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 수 있는 사람] 닻을 내리지 못하는 배 (스포 O)
따뜻하게 시작해서 관객을 응시하는 엔딩으로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영화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약자, 소수자와 같은 소외된 사람들을 탈북민 여성 '한영'에 빗대어 주제의식을 풀어가는 독립영화이다. 적응하려 노력해도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사람들의 편견 어린 시선에 무너지고, 다시 일어서려고 하면 짓밟히고, 이런 걸 해결하려는 사회 복지조차 궁극적으로는 형식에 불과하다는 한계에 부딪쳐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결말부로 갈수록 한영이 겪는 에피소드에서 탈북민으로서만이 아닌 한 명의 프리랜서, 한 명의 청년이 겪는 현실적 아픔으로도 확장 묘사되는데 이는 모든 이방인들을 묘사하는 효과를 이끌어낸다. 이렇게 글로 쓰니 영화가 심히 극적으로 그려진 듯 하지만 이건 나 개인의 감상이고, 실제 영화는 담담하고 사실적으로 그려진다. 신파나 극적 연출 없이도 몰입을 가능케 하고 큰 울림을 준다.
배우 이설·오경화의 연기 굉장했다. 영화가 아픔을 표현하는데도 담담하고 차분할 수 있었던 건 이 두 배우의 공이 크다. 앞으로 다양한 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곽은미 감독님도 자주 뵙고 싶다. 이 영화에서 좋은 연출의 힘을 깊게 느낄 수 있었다. 관람 전에는 여성 영화만 만들어 오셨다고 해서 살짝 우려스러운 마음이 있었는데, 뚜껑 열어보니 몇 달 전에 봤던 그 영화처럼 온 세상 남성을 모두 괴물로 그리려는 악의적 연출은 아예 없었고 오히려 어느 정도 균형점 지키려는 노력이 보였다.
우리말인데도 잘 안 들리는 지점에는 자막 깔아주는 배려도 인상적이었다.
1. 닻을 내리지 못하는 배 (어디에도 정착할 수 없는 운명)
배가 닻을 내리지 못하면 길을 잃은 채 세상에 휘말리게 된다. 어디에도 머무를 수 없는 이방인이 그렇고, 애플이 조명했던 Crazy Ones가 그렇다. 기존에 깔려있는 사회적 시선, 사회적 편견을 깨부시면 Crazy Ones처럼 게임 체인저가 되겠지만 그러지 못한다면 낙오자가 되겠지. 다르거나 독특하면 낙오되기 쉬운 게 만약 세상의 어떤 메커니즘 중 하나라면 많이 슬플 것 같다.
특권 계층의 시선에선 일반 소시민도 이방인이지 않을까? 학연·지연·혈연으로 쳐놓은 네트워크에 끼지 못하면 그 또한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 '그들만의 리그'가 너무 많은 것 같다. 학연·지연·혈연뿐만 아니라 재력으로 필터링하고, 인종으로 필터링하고, 외모로 필터링하고, 성적으로 필터링하고, 정치관으로 필터링한다. 단절 사회다. 단절 사회. 이런 구조에서는 초상류층을 제외하면 모든 사람이 사실상 이방인인 거 아닌가.
"여기서는 외국인보다 못하지"라는 한영 친구(귀화인)의 대사는 닻을 내리지 못하는 선원의 설움 같았다. 그건 평생을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살 수 없을 거라는 운명을 체념한 설움이기도 할 것이다.
머나먼 길을 찾아 여기에 꿈을 찾아 여기에, 괴롭고도 험한 이 길을 왔는데, 이 세상 어디가 숲인지 어디가 늪인지, 그 누구도 말을 않네 (조용필 - 꿈)
2. 촌지옥필유하적 (세상에 완벽한 사회가 어딨겠니?)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정말 좋은 영화라고 느낀 이유 중 하나가 사회를 촌지옥필유하적의 모양새로 그렸기 때문이다. 한국사회 복지를 상징하는 담당 경찰의 모습에서 생색내기 복지(허황된 꿈의 복지)가 보이기도 했지만, 도로무익이라도 진심으로 어떻게든 도와주려 하는 모습도 보인다(완전 도로무익은 아닌 게, 결국 한영은 경찰의 연락처명을 '감시자'에서 '임태구 경찰'로 바꾼다). 합쳐 보면 '그래, 세상에 완벽한 사회가 어딨겠니?'라는 탄식이 나오게 된다. 이렇듯 사회를 마냥 악하거나 모자라게 묘사하지 않아 정말 좋았다.
후반부에서 한영이 경찰의 손을 붙잡는 모습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인 것 같아 너무 슬펐다.
3. 최선을 다하면 정말 다 될까? (빌 게이츠 "주어진 삶에 적응하라")
'문득 떠오르는 현실을 바라보네. 다시 눈을 감아 내겐 과분한 꿈을 꾸었소' (박원 - 이방인)
한영은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녀의 최선은 누진취영이 될 뿐이다. 개인의 문제일까, 사회의 문제일까? 적어도 이 영화에서는 사회에 포커스를 둔다. 주어진 삶이라는 게 도대체 뭘까?
그 주어짐.. 편견 어린 시선과 낙인찍힌 사람은 그 인생을 평생 인정하고 감내하는 게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는 걸까? 아니면 그 주어진 삶을 깨고 나가는 게 본인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걸까?
4. 표현의 폭력성 (고의가 하니라 할지라도)
"이래서 탈북자들 쓰겠어?" (여행사 사장)
누가 봐도 끔찍한 표현이다. 해선 안될 말이지.
그러나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내뱉는다면?
마치 '기생충' 박사장의 코 막는 행동처럼 말이다.
극중에서 친구 다음으로 가장 한영에게 진심이던 그 경찰조차 말실수를 하고 만다.
고의가 아니라도 폭력적인 표현은 뱉었다면 스스로 바로잡고 반성해야 한다.
[여담]
- 2023 주목해야 할 디아스포라 영화
- 일자리와 싸우는 청년들의 이야기까지 번져 간다..
- 생존 위한 역사왜곡.. 하.. 누구를 탓해야 하나..
- 친구(오경화)는 재입북한 게 아니었을까?
- 그래도 한영은 특전으로 받은 집이 있잖아. 집도 크고 좋더라 (청년들은 내 집 마련이 쉽지 않다요..)
만약 자가 아닌 전월세 세입자였다면 이 소재로도 한 에피소드를 그렸겠지.
- 주의를 주지. 왜 원스트라이크제로 아웃시켜버리냐. 선배(이노아)!
- 가족이라는 굴레.. (한영의 기생충이 된 가족들)
- 믿을 수 있는 사람? 믿을 수 없는 사회..
힙합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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