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쬐금 스포] '애프터 양' -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1. 대부분의 SF영화는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예외로 어떤 SF영화는 'A long time ago, galaxy far, far away...'에서 시작한다). 미래는 현재의 상상을 통해 구현된다. 그리고 현재는 과거가 꿈꾸던 미래다. 즉 우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는 서로에게 빚을 지고 있다. 코고나다 감독의 SF영화 '애프터 양'은 시대를 가늠하기 어려운 낯선 시간에 낯선 공간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무려 3만 가구의 '4인 가족'이 참가하는 비대면 댄스배틀은 대단히 도식적이고 전투적이다. 4인 가족은 저마다 구성도 다르고 나이와 성별, 인종도 다르다. 그들은 모두 같은 동작의 춤을 추면서 경쟁한다. 이처럼 낯설게 시작하는 영화는 마치 통제된 미래사회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정작 영화가 통제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영화 내내 관객과 감독 자신의 과거와 현재로부터 단절을 선언한다. 영화의 모든 미장센과 플롯은 이 영화를 철저하게 낯설게 만들기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이렇게 낯설어지는 과정조차 과거의 유산에 빚을 지고 있다. 마치 양(저스틴 민)이 존재하는 이유처럼.
2. '애프터 양'이 낯설어지는 첫 번째 대목은 '소리'다. 이 영화의 소리는 마치 ASMR을 하듯 가깝게 녹음됐다. 서랍을 여닫는 소리나 정수기에서 물이 나오는 소리도 대단히 가깝다. 이를 의식하듯 모든 인물들은 속삭이듯 말한다. 영화는 배우들이 대사를 하는 말 사이의 호흡까지 다 잡아내 관객에게 들려준다. 이렇게 녹음된 소리를 알고 있다.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의 할9000(더글라스 레인)이다. 할9000의 목소리를 녹음한 더글라스 레인은 일부러 나른함을 이끌어내기 위해 거의 누워서 녹음을 진행했다. 그 덕분인지 할9000은 인물들이 위협받는 모든 상황에서도 나른하고 차분한 어조로 대응한다. 그는 인공지능이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서도 흥분하지 않는다. '애프터 양' 속 대부분의 인물들은 할9000처럼 말한다. 그 중 안드로이드인 양이 특히 그렇다. 양 역시 프로그래밍 된 인공지능이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3. 양은 할9000처럼 말하지만, 그는 할9000과 전혀 다른 캐릭터다. 그는 인간에 대해 자비가 없는 AI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사랑이 넘치는 AI다. 특히 제이크(콜린 파렐)와 키라(조디 터너 스미스)의 입양한 딸 미카(말레아 엠마 찬드라위자자)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처음부터 제이크와 키라가 안드로이드 양을 데려온 것은 동양인인 미카가 자신의 뿌리를 알게 하고 친구가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안드로이드를 서비스하는 기업의 이름은 '브라더스시스터스'다). 잠시 이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이 가족은 생물학적으로나 미국인의 고정관념으로는 대단히 나오기 어려운 구성이다. 아빠는 백인이고 엄마는 흑인인데 자녀는 동양인이다. 마치 인류의 축소판인 것처럼 인류를 대표하는 주요 인종들이 다 모였다(아랍계, 히스패닉계 등등은 일단 배제하자). 만약 이 영화에 한국계 미국인인 감독의 정체성을 반영했다면 미카는 한국인 입양아가 됐을테고 양은 한국문화를 가르쳤을 것이다. 그러나 미카는 (머릿수가 가장 많은) 중국인이고 양은 중국문화에 능통하다. 여기에는 이 사람들이 각 인종을 대표하도록 하려는 의도가 포함돼있다. 이 가족은 확실히 인류의 축소판이다.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가 시간적 개념에서 인류를 관찰했다면 '애프터 양'은 구성요소를 통해 인류를 들여다 보고 있다. 그리고 이를 들여다보는 자가 '양'이다.
4. 제이크는 고장난 양의 기억을 들여다본다. 거기에는 양의 가족과 무관한 존재인 에이다(헤일리 루 리차드슨)가 등장한다. 에이다는 양이 이전에 지냈던 집주인(케이티 호네이커)의 조카를 복제한 복제인간이다. 과거 양과 친구처럼 지낸 에이다는 이른 나이에 사망했다. 그리고 양이 지냈던 집의 릴리안 할머니도 사망한다. 양의 기억을 통해 보게 되는 릴리안 할머니의 집에서 생활은 꽤 이질적이다. 이 집에도 입양된 동양인 민이 있었다. 양은 민과 친하게 지내기 위해 노력하지만, 민은 끝까지 양을 낯선 표정으로 바라본다. 민의 집에서 지낸 기억은 에이다와의 시간을 제외하면 양에게는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제이크는 리퍼비시 제품으로 양을 구매했다. 처음에 그는 5일 정도 누가 사용한 제품이라고 들었지만, 실상은 수십년을 사용한 제품인 셈이다. 양은 수십년을 살면서 삶과 죽음을 봤고 미움과 사랑, 외로움을 경험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양은 제이크의 집에 도착했고 미카를 만나게 된 것이다.
5. 이 글의 제목에서 쳤던 말장난을 다시 꺼내보자.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 이 제목은 필립 K. 딕의 1968년 SF소설로 리들리 스콧의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원작이다. 당연히 이 소설의 양(sheep)은 '애프터 양'의 양(Yang)과 무관하다. 한글에 기댄 말장난이다. 그럼에도 나는 소설을 통해 탄생한 '블레이드 러너'의 장면을 꺼내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화의 최고 명장면 중 하나인 마지막 장면에서, 로이(룻거 하우어)는 죽어가며 데커드(해리슨 포드)에게 말을 한다. "난 너희 인간들이 상상도 못할 것들을 봤어. 오리온의 어깨에서 불타오르는 강습함들, 탄호이저 게이트 곁의 암흑 속에서 반짝이는 C-빔들도 봤어. 그 모든 순간들이 곧 사라지겠지, 빗속의 내 눈물처럼. 죽을 시간이야". 로이가 빗속의 눈물처럼 사라진다고 한 순간은 그의 말대로라면 인간은 도저히 목격할 수 없는 순간들이다(그리고 정말로 로이가 눈물을 흘렸는지는 로이 본인만 알 것이다). 양은 인간의 생과 성장,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봤다. 인간은 생과 사를 직접 경험해야 하는 대상이기 때문에 그것에서 온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양은 인간에 대한 모든 관찰에서 객관적일 수있다. 그는 그것을 경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 상기된 표정으로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는 양의 모습처럼, 양은 인간에 대해 객관적일 수 없는 처지에 이르렀다. 양은 에이다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6. 양은 제이크의 가족과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가족사진을 찍으려는 양은 제이크의 가족을 한참동안 바라본다. 그 가족은 인류의 축소판처럼 완전한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그들이 혈연으로 맺어진 것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양은 제이크의 가족이 모인 모습에서 행복을 느꼈다. 그가 인간을 관찰하면서 얻지 못한 마지막 퍼즐이다. 양이 정지되기 전 마지막 순간은 햇살이 내리쬐는 오후에 소파에 반쯤 누워 미카와 머리를 맞대고 낮잠을 잘때다. 적당히 따뜻한 햇살과 기분 좋은 바람이 양과 미카를 안아주고 있었다. 어쩌면 그 순간 양은 인간이 갖는 모든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이미 수십년을 살았던 양은 그 순간 장비를 정지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빗속의 로이가 죽을 시간을 직감한 것처럼, 양도 그 시간을 직감하고 있었다.
7. 말장난을 시작한 김에 조금 더 말장난을 쳐보자. '블레이드 러너'의 최대 화두는 '데커드 역시 안드로이드인가?'라는 물음이다. 몇 개의 다른 버전으로 공개된 '블레이드 러너'는 데커드에 대한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다. 30여년 뒤에 만들어진 '블레이드 러너 2049'는 데커드가 인간일 수 있다는 쪽에 무게를 싣고 있지만, 역시 명쾌한 답은 아니다. '애프터 양'에서는 제이크의 아내 키라가 유난히 사건의 바깥에 서있다. 제이크나 미카와 달리 키라는 양에게 큰 관심을 주지 않는다. 키라와 양이 대화하는 장면은 양의 수집품(나비)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거의 유일하다. 이때 두 사람의 대화는 중국철학에서 등장하는 나비의 이야기다(중국철학에서 등장하는 가장 대표적인 나비는 장자의 '내편'이지만, 의외로 이들의 대화에서는 노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 대화에서는 몇 가지 재미있는 말이 나온다. "애벌레의 끝은 나비의 시작이다", "무(無)가 없다면 유(有)도 없다" 등(이 말들은 정확한 워딩은 아니다). 키라는 '끝'이라는 개념에 대해 받아들이지 않는다. 대부분의 인간이 그렇듯 인간의 '끝' 이후에 다른 것이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갖는다. 그러나 양은 사라짐이 있어야 존재가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키라는 자신이 그렇게 '프로그래밍' 된 것이라고 말한다.
8. 키라와 양의 대화에서 양은 내내 "저는 그렇게 프로그래밍 된 것 같아요"라는 말을 해서 키라도 자신의 프로그래밍 이야기를 꺼낸 것일 수 있다(이쪽이 거의 확실하다). 그러나 키라도 온전한 인간은 아닐 수 있겠다는 의심이 강하게 든다. 이 영화에서 복제인간으로 규정된 존재는 양과 만나는 에이다다. 여기에 제이크의 이웃주민 조지(클리프톤 콜린스 주니어)의 아내 비키(에이바 드마리)도 복제인간일 수 있다는 힌트를 준다. 적어도 키라는 복제인간 내지는 양과 같은 안드로이드다. 단순히 키라가 양의 일에 적극 개입하지 않는다는 점 외에 제이크와의 영상통화에서 키라는 유난히 나른하다. 미카에 대한 걱정이 많은 편이지만, 거기에는 모성이 드러나지 않는다. 마치 연출단계에서 억지로 모성을 배제하기로 작정한 분위기다. 게다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키라는 등을 돌린 채 자고 있다. 미카가 양과 작별인사를 하고 제이크와 따뜻한 대화를 나눌 때 키라는 그 자리에 없다. 그러나 양은 이 가족을 보면서 행복을 느꼈다. 이 말은 거짓말일까? 한가지 가정을 해보자. 양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키라와 현재의 키라가 다른 존재라면? 이것은 양의 기억 속 에이다를 통해 가능할 수 있음이 드러났다. 제이크와 만난 에이다는 공감능력을 가지고 있고 배려가 넘치는 존재다. 그런데 그 에이다 역시 숲길을 걷다가 사라진다.
9. '애프터 양'은 안드로이드의 기억을 쫓는 영화다. 여기서 안드로이드의 기억이 재생될 때 한 가지 특징이 있다. 소리나 영상이 중첩돼서 나타난다. 예를 들어 같은 대사가 두 번 반복된다거나 에이다의 얼굴을 조회할 때 영상이 겹쳐서 나타나는 식이다. 이는 양의 기억을 불완전한 것으로 만든다. 안드로이드에 탑재된 고도의 AI가 저장한 기억이 불완전 할 수 있을까? 상식대로라면 이것은 고화질 CCTV처럼 정확하게 녹화돼야 한다. 그러나 영화 내내 등장한 양의 기억은 조각나 흩어져있고 영화가 재생하는 기억은 중첩돼있다. 엄밀히 따지면 이것은 양의 기억은 아니다. 기억에는 양도 등장하고 키라도 등장하고 제이크도 등장한다. 그리고 소리와 영상은 중첩된다. 기억은 불완전하다. 영화는 인간의 기억뿐 아니라 양의 기억에도 신뢰를 주지 않는다(이것은 마트 CCTV 데이터베이스보다 정리가 안돼있다). 이 때문에 키라는 그냥 인간일 수도 있다. 그리고 에이다와 만난 순간은 파손된 기억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 (영화에서 나비의 이야기가 나온 김에 언급하자면) 제이크가 안경을 쓰고 본 것은 온전히 양의 기억뿐이었을까? 기억의 조각들은 불완전하다. 이는 인물들의 실존에도 이의를 제기하게 만든다.
10. 기억이 중첩되면서 그 신뢰를 무너뜨린다고 해서 이 영화가 스릴러로 바뀌진 않는다. 여전히 양은 어떤 순간에 행복을 느꼈고 장비를 정지해도 될 때를 직감했다. 그리고 미카가 양을 떠나보내면서 이 행복은 완성됐다. '애프터 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지점이다. 그러나 코고나다 감독의 언급대로 이 영화는 기억에 관한 이야기다. 인간에게 기억은 인격을 형성하는 자산이 된다. 로이 역시 인간은 목격할 수 없는 여러 순간과 함께 상실을 봤을 것이고 자신 역시 상실할 때가 올 것임을 직감했다. 양 역시 행복한 순간에서 자신의 마지막을 직감했다. 양은 모든 것에는 끝이 있고 그 끝은 '무(無)'로 돌아갈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제이크와 미카가 기억하면서 그 말은 틀리게 됐다. 누구보다 끝의 이후를 믿었던 키라도 양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기억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끝이 찾아와서 '무(無)'로 돌아가더라도 '유(有)'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나는 인간이 사회 속에서 유기적인 관계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받는다고 믿는다. 픽사 애니메이션 '코코'에서처럼 누구도 죽은 자를 기억하지 않는다면 그는 사라진다. 기억하는 사람이 없다면 정말로 그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피터 파커?). '애프터 양'에서 기억은 존재를 지속하게 하는 동력이다.
11. 결론: 나른한 목소리의 대사 때문에 다소 졸릴 수 있는 영화다. 게다가 96분의 러닝타임 동안 워낙 방대한 화두를 던져서 체감은 196분처럼 느껴질 수 있다. 다만 그렇게 느껴지는 196분은 세상 유익하고 멋진 시간이 될 것이다. '애프터 양'은 명상하듯, 사색하듯 볼 수 있는 영화다.
추신) '애프터 양'의 교훈: 아이폰을 리퍼비시 제품으로 구매했는데 쓰다가 고장이 나서 수리 맡기러 갔더니 숨겨진 폴더 안에 모르는 사진이 수백장 튀어나왔다. 이걸 쓰던 주인은 뭐하는 사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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