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콘크리트 유토피아] 아무도 없는 쓸쓸한 나의 아파트지만 객석은 꽉꽉 차기를
지진으로 추측되는 거대 재난이 일어나 세상이 뒤집힌 서울
그 가운데 유일하게 제 모양을 유지하고 선 '황궁 아파트' 1개동을 배경으로
사람들의 생존기를 보여주는 영화가 [콘크리트 유토피아]입니다.
영화는 재난의 묘사에 제법 공을 들이지만 길게 보여주지 않습니다.
이야기의 핵심은 재난이 아니라 그로 인해 벌어진 포스트 아포칼립스 적 상황 속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고 행동하며 변해가는가를 묘사하는 것이니까요.
사회적 사고실험이고 군상극이며 아파트란 배경 답게 풍자도 담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미스트]가 생각나기도 하는데 [미스트]가 짧은 시간, 자원이 풍부한 마트 안이란 상황에서
크툴루적 코스믹호러라는 외부의 위험을 통해 인물들을 자극하는 방식을 선택했다면
이 영화는 그런 돈 드는 설정 필요 없이그냥 '자원' 그 자체의 부족을 갈등원인으로 삼습니다.
아마도 겨울이라는 시간적 배경으로 비롯되는 추위가 거기에 한 몫 거들고요.
그러니까 기본적인 '의식주'에서 없애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한 하나를 제외한 두 가지를 재료 삼는 거죠.
식음료의 부족과 구난의 희망이 사라진 순간 사람들을 부추기는 것은 생존욕구와 이기심이죠
그나마 현대인으로서 일말의 양심을 '주민회의'라는 형식으로 유지해보려 하지만
굳이 이후 전개를 보지 않더라도 그것이 간접적 살인을 위한 모의라는 건 분명해 보입니다.
각본의 영리함은 이런 회의장면에서 빛을 발하는데 표면으로 크게 갈등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이면의 불편함을 자극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자신이라면 어떻게 할지 고민하게 만들어요.
처음 아파트의 외부인을 내보내는 결정을 위한 투표에서 어떤 돌을 넣는지 보여주지 않는 식으로 말이죠.
(이때에 바둑돌이라는 오브제가 이후 이병헌의 전사에도 반복되는 것 역시 인상적입니다)
시간이 흐르고 상황이 점점 나빠지며 아파트의 개인들 그리고 집단이 서서히 변해가는 모습도
사건과 대사, 미술, 의상까지 공들여 자연스럽게 보여주는데요 게으른 각본이었다면 이쯤에서
뭔가 극단적인 설정들을 집어넣으려다 망쳐버릴 법도 하지만 이 영화는 무리하지 않습니다.
조금은 건조하다 싶을 정도로 전개하면서 텐션을 유지하는 길을 선택하죠.
잠시 외부의 위험으로 눈길을 돌리는 듯 하면서 아파트 내부의 위험도 서서히 싹을 틔웁니다.
그리고 영화의 진주인공이랄 수 있는 이병헌이란 인물의 변화를 통해 클라이맥스로 향하죠.
돌이켜보면 황궁아파트 사람들의 최후는 그들의 아파트가 멀쩡하게 서있었기에 비롯됩니다.
세상이 망했는데 당장의 추위를 피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이점도 없는 자신들의 '집'에 매여버린 거죠
그렇게 추동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바로 이병헌이지만 애초에 그를 부추겨 자리에 올린 것은 주민들입니다.
'아파트는 주민의 것!'이라 외치는 순간 가능성은 제한되고 세계로부터의 고립을 선택한 셈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에게 아파트는 평생을 바쳐 빚까지 지면서 얻어낸 나의 가장 큰 자산이니까요.
돈의 가치가 사라져도 부동산의 가치는 유효하다는 착각이 이들을 고립시키고 고사시킵니다.
세상이 뒤집어졌는데도 기존의 가치에 몰입되어 사고를 변환하지 못한 것이고.
이것은 사각으로 반듯하게 세워올린 모양을 유지한 황궁아파트를 닮았습니다.
결국 자신의 부동산을 지키려던 이들은 그것을 계급화시키고 성골진골 놀이를 하던 중에
스스로 타락하고 갈등하며 외부의 위험에 대한 면역을 상실하고 파국으로 치닫습니다.
그들이 바퀴벌레라 부르던 외부인들의 습격이 성골진골 놀이에서 내쳐진 부상자(약자)의
배신으로 말미암았다는 점 역시 시사하는 면이 있겠지요.
난리통 속에서 아파트보다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박보영이 구조의 손길에 이끌려 간 곳의
미술적 설정은 그래서 흥미롭습니다.
층고가 높아서 모양이 잘 빠졌다며 긍정하는 황궁보다 좋아보이는 공동체의 공간은
역시나 아파트이지만 옆으로 나자빠진 곳이죠
(화려한 인테리어와 넓은 평수를 보아하니 재난 전엔 부촌이었을 장소)
이전의 상식을 90도 기울인 채로 수용한 그들은 보다 안정적 생존 방식을 택한 듯 보입니다.
모양을 그대로 유지할 필요도 뒤집힌 세상처럼 180도 바뀔 필요도 없었고 조금만 생각을 바꿨다면,
아파트라는 물성이 아닌 생면부지 사람과 주먹밥 하나 나눠먹는 태도를 취했다면 달라졌을
황궁아파트 주민들이 가지 않았던 길인 거죠.
각본도 연출도 연기도 모두 훌륭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개봉전 시사에서 나왔던 호평들이 이해가 가는 결과물이고
여름 텐트폴4대장들 중에서 영화적으로 가장 뛰어난 성취물이랄 수 있겠습니다.
다만, 흥행에 있어서는 조금 불안한 면이 있습니다.
영웅도 희망도 없는 가운데, 관객의 내면을 성찰하게 하는 불편함만 있으니
가볍게 극장을 찾는 여름관객들의 반응을 끌어내긴 여간 쉽지 않아 보입니다.
마치 작년의 [헤어질 결심]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네요.
그만큼 완성도 높은 작품이라는 건 분명합니다.
추천인 8
댓글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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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해석과 평입니다.
심지어 식량을 건물 '밖'에서 '배급'하는 모습까지 깨알같이 넣어두었죠.
포스트 아포칼립스 자체가 이미 모든게 박살난 상태라는 설정인지라 엔딩은 매우 허무할 가능성이 높은데 이렇게 주제와 의미를 함축하는 장면이 나올거라 상상 못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