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lked with a zombie (1943) 제인 에어 영화화의 최고걸작. 스포일러 있음.
제인 에어를 영화화한 것들 중 최고걸작이라고 확신한다.
발 류튼 영화답게 저예산이다. 셋트장 하나 놓고 여기서 찍고 저기서 찍고 한 것이 티가 난다.
심지어는 야외촬영이 몇 장면 안 된다. 그 야외촬영조차도 한 날에 한 장소에서 다 몰아 찍었다.
그런데, 이 영화는 대하드라마다(!).
미국에 사는 어느 순진한 간호사가, 서인도제도 백인농장주 아내의 간호업무를 맡아 가서 겪는 모험이다. 간호사는 말하자면 제인 에어다. 대저택에는 싸늘한 분위기가 감돈다. 늘 씨니컬한 카리스마 있는 농장주는 병에 걸린 아내때문에 고통받고 있다. 그 병이라는 것이 이렇다. 농장주 아내는 열에 시달리다가 신경이 다 타버려서 시체처럼 되어 버렸다. 간단한 말에만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로봇같은 존재다. 의식도 의지도 자기 생각도 없다. 대저택에서 이복형제들 간에 이 아내를 두고 신경전이 감돈다. 늘 술에 취해 사는 동생은 뭔가 비밀이 있다. 원주민들은 농장주의 아내가 좀비라고 생각한다. 의사는 무슨 말이냐고 한다. 자기에게는, 의학적으로 잘 밝혀진 전형적인 병의 증상이라고, 너무 익숙한 것이라고 한다. 간호사는 농장주를 사랑하게 되어서, 농장주 아내를 되살리고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무시무시한 밤의 사탕수수밭을 지나 좀비 마법사를 찾아간다. 한없이 뻗은 무성한 사탕수수밭이다. 영화사상 가장 유명한 "격렬한 밤의 모험" 장면이다.
이것을 작은 셋트장에서 찍은 영화로 커버할 수 있겠는가? 공간적으로도, 미국과 서인도제도, 무한히 뻗은 사탕수수밭과 원주민들의 마을, 농장주의 대저택 등 아주 넓은 범위를 포괄한다. 작은 셋트장에서 찍은 영화가, 이 엄청난 공간감을 효과적으로 살린다. 이 영화를 보면, 관객들은, 주인공 간호사의 이런 넓은 지역에 걸친 모험을 함께 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실제 장소에 가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다. 프로듀서가 발 류튼, 감독이 자크 투르니에라면, 대하드라마를 찍으러 멀리 갈 필요 없다. 작은 셋트장 하나면 충분하다.
등장인물들도 대하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커버리지를 자랑한다. 순진하지만 강인한 간호서, 시니컬하지만 고통받는 농장주, 뭔가 비밀을 감춘 알콜중독자 동생, 아름다운 좀비 아내, 키 크고 위협적인 흑인 좀비, 부두 마법사, 현명한 원주인 하녀, 농장의 가부장 어머니 등. 다 개성적인 인물들이고 감독은 각 등장인물의 개성을 잘 살린다. 흐릿한 인물들이 없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다.
감독 자크 투르니에 못지 않게, 콜롬비아대학 출신 작가이자 저널리스트 발 류튼의 역량도 크게 기여한다.
대본이 기가 막히다. 가령 간호사가 배를 타고 서인도제도로 가는 장면이 유명하다. 갑판 셋트장 위에서 벽의 벽화를 보고 한 장면 찍은 것인데, 바다의 무한함 그리고 간호사가 꿈에 부풀어 가는 곳의 공포를 잘 나타낸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들 중 하나다.
간호사: 저렇게 무한히 뻗은 바다. 참 아름다워.
남자: 아름답지 않아. (어떻게 자기 마음을 읽었냐는 듯, 간호사는 놀라 뒤를 돌아본다.)
저기 바다 위로 튀어오르는 날치들 보이죠? 생의 즐거움을 찬미하기 위해 튀어오르는 것이 아닙니다. 공포에 질려 튀어오르는 거죠. 바다에서 그들을 잡아먹으려는 더 큰 물고기들이 있어요. 저기에는 바다가 은은한 빛을 띄고 있죠? 저기에는 수많은 플랑크톤들이 죽어 있습니다. 시체들이 빛을 내는 거죠. 여기에서는 좋은 것들이 모두 죽어가죠. 잔인하게 말입니다.
자크 투르니에가 한껏 무한한 공간감을 살리는 촬영을 하고, 배우들이 이런 시적인 대사를 효과적으로 읊으면, 갑판 셋트장 하나도 무한한 공간감을 살리는 바다가 될 수 있다. 좋은 시를 읽으면, 시를 읽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공간감을 느낄 수 있는데, 이 대사가 좋은 예다. 젊고 순진하고 꿈에 부푼 간호사 역할을 주연여배우가 아주 잘 해냈다. 눈을 크게 뜨며 놀라서 "당신은 정말 그렇게 생각하지 않죠?"하는데, 간호사의 세계관에서는 이런 암흑이나 시니컬함이 없다. 제인 에어의 영화화된 캐릭터답게, 이 간호사의 낙관주의와 순수성은 엄청나게 어두운 사건들을 겪으면서도 변하지 않는다. 농장주보다 더 강인한 사람이 간호사였던 것이다. 나중에 농장주가 이 순진한 간호사에게 정신적으로 의존하게 된다.
좀비가 된 농장주 아내 역을 맡은 여배우도 신비롭고 처연한 분위기를 잘 살린다. 마치 꿈을 꾸듯 아무 의식 없는 상태로 배회하는 좀비 역이다. 별 연기가 필요하지 않은 역인 듯 보여도, 그렇지 않다. 조금이라도 의식이 있는데 없는 척 연기한다 하고 관객들이 생각하면 이 영화는 끝이다. 영화 맥락 상, 이 여자는 엄청난 미녀다. 거기에다가 좀비가 되어서 몽롱하고 환상적이다. 거기에다가 호러효과도 동작만으로 내야 한다. 이것을 눈을 내리깔고 걸음걸이연기만으로 해낸다.
대저택에서 좀비가 된 아내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복형제들 간의 신경전도 아주 팽팽한 긴장감으로 만들어졌다. 나중에 서서히 진상이 밝혀지는 식으로 추리물처럼 견고하게 긴장을 쌓아올리는 방식도 훌륭하다. 원래 제인 에어도 그렇지 않았나? 미모의 농장주 아내가 남편 앞에서 이복동생과 공공연히 바람을 피우다가 이복동생과 함께 집을 나갈 것이라고 남편 앞에서 선언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농장주 아내는 좀비가 되어 버렸다. 남편은 아내를 증오하면서도, 그냥 놔둘 수 없어 간호사를 고용해 간병을 했던 것이다. 별 것 없는 것같은 농장주 대저택 셋트장도, 이렇게 격렬한 드라마를 집어넣으니까 훌륭한 대하드라마의 장소가 된다.
간호사가 좀비 농장주 아내와 함께 밤의 사탕수수밭을 지나 원주민들 마을에 있다는 좀비 마법사를 찾아가는 장면은 엄청 유명하다.
저거 다 작은 셋트장에서 찍은 거다. 하지만, 공간감이 느껴지지 않는가? 거대한 밤의 사탕수수밭을 좀비와 함께 나아가는 모험이 잘 느껴진다. 거기에다가, 이 장면들이 매우 격렬하다.
발 류튼 영화답게 농장주 아내가 진짜 좀비가 된 것인지 아니면 열병에 걸린 결과인지 애매하게 만든다.
그리고, 원시적이고 신비하고 흙냄새 나는 원주민들 사회 속에 포위되어, 고립되어 존재하는 백인들의 플랜테이션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어리석은 원주민들 하는 식으로 그리지 않는다. "그들은 모든 것을 알아"하고 농장주 동생은 공포스럽게 말한다. 사실 백인들이 무력한 존재다. 원주민들이 모시는 신에 의해 좀비가 된 농장주 아내는, 백인들의 공포를 상징하는 존재다. 좀비가 된 농장주 아내는, 원주민들이 하라는 대로 기계적으로 따르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조셉 콘라드의 "암흑의 핵심"에서 가져온 설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 영화는 제인 에어를 영화화한 것들 중 최고이다. 스토리를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 분위기를 재현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간호사나 농장주 캐릭터는 원작 소설 속 등장인물들을 영화에 데려다 놓은 것처럼 생생하고 자연스럽다. (19세기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을 오늘날로 데려다가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만들려는 어프로치는 참 비효과적이다.) 제인 에어가 겪는 모험은 공포스럽고 격렬하며 열정적이다. 그 모험 속에서 보여주는 간호사의 순수성과 열정 그리고 강인함도 진짜다. 이것을 영화 내내 잘 그려내는 것이 아주 훌륭하다. 영화 전체를 감싸는 아우라가 바로, 이 간호사가 가지는 순수성과 열정이다.
이 영화는 상상으로 좀비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서인도제도에 실재한다는 좀비를 생태학적으로 정확히 그리는 것 같다. "좀비는 마법사가 약물로 만드는 것 아니냐?"하고 대사가 나오니까.
이 영화는 아주 걸작이다.
추천인 3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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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메로 좀비처럼 사람을 잡아먹는다거나 하는 좀비는 아니죠. 그냥 영혼을 잃고 주인의 말에 기계적으로 따르는 기계적인 존재 같은 거죠.
로메로 좀비가 나오기 전 좀비 영화의 원조로 알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