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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문제들에 관하여 - 썬더볼츠

이자락
1283 5 3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다.

-Since my sister’s death, there is a void

옐레나의 독백, 그리고 이어지는 낙하와 추락으로 시작하는 영화의 도입부는 연구원의 권총 자살로 마무리된다. 메시지는 명백하다. 본 영화의 주제는 우울증과 자살이다. 시작부터 영화는 자신이 할리우드 슈퍼히어로물이 아닌 사이코드라마임을 천명한다.
주제에 맞게 영화의 화면은 계속해서 세피아톤, 무채색에 가까운 낮은 채도를 유지한다. 빛 바란 옛날 사진과 같다. 사진 속의 인물들처럼, 옐레나(와 썬더볼츠)는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떠한 시점에 있었던 트라우마들은 그들을 잡고서, 나아가지 못하게 만든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중반부 옐레나의 선택에 있다. 영화는 첫 장면부터 계속해서 옐레나의 내면을 보여 준다. 마치 심리상담을 받는 것과 같이 옐레나는 계속해서 본인의 트라우마와 감정을 이야기하는데, 이러한 심리상담적 영화의 구조는 그의 아버지인 레드 가디언과의 대화에서 정점에 이른다. 부녀의 대화에서 아버지는 딸을 이해하고, 그를 위로한다. 부녀상담은 실제로 옐레나의 기분을 낫게 만들고, 마음의 상처를 어느 정도 치유한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는 관객은 옐레나의 입을 통해 자연스럽게 그의 마음을 ‘이해’하면서, 치유의 과정을 납득한다.

그리고 공허가 나타났을 때, 그 ‘치유’에도 불구하고 옐레나의 선택은 자살이다. 기회가 오자 그는 망설임 없이 공허에 다가가 스스로를 파괴하는 것을 선택한다. 그가 선택을 할 때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연출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공포가 아닌 마치 새롭고 놀라운 것을 마주한 듯한 눈빛, 이는 바로 직전 심리상담 장면에서 ‘이제 나의 삶에는 새로운 것이 없다’라는 대사가 나왔던 것을 생각하면 의미심장하다.

영화는 이러한 방식으로 매체 속 ‘우울함’의 정석을 묘사하면서, 이를 ‘가족과 소통의 힘’이 해결할 것이란 클리셰를 부수고, 현실의 자살을 자신의 담론 속으로 가져온다. 영화는 관객이 바로 직전 장면을 통해 옐레나가 ‘치유’되었을 것이라고 은연중에 생각하도록 유도한다. 그래서 실제로 일어나는 많은 ‘진짜 자살’이 그렇듯, 옐레나의 선택은 의외성을 띄고, 그 선택에 대한 아버지 레드 가디언의 격정적인 반응과 어째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모르겠다는 대사 또한 현실성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선택은 끝인가? 옐레나는 선택을 통해서 영원히 끝나지 않는 문제에 갇히게 되었다. 공허(보이드) 속에 있는 것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계속해서 나왔던 그의 트라우마다.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면 다른 트라우마가 있고, 다른 트라우마를 벗어나면 또 다른 트라우마가 있고, 마치 만화경이나 프랙탈 구조와 같이 끝나지 않는 트라우마가 반복된다. ‘자살한 이’로서 옐레나는 되려 스스로 이 문제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이는 현실적으로 남겨진 이들에 대한 비유다. 자살자의 문제는 자살자만의 것이 아니다. 남겨진 이들은 선택 이후 해결할 수 없게 된 남겨진 문제들 속에서 살아가야만 한다.)

오직 문제를 벗어나는 길은 ‘자살할 이’이자, 비슷하게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다른 주인공 ‘밥’을 통해 이루어진다. 밥, 센트리는 ‘아직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다. 그의 문제는 그의 것이 아니다. 언제나 그에게 트라우마를 안기는 것은 타인(사회)이었고, 결국 또 다른 트라우마를 가진 피해자이자 가해자인 발렌티나에 의해 그는 공허가 된다(이는 곧 우울과 공허가 세대를 통해 반복되어 온 문제임을 가리킨다. 이러한 류의 문제는 하나의 사회 내에서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경향이 있고, 그러한 사회의 구성원은 모두 상처를 받는 밥이면서, 동시에 상처를 입히는 발렌티나가 된다.).

옐레나와 썬더볼츠는 결국 공허 속에서 그를 만나고, 그와 함께 트라우마의 층위를 넘어 공허(보이드)를 마주하기로 한다. 긴 대화의 과정에서 썬더볼츠는 –나쁜 아버지가 되었던 죄책감이 있는 행크가 나쁜 아버지를 후려패는 류의- 방식으로, 스스로의 문제가 스스로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며, 결국 썬더볼츠와 옐레나는 목을 조르는(다시 자살의 이미지다) 철사를 넘어 센트리가 스스로의 다른 모습인 공허를 죽이는 것-즉 스스로를 죽이는 것-을 막는 데 성공한다.

-기억이 중요한가?
영화는 전형적인 문제 제기-결론 도출의 형식을 가진다. 썬더볼츠가 보이드에 들어가기 이전까지가 문제라면 그 이후 보이드에서 일어나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적 환상체험은 결론이라고 볼 수 있다.
공허 속에서, 옐레나는 밥을 통해 트라우마에도 층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가장 깊은 트라우마가 있기도 하고, ‘상대적으로 고요한’ 얕은 트라우마도 존재한다. 곧 트라우마는 스펙트럼이다. 그리고 그 층위의 가장 낮은 기억, 곧 가장 깊은 트라우마에 공허-자살이 존재한다. 그러니 그것을 막는 방법은 가장 높은 기억, 어린 시절의 가장 밝은 기억, 곧 썬더볼츠 축구단이 되어야 마땅하다. 영화가 표면적으로 보여주는 해결방안은 마치 일종의 공식과 같이 정석적이고 전형적이다.

그러나 그 트라우마라는 것은 실재하는가? 우리의 기억은 명확한 ‘실재’로서의 기억인가? 만약 우리의 기억이 분명한 실재가 아니라면, 즉 트라우마가 과거 속에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이 어떻게 우리를 상처입힐 수 있는가? - 곧 썬더볼츠 축구단을 후원했던 건 드미트리였는가, 혹은 셰인이었는가? 
또한 트라우마와 추억의 차이는 무엇인가? 트라우마의 층위가 존재한다면, 어떤 트라우마는 추억만큼 옅고, 어떤 추억은 트라우마만큼 깊을 것이다. 모든 기억이 트라우마가 될 수 있고, 반대로 어떤 기억도 트라우마가 되지 않을 수 있다. 영화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 답을 제시하지 않음으로서 역설적으로 답을 제시한다.
즉 영화는 옐레나의-자살자의- 선택의 원인이 사실 트라우마가 아니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트라우마를 가진 모든 이들이 자살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자살이란 원인이 없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자살을 일으키는 트라우마 또한 실재하지 않거나 정확하지 않은 기억에 기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영화가 제시하는 답은 명확하다. 원인이 없는 문제는 해결할 수 없다. 현실에서 우리는 옐레나의 자살을 막을 수 없다. 현실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

그래서 썬더볼츠는 현실 바깥으로 벗어나는 것을 선택한다. 현실 바깥의 세계인 공허 속으로 몸을 던짐으로써, 곧 영화이기에 가능한 환상적 장면들과 비유의 연속(현실과 유사하지만 온전히 현실과 구분되는)을 통해서 영화는 현실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기’를 선택한다. 보이드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오직 영화적 방식으로만 묘사될 수 있는 옐레나(그리고 썬더볼츠)와 밥의 심리상담이다. 따라서 이 순간 영화는 메타적이 되고, 동시에 그 스스로 사람을 구하기 위한 ‘히어로물’이 된다. 모든 히어로물의 목적은 결국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한 이야기가 아니던가?
(cf. 썬더볼츠의 각본 담당인 이성진은 전작 ‘성난 사람들(Beef)’에서 이미 이러한 플롯을 작은 규모로 제시했던 적이 있다. 썬더볼츠는 엄밀히 말해 마블 영화라기보단 대규모 할리우드, 디즈니 자본으로 만들어진 ‘성난 사람들’의 확장 및 변용에 가까운 영화다.)

결국 타인과 함께하는 것이 서로를 죽음으로부터 구하고 구원한다는 이야기는 진부한 결론이다. 영화도 이걸 알고 있다. 보이드 속 공간이 그곳에 들어가기 이전의 현실적인 영화의 흐름에서 벗어나 꿈과 같이 진행된다는 것은 그런 방식의 자살 예방이 꿈 같은 이야기라는 냉소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의 기저에는 공허와 허무주의가 있으며, 결과적으로 죽음을 피하는 것에는 성공하나 영화의 말미에도 공허는 사라지지 않고, 허무주의는 해결되지 않은 채, 다만 공동체 속에서 억제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죽음을 막을 수 있는 일이 없다면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공허 속의 옐레나와 썬더볼츠가 그러했듯 설령 그것이 죽음을 막지 못하더라도 함께 이야기하고, 함께 공감하는 것 뿐이다. 유년 시절 썬더볼츠 축구단에 대해서, 공유되는 추억에 대해서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결국 사람을 구하는 것은 사람이다. 따라서 영화는 자기부정(소통이 사람을 정말로 구할 수 있나?)을 자기부정(허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소통 외에 무엇이 있는가?)하는 방식으로 스스로의 의미를 만든다.

따라서 그 모든 허무와 공허 속에서도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견고하다. 깊숙한 바닥에 남겨진 문제들 속에서 위를 향해 빠져나오는 법은 다 같이 어깨를 모으고 한 발 한 발 벽을 딛고 올라가는 방법 뿐이라는 것, 중요한 것은 구단 후원자가 드미트리냐 셰인이냐가 아니라 “썬더볼츠 축구단이 있었고, 그 시절은 행복했으며, 우리가 그 기억을 공유하는 것”이라는 다분히 디즈니스럽고, 다분히 할리우드스러운 진부한 결론은, 영화 속에서 사실은 그게 답이 아닐수도 있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 뿐이라는 ‘히어로적’ 양식에 맞춘 호소를 통해 설득력을 가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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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onat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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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첫 대사부터 보이드의 등장을 예고하고 있었네요. 심도 깊은 고찰 잘 봤습니다.
12:38
5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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