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금호러 No.74] 백설공주의 호러버전 - 스노우 화이트

스노우 화이트 - Snow White: A Tale of Terror (1997)
백설공주의 호러버전
어릴 적에 읽은 동화 속 이야기들은 언제나 행복한 결말로 마무리되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림 형제의 원작 동화들이 실제로는 잔혹하고 음울한 이야기였다는 사실은 이제 널리 알려져 있죠. 마이클 콘 감독의 <스노우 화이트>는 바로 이런 원작이 품고 있던 이야기의 어두운 본질을 호러 영화 스타일로 되살려낸 작품입니다. 시고니 위버, 샘 닐과 같은 쟁쟁한 배우들의 참여는 <백설공주>의 진정한 '잔혹동화'가 탄생하는 데 든든한 밑바탕이 되었지요.
이야기는 프레드릭이 임신한 아내와 함께 성으로 돌아가던 중 뜻밖의 사고를 당하면서 시작됩니다. 깊은 숲속에서 릴리가 세상의 빛을 보는 순간, 그녀의 어머니는 생명의 불꽃이 꺼지게 됩니다. 세월이 흐른 뒤, 릴리의 아버지 프레드릭은 클로디아와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클로디아는 진심으로 릴리와 따뜻한 관계를 맺고 싶어 하지만, 릴리는 끊임없이 거리를 두며 삐뚤어진 행동으로 그 마음을 외면합니다. 둘 사이의 관계는 날이 갈수록 냉랭해지고, 결정적으로 클로디아는 릴리로 인해 자신의 뱃속 아이를 잃게 되면서 깊은 복수심의 늪에 빠져들게 됩니다.
<스노우 화이트>와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가장 큰 차이점은 중세의 음산한 고딕 호러 분위기에 있습니다. 디즈니가 정성스레 빚어낸 밝고 순화된 이미지와는 완전히 다른 결을 지닌 이야기와 캐릭터들이 영화 속에 살아 숨 쉽니다. 디즈니 버전에서 난쟁이들이 귀엽고 코믹한 백설공주의 든든한 조력자로 그려진 것과 달리, 이 영화에서는 각자 품은 상처와 결함을 가진 현실적이고 어두운 인물들로 새롭게 해석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백설공주인 릴리의 묘사인데, 그녀는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일삼는 싸가지 없는 밉상 캐릭터로 관객 앞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계모인 클로디아입니다. 그녀는 소중한 아이를 잃은 깊은 상실감과 고통, 치유되지 않는 슬픔을 안고 서서히 릴리에게 복수하려는 어둠의 길로 접어듭니다. 클로디아의 이러한 심리적 변화는 충분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디즈니 애니의 마녀가 단순히 일차원적인 악역에 그쳤다면, 클로디아는 관객의 동정심마저 이끌어내는 입체적인 캐릭터로 섬세하게 그려집니다.
클로디아가 처음부터 순수한 악의 화신이 아니라,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 깊은 상실감에 휩싸여 점차 어둠의 세계로 발을 내딛는 모습은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마음속에 연민과 지지의 감정을 일으킵니다. 특히 클로디아가 거울 속에 비친 또 다른 자아와 나누는 대화 장면은, 정신 분열과 내면의 어둠을 섬세하게 표현한 시고니 위버의 압도적인 연기로 잔혹 동화로서의 이야기에 단단한 뼈대를 세워줍니다. 시고니 위버가 이 영화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스노우 화이트>의 아쉬운 점은 릴리와 함께하는 일곱 난쟁이가 여섯 명의 건장한 광부와 단 한 명의 난쟁이로 변모한 설정입니다. 이 인물들은 각자 나름의 사연과 아픔을 품고 있지만, 깊은 정서적 반응을 이끌어내기엔 역부족입니다. 일곱 중 한 명은 릴리를 강간하려고 하고, 여러 명이 클로디아의 저주로 인해 죽게 됩니다. 이런 설정들은 디즈니 애니와 비교하면 굉장히 흥미로운 접근인데, 안타깝게도 황당함을 자아내는 릴리의 뜬금없는 로맨스 전개로 망가지죠.
왜 그 광부와 사랑에 빠지는 건지, 너무나 급작스러운 전개인데다가, 릴리는 이미 자신이 사랑하고 결혼을 허락한 상대가 있었음에도 이해하기 어려운 돌발 행동을 보여주죠. 애초에 클로디아가 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자리 잡고 있기에 릴리의 존재감은 상대적으로 희미해질 수밖에 없지만, 캐릭터 묘사의 허점이 너무 많아 인물과 깊은 공감대를 형성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면모를 보여줍니다.
<스노우 화이트>는 그림 형제의 원작이 간직한 이야기의 어둡고 잔혹한 진실에 충실하게 다가선 영화입니다. 1997년 당시의 기준에서는 호러적인 색채가 강하게 느껴졌지만, 세월이 흐른 뒤 다시 보니 강렬한 공포와 자극적인 비주얼보다는 원작 동화의 어둠을 진지하게 파고든 이야기와 캐릭터의 심리적 변화가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영화가 지닌 여러 결점들이 눈에 띄게 드러나지만, 시고니 위버의 압도적인 연기력이 그런 단점들을 상당 부분 희석시켜 주는 효과를 발휘한 것 같습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사랑스럽고 환상적인 <백설공주> 이야기와는 달리, 불길하고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진정한 잔혹 동화의 세계를 경험하고 싶다면 이 영화는 분명 색다른 경험과 재미를 선사해줄 의미 있는 선택이 될 것입니다.
덧붙임...
1. 극장 개봉용으로 제작된 영화이지만, 케이블 방송사 쇼타임을 통해서 공개가 되었습니다. 이 결정으로 인해 TV 부문 에미상과 배우조합상에 시고니 위버가 후보로 오르는 성과를 거두게 됩니다.
2. 시고니 위버는 사악한 여왕 역할을 맡고 싶었던 이유로, 왕이 어리석게도 왜 그런 잔인한 여자를 아내로 맞이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밝힌 적이 있습니다. 클로디아가 동정심이 가는 캐릭터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시고니 위버가 진심으로 좋은 어머니가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계모를 표현했기 때문인 것 같군요.
3. 시고니 위버는 자신의 끔찍한 마녀 분장을 즐겼다는군요. "촬영 중간 중간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게 정말 즐거웠어요. 샘 닐은 그걸 정말 싫어했죠. 제가 다가가서 쓰다듬으면 엄청 불편해 했어요."라며... 소감을 밝힌 적이 있습니다.
4. 백설공주인 릴리 호프만의 역할은 원래 알리시아 실버스톤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캐릭터였다고 합니다.
5. 이 영화의 몇 가지 요소들은 <스노우 화이트 앤 더 헌츠맨>과 겹치는 부분이 있습니다. 두 작품 모두 여왕의 하수인 역할을 하는 남자 형제가 나오고, 백설공주는 그 위기에서 탈출하죠. 그리고 까마귀가 두 영화에서 악을 상징하는 요소로 그려집니다.
다크맨
추천인 8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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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장이 ㄷㄷ
오늘도 영화소개 감사드립니다.

시고니 위버가 마녀 분장을 하고
샘 닐에게 장난을 쳤다고요?
싫어할 만도 하죠.;;;;


기회 되면 한번 보고 싶어요~
아주 옛날에 봐서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다시 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