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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의 풍경, 기동경찰 패트레이버 극장판 2 (1993)

해리엔젤 해리엔젤
10971 4 5

스포 있어요

 

 

 

 

 

 

 

 

 

 

520D61843D0AEA0014.jpeg.jpg

 

근미래 도쿄, 어디선가 날아온 미사일이 베이 브리지를 날려버린 걸 시작으로 국적을 알 수 없는 전투기가 영공에 나타나는 등 국가적 혼란이 가중되자, 정부는 도쿄에 치안을 위한 자위대 출동을 명령합니다. 사실상 계엄령이 떨어진 것입니다. 한편 격오지에서 한가한 나날을 보내던 특차2과에 한 제보자가 나타나 이 사건의 흑막을 알려주면서, 주인공 고토와 나구모는 계엄령을 야기한 이번 테러사건의 진상을 추적하기 시작합니다. 

 

오시이 마모루의 1993년작 기동경찰 패트레이버 극장판 2 (이하 패트레이버 2)는 지금 봐도 놀라운 퀄리티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일단 메카닉 디자이너로 카와모리 쇼지, 이츠부치 유타카, 카토키 하지메라는 초특급 네임드가 셋이나 참여했는데다가 카와이 켄지가 음악을 맡고 요절한 천재 콘 사토시가 전체적인 레이아웃을 잡았습니다. 뭣보다 패트레이버 시리즈가 레이버(패트레이버 세계관의 다족보행 로봇)라는 소재를 제외하고는 매우 현실친화적인 작품이다보니, 오시이 마모루 특유의 극사실적 연출과 궁합이 매우 좋습니다.

 

한편으로 오시이 마모루는 원작의 유머를 모두 거세하고 뛰어난 작화만이 받쳐줄 수 있는 정적인 연출을 통해 특유의 현학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작품 속에 밀어습니다. 팬들에게 친숙한 기존 특차2과의 캐릭터들은 만화 특유의 데포르메를 싹 배제하고 리얼하게 새로 디자인됐습니다. 인물을 포함한 모든 작화에 칼로 깎은 듯한 정교한 그림자를 심고, 겨울이라는 계절감을 살리기위해 한색 계열의 푸르스름한 톤으로 작품 전체를 찍어누릅니다. 그리하여 탄생한 패트레이버 2의 분위기-눈과 침묵에 잠긴 도쿄의 풍경으로 대표되는-는 작중 인물이 읊어대는 성경구절만큼이나 묵시록의 그것에 가깝습니다. 

 

520D62014F7010002E.jpg

 

스토리를 좀 더 풀어보자면, '환상의 쿠데타'라 불리는 이 사건의 주범은 혁신적인 레이버 이론을 제창했던 천재 엔지니어이자, 동남아에 평화유지군으로 참가했다가 지휘부의 무능으로 부하를 모두 잃었던 과거가 있는 전직 자위대원 츠게라는 남자입니다. 전쟁의 참상을 직접 겪은 그는 평화로운 일상에 익숙해져 무기력해진 일본인들에게 진짜 전쟁이 무엇인지 보여주겠다는 일념으로 일부 자위대 강경파, 미 군산업체와 손잡고 도쿄를 무대로 실제같은 전쟁상황을 만들어냅니다. 작정하고 시스템의 허점을 파고든 그의 치밀한 계획앞에 정부, 군경은 모두 허무하게 무력화되고 맙니다. 

 

패트레이버 2는 누군가 작심하고 판을 흔들면 우리가 당연히 생각하던 일상의 평화가 얼마나 깨어지기 쉬운지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전범국 일본에게 강제된 평화헌법으로 만들어진 잔잔한 일상 뒤에는 보통국가라는 명분하에 과거처럼 전쟁을 할 수 있는 국가가 되고 싶다는 불온한 욕망이 꿈틀대고요. 전공투세대를 대표하는 좌파 감독 오시이 마모루는 이 모든 상황을 냉소적인 시각으로 그려냅니다. 국가적 위기상황에서조차 경찰과 자위대는 서로 책임 떠넘기기에 바쁘고, 그나마 분투하던 특차2과의 협력자는 사실 츠게와 내통하던 이중스파이였죠. 

 

520D6191402632003E.jpeg.jpg

 

나온지 30년이 넘은 이 영화를 기억 속에서 불러내게 된 건, 12월 3일 밤 국회로 날아든 전투헬기가 불러일으킨 기시감이었습니다. 극중에서 전투헬기가 도쿄의 전략요충지를 무참하게 파괴했듯이, 현실의 전투헬기는 민의의 전당인 국회에 중무장한 특전사 대원들을 뱉어냈습니다. 자국민에게 총을 겨눴던 영화의 참담한 전개가 우리나라에서 현실이 되는게 아닌가하는 공포감으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죠. 

 

하지만 이후 현실은 전혀 다르게 흘러갔습니다. 계엄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국회를 포위한 계엄군을 막아섰고, 지금은 내란수괴의 탄핵을 외치며 광장을 촛불과 응원봉으로 따뜻하게 물들이고 있죠. 패트레이버 2의 차갑고 냉혹한 계엄의 풍경은 2024년 대한민국에선 재현되지 않았습니다.  

 

결말부에 이르러, 도쿄 전역을 파괴했음에도 피만은 보고 싶어하지 않았던 기묘한 테러리스트 츠게는 '이런 짓을 저지르고도 왜 자살하지 않았냐'는 경찰의 질문에 '이 도시의 미래를 보고 싶었다'라고 대답합니다. 불의한 권력에 맞서 당당히 저항하고 도탄에 빠진 민주주의를 지켜내겠다고 다짐하면서 광장에 모여든 시민들의 모습이야말로, 아마 그가 보고 싶었다는 미래의 가장 긍정적인 형태가 아닌가 싶습니다. 

 

520D620A4E6921002F.jpg

 

PS.

1. 사실 군대를 가질수 없는 현재 일본의 상황에서는 계엄이란 말 자체가 애당초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형식상 경찰 휘하 조직인 자위대가 치안유지를 목적으로 출동하는 것이 이른바 일본의 계엄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자세히 다룬 좋은 영상이 있어서 링크를 걸어둡니다.

https://youtu.be/OJwwpVXzcmU?si=RHX5BDWLHgLNq5Mf

 

2. 원작의 페이소스를 배제하고 철저하게 극사실적인 영상을 추구하는 오시이 마모루의 스타일은 이후 차기작이자 그의 최고 걸작, 공각기동대(1995)로 고스란히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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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image 1등

90년대 일본의 작가 감독 애니메이션들은 세월이 지나도 그 아우라가 대단하네요

21:19
24.12.11.
profile image
golgo

오시이 마모루는 이대로 애니 한 길만 쭉 팠으면 좋았을 텐데...이후 나온 그의 실사영화들은 아발론 정도를 제외하면 눈 뜨고 봐주기 힘든 수준이라...

21:29
24.12.11.
profile image
해리엔젤
제말이요.
모에의 시대가 오면서 버텨내질 못한 건가 싶고요
22:11
24.12.11.
profile image
golgo

오시이 마모루가 레이버가 멋있게 나오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기도 하죠.
최초 OVA 때는 잉그램이 허리가 굽혀지지 않고 회전만 한다는 설정을 끝까지 고집해서
잉그램의 액션을 역동적으로 그리고 싶어했던 원년 제작진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습니다.
몇 년 전에 본인이 총감독을 맡았던 실사 드라마 및 영화에서는

잉그램이 몇 번 움직이면 금새 고장 나는 퇴역 직전의 고물로 나오고,

패트레이버 세계관을 끝장내기로 작정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레이버 산업이 사양길로 접어들었다는 설정을 시리즈 내내 노골적으로 드러내서,
기존 시리즈 팬들과 원년 제작진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습니다.
극장판 2편에서도 레이버가 움직이는 건 후반부의 전투 장면을 제외하면 몇 장면 없죠.
그만큼 스토리의 진정성과 메시지에 힘을 많이 싣긴 했지만,
그래도 극장판 1편의 오락성을 아예 배제하다시피 한 건 아쉬워요.

 

덧붙이자면, 아발론은 극장에선 끝까지 다 봤는데
나중에 비디오로 빌려봤을 때에는 기어이 꿈나라 갔다 왔습니다. ;;;;

00:15
24.12.12.
profile image 2등

지금 우리나라의 상황을 감안하면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겠네요.

00:36
24.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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