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찔끔 스포] '헤어질 결심' 간단 리뷰
1. '헤어질 결심'의 멀티플렉스 시사회에 응모한다던 여자친구가 "박찬욱 감독의 작품 중 최애영화 3편을 넣어야 된다"라고 하길래 나는 "그렇다면 '달은...해가 꾸는 꿈'과 '3인조'를 넣어봐"라고 제안했다. 박찬욱 감독이 데뷔 후 만든 두 편의 장편영화로 관객 반응이 그리 좋았던 작품은 아니다. 두 작품은 각각 1992년 1997년에 만들어진 영화로 당시 박찬욱은 갓 서른살이 됐거나 30대 중반이 됐을 때다. 정확한 배경은 알지 못했지만, 초보감독에게 제대로 된 투자자가 나서지도 않았을 것이며 박찬욱 감독 역시 골수 씨네필에서 벗어나지 못한 감독이었다. 실제로 예전에 봤던 두 작품의 기억을 떠올려보자면 지금의 매끄럽고 여유있는 박찬욱 영화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만약 '박찬욱 감독의 작품 중 최애영화'에 '달은...해가 꾸는 꿈'이나 '3인조'를 넣을 수 있다면 그는 박찬욱 감독의 찐팬이거나 도른자,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치기 어린 시절의 박찬욱 감독 이야기를 꺼낸 것은 '헤어질 결심' 때문이다. 감히 이런 말이 어울릴지 모르겠는데, '헤어질 결심'은 이제 환갑을 목전에 둔 박찬욱 감독이 또 한 번 진화했음을 증명한 작품이다.
2. '헤어질 결심'은 제작단계서부터 화제가 된 작품이다. "박찬욱 감독이 멜로영화를 찍는대"라는 말은 마치 "손흥민이 야구한대"처럼 이상하게 들린다. 그런데 정말 박찬욱 감독이 멜로영화를 찍는다고 한다. 그런데 시놉시스와 관련 정보가 공개되면서 "그럼 그렇지"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형사 혜준(박해일)이 낙사 사건의 변사자 기도수(유승목)의 중국인 아내 송서래(탕웨이)를 조사하던 중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이다. 형사와 미모의 사건 관계자와 사랑은, 과거 하드보일드 탐정물에서 자주 보던 설정이다. 지독한 영화광이었던 박찬욱이 하드보일드 탐정물에 대한 애착도 당연히 있었으리라. '헤어질 결심'은 히치콕의 범죄 스릴러 영화('싸이코'는 제외하고)들이 가장 보편적으로 떠오르지만, 탐정/경찰의 수사권력을 가진 남자를 위기에 빠뜨리는 팜므파탈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20세기 미국 하드보일드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다만 박찬욱 감독은 여기에 멜로를 담아 스릴러를 희석시켜버렸고 한국적인 상황을 추가해 '이상함'을 이끌어냈다. '헤어질 결심'은 박찬욱 감독이 고집한 스타일이 어떻게 성숙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3. '헤어질 결심'에는 몇 가지 이상한 포인트가 있다. 이는 영화광에게는 익숙한 이야기를 낯설게 해서 관객이 흥미를 갖도록 하기 위함이다. 첫 번째는 송서래가 중국인이라는 사실이다. 이 이야기는 형사와 미망인의 사랑이야기다. 여기서 미망인은 한국인이어도 이야기에 큰 문제는 없다. 그러나 송서래는 중국인이다. 그것도 밀입국한 중국인으로 변사자 기도수는 출입국사무소 직원이다. 송서래는 밀입국부터 시작해 이미 중국에서도 사연을 가지고 있다. 철저하게 이야기를 현실감없게 만든다. 그리고 중국인 송서래와 한국인 장혜준의 대화는 부자연스럽다(심지어 서래의 어떤 대사는 관객에게도 잘 들리지 않는다. 다른 영화였다면 "대사가 안들린다", "서래의 대사는 한글자막이 필요하다"고 반박할 수 있지만, '헤어질 결심'은 실제 서래와 대화하는 기분이 들어서 그것조차 필요없어 보인다). 어눌한 한국말과 중국어, 구글식 번역을 하는 통역기의 남자 목소리가 교차된다. 부자연스런 대화들은 몇 개의 부자연스런 문장을 만든다(구글번역기 생각하면 된다). 부자연스런 문장은 혜준과 서래가 언어 이상의 교감을 해야 하는 숙제를 주고, 문장이 더 특별해지도록 만든다.
4. 이것은 혜준과 서래의 주변인과 대화에서도 드러난다. 혜준은 원자력발전소 다니는 아내 정안(이정현)과 주말부부다.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주말마다 만나서 섹스를 하지만, 의무적인 관계다. 혜준과 정안 사이에는 언젠가 터질 것 같은 균열이 있다. 그것은 안방 귀퉁이의 곰팡이처럼 불편하고 찝찝하다. 심지어 균열은 이상한 오해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서래 역시 새로운 남편 호신(박용우)과 대화가 부자연스럽다. 정확한 한국어로 문자를 보내는 중국인 서래와 달리 한국인 호신은 문자메시지에 오타가 작렬한다. 언어가 통하는 사람과 관계가 부자연스럽지만, 언어 이상의 교감을 한 혜준과 서래는 자연스럽게 감정을 주고 받는다. 여기서 언어란 정확히 표현하자면 '대화'다. 이 영화에서는 곳곳에 '대화'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부자연스런 관계는 대화가 통하지만, 교감하는 관계에서는 대화가 부자연스럽다. 어눌한 문장과 낯선 상황이 이어지고, 그것은 두 사람을 더 특별한 관계로 만든다.
5. 또 부자연스러운 것은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TV드라마와 영화다. 어떤 사정인지 몰라도 영화 속 TV화면으로 등장하는 드라마와 영화를, 박찬욱 감독은 직접 찍었다(저작권 문제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다. 그리고 박찬욱 감독이 아니라 조연출이 찍었을 수도 있다). 발연기 배우들이 출연한 작품도 아니고(심지어 배우 고민시가 출연한다), 무려 박찬욱 감독의 영화에 들어간 장면이지만, 이 영상들은 어설퍼보인다. 여기에 TV에서 자주 본 방송인 김신영이 비중있는 조연으로 출연하는 것도 영화를 낯설게 만든다. 박찬욱 감독의 '낯설게 하는 연출'이 특별한 것은 아니다. 그는 영화 내내 기성영화에서 볼 수 없는 자신만의 연출 스타일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전에는 낯선 상황을 낯설게 연출해서 관객이 낯선 감정을 느꼈다면, 이번에는 낯선 요소들을 곳곳에 배치하기까지 한다. 정말 최선을 다해서 관객과 영화의 거리를 벌려버린다. 보통 이런 경우라면 관객이 영화 속 상황을 더 객관적으로 보도록 하는 게 목적인데 '헤어질 결심'은 그 이상을 노리게 한다.
6. 앞서 언급한대로 '헤어질 결심'은 멜로영화다. "내가 미결사건이 되면 당신이 나를 평생 바라볼 거라 생각했어요"라는 대사는 얼마나 애절한가. 멜로영화의 핵심은 두 주인공의 사랑이야기다. 최근에 본 이상일 감독의 영화 '유랑의 달'도 세상 모두가 등진 채 두 사람만 남아버린 사랑이야기다. '가장 비싸게 주고 만든 멜로영화'인 '타이타닉'도 세상 모두가 등진 채 두 사람(의 감정)만 남는 사랑이야기다. 정통 멜로영화는 주변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함께 사는 것보다 사랑하는 두 사람만 남았을 때 더 애절하다. '헤어질 결심'이 낯설어지는 모든 상황은 영화 속 모든 요소들을 멀리하고 두 주인공만 남게 하기 위함이다. 처음부터 혜준과 서래 사이에는 얽힌 관계가 많다. 혜준의 동료형사부터 정안, 호신까지. '헤어질 결심'은 영화의 모든 익숙한 것과 멀어지고 두 사람의 관계만 남았을 때 비로소 감정이 완성되고 그 감정이 관객에게 전달된다. '헤어질 결심'은 멜로영화가 맞다. 그것도 아주 잘 찍은 멜로영화다.
7. '헤어질 결심'은 공간마저도 낯설다. 먼저 '이포'라는 도시의 특징도 이 영화의 지향점을 대변한다. 이포는 해안도시이며 원자력발전소가 위치해있다. 안개가 자주 끼는 곳이고 보양식으로 쓰는 자라를 양식한다. 경북의 어느 도시를 모티브로 한 것 같은데 정확히는 모르겠다. 이 도시의 특이점은 '안개'다(마침 정훈희의 노래 '안개'도 중요하게 쓰인다). 안개는 사물을 자세하게 보는 걸 방해한다. 마치 혜준이 서래라는 안개에 씌여 사물을 제대로 분간 못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와 동시에 안개에 뒤덮힌 공간은 익숙한 실체를 제대로 보지 못하도록 한다. 실체가 낯설어지는 공간에 있으면 어서 벗어나고 싶다. 혜준도 서래라는 안개로부터 벗어나고 싶었지만, 자꾸 그것이 발목을 잡는다. '안개'의 가사에도 "돌아서면 가로막는 낮은 목소리/바람이여 안개를 걷어가다오"라는 말이 있다. 안개처럼 흐리지만 머물러있는 상대방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벗어나지 못하는 감정을 노래하고 있다. 이 안개낀 도시에서 완성된 두 사람의 관계('사랑'이 아니라 '관계')는 습한 도시에 핀 곰팡이처럼 짙게 마음 한켠에 자리잡는다.
8. 호미산의 디자인도 낯설다. 이 공간은 마치 낙사 사고가 일어나라고 만들어 놓은 곳 같다. 실제로 존재했다면 당연히 입산을 금지했을 것 같다. 그리고 사건의 실체가 드러났을 때도 "지나치게 복잡하다"는 인상을 준다. 즉, 현실과 동떨어진 방법이 등장한다. 서래의 남편들이 죽는 방법이 대체로 이렇다. 완전범죄를 지향하고 있지만, 결국 혜준에게 모두 들키고 지나치게 복잡하기까지 하다. '추리영화'의 뉘앙스를 찾기에도 관객을 사건으로 초대하지 않는다(앞서 언급한대로 이 영화는 관객을 밀어내고 있다). 호미산의 낯선 디자인은 '미드소마'에서 할아버지가 뛰어내리던 바위를 연상시킨다. 죽음을 대단히 가까이 두고 있고 죽음으로부터 익숙해지도록 만든다. '헤어질 결심'은 모든 것이 낯설지만, 죽음만큼은 익숙해진다. ...사실 그게 익숙해지면 곤란하다. 이것 역시 영화가 철저하게 두 사람만 남기겠다는 굳은 의지를 보여준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헤어질 결심'은 아주 잘 찍은 멜로영화가 맞다.
9. '헤어질 결심'은 근래 보기 드문 수준의 우아하고 매력적인 멜로영화다. 그러나 여기에는 박찬욱 감독 특유의 인장도 찍혀있다. 부자연스러움에서 나오는 유머러스한 상황들이 있고 꽤나 한국적인 설정들도 등장한다. '박찬욱식 부자연스런 개그'가 좋았던 관객이라면 '헤어질 결심'은 특히 좋아할만 하다. 여기에 장면전환이라던지 공간전환도 박찬욱스럽다. 사건을 복기하는 화자를 사건 안으로 초대해 같은 프레임 안에 두거나 현재와 과거 사이에 편집의 벽을 없애버린다. 그리고 녹음파일을 돌려볼 때 회상장면을 터치하는 손이라던지, 시체의 시점이 담긴 숏도 재미있다. '헤어질 결심'은 '박찬욱의 멜로영화'라는 독특한 포지션에 있다. 그러나 이 말에는 엄연히 '박찬욱'이라는 단어도 들어가는 만큼 박찬욱스러운 편집도 여러 차례 등장한다.
10. 결론: 칸 영화제 기자회견이나 이전의 인터뷰 당시에 의아했던 게 있다. 왜 사람들이 박찬욱을 '잔인하고 야한 영화 찍는 감독'으로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박찬욱을 '쎈 영화 전문감독'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대신 '영화보기의 은밀한 매력, 비디오드롬(現 '박찬욱의 오마주')'부터 그의 영화취향을 챙겨봤던 입장에서, 박찬욱은 지독한 영화광이다. 한국영화의 세 거목이자 친구들인 박찬욱, 봉준호, 김지운 감독 중에서도 박찬욱 감독은 지독하게 영화를 좋아했다(그건 '달은...해가 꾸는 꿈'을 봐도 알 수 있다. 무려 장 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를 오마주하는 영화다). '헤어질 결심'은 전작들보다 더 '영화광 박찬욱'의 기호가 고스란히 반영됐다. 그러면서 자신만의 역량으로 영화광의 기호를 진화시켰다. 영화광의 영화에 절대적인 창작은 없다. 쿠엔틴 타란티노나 류승완 모두 어디서 본 것 같은 영화를 자기 식대로 진화시켜서 새로운 창작물을 만들어낸다. 박찬욱은 영화광의 역량을 총동원해 '헤어질 결심'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영화는 이전의 박찬욱 영화보다 더 진화했고 지적이다(그리고 재미있다). 환갑 다 돼가는 중견감독의 발전을 보니 절로 숙연해진다.
추신1) (극 중 캐릭터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박정민과 오가인(정하담)의 관계는 마치 혜준과 서래의 관계에 대한 복선과 같다. 그리고 박정민과 수완(고경표)의 대면은 '응답하라 1988'이 떠오른다. ...그때도 박정민은 특별출연이었구나.
추신2) 분명 에로씬은 없다. 그러나 이상하게 야하게 느껴지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은 주로 서래의 '구강'과 관련이 있다. 구강상피세포를 채취하는 장면이나 양치하는 장면, 담배 피우는 장면, 방수밴드에 물을 묻혀서 입으로 불어보는 장면 등이다. '박찬욱의 오마주'를 읽어본 관객이라면 알겠지만, 박찬욱 감독은 영화를 볼 때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에 많이 바탕을 둔 편이다. 당연히 '구강기'라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 다만 구강을 드러내는 캐릭터는 서래이고 그것을 바라보는 자는 관객과 혜준이다. (일단 관객의 위치는 배제하고) 혜준은 아내 정안과 의무방어전을 치를 정도로 성에 대한 의지가 없다. 이건 혜준과 정안의 베드씬에서도 나온다. 그런 그의 시선에서 서래의 구강을 자꾸 보여주는 것부터 '리셋된 성욕'을 보여주는 것과 같았으리라. 그리고 영화를 보는 관객도 박찬욱 영화의 섹슈얼리티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만든다. ...이건 정신분석학자의 이야기를 들어보거나 GV로 물어보고 싶은 대목이다.
추천인 25
댓글 7
댓글 쓰기정치,종교 관련 언급 절대 금지입니다
상대방의 의견에 반박, 비아냥, 조롱 금지입니다
영화는 개인의 취향이니, 상대방의 취향을 존중하세요
자세한 익무 규칙은 여길 클릭하세요
전혀 간단하지 않은 상세한 리뷰 감사합니다. 🙏🏻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