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리뷰_ 30년만에 돌아온 화답

스포있어요.
홍콩 느와르의 걸작 첩혈쌍웅(1989)이 아시아권을 휩쓸고 서양에 소개되었을때, 서구의 비평가와 관객들은 두 주인공이 보여준 신분을 넘어서서 죽음마저 불사하는 저 끈끈한 '의리'라는 감정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서양이라고 우정이나 의리라는 미덕이 없었겠습니다만, 홍콩 느와르 특유의 의리는 오랫동안 아시아권에서 통용되어온 이른바 협(俠)의 논리의 현대적 계승에 가깝습니다. 즉 아시아 문화권에서 태어나 각종 무협물이나 조폭물, 김보성(...)등을 보면서 성장한 우리같은 사람들에게 의리란 매우 자연스런 감정이겠지만 대부(1972)나 스콜세지 감독의 서늘한 느와르들을 보고 자란 서구 관객에게는 그게 그렇지 않았던 겁니다.
그러다보니 일부 서구 비평가와 관객들은 이들의 의리를 두고 동성애적 감정으로 해석하곤 했습니다. 예, 너무나도 명백한 오역이죠. (애초에 첩혈쌍웅에는 비록 짐짝 취급이긴해도 엽천문이 맡은 공식 히로인이 존재한다구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이 당시만 해도 서구에 있어 홍콩 영화란 극소수의 특정 인종과 매니아들만 보는, 이른바 게토(Ghetto) 영화였으니까요.(그 게토 영화에 심취해서 단골 손님들에게 영웅본색 등의 홍콩 느와르를 강추하던 어느 비디오 가게 점원은 이후 세계적인 영화감독이 됐다는 전설이...)
2017년에 개봉한 영화 불한당: 나쁜놈들의 세상(이하 불한당)은 당시 서구 비평가의 오해에 대한 화답같은 영화입니다. 이 영화를 보고 있자면 마치 감독이 개구진 웃음을 지으면서 "그때 댁들이 원한게 이런 거 아니였나요? 짜잔~ 그래서 한번 만들어 봤습니다. 어때요?" 이라고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지경이에요.
이 영화는 나온지도 꽤 됐고 비록 극장에서의 흥행은 실패했을 망정, 평이 꽤 좋았기에 많은 분들이 이미 찾아 보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굳이 숟가락을 하나 더 올릴 필요는 없을 것 같고 인상적인 점 몇 개만 간단히 짚어보려고 합니다.
분명 이 영화는 느와르물이면서 동시에 퀴어 영화입니다. 주제는 괴물의 사랑이죠. 세상의 어떤 법과 제도로도 제어가 불가능한 천상천하 유아독존급 괴물이 사랑에 빠져 자멸하는 이야기입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하필 사랑에 빠진게 남자였다는 점 뿐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퀴어적 요소를 차용하면서도 마치 주인공들은 이 방면으로는 아무 관심도, 지식도 없는 맹탕들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극중 아무도 자기자신들을 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막상 저같은 관객들이 보기엔 영락없이 퀴어물이란 말이죠. 이런 캐릭터들의 자각없음과 어수룩함이 퀴어물 특유의 정서와 맞물리면서 아이러니한 재미를 줍니다.
예를 들어 영화 초반부에 재호(설경구 분)가 현수(임시완 분)의 출소를 마중나옵니다. 자동차 뒷자석에서 현수는 백인 여성과 뒹굴고 있지만 재호는 신경쓰지 않고 앞만 보고 운전합니다. 그런 재호가 정말 성질을 내는 건 후반부에 현수가 동료형사와 만나다가 재호에게 들키는 장면에서죠. 현수가 '저 새끼가 나 오줌누는 거 훔쳐봤다'라고 거짓말로 둘러대자 재호는 죽일듯이 달려들어 그 형사를 패버립니다. 재호에게 있어 여자는 아무런 위협도 뭣도 아니었지만, 같은 남자에게 연인(?)을 빼앗길 것 같은 일말의 위협을 느끼자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게 포인트입니다.
현수에 빠져 결국 모든 일을 망쳐가는 재호에게 부두목 병갑(김희원 분)이 정신차리라며 울면서 사정사정하는 장면도 그렇습니다. 이 장면에서 성별만 바꾸면 영락없이 '젊고 아름다운 여자에 빠져 집안을 내친 남편에게 조강지처가 바지가랑이를 붙잡으며 눈물로 호소하는' 우리나라 드라마에서 흔히 보던 바로 그 장면입니다. 분명 슬프고 참혹한 장면인데 이렇게 살짝 비틀어서 보면 뭔가 유머러스하기까지 합니다.
결론적으로 불한당은 최근에 나온 느와르 영화 중 단연 최고의 반열에 들만한 작품입니다. 불한당은 한동안 우리나라 영화계를 점령했던 남자배우들이 우글우글 등장해 땀과 피를 튀기며 패싸움을 벌이는, 이른바 '알탕영화' 특유의 끈쩍끈쩍하고 촌스러우며 비루한 느낌이 훨씬 덜합니다. 이 영화는 느와르 장르 특유의 잔혹함과 폭력성을 오롯이 담아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상외로 뒷맛이 깔끔하고 청량합니다. 몇몇 장면들은 감탄이 나올 정도로 세련된 비주얼을 보여주며, 이런 영화의 가장 큰 문제점인 대사도 비속어와 욕설의 비중을 줄이고 제법 맛깔스럽게 쓰여져 있습니다. (극 도입부의 병갑과 승필의 대화씬를 보면서 마치 스콜세지나 타란티노 영화의 한 장면 같다고 생각한 건 저뿐인가요?) 이러한 장점들은 이 영화가 느와르의 영역에 퀴어 멜로의 문법을 끌어오면서, 동시에 K-느와르 특유의 부글대며 끓어넘치던 마초성을 어느 정도 덜어내면서 얻어진 것입니다. 얼핏 어울리지 않을 것 같던 이 두 장르의 조합이 예상외로 좋은 시너지를 낸거죠.
누군가는 느와르란 비에 젖은 뒷골목의 풍경을 얼마나 잘 담아내는가에 따라 평가가 갈린다고 했다죠. 그런 의미에서 불한당은 비에 젖은 아스팔트의 생생한 내음에 퀴어영화 특유의 멜랑콜리한 세련미를 더한 근사한 혼성 느와르입니다.
PS.
1. 감독도 이 영화 제작때 첩혈쌍웅에서 모티브를 얻어왔다고 직접 말했다는군요. 나무위키에 그렇게 적혀있으니, 뭐 사실이겠죠.
2.초반 도입부에서 김희원이 김성오를 가차없이 죽여버리는데, 이 두 배우는 과거 아저씨(2010)에서 형제로 나와 나름 애틋한 형제애를 보여줬던 적이 있습니다. 노린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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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후기들 읽어보니까 제가 영화를 잘 못봤구나 느꼈었어요
이 영화 덕분에 킹메이커 볼때 좀 편해서 좋았습니다 ㅋㅋ
불한당 좋아하는 팬들.. 불한당원들과 영화제에서 봤는데 열기가 대단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