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보다 원망하는건”…‘이태신’ 실존인물 생전 증언

군이 주도한 반란이었기 때문에 철저하게 보안이 유지됐다. 나는 물론이고 계엄사령관이나 국방장관, 대통령께서도 감쪽같이 몰랐다”며 “내가 그날 연희동 저녁 식사에 유인돼 도착했던 시간이 저녁 6시 반이었는데 그때는 이미 95% 이상 반란 성공이 보장된 상태였을 것”이라고 회상했다.
이어 “실제로 내가 (당시 상부에) 요구했던 병력이 한 사람이라도 동원이 됐나. 그 사람들이 전부 (쿠데타) 판을 다졌다”면서 “사령부에 들어가 보니 반란 진압 주력부대인 30경비단장, 33경비단장, 헌병단장 세 단장들이 전부 경복궁 30경비단 반란에 가담하고 있더라. 그 사람들은 10·26사태 직후부터 한 달이 넘도록 충분한 반란 준비를 한 것이었다”고 돌이켰다.
장 전 사령관은 “원망스러운 게 있다면 나 자신이 가장 원망스럽다”고 털어놨다. “내가 하도 못나서 나의 소임을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말이다. 다만 “아쉬운 점은 내가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26사단과 수도기계화사단 2개 사단을 요청했을 때 즉각 승인 조치가 내려지지 않은 것”이라고 짚었다.
장 전 사령관은 “(요청한 병력이 동원됐다면) 경복궁에 있던 반란군 4개 여단 정도야 일격에 끝장내버릴 수 있었다”면서 “감히 당시 (최규하)대통령에 대한 불경인 줄 알면서 말씀드리자면, 국가의 궁극적인 반란 진압의 책임은 헌법상 대통령에게 있다. 대통령이 내란과 반란으로부터 국가의 헌정질서를 지켜야 한다는 말이다. 장관 보고가 없었더라도 즉각 진압 명령을 내렸어야 한다”고 했다.
12·12사태 이후 장 전 사령관 개인의 비극도 시작됐다. 장 전 사령관 체포 소식에 분개한 부친이 곡기를 끊고 이듬해 세상을 떠난 것이다. 당시 서울대생이었던 아들은 같은 해 실종됐다가 낙동강변에서 사망한 채 발견됐다. 장 전 사령관은 “아들이 2학년 올라가는 겨울방학 때 ‘도서관에 간다’며 나가선 한 달 동안 소식이 없더니 변사체로 발견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발견 장소인 낙동강변 야산에 가보니 (아들 시신이) 완전히 얼어 거적때기로 덮여 있었다”며 “그놈을 안고 (서울로) 올라오는데 일그러진 아들 얼굴을 아내에게 보일 수 없어 제가 입김으로 녹이고 혀로 씻어냈다. 그때 눈알에서 사탕만한 얼음덩어리가 나왔는데, 이놈이 얼마나 세상을 원망하고 가는 눈물인가 생각했다. 오늘날까지 제 가슴에 수만 개의 못이 돼 있다”고 토로했다.
장 전 사령관의 아내는 생전 인터뷰에서 “우리 가족이 어쩌면 이렇게 비참하게 돼 버렸는지 모르겠다. 국가에 잘못을 저질렀거나 도적질을 했거나 역모를 꾸민 것도 아니잖나”라며 “(한번은 남편에게) 농담으로 ‘당신은 왜 그쪽에서 회유할 때 넘어가지 않았나. 그쪽에 가 있으면 득세하고 호의호식하며 가족이 잘 지내지 않았겠나’라고 했었다”고 말했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5/0001657833?sid=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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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완 소장이 가슴에 한은 있을꺼 같은데 어렵게 사시진 않은거 같아여~
공기업사장,르메이르 그룹회장까지 역임하셔서 재향군인회 회장도 2번 역임에 국회의원으로
활발한 정.재계활동을 하신편이라 참군인은 맞습니다!!

ㅠㅠ

잘살아서 부귀영화 누릴 수 있었을 텐데 어렵게 사시다가 돌아가셔서 뒤늦게 부각되는 모습이 때늦은 감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