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급리뷰] 그어살 (★★) "스토리텔링과 비주얼텔링의 불일치가 과대평가를 무너뜨리는 순간"
(지금 컴퓨터가 고장이 나서 이미지가 없습니다. 고치면 이미지는 그때 첨부해 볼게요.)
간단히 요약하면 그어살은 미야자키 후기 작품인 하울의 움직이는 성, 벼랑 위의 포뇨, 바람이 분다의 단점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이야기와 주제의 불일치는 하울, 장면 사이의 떨어지는 연결성은 포뇨, 자전적인 이야기에 얽매인 것은 바람이 분다에 가깝죠. 이 때문에 센치행까지의 지브리를 기대하고 간다면 낭패를 볼 가능성이 높습니다. 저 3개랑 취향이 맞는 분들께 추천합니다.
사실 미야자키 감독은 '하울의 움직이는 성'부터 스토리텔링과 비주얼텔링이 불일치하기 시작했습니다. 센치행 이후의 작품들을 보면 그림을 통해 '보여주고 싶은 것', 각본을 통해 '들려주고 싶은 것', 주제를 통해 '전달하고 싶은 것'이 따로 노는 감이 있어요. 정확히는 이 때부터 평화나 공존 등 후세에 전달하고 싶은 주제를 작품에 끼워넣는 데 몰두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보니 하울은 사랑 이야기, 반전(反戰) 이야기, 영화 속 이야기가 전부 따로 노는 사태가 발생했는데 그어살에서 이 문제가 극도로 심화되었습니다.
우선 그어살이 그리 환상적이라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영화의 초반부는 지나치게 태평양 전쟁이라는 현실과 결부되어 있어요.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환상의 세계일 텐데 이쪽으로 들어서기까지 너무 길면서도 무거운 시간이 걸립니다. 게다가 이쪽 파트는 전쟁 피해자인 마히토의 어머니와 전쟁으로 돈을 버는 마히토의 아버지만 중점적으로 묘사되어서 이 장면들은 딱히 주제를 전달하지 않는 '임시적으로 빈' 공간이 되었습니다. 마히토가 최대한 빨리 왜가리를 따라 탑으로 들어갔으면 하는 마음이였네요.
비주얼적으로도 분석해 보면 분명히 작화는 좋은데 왠지 모르게 지브리의 전작들보다 인상이 얕다고 느끼게 됩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시퀀스마다 공간이 따로 노는 감이 강한 데다, '와라와라'를 제외하면 이 세계의 것이 아니라는 인상을 받기도 어렵기 때문일 겁니다. 앵무가 있다고요? 앵무는 인간을 잡아먹는 생물이라는 설정이 붙은 데다 디자인적으로 꽤나 단순하면서도 멍청...해 보여서 심리적으로 그러한 인상을 주지 못합니다.
후반부의 스토리텔링에도 문제가 있는데, 하울에서도 드러난 '후반부에 몰아서 주제 전하기'가 이번에도 등장합니다.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주제를 녹이는 게 아니라, 일단 그려 놓을 거 다 그리고 후반부에 작위적으로 주제를 풀기 시작한다는 것이죠.
산실에 들어가기 전까지의 이야기들은 산실에 들어가고 인물들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순간 모두 무의미해집니다. 그러면 이 인물들의 관계가 일관된 주제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세계의 주인을 만나면서 아까의 이야기랑 상관이 없는 새로운 주제를 또 풀어 버리거든요. 돌이켜 보면 산실에서 드러난 인물들의 관계는 세계의 주인과 대화하여 정립되는 주제와 연관성을 찾기 어려울 뿐더러, 둘 중에 하나가 없어도 나머지 하나가 그다지 무리 없이 성립됩니다. 심지어 두 개의 주제는 키리코와 겪었던 모험 이야기를 빼 버려도 각자 나름대로 성립이 돼요.
그리고 가장 문제가 되었던 건 역시 앵무 대왕입니다. 이 인물이 초반부와 후반부를 모두 망쳤습니다. 일단 앵무 대왕은 너무 노골적으로 히틀러와 도조 히데키를 모티브로 삼고 있습니다. 거장이라 불리는 인물의 알레고리가 고작 이 정도라니요. 모노노케 히메에서 보았던 깊은 스토리텔링을 통한 주제의식 전달은 사라지고 오직 대놓고 '얘 전쟁 추축국 지도자예요'라고 묘사하는 인물을 툭 던지는 선에서 끝나요. 인간을 잡아먹던 앵무는 그 순간부터 노골적으로 독일+일본 군인들이 됩니다.
그러면 어쨌든 이 인물을 통해 반전(反戰) 메시지를 전달해야겠죠? 세계를 앵무가 지도하겠다는 일념 아래 탑을 부수며 세계를 멸망시키는 어리석음으로요. 그런데 정작 이 메시지는 아까 얘기했던 '임시적으로 빈' 초반부의 이야기와 따로 놉니다. 분명히 초반부에는 일본의 전쟁 피해자들과 전쟁 사업가들이 묘사되었어요. 하지만 후반부에 앵무 대왕이 세계를 멸망시켰는데, 정작 현실의 전쟁 사업가들은 돈을 벌고 있죠. 또한 반대쪽 세계에서 일본이 멸망시킨 세계와 현실 세계에서 미국에게 죽은 피해자는 위치상으로 모든 면에서 일치하지 않아, '앵무 대왕의 어리석음으로 일본 국민들이 고통받았다'는 연결고리를 작품 내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전쟁 사업가와 앵무 대왕 중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으며 앵무들도 여전히 잘 살고 있거든요.
물론 미야자키 감독이 우익적 사상과는 정반대되는 인물이라는 건 잘 알고 있죠. 이 작품도 그럴 의도가 아니였다는 건 미야자키의 작품관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모두 알 겁니다. 그런데 작품 외적 정보를 모두 배제하고, 작품 내적 정보로만 해석한다면 일본은 일방적인 전쟁 피해자라는 상당히 무서운 해석으로도 연결지을 수 있습니다. 그만큼 이번 작품의 주제 전달 능력이 떨어졌다는 의미이죠. 그래서 이번 작품을 우익적 해석으로 받아들인 관객들에게 '바람이 분다' 때와는 달리 별다른 반박을 하지 못한 겁니다. 의도가 어찌 되었든 관객들이 그렇게 받아들였고, 작품 내적으로 한정해서 심각한 곡해가 아니라면 작품은 그렇게 되어 버립니다. 영화는 결국 관객들을 위한 것이니까요.
결론적으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자전적 이야기'라는 이름값에 의해 상당히 과대평가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전적 이야기라는 측면을 빼고 보면 모든 요소가 따로 놀거든요. 이미 거장의 자전적 이야기이지만 그것을 빼고 보아도 매력적인 '파벨만스'를 접한 적이 있기에 더욱 부각되는 측면입니다. 물론 40년을 했으면 자전적 이야기 하나 만들 수 있다는 건 인정하지만, 그 이전에 작품에서 다루고 싶었던 게 자서전 외에도 너무 많았던 게 아닐까요?
영화에도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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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하울의 움직이는 성'도 개봉 당시에 평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가 나중에 추억 보정 좀 껴서 과대평가된 사례이긴 합니다. '벼랑 위의 포뇨'도 그렇고... 물론 명작이라 평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미야자키 작품 중에서 제일 까이는 쪽을 꼽는다면 보통 저 둘이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