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헌팅 (1963) 최고의 공포영화. 스포일러 있음.
하나도 폭력적인 장면이나 특수효과 안나오면서도 카메라기술로만 평생 잊을 수 없는 공포를 선사하는
영화의 최고봉이다.
가령 예를 들면,
이 징면 하나만으로도 주인공 엘레노아가 주변사람들에게 신경을 쓰고 불안정해 하는 정신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다.
영화니 다른 거 다 떠나서, 이 사진 한 장만 보고서도 엘레노아의 성격이나 상황 등에 대해 짐작 가능하다.
거대한 방에 귀신이 안 돌아다닌다. 하지만 이렇게 어둠 속에 드러난 물건들을 서서히 클로즈업해가는 것만으로도
공포를 준다. 방안에 있는 물건들을 이것저것 차례로 이렇게 클로즈업해간다.
그리고 희미한 빛을 조금씩 움직여가면서 그림자를 아주 섬세하게 움직여간다. 그러면 빛과 어둠이 살아서 서서하
움직이는 것을 보는 듯한 효과를 준다. 거기에다가 엘레노아의 공포에 질린 숨소리와 표정 연기를 더하면,
공포 완성이다. 무서워서 소리 지를 공포는 아니지만, 서서히 뼛속으로 스며드는 기분 나쁜 공포다.
그리고 사선으로 기울어진 각도들. 분명히 고전적으로 잘 짜여진 아름다운 화면들인데, 어딘지 불안하고 공포스럽다.
그 비결은 불안정한 사선 각도다.
카메라기술만으로 이런 공포를 선사할 수 있을 줄 예전엔 미처 몰랐다.
귀신 안 나온다. 이 영화의 유일한 초현실적 장면은 이거다.
자는데 아무도 없는 복도를 누가 쾅쾅 걸어다닌다. 그리고 문을 이렇게 민다. 그리고 문을 크게 쾅쾅쾅 두드린다.
이게 다다. 하지만 귀신 나오는 대저택에서 찍은 홍상수영화처럼 흘러가다가 갑자기 이런 장면이 나오니
공포는 극대화된다. 거기에다가 여배우들이 얼마나 연기를 잘 하는지 공포영화의 명장면이 나왔다.
복도에서 뭔가 걸어다니는 거다. 그게 뭐가 무섭냐고? 한번 보면 소름끼친다. 미지의 뭔가가 쾅쾅 복도에서 발소리를 내고 내 방의 문을 쾅쾅 두드린다. 하지만 진짜 무서운 것은, 엘레노아가 방의 문을 열고 복도로 뛰어나가는 것이다.
그 미지의 뭔가가 금방이라도 나올 수 있을 것 같은데.
하지만 역시 복도에서 귀신은 나오지 않는다. 대신 왜곡된 형태들, 사선의 구도, 급작스러운 클로즈업의 활용 등으로
짜릿한 공포를 선사한다.
이 영화가 정말 무서운 것은, 주인공 엘레노아의 내면의 황폐함이다.
침대에 누운 어머니 병수발을 해 온 엘레노아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갈 데도 없는
빈털털이가 된다. 아는 사람도 없고 집도 없고 몸도 마음도 지쳤다.
여동생의 집에 얹혀사는데, 동생이 구박을 넘어서 학대를 한다. 어머니 유산은 모두 차지하고.
엘레노아는 참다가 못해 그 집을 나온다.
믿는 구석이 있어서다.
마크웨이박사라는 초자연현상 연구가가 엘레노아를 귀신 들린 저택 연구에 초대한 것이다.
엘레노아는 어려서 귀신을 본 적 있다. 마크웨이박사는 엘레노아를 영능력자로 생각해
귀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연구에 고용한 것이다.
세상에 자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니! 엘레노아는 즐겁다.
거기에다가 마크웨이박사라는 사람은, 잘 생기고 지위도 높고 부자이고 인격도 훌륭하다.
갈 곳 없고 의지할 곳 없는 엘레노아는 마크웨이박사에게 금새 짝사랑을 품는다.
마크웨이박사는 이미 기혼에다가 엘레노아에게 정중할 뿐 아무 사심이 없는데 말이다.
그리고 영능력자 둘에 대저택 상속자 한명이 모인다. "귀신이라고? 헤헤 재미있겠는데." 젊고 까부는
늘 쾌활한 청년이다. 이 청년이 "귀신이 어디 있어요?" 포지션이다. (물론 나갈 때는 공포에 질려 "이런 집은
다 부수고 그 위에 소금을 뿌려야 해"하고 중얼거리지만 말이다.)
엘레노아의 황폐하고 불쌍한 정신세계와 이 불안정한 대저택이 겹친다.
위에 보인 이미지들은 이런 황폐한 정신세계를 가진 엘레노아의 눈으로 바라본 것들이다.
그래서 불안정한 것이다. 불안정한 귀신 들린 저택의 풍경이자 동시에 엘레노아의 불안정하고 비참한 정서적
풍경이다. 아주 고차원이다.
하나 있던 여동생의 집조차 나와버렸으니, 엘레노아는 이제 갈 곳 없다. 뭐 어디든 직장을 잡고 살면 된다고?
평생 심술궂은 어머니 병수발 드느라 지식도 기술도 없고 생활반경도 좁았다.
마음은 소극적으로 변하고 늘 두렵다. 자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도 없어서 어디 소속감도 못 느낀다. 누가 자길
원해주고 사랑해주고 어디 소속감을 느끼고 싶다. 그런데 잘 생긴 상류층 신사 마크웨이박사가 나타난 것이다.
엘레노아는 마크웨이박사에게 짝사랑을 품고 작은 행복을 느낀다.
귀신 들린 집이 무섭지만, 처음으로 소속감을 주는 사람들이 생겼다. 짝사랑의 대상도 만나서
혼자 마음을 애태운다. 하지만 관객들은 처음부터 안다. 마크웨이박사가 엘레노아를 원할 리 없고,
엘레노아는 상처 입고 귀신 들린 집을 떠나 어디 쓰러져 죽을 운명이라는 것을.
이 영화의 내용은 이것이다.
로버트 와이즈감독이 이 과정을 어찌나 가슴 아프고 생생하게 그렸던지, 관객들은 감정이입을 금방 한다.
엘레노아가 세상에 다시 없을 슬픈 표정으로 마크웨이박사의 얼굴에 천천히 손을 대자, 마크웨이박사가 정중하지만
단호한 표정으로 얼굴을 돌리는 장면은 정말 애절하고 슬프다.
온영혼의 상처를 이 한 장면에 쏟아붓는 명장면이다.
그런가 하면 이 영화는 퀴어영화다. 세련되고 도시적이고 지적인 테오도라는 늘 빈정댄다. 특히 엘레노아에게
심술궂다. 다른 사람들은 의아해하지만, 같은 여자인 엘레노아는 즉각 알아챈다.
테오도라는 레즈비안이고, 엘레노아에게 관심이 있는 것이다. 엘레노아는 테오도라를 경멸한다.
테오도라도 상처를 입기는 마찬가지다. 초자연현상이 나타나자, 강인해 보이던 테오도라는 엘레노아에게 의존한다.
"내가 네가 누군지 모를 줄 알아? 너는 자연의 실수야." 엘레노아가 차갑게 말하자, 테오도라의 단단한 외면이 깨지고 연약한 모습이 나타난다. 하지만, 귀신이 나타나고 테오도라가 흔들리자, 남을 돌보는 것이 적성에 맞는지
"정말 아기같아"하면서 테오도라를 돌봐준다.
이 두 여인이 영화의 핵심이다. 다른 남자들은 곁가지다.
엘레노아는 점점 더 귀신 들린 집에 애착을 가진다. "이 집은 날 원해." 그녀는 기쁜 듯이 말한다.
귀신 들린 집이라도 좋다. 내가 죽어도 좋다. 난생 처음으로 자길 원하는 대상을 만났다. 엘레노아는 점점 더 신기가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무당처럼 행동한다.
마크웨이박사는 위험하다고 판단한다. '저렇게까지 몰입하는 것은 위험해.'
그리고 엘레노아를 해고한다. 차를 태워서 저택밖으로 보낸다.
테오도라는 같은 여자로서 엘레노아를 이해한다. 여길 나가면 그녀는 죽어야 한다고. 세상 어디에도 갈 곳도
없다고.
하지만 그녀라고 뭐 뾰족한 수가 없다. 마크웨이박사가 엘레노아의 미래까지 책임질 의무도 없다.
그리고 파국이 일어난다.
호러적 요소를 빼더라도 애절하고 슬픈 (짝사랑) 로맨스물이다. 마크웨이박사와 엘레노아의 짝사랑 그리고
테오도라와 엘레노아의 짝사랑이다. 여기에 카메라기술만 이용한 극강의 공포가 결합한다. 귀신 들린 집의
불안정한 공포는 엘레노아 내면의 공포이기도 하다.
자기가 소속감을 느끼는 귀신 들린 대저택을 떠나, 아무도 기다리는 이 없는 세상으로 나가야 하는
엘레노아의 절망을 관객들도 생생하게 느낀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나 사운드 어브 뮤직같은 로맨스물 걸작, 나는 살고 싶다같은 리얼리즘 걸작, 지구 최후의 날같은 SF걸작, 바디 스내쳐 그리고 캣피플의 저주같은 호러물 걸작, 본 투 킬과 셋업같은 느와르 걸작, 위대한 앰버슨가에 감독으로 비공식 참가하기도 한 로버트 와이즈감독이니 이 정도 영화를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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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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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봐도 대단한거 같아요
잘봤습니다. 1999년 리메이크도 볼만했는데... 오리지널에 비하면 형편 없다고 하더라고요.^^
근데 캐릭터 이름이 레오노라가 맞나요? 엘레노아랑 따로따로 적으셨는데.... 뭔가 이상해서 찾아보니 레오노라는 없는 걸로 나와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