을 들게 하지만, 그렇게 얻은 충족감을 금방 휘발되고, 무제한의 소비를 하는 악순환으로 빠져든다. 그야말로 풍요 속의 빈곤이다. 가면과 물질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일시적 공허함만 채운채 진정한 나의 본질을 찾아야 한다는 자각조차 하기 어렵다.
Monstro Elisasue는 객관적인 자기 인식능력을 상실하고 신데렐라를 꿈꾸며 신년전야제 쇼에 나간다. 내가 그녀를 멍청하다고 쉽게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나의 본질이 야자수 나무처럼 단단하게 뿌리박은 것인지? 아니면 피상적이고 물질적 욕구에 휩쓸려 그 무엇도 아니게 된 Monstro Elisasue와 같은지? 아마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끝.
추천인 8
댓글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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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정말 잘쓰시네요. 😆




멋진 글 잘 읽었습니다 ㅎㅎ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이 내용 들어가실줄 알았습니다 ㅋㅋ
잘 읽었습니다 ‼

저도 갓두조님 리뷰를 읽었습니다. 그 물컵에 빠진 파리가 설마 진짜 바디호러의 선배격 영화인 <플라이>를 암시할 줄 몰랐네요 ㅎㅎ
아카데미 각본상 받기에 충분할 정도로 생각할 거리들이 가득했습니다. 비록 수상은 못했지만...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