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크모드
  • 목록
  • 아래로
  • 위로
  • 댓글 2
  • 쓰기
  • 검색

잔 다르크(1999) 리뷰

해리엔젤 해리엔젤
783 3 2

스포 있어요

 

 

 

 

81LQZTG46ZL._AC_SL1500_.jpg

영화는 현실을 절대 못따라간다는 말이 있죠. 잔 다르크가 딱 그런 경우입니다. 세상에, 문맹에다 칼 한번 쥐어본 적 없는 시골소녀가 신의 계시를 받았다며 왕을 접견하고, 군대를 이끌어 기적적인 승리를 거두고 조국을 전화의 수렁에서 구해낸다니, 싸구려 양판소도 이따위로 써오면 개연성과 핍진성은 엇따가 엿바꿔 먹었냐며 한 소리 들을 겁니다.

 

이후 이 믿기 힘든 이야기에 혹한 수많은 학자들은 잔 다르크의 삶을 철저히 연구검증했고 그 결과, 약간의 과장은 있었을지언정 그녀가 행했던 일들이 대부분 사실임이 밝혀졌습니다. 과연 그녀는 그녀 말마따나 신의 메신저였을까요? 그녀가 이룬 모든 업적은 신의 기적이었을까요?

 

뤽 베송은 자국의 구국영웅 잔 다르크에 대해 꼭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는 영화 <잔 다르크(1999)>에서 그녀를 심각한 트라우마와 정신분열증을 가진 광신도로 묘사합니다. 이런 재해석은 사실이냐 아니냐를 떠나 꽤 놀랍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누군가가 이순신 장군을 일본에 대한 적개심 때문에 반쯤 미친 외골수 전쟁광으로 묘사한 영화를 만들었다고 칩시다. 과연 이 영화가 극장에 걸릴 수 있을까요? 아니 그 전에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은 우리나라에서 살 수나 있을까요? 

 

근데 뤽 베송은 이런 짓을 꺼리낌없이 합니다. 영국과 싸운 프랑스인 영웅을 다룬 영화인데 각본은 전작들처럼 영어로 썼습니다. 잔 다르크 역의 밀라 요보비치를 포함, 주연이라 할만한 인물들은 모두 미국 배우들이고 모국 프랑스 배우들은 거의 조연 수준에 머무릅니다. 이쯤되면 평생을 헐리우드 바라기로 살아온 뤽 베송답다고나 할까요. 

 

물론 뤽 베송이 잔 다르크를 완전히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 아마도 그의 원래 목적은 자국 영웅의 현대적 재해석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잔 다르크는 중세의 끝물에 태어난 인물이고, 그녀가 활약했던 백년전쟁은 중세를 끝내고 근대를 열어제낀 세계사적 대 이벤트였죠. 즉 그녀는 그녀가 살았던 중세라는 특정시대의 분위기를 통해서만 이해가 가능한 인물입니다. 그녀의 행동을 현대적으로 '분석' 정도까지는 할 수 있겠지만, 철저하게 중세적 인간이었던 그녀의 총체를 현대의 사고와 관점으로 '재구성'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영화 초반, 잔의 언니는 어린 잔의 눈 앞에서 영국군에게 강간 살해당합니다. 감독은 이 충격적이고 잔혹한 오프닝을 통해 잔 다르크에게 강렬한 트라우마와 참전의 동기를 부여합니다. 하지만 실제 역사를 보면, 잔에게 손윗 언니가 있던 건 사실이지만 그녀는 옆마을로 시집을 가서 아이를 낳다가 죽었습니다. 당시 산모가 출산 후 산욕열로 죽는 건 비위생적이던 중세에선 매우 흔한 일이었죠. 그런데 왜 굳이 뤽 베송은 누이의 병사를 끔찍한 강간살인사건으로 바꿨을까요? 

 

역으로 생각해보면 이 장면은 '현대인' 뤽 베송이 '중세인' 잔 다르크를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이 정도쯤 되는 전제가 있어야,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적진을 유린하는 강렬한 여전사 캐릭터를 현대의 관객에게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한거죠. 그러니 이 영화에서 잔 다르크가 심각한 정신분열에 시달리는 광신도로 묘사되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귀결이었을 겁니다. 잔이 들었다는 신의 목소리를 종교를 제외하고 설명할 수 있는 건 정신의학의 영역뿐이니까요.

 

영화 후반에 이르러, 영국군에게 생포된 잔은 구금되어 종교재판을 받는 와중에 자신의 양심을 상징화한 캐릭터(더스틴 호프만 분)를 만납니다. 그는 끊임없이 잔에게 "니가 들었다던 신의 계시는 사실인가? 너는 그저 내면의 증오와 분노를 신의 사명으로 착각하고 왜곡한 채, 자신 스스로와 사람들을 속여온게 아닌가?" 를 잔인할 정도로 추궁합니다. 혼란스러운 잔은 어찌할 줄을 몰라하며 계속 신에게 매달립니다만, 한때 그토록 선명했던 신의 목소리는 이제 더이상 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화형대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여기에는 기존 잔 다르크의 이미지였던 고결한 신념의 극치, 종교적 무아지경의 도취 따위는 없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뤽 베송은 기본적으로 잘못된 전제를 깔고 영화를 진행했음에도 결과적으로 그녀를 전쟁과 종교로 대표되는 중세라는 시대가 만들어낸 무고한 희생자로 만드는 데는 성공합니다. 

 

벌써 나온지 25년이 다 되어가는 뤽 베송의 <잔 다르크>는 앞으로도 한동안 회자될 영화입니다. 이 영화가 대단한 명작이라서가 아니라, 잔 다르크를 다룬 영화가 별로 없다보니 그나마 이 작품이 가장 최신작에 속하거든요. 그렇다고 이 영화가 마냥 엉망이고 재미없었냐라고 물으신다면, 그건 아닙니다. 꽤 볼만해요. 현대 서브컬쳐의 주요소재인 '갑옷입은 미소녀 여전사'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잔 다르크를 주인공으로 삼아 역사적 대전환점에서 벌어진 전쟁을 대규모 인원과 자본을 동원해 구현한 이른바 '에픽 영화'가 재미없기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뤽 베송의 전성기를 함께한 콤비인 티에리 아보가스트의 촬영과 에릭 세라의 음악도 건재하고요.

 

PS.

 

1. 잔 다르크의 수하 장수 중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역시 뱅상 카셀이 분한 질 드 레겠죠. 실제로 잔 다르크 사후 그녀와 정반대의 길을 걸은 질 드 레와 퇴폐미 뿜뿜하는 젊은 날의 뱅상 카셀의 날카로운 이미지는 정말이지 찰떡입니다.

 

2. 이 영화 촬영시 뤽 베송과 밀라 요보비치는 부부사이였습니다. 무려 16살 차이가 나죠. 뤽 베송이 자신의 어린 신부를 띄우려고 만든 영화라는 삐딱한 시선은 당시 이 영화가 과소평가 받은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신고공유스크랩

추천인 3


  • 이상건
  • Sonatine
    Sonatine
  • golgo
    golgo

댓글 2

댓글 쓰기
추천+댓글을 달면 포인트가 더 올라갑니다
정치,종교 관련 언급 절대 금지입니다
상대방의 의견에 반박, 비아냥, 조롱 금지입니다
영화는 개인의 취향이니, 상대방의 취향을 존중하세요
자세한 익무 규칙은 여길 클릭하세요
profile image 1등
질 드 레면 끔찍한 살인마 말이죠?
뤽 베송 영화 중 이 영화는 못봤는데 한번 봐야겠네요
18:14
22시간 전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에디터 모드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댓글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

공유

퍼머링크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HOT 센텀 cgv 근황입니다. 4 GI 59분 전16:12 417
HOT 비상계엄 알고리즘에 [서울의 봄] 떴다…재개봉 요청 쇄도 2 시작 시작 1시간 전16:06 447
HOT 마고 로비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 속 나오미의 ... 4 카란 카란 3시간 전13:40 966
HOT [Gundam GQuuuuuuX] 국내 극장 개봉 예정 2 시작 시작 1시간 전15:58 263
HOT '하얼빈' 미장센 스틸들 2 NeoSun NeoSun 1시간 전15:27 477
HOT '백설공주' 메인 예고편도 싫어요가 좋아요의 10... 3 golgo golgo 1시간 전15:29 497
HOT 극장판 미스터리라 하지 말지어다 1타2피 굿즈 수령했습니다 1 카스미팬S 1시간 전15:19 255
HOT 소방관 실화라 몰입에 흠잡을데 없는 무난한 재난물 3 전단메니아 전단메니아 2시간 전14:59 504
HOT [1승] CGV 골든 에그 점수 96%, [소방관] 91% 2 시작 시작 2시간 전14:25 693
HOT 오스카 아이작, 티모시 샬라메의 밥 딜런 역에 부정적이었다 4 카란 카란 6시간 전10:17 1047
HOT <백설공주> 메인 포스터 공개 2 넷플마니아 넷플마니아 3시간 전14:08 633
HOT 전우용 역사학자의 하얼빈 예고편 평 6 쌈장 7시간 전09:35 1788
HOT [넷플릭스] 2024년 12월 후반기(16~31일) 넷플릭스 종료 예... 3 deskiya deskiya 3시간 전14:07 492
HOT '백설공주' 실사판 첫 트레일러 공개와 작품 근황 3 NeoSun NeoSun 4시간 전12:58 541
HOT 기예르모 델 토로 '나이트메어 앨리' 흑백 확장컷... 2 NeoSun NeoSun 4시간 전12:57 636
HOT '히든페이스' 박지현 대학내일 모델 모습 4 NeoSun NeoSun 6시간 전11:05 2647
HOT 이정재 배우 벌크업시절 사진 입수 2 전단메니아 전단메니아 6시간 전10:46 2464
HOT '백설공주' 실사판 VS 애니 비교샷 5 NeoSun NeoSun 6시간 전10:21 927
HOT '반지의 제왕 : 더 워 오브더 로히림' 런던 프리... 1 NeoSun NeoSun 7시간 전09:38 710
HOT [퇴마록] 애니메이션 2월 개봉 4 시작 시작 8시간 전09:05 1072
1159727
image
NeoSun NeoSun 방금17:11 1
1159726
image
golgo golgo 방금17:11 8
1159725
image
아몬드밀크 5분 전17:06 62
1159724
image
hera7067 hera7067 6분 전17:05 63
1159723
image
무비티켓 10분 전17:01 79
1159722
image
넷플마니아 넷플마니아 26분 전16:45 113
1159721
image
카란 카란 28분 전16:43 186
1159720
image
NeoSun NeoSun 30분 전16:41 136
1159719
image
카란 카란 31분 전16:40 139
1159718
normal
순하다 순하다 45분 전16:26 171
1159717
image
카스미팬S 48분 전16:23 96
1159716
image
션2022 51분 전16:20 163
1159715
image
NeoSun NeoSun 57분 전16:14 295
1159714
image
GI 59분 전16:12 417
1159713
image
NeoSun NeoSun 1시간 전16:07 276
1159712
image
시작 시작 1시간 전16:06 447
1159711
image
NeoSun NeoSun 1시간 전16:01 219
1159710
image
시작 시작 1시간 전15:58 263
1159709
image
NeoSun NeoSun 1시간 전15:43 174
1159708
image
NeoSun NeoSun 1시간 전15:34 268
1159707
image
golgo golgo 1시간 전15:29 497
1159706
image
NeoSun NeoSun 1시간 전15:27 477
1159705
image
카스미팬S 1시간 전15:19 255
1159704
normal
넷플마니아 넷플마니아 2시간 전15:04 335
1159703
image
전단메니아 전단메니아 2시간 전14:59 504
1159702
image
golgo golgo 2시간 전14:51 284
1159701
normal
totalrecall 2시간 전14:32 496
1159700
image
시작 시작 2시간 전14:25 693
1159699
image
호러블맨 호러블맨 2시간 전14:24 313
1159698
image
넷플마니아 넷플마니아 3시간 전14:08 633
1159697
image
deskiya deskiya 3시간 전14:07 492
1159696
image
카란 카란 3시간 전13:40 966
1159695
image
NeoSun NeoSun 4시간 전12:58 387
1159694
image
전단메니아 전단메니아 4시간 전12:58 371
1159693
image
NeoSun NeoSun 4시간 전12:58 5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