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먼 여인의 저주 (1970) 카지 메이코와 이시이 데루오의 만남. 그런데 평작. 스포일러 있음.
대여배우 카지 메이코와 막장영화의 황제 이시이 데루오 -
둘이 만나면 뭔가 엄청나게 파워풀하고 막장스럽고 기상천외한 영화가 나올까 기대가 컸지만, 흠,
평작이 나왔다.
카지 메이코의 카리스마는 여전하고 이시이 데루오의 거장적인 솜씨는 군데군데 빛을 발한다.
굉장히 상징주의적이고 일본적인 무대효과도 좋다. 장중한 일본고전영화의 힘이 있다.
하지만 뭔가 부족하다.
카지 메이코는 아버지의 자리를 물려받아 야큐자집단의 여두목이 된다. 그리고, 경쟁야쿠자집단을 습격해서
죽인다. 야쿠자집단끼리 칼부림을 한 거야 어쩔 수 없다. 그런데, 카지 메이코는 그 와중에서 상대방 오야붕딸의 눈을 베어 버린다. 상대방 오야붕을 칼로 베어버리려는데, 그 딸이 아버지를 구하겠다고 가로막은 것이었다.
카지 메이코는 큰 충격을 받는다. 그때 검은 고양이가 나와 딸의 베어진 눈동자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핥는다.
그리고 그녀를 노려본다. 카지 메이코는 그때부터 검은 고양이 공포증같은 것에 걸린다.
이야기가 어정쩡하다. 상대방 오야붕딸이 죽어버렸다면 검은 고양이가 빙의해서 요괴가 복수를 하는
전형적인 괴담이 되었을 것이다. 이시이 데루오는 이런 요괴이야기를 막장으로 컬러풀하게 만들어냈을 것이다.
그런데, 상대방 오야붕딸은 눈 먼 것 외에는 멀쩡하다. 복수를 한다고 카지 메이코를 쫓아 다닌다.
그러니까, 초현실적인 괴담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눈 먼 여인이 검술을 배워 카지 메이코를 추격하는
야쿠자 복수물이다.
이시이 데루오는 이 전형적인 야쿠자영화에다가 초현실적이고 막장스러운 것을 넣고 싶어한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들어올 여지가 없다. 그래서 영화가 어정쩡해진다. 갑자기 놀이공원 귀신집이 나오고
야쿠자들이 거기 놀러 들어갔다가 무서운 경험을 한다 하는 식으로 호러적인 요소를 집어넣지만,
결국 곁가지로 억지로 집어넣은 것밖에 되지 않는다. 이 영화는 괴담이 전혀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심리스릴러적인 면이 있다. 카지 메이코는 야쿠자 오야붕으로서 당당하게 죽음과 직면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죄 없는 여인의 눈을 벰으로써 이런 당당함에 금이 간다.
검은 고양이에 대한 공포증은, 눈 먼 여인을 향한 것이라기보다, 자기 정신적 순결에 금이 간 그 공포를 상징하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카지 메이코는 비열한 경쟁 야쿠자두목과 싸워 난도질한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공포 또한 내면에 갖고 있다. 그녀 앞에 어른거리는 검은 고양이의 공포.
초현실적인 요괴는 아니지만, 카지 메이코의 내면에 자리잡아 더 큰 공포를 주는 검은 고양이의 정체는 뭘까?
자기에 의해 눈 먼 여인은 초인적인 검술을 익혀 카제 메이코를 죽이는 것만이 인생의 목표다.
경쟁야쿠자조직 두목을 죽인 다음, 카지 메이코는 그녀와 대결을 한다. 사실 카지 메이코는 검술이 더 뛰어난
눈 먼 여인에 의해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갑자기 나타난 검은 고양이에 의해 구조된다. 검은 고양이는
카지 메이코와 눈 먼 여인 사이에 뛰어들어 대신 칼을 맞고 죽는다.
눈 먼 여인은 카지 메이코를 베는 대신, 그녀의 등 위에 있는 용문신의 눈을 베고 떠나 버린다.
"내 칼은 순결한 사람은 베지 않아."하는 말과 함께.
검은 고양이는 카지 메이코에게 공포와 고통을 주지만, 구원도 해 준다.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이 영화에 있다. 매력이 넘쳐흐르는 영화다.
영화 처음, 빗속에서 칼을 든 카지 메이코가 앞으로 달려오는 장면을 보면, 그녀의 매력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감독도 어떻게 하면 카지 메이코의 매력을 잘 살릴까 고민한 듯하다.
그리고 영화 중간 중간에 뚱딴지처럼 삽입되는 이시이 데루오감독의 막장 장면들도 상당히 매력적이다.
검은 고양이에 빙의되어 발작하다가 피투성이가 되어 죽는 카지 메이코의 부하 - 아마,
다른 일로 죽었는데 카지 메이코의 눈에 검은 고양이 귀신이 빙의된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시체들이 썩어가는 환상적인 공간을 헤메다니는 사람들, 검은 구름이 요동치는 환상적인 검은 거리에서
카지 메이코와 눈 먼 여인이 벌이는 결투 - 검은 고양이를 베는 것으로 클라이맥스에 이르는 -
다 매력적이다. 잘 만든 얌전한 사무라이영화보다 이 결함이 있는 영화가 훨씬 더 좋다.
그리고 이시이 데루오는 막장스럽고 폭주하는 영화는 만들어도, 어설픈 영화는 안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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