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일본 평론가의 해설
일본에서 상당히 이름난 애니메이션 전문 평론가 후지츠 료타의 글입니다.
원문은 아래...
https://animeanime.jp/article/2023/08/03/79044.html
불친절한 작품의 맥을 짚어주는 좋은 글 같아요. 글이 좀 어려운 편이라 오역 있을까 걱정입니다.^^
<그대들은 어떻게 사는가> 제목이 그렇게 되어야만 했던 이유
[후지츠 료타의 아니메의 문V 제97화]
※이하 글에는 본 주제의 특성상 작품을 아직 못 본 분들에겐 ‘스포일러’가 될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읽을 때 주의하세요.
<그대들은 어떻게 사는가>는 단순한 스토리상에, 이 세계의 다양한 요소들을 모자이크처럼 흩뿌려놓은 작품이다. 때문에 각각 스케일이 다른 ‘대단히 사적인 디테일’과 ‘문명에 관한 고찰’이 함께 자리하고, ‘탄생과 죽음이 공존하는 에피소드’와 ‘섬뜩한 괴물(잉꼬)에게 잡아먹힐 수도 있는 공포’가 같은 테이블 위에 놓여있다.
하지만 흩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각 요소들은, 그렇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세계’라는 것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고, 그것을 하나의 규칙으로 해석해 버린다면, 그것은 단순한 우화(寓話)화에 지나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 ‘우화화’를 피해서 읽는 자세에 관해서는 주조 쇼헤이가 카뮈의 <페스트>를 해석한 <100분 de 명저>(100分de名著)에서 다룬 바 있다.
주조는 종종 <페스트>에 나오는 페스트를 나치 독일로 간주하고, 카뮈의 레지스탕스 경험이 반영됐다는 식으로 읽는 방식을 거론하면서 “그것은 아마도 왜곡된 해석일 겁니다.”라고 지적한다. “애당초 레지스탕스라는 영웅적인 주제를 그리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재앙이 인간을 덮치는 부조리함과 그 공포가 출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여러 재앙에 대한) 인식의 집약이, 예컨대 전쟁이고, 여기서는 페스트인 것이죠.”라고 했다.
“결과적으로 등장인물들의 행동이 레지스탕스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전쟁 중 카뮈의 레지스탕스 경험을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해 버리면, 그것은 단순한 우화화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주조는 여기서 <페스트>라는 작품을 ‘우화화’해버림으로써, 작품이 카뮈의 체험 속으로 축소되어 버리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작가가 체험한 것의 반영을 포함하면서도, 거기서 깊어진 사고 너머에 있는 작품을 다룰 때, 이 ‘우화화’의 욕망을 통제하지 않으면 작품을 폭넓게 펼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럼 우화화에 대한 욕구를 최대한 억제하면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이해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미 사람들이 지적했듯이 전체적인 구성은 (감독에게) 힌트를 주었다는 <잃어버린 것들의 책>(작가: 존 코널리)과 매우 흡사하다. 어머니의 죽음과 아버지의 재혼, 그리고 아버지와 재혼한 여성의 출산이라는 주인공을 둘러싼 환경, 거기에 주인공이 이세계(異世界)에 발을 들이고,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잃어버린 것들의 책’을 가진 왕을 찾아간다는 전개 등도,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와 공통점으로 느껴지는 부분이다.
애당초 모종의 만족스럽지 못한 감정을 가진 인간이 다른 세계로 여행을 떠나서, 어떠한 변화를 겪고 돌아오는 전개는 ‘떠났다가 돌아오는 이야기’라고 불리는 판타지의 전형적인 이야기 구성이다. <잃어버린 것들의 책>이 이 작품에 영감을 준 것은 틀림없지만, 원작이라기보다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영화를 낳기 위한 산파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상상해 본다.
영화는 전쟁이 시작되고 3년째 되는 해에 주인공 마히토의 어머니가 화재로 사망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1년 뒤, 마히토는 도쿄를 떠나 어머니의 고향 저택에서 지내게 된다. 그곳에서 마히토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아버지의 재혼 상대이자 어머니의 여동생인 나츠코였다. 나츠코는 이미 아버지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
저택 부지에는 폐쇄된 ‘탑’이 세워져 있다. 행방불명된 나츠코를 찾던 마히토는 수상쩍은 왜가리에게 이끌려서 그 ‘탑의 세계’로 발을 들이게 된다. 이 '탑의 세계'의 에피소드는 크게 세 파트로 나뉜다.
우선 첫 번째 파트는 어떤 섬에 오게 된 마히토가 펠리컨들의 공격을 받고 무덤의 문을 열어버리고, 선원 키리코가 그를 구해주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키리코는 물고기를 잡아서 그것을 그 세계에 사는 그림자 같은 사람들과 태어나기 전 영혼들(와라와라)에게 먹이는 일을 한다. 와라와라들은 물고기 내장을 먹으면 둥글게 부풀어서 하늘로 떠오르고, 현실 세계에서 다시 태어나게 된다. 한편 와라와라들은 펠리컨들의 먹잇감이 되기도 하는데, 태어나기 전에 잡아먹히는 경우도 많다. 마히토는 죽어가는 늙은 펠리컨한테서 물고기가 적고 섬도 없는 이 바다에서 와라와라를 잡아먹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여기서 그려지는 것은 ‘생명의 순환’과 그것이 어떤 인과관계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부조리’하다는 세계의 본질을 구현한 장소다. 이것을 통해 마히토 어머니의 죽음도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부조리 속에서 벌어졌다는 점(때문에 어머니의 죽음은 ‘공습으로 인한 화재’가 아닌 단순한 ‘화재’라는 형태로 표현되었다.)이 함축적으로 제시된다.
두 번째 파트는 불을 조종하는 소녀 히미를 따라서 행방불명된 나츠코를 찾아가는 에피소드다. 마히토는 해산실에 있는 나츠코와 만나는데, 그녀한테서 “(네가) 싫어.”라는 소리를 듣는 한편, 마히토는 그녀에게 처음으로 “어머니”라고 말한다. 여기서 이야기의 시작 부분에 그려진 마히토의 갈등이 마무리된다. 이전 에피소드가 ‘세계가 돌아가는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에 비해, 이 부분은 좀 더 섬세한 심리 변화를 표현한 파트여서, 이해하는 방식 또한 달라진다.
원래 마히토는 처음부터 나츠코에 대해 모종의 껄끄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엄마와 쏙 닮은 이모’가 ‘새엄마가 된다’는 것에 대한 생경함이며, 그녀가 임신 중이라는 사실이 그것을 더욱 강화한다. 자전거 택시 좌석에서 이미 변성기가 온 마히토의 손을 일부러 잡아서 임신한 배를 만지게 하는 나츠코의 거리낌 없는 행동도 마히토를 당황하게 만든다.
마히토는 ‘죽은 어머니를 잊을 수 없다.’는 감정 위에 어머니를 쏙 닮은 나츠코에 대한 ‘이성이라는 의식’과 ‘어머니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모순된 감정이 겹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입덧으로 몸져누운 나츠코가 마히토를 걱정하지만, 마히토가 그녀를 보러 가지 않는 것은 그러한 말 못할 감정이 그의 마음속에서 정리되지 않은 채 소용돌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마히토가 왜 굳이 나츠코를 원래의 세계로 데려오기 위해 행동하게 된 걸까. 이 전환점에서 등장한 것이 이 작품의 제목이 된 책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작가: 요시노 겐자부로)이다.
대낮에 마히토는 수상한 왜가리를 잡기 위해 활과 화살 만들기에 집중한다. 이때 마히토는 나츠코처럼 보이는 인물이 숲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목격한다. 하지만 그때는 그냥 바라보기만할 뿐이다. 그 장면과 저녁이 되어 나츠코의 실종으로 소란스러워지는 장면 사이에 마히토는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를 읽게 된다.
화살을 만들다가 책상 위에 놓여있던 책을 떨어뜨리는 마히토. 페이지가 펼쳐진 한 권의 책에는 1937년에 어머니가 언젠가 성장할 마히토에게 주려고 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그 책이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였다. 참고로 1937년은 그 책이 ‘일본소국민문고(日本少国民文庫)’ 총 16권의 마지막 책으로 출판된 해였다.
마히토는 그 책을 읽으며 눈물을 흘린다. 그 책의 내용 전반에 감동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 책을 읽어보면 아마도 마히토의 감정을 자극했을 것으로 상상되는 부분이 있다. 그 책은 15살 소년 코페르가 친구들과의 학교생활에서 느낀 점을 삼촌에게 이야기하고, 삼촌이 그에 대한 답을 노트에 적는 구성으로 되어 있다. ‘윤리’를 다루는 교양 교육을 위해 기획된 책으로, 삼촌의 노트는 코페르 및 독자에게 ‘사고방식’ 등을 쉽게 이야기해 주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 책 중반부에는 큰 에피소드가 나온다. 코페르의 친구가 건방지다는 이유로 상급생한테 붙들려 폭행당하게 된다. 다른 친구들은 그를 감싸기 위해 뛰쳐나가지만, 코페르는 겁에 질려서 그 모습을 지켜보기만 한다. 바로 직전에 상급생이 위협하면 옆에 같이 있어주겠다고 친구들에게 약속했음에도 말이다. 코페르는 깊은 후회감에 사로잡힌다. 이 사건에 대해 삼촌도 물론 조언을 해주지만, 특이하게도 여기서는 코페르의 어머니가 등장한다. 책 전체 가운데서 어머니가 큰 역할을 하는 건 여기뿐이다.
사건 다음 날부터 지독한 감기에 걸려 앓아누운 코페르에게 어머니는 그 사건을 알고서 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한다. 그녀가 여학교에 다녔을 때, 어떤 할머니가 무거운 짐을 들고 돌계단을 오르는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된다. 쉽사리 오르지 못하고 두세 계단을 오르다가 잠시 쉬는 할머니를 보고서 ‘도와드려야겠다.’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녀는 끝내 도와주지 않았다. 그 후회는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마음속에 남아 있고, 그 후회의 기억이 있기에, 자신은 마음속의 친절함을 솔직하게 행동으로 옮길 수 있게 되었고, 타인의 친절도 절실히 느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히토는 그 부분을 읽고서, 자신의 어머니가 말을 건넨 것처럼 느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눈물이 쏟아진 것이 아닐까 싶다. 마히토는 전학 첫날, 같은 반 아이와 몸싸움을 벌였다. 이후 그는 자신이 직접 돌을 들고 관자놀이 부근을 때려 심하게 자해한다. 이것은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기댈 곳이 없는, 온갖 조바심의 화살을 자신에게 돌린 결과일 것이다. 나츠코 등 집안사람들에게는 “넘어졌다.”며 엉터리 변명만 할 뿐이다. 나츠코는 입덧으로 몸져누운 상태에서도, 마히토의 머리 상처에 대해 “미안하다. 언니에게 할 말이 없어.”라며 자신의 책임처럼 느낀다. 하지만 마히토는 그런 나츠코를 찾아가려 하지 않고, 보러 가서도 쌀쌀 맞은 태도를 취한다.
그런 자신의 행동과 태도에 대해 어렴풋이 느꼈던 후회.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나오는 어머니의 말을 통해, 그것을 죽은 어머니한테서 듣게 된 것 같아서 마히토는 눈물을 흘린 것이다. 그래서 그 책을 읽은 뒤부터 마히토는 나츠코를 찾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이다. 이야기상으로도 왜가리가 “네 엄마는 살아있어.”라고 했던 거짓말이 일찌감치 탄로 나고, 나츠코를 찾는 것이 마히토의 동기가 되어 이야기가 진행된다.
나츠코는 탑의 세계에 있는 돌로 만들어진 해산실에 있었다. 마히토는 금기의 공간인 해산실에 들어가서 나츠코를 데리고 돌아가려고 시도한다. 여기서 나츠코가 마히토에게 “싫어.”라고 말한다. 그것은 나츠코의 진심이었을 것이다. 나츠코가 왜 ‘탑의 세계’에 있는지를 생각해보면, 그녀 역시도 ‘떠났다가 돌아오는 이야기’에 이끌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영화는 음악도 포함하여 마히토의 시선에 맞춰져 있기 때문에, 나츠코의 내면은 파악하기 어렵지만, 아들이 된 조카와의 관계도 힘들고, 남편은 일에 매달려 있어서 이야기를 나눌 상대가 되지 못하고, 거기다가 입덧으로 인한 컨디션 악화 등, 작품 속에 그려진 모습만 봐도 꽤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임을 알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억누르고 있던 ‘응어리진 마음’이 ‘싫어’라는 단어로 튀어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마히토에게는 위안의 말이 된다. 왜냐면 마히토가 나츠코에게 품고 있던 ‘응어리진 감정’ 역시 말로 표현한다면 ‘싫어’가 되었을 테니까 말이다. 이렇게 인간관계가 한번 정리가 되었기 때문에, 마히토는 솔직하게 ‘어머니’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이 장면에서 마히토가 나츠코를 데리고 돌아가지는 못하지만, 나츠코와 마히토의 드라마는 이후에 특별히 그려지지 않는다. 그 점을 고려하면 ‘싫어’라는 말에 ‘어머니’라고 대답한 것이 두 사람 간의 드라마의 목표 지점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표면적 차원에서의 마히토의 갈등은 해소된다. 그렇다면 이후에는 어떤 드라마가 남아 있는가, 그것은 ‘탑의 세계’의 주인인 큰할아버지와의 대면이다.
작품 속 설명에 따르면 메이지 유신 직전에 우주에서 내려온 돌이 탑의 원형이라고 한다. 이후 시간이 흐른 뒤 돌의 주변을 탑으로 덮은 것은 큰할아버지였다고 한다. 큰할아버지는 탑 속 자기 방에서 지내다가 자취를 감췄다고 한다. 큰할아버지가 탑 안에 들여온 잉꼬들이 진화하여 왕국을 형성하고 있다. 잉꼬들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개구리의 모습으로 그려진 ‘현대 회사원들’의 연장선상에 있는 캐릭터로 보인다. 그것은 부조리하면서도 생명의 본질에 가까운 곳에서 살아가는 펠리컨들과 대비된다.
큰할아버지는 ‘탑의 세계’에서 신적인 관리자로 살아간다. 돌을 쌓아 올려 세계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큰할아버지의 일이다. 잉꼬 대왕은 그에게 어느 정도 경의를 표하면서도 자신들에게 탑의 관리를 맡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애당초 큰할아버지는 ‘탑의 세계’에서 무엇을 하려고 했던 걸까? 그것은 작품 속에서 전혀 그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잉꼬들이 극도로 희화화된 ‘인간 사회’를 연기하는 것을 보면, 자신의 손으로 ‘근대화 사회’를 만들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상상이 가능하다. 그것은 큰할아버지가 살았던 시대가 아마도 메이지 시대이고, 러일전쟁으로 일본이 ‘근대국가’라는 증거를 세우려 했던 시대라는 점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독서광이었던 큰할아버지는 다른 세계에서 자신이 꿈꾸던 ‘근대 사회’를 구축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현실 세계에서 근대화된 일본이 패전을 맞이하는 것과 동시에, 근대화를 목표로 한 큰할아버지의 '탑의 세계'도 한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 이유는 화면에서 ‘잉꼬들(=인간)이 근시안적인 소비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라든지, ‘근대화를 표방하면서도 해산실 같은 전근대적 시스템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등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작품 속에서 가장 구체적인 힌트로 제시되는 것이 ‘악의(悪意)’의 존재다. 마히토가 큰할아버지와 대면하는 장면은 두 번 나온다.
첫 번째는 잉꼬들에게 사로잡힌 마히토의 꿈속이다. 여기서 큰할아버지는 자신이 쌓아올린 블록으로 세계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 일은 자신의 혈통만이 이어받을 수 있으니 마히토가 이으라고 다그친다. 하지만 마히토는 “그것은 나무가 아니야. 돌이야. 무덤과 같은 악의의 돌이야.”라며 거절한다. 여기서 갑자기 ‘무덤’ 이야기가 나온다. 이것은 영화 초반부에 마히토가 펠리컨들에게 공격당해서 들어가게 된 무덤을 말하는 것 같다. 그 문에는 “나를 배우는 자는 죽는다.”라고 적혀 있었다.
두 번째 만남에서 큰할아버지는 (아마도 첫 만남 때 마히토가 한 반론을 염두에 두고) ‘악의에 물들지 않은 돌’을 13개 갖추고, 그것을 3일에 하나씩 쌓아서 마히토의 탑을 세우라고 명령한다. 그러자 마히토가 이번에는 자기 머리의 상처를 보여주면서 “이 상처는 제 악의의 표시입니다. 저는 그 돌을 만질 수 없습니다. 나츠코 어머니와 함께 저의 세계로 돌아가겠습니다.”라고 선언한다.
큰할아버지와 마히토의 대립은 ‘악의’를 둘러싼 것이고, 그것은 ‘무덤’과 관련이 있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큰할아버지는 ‘악의’가 없다는 것에 집착하고 있다. 결론부터 적자면 여기서 ‘악의’라고 불리는 것은 ‘그림자’가 아닐까 싶다.
※어슐러 K. 르귄은 이렇게 썼다. “그림자는 우리 마음의 이면에 있는, 의식적 자아의 어두운 형제입니다.”, “그림자는 단순한 악이 아닙니다. 보다 열등한 것, 원시적이며, 볼품없고, 동물적이며, 유치하지만, 한편으로 큰 힘을 가졌고, 생기 넘치고, 자발적인 것입니다. (생략) 그림자 없는 인간은 무(無)에 지나지 않습니다.”(밤의 언어: 판타지, SF 그리고 글쓰기에 관하여)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많은 영향을 준 작가. <게드전기> 원작자.)
큰할아버지는 ‘탑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자신의 세계를 만들기 시작했을 때, 자신의 그림자를 ‘죽이고’, ‘매장’한 것은 아닐까. 그것이 그 무덤이고 ‘그림자’를 배우는 것은 위험하다는 자신의 말로 봉인한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렇게 쉽게 ‘그림자’를 죽일 수는 없다. 큰할아버지가 인간인 이상, 그림자는 거기에 붙어있을 것이다. 그래서 큰할아버지가 매일 손을 대는 ‘돌 블록’에는 무덤의 돌처럼 ‘악의’가 깃들게 된 것이 아닐까.
하지만 큰할아버지는 마히토가 나타난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마히토는 ‘큰할아버지의 그림자’를 물려받을 수 없다고 말하는데, 그림자를 잘라낸 큰할아버지는 ‘그림자’ 그 자체가 문제라고 이해한 것이다. 그래서 ‘악의 없는 돌’을 다시 준비하게 된다.
그래서 다시금 마히토는 ‘자신의 악의=그림자는 자신과 함께 있고, 그것을 잘라낼 수는 없다.’라고 선언하면서 ‘악의 없는 돌’을 만지는 것조차 거부하는 것이다. 이렇게 ‘그림자’를 부정하면서도 근대화를 시도하는 큰할아버지의 자세야말로 ‘탑의 세계’를 불균형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
‘탑의 세계’에서 가장 원시적인 곳에 있는 무덤. 그리고 ‘자기 자신의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의식된 악의=그림자’. 그 서로 다른 2개의 에피소드가 최종적으로 ‘악의=그림자’라는 주제로 통합되는 형태로, 3번째 파트인 큰할아버지와의 에피소드가 이야기되는 것이다.
“아이는 자기 자신의 그림자라면 그것을 향해 나아갈 수 있고, 그것을 통제하거나, 그것을 길잡이로 삼는 걸 배울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 사회의 일원으로서 힘과 책임감을 몸에 익혔을 때, 세상에서 벌어지는 악과 직면하지 않으면 안 될 때에도 절망하여 기력을 잃거나, 자기 눈에 보이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 사람이 될 수도 있겠죠. 우리 모두가 견뎌내야만 하는 불의와 슬픔과 고통, 그리고 모든 것의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마지막 그림자와 마주할 때에도”(밤의 언어: 판타지, SF 그리고 글쓰기에 관하여)
책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는 사회과학적 사고방식을 통해 윤리를 설파했다. 영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판타지의 언어를 사용해 ‘그림자’와 함께 사는 것을 설파하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 큰할아버지가 꿈꿨던 ‘근대화’의 탑은 무너지고, 일본 역시 패전을 맞이한다. 그 뒤에 남겨지게 될 폐허의 황무지야말로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혼돈의 현대와 겹쳐진다. 마치 <모노노케 히메>가 무로마치 시대 후기의 사회 변혁을 현대와 겹쳐 보이게끔 그린 것처럼(<모노노케 히메>의 엔드 크레딧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미래를 암시하기 위해 검은 배경이었던 것처럼, 이번 작품의 엔드 크레딧은 파란색 배경으로 진행된다.). 그렇기에 이 작품의 제목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gol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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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자료 감사드립니다.
해석이 감독 의도와 다를 수도 있고요
와 읽으면서 감탄했습니다. 그동안 무덤에대해서 의아해 했는데... 깔끔하게 잘 해석해주었네요. 좋은정보에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런 해석 또한 하나의 의미부여라고 생각되면서 감독 자기자신도 무슨 의미로 만들었는지 모르는 부분이 있다고 하는거 보면 이 영화의 옳은 관람방법은 영화를 보고 내가 느낀 감정과 해석이 곧 나한테는 정답이다가 될 거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