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트 도터] 간략후기
배우 매기 질렌할의 감독 데뷔작인 영화 <로스트 도터>를 개봉 전 시사회로 미리 보았습니다.
작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하고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색상, 여우주연상, 여우조연상 등 3개 부문 후보에 오르며
작품성을 인정받은 이 영화는 모성의 신화가 꿈꾸고 욕망하는 여성에게 한평생 떠안겨 온 불안과 두려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다양한 모습으로 '엄마'라는 타이틀을 지닌 과거와 현재의 여성들이 교차하는 가운데 펼쳐지는 이 심리극은,
인간이라면 당연스레 여겨 온 모성의 환상이 실은 인간에게 얼마나 당연하지 않은 것이었는지를 차분하게 고발합니다.
중년의 여교수 레다(올리비아 콜맨)가 그리스의 해변 휴양지로 홀로 휴가를 떠나옵니다.
친절한 관리인 라일(에드 해리스)이 케어해주는 숙소는 긴 휴가 기간 내 집처럼 지내기 더없이 좋고,
비치하우스의 젊은 알바생 윌(폴 메스칼)이 살뜰하게 챙겨주는 해변가는 달콤한 고독을 만끽하게 안성맞춤입니다.
해변 사람들이라면 다 아는 한 무리의 가족이 휴양을 와 레다가 즐기던 고요를 사정없이 깨뜨리긴 하지만요.
그러던 차에 레다의 눈에 띈 한 사람이 있으니, 그녀는 어린 딸아이를 데리고 있는 젊은 여자 니나(다코타 존슨)입니다.
자주 해변에서 마주치던 그들은 어느날 니나의 딸이 사라지는 사건을 계기로 인연을 맺게 됩니다.
니나를 바라보는 레다의 눈빛을 애틋하면서도 동시에 불안한데, 무엇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친 것일까요.
추억인지 상처인지, 부대끼며 딸들을 키웠던 엄마의 시간인지, 딸들을 두고 집을 나온 여자의 시간인지.
영화는 현재의 레다와 젊은 시절의 레다(제시 버클리)를 오가며, 그 위태로운 마음의 기원을 되짚어 갑니다.
영화를 보면서 계속 궁금해지게 되는 것은 레다가 과거에 엄마로서 어떤 삶을 살아왔는가 입니다.
대체 어떤 삶을 살아왔기에 니나를 보면서 단지 젊은 날의 자신에 대한 회상에 머물지 않고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히는지,
그 정도로 요동치는 감정이라면 레다가 분명 젊은 시절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을까 지레 짐작하게 되죠.
그 진실을 쫓아가는 심리 스릴러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에는 드러나는 진실의 충격파가 그리 세지 않습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는 당연한데, 레다가 행한 것은 자신이나 타인의 삶을 파괴시킬 만큼의 잘못이 아닌 당연한 욕망이었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젊은 엄마의 모습을 계속 좇는 현재의 레다와 엄마이면서 동시에 꿈을 지닌 여자의 삶을 좇았던 과거의 레다를 교차시키며
가뜩이나 지독한데 심지어 일시적이지도 않고 반평생 이상 그녀를 유령처럼 따라 다녀온, 모성에 대한 염증 혹은 애착을 추적합니다.
영화가 그리는 레다의 지난 삶은 '엄마의 삶'이 아니라 '엄마가 된 여자의 삶'에 가깝습니다.
헤드폰을 쓰고 일에 몰두하느라 아이들의 울음소리를 듣지 못하는 모습, 아이들의 성화에 거칠게 화를 내는 모습,
아이들이 바로 옆에 있음에도 욕망을 솔직하게 갈구하는 모습 등 흔한 창작물 속 엄마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죠.
행여나 <케빈에 대하여> 같은 영화가 떠오를 수도 있지만, 이 영화가 그리는 엄마의 초상은 그러나 그렇게 극단적이지 않습니다.
레다는 아이들을 사랑하고 너무나 소중히 여기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꿈과 욕망을 누그러뜨릴 수는 없을 따름입니다.
그러나 불안한 내면을 부여잡고 있는 현재의 레다는 그런 과거의 자신에 대해 응어리진 마음을 놓지 못한 듯 합니다.
왜 그런가 생각해보면, '해변가의 이방인'으로 존재하고 있는 현재의 레다에게서 그 단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신 외에 다른 손님이 없을 때만 해도 고요한 고독을 즐기는 그녀의 모습은 평온하고 여유롭기 이를 데 없었지만,
인근에 저택에 있는 대가족이 휴양지를 찾아오는 순간 그녀는 고립된 이방인으로서 불안한 입지에 놓입니다.
가족들끼리 어울리게 자리 좀 비켜달라는 요청에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사양하겠다'고 밝히거나,
극장 안에서 시끄럽게 소란을 피우는 청년들에게 소리치며 항의하는 그녀의 모습은 여행객으로서 엄연히 납득할 만한 행동입니다.
하지만 여러 관광객들이 모여든 휴양지라기보다 한 대가족의 단골 별장에 가까워 보이는 그곳에서 이런 그녀의 행동은 환영받지 못하죠.
마치 이곳 분위기가 원래 이런 식인 걸 모르고 센스 없이 하나하나 딴지를 거는 부적응자처럼 말입니다.
옳고 그름, 합당함과 부당함에 상관없이 공동체 사회에서 강요되는 역할에 떠밀리는 개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부분인데,
이건 아마도 꿈꾸고 욕망하는 당연한 인간의 모습을 공동체 속에서 죄처럼 떠안고 살아온 레다의 과거와도 맞닿는 점이기도 할 것입니다.
이렇듯 <로스트 도터>가 보여주는 강요된 모성의 비애는 그로 인해 어떤 중요한 것이 파괴되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럼에도 공동체는 순탄하게 굴러가기에, 흔들리는 건 그저 개인이기에 더욱 크게 느껴집니다.
그렇게 흔들리는 내면을 부당하게 껴안은 과거와 현재의 엄마들을 연기하는 세 주역 배우들의 연기 호흡이 매우 조화롭습니다.
교수로서 바라던 바를 이루었음에도 완전히 떨치지 못한 모성의 강박에 위태로워 하는 현재 레다 역의 올리비아 콜맨은
태연하고 꼿꼿해 보이는 겉모습 너머에 숨기고 있는 불안과 두려움을 본능적으로 그려내며 과연 감탄을 자아냅니다.
'나쁜 엄마'가 된 보통 여성이 지나왔을 지난한 역사의 여파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연기로 시종일관 마음에 동요를 일으킵니다.
한편 젊은 시절의 레다를 연기한 제시 버클리는 한창 격동기였을 때의 요동치는 내면을 대담하고도 침착하게 그려냅니다.
포기할 수 없는 꿈과 아이들을 향한 사랑 사이에서의 번민을 섬세하게 연기하며 인물에 설득력을 부여합니다.
현재 레다의 관심 대상으로서 엄마로서의 시험에 오르는 또 다른 여성인 니나 역의 다코타 존슨 역시
여성으로서의 욕망과 엄마로서의 의무감 사이에서 초조해 하는 심리를 안정적으로 표현해냅니다.
<로스트 도터>의 전개는 마땅한 해소 지점 없이 시종일관 지속되는 인물의 불안과 두려움을 따라가는 만큼 편치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 도달하는 답은 새삼 명료하니, 바로 '모성과 여성성과 인간성은 동의어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딸들을 떠나오니 기분이 어땠냐'는 질문에 레다는 '너무 좋았다'고 말하면서도 눈물을 짓습니다.
이런 레다의 모습을 통해 영화는 인간으로서 '디폴트값'으로 품을 만한 성장과 성취의 욕구에
죄책감을 짊어지우는, 희생과 헌신이 '디폴트값'인 모성 신화가 과연 인간에게 합당한지 질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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