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인 일본 역대 최고 걸작 10

1위. 동경 이야기(1953) - 오즈 야스지로: 일본 영화의 아버지이자 영원한 무의식인 오즈 야스지로의 최고 걸작이자 대표작. 이 작품은 끊임없이 변하는 세상의 이치에 의해 스스로 사라져야만 하는 늙은 노부부의 일상을 서글프지만 차분하게 묘사한다. 하지만 작품은 단순히 과거 속으로 사라져가는 노부부 세대의 안타까움에 머물지 않고 유일하게 그들을 진심으로 위로하는 며느리의 모습을 통해 ‘그럼에도 불구하고’에 방점을 찍은 다음, 삶의 한 귀퉁이에서 과거 세대만의 인장을 조용히 찍어낸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 해서 작품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한 묶음으로 통합한다. 아주 미묘하게 말이다.

2위. 우게츠 이야기(1953) - 미조구치 겐지: 오즈 야스지로에 버금가는 취향에 따라서는 오히려 그보다 더 높게 평가해도 무방할 정도의 압도적인 연출력을 지닌 거장 미조구치 겐지의 최고 걸작!(이라고 적기는 했지만 ‘오하루의 인생’, ‘산쇼다유’가 최고라고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이 작품은 혼란스러운 전쟁에서 한 몫 잡고 출세하려는 두 남자의 허망한 욕망을 통해 자본주의와 폭력적인 군사 문화를 굉장히 비판한다. 신랄하게 말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안으로 욕망 때문에 자신들을 내친 남자들을 끝까지 기다린 부인을 통해 부와 권력에 눈이 먼 가부장이 아닌 기족을 생각하는 따뜻한 어머니를 그 자리에 위치시킨다.

3위. 교사형(1968) - 오시마 나기사: 일본 누벨바그의 상징과도 같은 오시마 나가시의 대표작. 이 작품은 한국인 소년 r의 교수형이 실패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문제가 시작된다. 교수형 실패로 소년 r의 기억이 사라져 교수형을 시킬 명분이 사라진 것이다. 이때부터 작품은 소년 r이 저지른 범죄를 다시 각인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한다. 동시에 그렇게 함으로서 일본이 한국에 저지른 제국주의 범죄도 동시에 드러난다. 그리고 작품은 이 일련의 과정을 브레이트를 비롯한 각종 실험적인 방식으로 풀어낸다. 이처럼 이 작품은 한 이름 모를 한국인의 교수형 과정을 통해 국가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제국주의 범죄를 아주 통렬하게 비판한다.

4위. 부운(1955) - 나루세 미키오: 공식적으로 일본 3대 거장은 오즈 야스지로, 미조구치 겐지, 구로사와 아키라이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여기에 나루세 미키오를 추가해 일본 4대 거장으로 칭하기도 한다. 그만큼 나로세 미키오는 우리에게는 생소한 감독이다. 그리고 ‘부운’은 그런 그의 대표작이다. 이 작품은 일본 멜로드라마의 정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훌륭한 연출력이 돋보이는 걸작이다. 내용은 흔하디흔한 멜로드라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자만 제목인 ‘부운’ 즉 떠다니는 구름처럼 너무도 유려하고 아름답게 이야기를 재현한다. 한마디로 일본 멜로 영화의 거장이라는 칭호가 전혀 어색하지 않게 만드는 걸작이다.

5위. 할복(1962) - 고바야시 마사키: 괴담과 더불어 고바야시 마사키를 대표하는 최고 걸작. 이 작품은 한 몰락한 사무라이의 할복을 통해 당시 귀족 세력의 위선과 인습을 아주 통렬하게 비판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삶에 대한 지독할 정도의 애착을 보여줌으로 해서 죽음을 찬미하는 일본 사무라이 문화 전반에 일침을 가한다. 그렇게 작품은 일본의 전통적인 사무라이 계급의 위선과 허위를 비판하면서 구로사와 아키라가 정립한 일본 사무라이 영화 전통에 반기를 든다. 가히 구로사와 아키라의 사무라이 영화와 진검 승부를 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작품인 것이다. 빛으로서의 구로사와 아키라, 어둠으로서의 고바야시 마사키.

6위. 복수는 나의 것(1979) - 이마무라 쇼헤이: 이마무라 쇼헤이의 대표작. 이마무라 쇼헤이 영화를 본다는 것은 아마도 갓 잡은 싱싱하게 살아있는 물고기를 아무런 조리 없이 그냥 그 자리에서 바로 생으로 잡아먹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 정도로 이마무라 쇼헤이의 영화는 날 것 그대로의 정제되지 않은 비린내가 난다. 그리고 그 역한 냄새가 극한으로 드러나는 작품이 바로 이 작품이다. 자신의 아내와 사통하는 아버지를 차마 죽이지 못 하고 대신 엉뚱한 사람들을 죽이는 한 연쇄 살인범의 뒤틀린 행각을 통해 인간이 막장으로 추락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를 아주 살벌하게 묘사한다. 한마디로 이 작품은 일본 영화 역사상 가장 구역질나는 걸작이다.

7위 아키라(1988) - 오토모 가츠히로: 일본 애니메이션 역사상 최고 걸작이자 극한의 상상력이 돋보이는 걸작. 일본은 애니메이션 천국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이 분야에 관한한 전 세계적인 위상을 자랑한다. 그리고 그것이 총집결되어 완성된 작품이 바로 ‘아키라’이다. 덕분에 이 작품은 지금 봐도 감탄을 자아내는 압도적인 연출력과 작화를 자랑한다. 하지만 이 작품의 진정한 가치는 거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아무런 변화 없이 오직 자신들의 기득권만을 수호하는 부패한 기성세대가 이룩한 세계를 초능력을 통해 남김없이 다 박살내는 저항 정신이다. 일본 영화를 다 통틀어서 보수적인 기성 세계를 이처럼 다 깡그리 박살내는 작품이 있었던가.

8위. 천국과 지옥(1963) - 구로사와 아키라: ‘천국과 지옥’? 아마 이 순위를 보는 사람들은 손을 꼽으며 구로사와 아키라가 언제 등장할까, 고대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등장한 감독의 작품이 ‘천국과 지옥’이라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을 납득하지 못 할 것이다. 싫든 좋든 공인된 감독의 최고 걸작은 전기 ‘라쇼몽’, ‘7인의 사무라이’, 후기 ‘카게무샤’, ‘란’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이 작품은 선택한 것은 첫째는 개인적으로 하드보일드 느와르, 형사 물을 굉장히 좋아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재미와 완성도면에서 감독의 4대 걸작에 전혀 뒤지지 않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 작품을 선택한 것은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그것이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엄청난 완성도를 자랑하기에 이 선택이 전혀 후회되지 않다. 오히려 기껍다.

9위. 피와 뼈(2004) - 최양일: 괴물 감독 최양일과 괴물 배우 기타노 다케시가 뭉쳐 괴물 아버지 김준평을 다룬 괴물 같은 걸작 피와 뼈. 세상에는 나쁜 아버지를 다룬 작품들이 많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이 작품은 가히 나쁜 아버지의 최종 두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극악함을 과시한다.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모든 종류의 악행을 처음부터 끝까지 어떠한 미화 없이 그대로 다 드러낸 이 작품은 가부장제에서 자행된 폭력성을 극한으로 묘사한다. 그렇게 단순히 나쁜 아버지를 넘어 괴물 아버지가 되어 버린 한 가부장을 통해 작품은 인간 수컷이 오직 본능적인 무의식적인 욕망만이 남았을 때 얼마나 끔찍한 존재가 되는 지를 충격적으로 보여준다.

10위. 하나비(1997) - 기타노 다케시: ‘소나티네’와 더불어 기타노 다케시의 최고 걸작. 기타노 다케시는 괴이한 감독이다. 아니 괴이하다기보다는 족보가 없는 감독이다. 그는 원래 코미디언 출신으로서 어떻게 하다 보니 우연히 감독이 된 좀 어처구니없는 경우에 속한다. 그러다 보니 기타노 다케시의 작품은 기존 주류 감독 영화에서는 볼 수 없는 그만의 독창적인 인장들이 작품 곳곳이 박혀있다. 그리고 그것이 정점에 이른 작품이 ‘하나비’이다. 이 작품은 감독 특유의 엇박자 유머와 그로 인해 생기는 부조리한 웃음, 그리고 생과 사를 하나로 뭉뚱그린 다음 멀리서 관조하는 그만의 철학이 완성형으로 제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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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형' 저도 인상적으로 봤네요. (오시마 나기사 본문에 살짝 이름 오타가 ^^;)

8-90년대 뉴웨이브 세대도 괜찮은데...
1위는 안전한 선택이면서도 부인할 수 없는 목록이기도 합니다ㅎ
평론가나 감독들은 오즈와 나루세 영화 중 저 두편은 피해가려 한다는 얘길 들었어요..왜? 말 안해도 최고인데 굳이 나까지 이런식 ㅋ
80~90년대까지도 나쁘지는 않았죠. 문제는 그 이후에 너무 심하다 싶을 정도로 작품의 질이 떨어져서 지금은 일부 거장 빼고는 아예 안 봅니다. 그리고 저는 다행스럽게도 오즈를 나루세보다 더 좋아해서 선택하는데 별 걱정이 없었습니다. 하하하

오히려 8-90년대 세대는 스튜디오 몰락 후 자주적으로 자신들 색깔을 만들어 간 인재들이라 전 이부분에서 높은 점수를 주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다들 어디로 갔는지....

저는 젊었을 때 뜨겁게 타오르는 것도 좋지만 끝까지 살아남아 아주 오랫동안 자신만의 영화 세계를 구축한 거장들을 더 좋아하는지라 그들의 조락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그나마 구로사와 기요시가 최근작으로 칸 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 부분을 수상하는 등 건재를 과시하며 거장으로 살아남을 것 같기는 하지만 그 외의 아오야마 신지, 츠카모토 신야 그 이외의 감독들은 부진해서 슬픕니다. 특히 아오야마 신지! 유레카라는 엄청난 걸작을 만들며 거장으로 성장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지지부진해서 가슴이 답답합니다.

동경이야기는 절대 빠지지 않네요 ㅎㅎ 빨리 봐야겠어요 ㅎㅎ

저는 딱 3작품만 봤네요;;
저의 부족함을 반성하며.. 좋은 영화들 꼭 찾아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역시 동경이야기를 벗어날 순 없군요. 원체 걸작이라....
개인적으로는 기타노다케시 감독의 <소나티네>가 더 좋긴 했습니다.
하나비 부산에서 보고 관객과의 대화에서 본 기타노다케시 감독이 아직도 뇌리에 선명하네요.
안보신분 놓치지 마시길.천국과 지옥은 원작 읽어보니 영화가 진짜 걸작이구나 싶더군요.

우게츠 이야기.. NHK에서 처음 보고 흑백 영상에 빠져들었던 기억 나네요..^^

우게츠 이야기.... 키노의 마지막호 표지를 장식한 영화죠. 미조구치 겐지 감독의 영화중 <오 하루의 일생>을 제일 좋아하긴 하지만 <우게츠 이야기>또한 못지않게 좋아해서...저는 제가 제일 좋아했던 극장인 시네마떼끄 부산에서 봤었죠,

일본영화로도 하셨군요. 이번 리스트도 엄청 마음에 듭니다. 제가 좋아하는 영화들이 많네요

와, 교사형에 대한 얘기는 처음 들어보는데 엄청 흥미롭네요. 저 당시에 저런 내용을 담을수 있었다니
저는 구로사와 아키라랑 고바야시 마사키의 광팬이라서 그들의 관한 영화랑 서적들은 미친듯이 파고 든 적이 있는데....
근데 요즘 일본 영화계의 현실을 보면 참 한숨만 나오죠..... 그 많던 명장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는지........
한국인이라서 그런지 작품의 주제가 더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피와 뼈> 이미지를 보니 그 때는 잘 몰랐지만
지금은 다 아는 얼굴들이 많이 보이네요 ㅋ

과거의 일본 작품들을 보면 참으로 신기해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고요. 도대체 저 시대에 저런 배경의 영화가 어떻게 나올 수가 있지? 라는 생각을 하는 작품들이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