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 다르크(1999) 리뷰
스포 있어요
영화는 현실을 절대 못따라간다는 말이 있죠. 잔 다르크가 딱 그런 경우입니다. 세상에, 문맹에다 칼 한번 쥐어본 적 없는 시골소녀가 신의 계시를 받았다며 왕을 접견하고, 군대를 이끌어 기적적인 승리를 거두고 조국을 전화의 수렁에서 구해낸다니, 싸구려 양판소도 이따위로 써오면 개연성과 핍진성은 엇따가 엿바꿔 먹었냐며 한 소리 들을 겁니다.
이후 이 믿기 힘든 이야기에 혹한 수많은 학자들은 잔 다르크의 삶을 철저히 연구검증했고 그 결과, 약간의 과장은 있었을지언정 그녀가 행했던 일들이 대부분 사실임이 밝혀졌습니다. 과연 그녀는 그녀 말마따나 신의 메신저였을까요? 그녀가 이룬 모든 업적은 신의 기적이었을까요?
뤽 베송은 자국의 구국영웅 잔 다르크에 대해 꼭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는 영화 <잔 다르크(1999)>에서 그녀를 심각한 트라우마와 정신분열증을 가진 광신도로 묘사합니다. 이런 재해석은 사실이냐 아니냐를 떠나 꽤 놀랍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누군가가 이순신 장군을 일본에 대한 적개심 때문에 반쯤 미친 외골수 전쟁광으로 묘사한 영화를 만들었다고 칩시다. 과연 이 영화가 극장에 걸릴 수 있을까요? 아니 그 전에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은 우리나라에서 살 수나 있을까요?
근데 뤽 베송은 이런 짓을 꺼리낌없이 합니다. 영국과 싸운 프랑스인 영웅을 다룬 영화인데 각본은 전작들처럼 영어로 썼습니다. 잔 다르크 역의 밀라 요보비치를 포함, 주연이라 할만한 인물들은 모두 미국 배우들이고 모국 프랑스 배우들은 거의 조연 수준에 머무릅니다. 이쯤되면 평생을 헐리우드 바라기로 살아온 뤽 베송답다고나 할까요.
물론 뤽 베송이 잔 다르크를 완전히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 아마도 그의 원래 목적은 자국 영웅의 현대적 재해석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잔 다르크는 중세의 끝물에 태어난 인물이고, 그녀가 활약했던 백년전쟁은 중세를 끝내고 근대를 열어제낀 세계사적 대 이벤트였죠. 즉 그녀는 그녀가 살았던 중세라는 특정시대의 분위기를 통해서만 이해가 가능한 인물입니다. 그녀의 행동을 현대적으로 '분석' 정도까지는 할 수 있겠지만, 철저하게 중세적 인간이었던 그녀의 총체를 현대의 사고와 관점으로 '재구성'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영화 초반, 잔의 언니는 어린 잔의 눈 앞에서 영국군에게 강간 살해당합니다. 감독은 이 충격적이고 잔혹한 오프닝을 통해 잔 다르크에게 강렬한 트라우마와 참전의 동기를 부여합니다. 하지만 실제 역사를 보면, 잔에게 손윗 언니가 있던 건 사실이지만 그녀는 옆마을로 시집을 가서 아이를 낳다가 죽었습니다. 당시 산모가 출산 후 산욕열로 죽는 건 비위생적이던 중세에선 매우 흔한 일이었죠. 그런데 왜 굳이 뤽 베송은 누이의 병사를 끔찍한 강간살인사건으로 바꿨을까요?
역으로 생각해보면 이 장면은 '현대인' 뤽 베송이 '중세인' 잔 다르크를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이 정도쯤 되는 전제가 있어야,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적진을 유린하는 강렬한 여전사 캐릭터를 현대의 관객에게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한거죠. 그러니 이 영화에서 잔 다르크가 심각한 정신분열에 시달리는 광신도로 묘사되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귀결이었을 겁니다. 잔이 들었다는 신의 목소리를 종교를 제외하고 설명할 수 있는 건 정신의학의 영역뿐이니까요.
영화 후반에 이르러, 영국군에게 생포된 잔은 구금되어 종교재판을 받는 와중에 자신의 양심을 상징화한 캐릭터(더스틴 호프만 분)를 만납니다. 그는 끊임없이 잔에게 "니가 들었다던 신의 계시는 사실인가? 너는 그저 내면의 증오와 분노를 신의 사명으로 착각하고 왜곡한 채, 자신 스스로와 사람들을 속여온게 아닌가?" 를 잔인할 정도로 추궁합니다. 혼란스러운 잔은 어찌할 줄을 몰라하며 계속 신에게 매달립니다만, 한때 그토록 선명했던 신의 목소리는 이제 더이상 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화형대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여기에는 기존 잔 다르크의 이미지였던 고결한 신념의 극치, 종교적 무아지경의 도취 따위는 없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뤽 베송은 기본적으로 잘못된 전제를 깔고 영화를 진행했음에도 결과적으로 그녀를 전쟁과 종교로 대표되는 중세라는 시대가 만들어낸 무고한 희생자로 만드는 데는 성공합니다.
벌써 나온지 25년이 다 되어가는 뤽 베송의 <잔 다르크>는 앞으로도 한동안 회자될 영화입니다. 이 영화가 대단한 명작이라서가 아니라, 잔 다르크를 다룬 영화가 별로 없다보니 그나마 이 작품이 가장 최신작에 속하거든요. 그렇다고 이 영화가 마냥 엉망이고 재미없었냐라고 물으신다면, 그건 아닙니다. 꽤 볼만해요. 현대 서브컬쳐의 주요소재인 '갑옷입은 미소녀 여전사'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잔 다르크를 주인공으로 삼아 역사적 대전환점에서 벌어진 전쟁을 대규모 인원과 자본을 동원해 구현한 이른바 '에픽 영화'가 재미없기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뤽 베송의 전성기를 함께한 콤비인 티에리 아보가스트의 촬영과 에릭 세라의 음악도 건재하고요.
PS.
1. 잔 다르크의 수하 장수 중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역시 뱅상 카셀이 분한 질 드 레겠죠. 실제로 잔 다르크 사후 그녀와 정반대의 길을 걸은 질 드 레와 퇴폐미 뿜뿜하는 젊은 날의 뱅상 카셀의 날카로운 이미지는 정말이지 찰떡입니다.
2. 이 영화 촬영시 뤽 베송과 밀라 요보비치는 부부사이였습니다. 무려 16살 차이가 나죠. 뤽 베송이 자신의 어린 신부를 띄우려고 만든 영화라는 삐딱한 시선은 당시 이 영화가 과소평가 받은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뤽 베송 영화 중 이 영화는 못봤는데 한번 봐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