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빗 핀처의 기막힌 동선 연출 ([조디악] 스포일러)
※ 본문에 <조디악 (Zodiac) >(2007)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평어체로 작성된 글입니다.
영화 문법 혹은 형식이란, 영화감독의 '언어'다. 감독은 형식을 통해 말을 한다. 실제 미제 사건인 연쇄살인마 '조디악 킬러' 사건을 영화화한 <조디악>은, 데이빗 핀처가 영화 언어에 얼마나 통달한 감독인지 보여주는 걸작이다. 핀처는 간단한 동선 설정과 쇼트의 배열로, 관객의 심리를 능숙하게 (그러나 차분하게) 조였다 풀었다를 반복한다. 특히 <조디악>의 도입부는, 영화 전반의 주요 시각적 동선을 응축한 축약도나 다름없다. 이것은 핀처가 그려낸 건축술의 설계도면이다.
<조디악>의 도입부
1969년 7월 4일, 미국은 독립기념일 축제가 한창이다. 영화는 밤하늘에 축제 폭죽이 터지는 도시의 전경을 비춘 익스트림 롱 쇼트로부터 시작한다. 이 쇼트가 지나고 나면, 곧 이어 독특한 쇼트 하나가 등장한다. 바로 움직이는 차 안에서 교외 주택 단지 풍경을 찍은 수평 트래킹 쇼트다. 이 쇼트는 관객이 방금 전 보았던 넓은 사이즈의 쇼트와 대조를 이룬다. 차량의 창틀은 자연스레 프레임 속에 또 하나의 프레임을 형성하며, 폐소공포적인 정서 효과를 야기한다.
이 쇼트에서, 관객은 차량의 운전자 즉, 시점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장르적 관습에 따라 이 쇼트의 시점은 범행 대상을 물색하는 살인마의 시선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이 쇼트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트래킹 동선의 방향이다. 관객이 보는 화면을 기준으로, 차(카메라)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동한다. 이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향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시선 방향과 충돌하는 방향이다. 인간 시각의 방향성을 위배하는 이 동선은, 관객에게 무의식적인 불편함을 안긴다. 정체 모를 인물의 시점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동하는 구도. 이를 통해 자연스레 섬뜩한 긴장감이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살인마의 음습한 시선으로 보였던 그것은, 이내 곧 오인이었음이 밝혀진다. 차가 멈추면 차(카메라)를 향해 어느 남성이 다가온다. 운전자는 어느 여성이고 두 사람은 데이트를 하기 위해 만난 연인이다. 이때부터 핀처는, 인간의 기본 시선 방향 즉,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향하는 동선을 전개한다. 긴장(오른쪽에서 왼쪽으로)에서 이완(왼쪽에서 오른쪽으로)의 상태로 이동하는 것이다. 계속해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향하던 연인이 탄 차는, 곧 어두운 공터에 멈춰선다.
공터에 멈춰 선 연인의 차, 그 뒤 도로 저편에서 수상한 차량 한대가 등장한다. 역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등장한 이 차는, 갑자기 연인의 차 바로 뒤에 멈춰 선다. 연인은 긴장한다. (그들이 긴장하는 이유는 두 사람이 사실 내연 관계임으로 밀회가 발각될 두려움 때문이다.) 잠시 멈춰 서있던 수상한 차량은, 원래 가던 운동 방향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사라짐으로써 이완의 상태를 유지한다.
연인은 안도한다. 하지만 그 안도감도 잠시, 수상한 차량이 역방향으로 즉,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다시 연인의 차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한다. 이완의 동선이 그치고, 다시끔 긴장의 동선이 찾아오는 것이다. 그 상황의 불안은, 그것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동선 방향으로 인해 극대화된다. 연인의 차 뒤에 다시 멈춘 수상한 차. 차에서 내린 의문의 운전자는, 손전등으로 연인을 비추더니 느닷없이 그들에게 마구 총질을 한다. 조디악 킬러의 등장이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향하는 살인마
카메라 또는 피사체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향하며, 은근한 불안감을 자극하는 방향의 동선은 영화 전반에 걸쳐 반복된다. 살인마의 공격 행위가 발생하기 직전, 살인마는 항상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나타난다. 호숫가 살해 장면이나 택시 기사 살해 장면 모두 살인마는 화면 오른쪽에서 등장해 왼쪽 방향으로 이동한다.
특히 영화에서 가장 섬뜩한 순간 중 하나인 모데스토 고속도로 장면은, 도입부의 구성과 가장 유사한 방식으로 짜여진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조디악 킬러는 선량한 시민의 탈을 쓰고서 범행 대상에게 접근한다. 그의 위장된 호의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향하는 즉, 이완의 운동 방향으로 묘사된다. 조디악 킬러는 범행 대상에게 가짜 호의를 건넨 후, 도입부와 마찬가지로 가던 운동 방향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사라진다. 하지만 역시 그는 역방향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다시 돌아와 범행을 시도한다. 이 영화에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향하는 동선은, 폭력의 전조이자 조디악 킬러의 존재감 그 자체나 마찬가지다.
형식을 통해 범인을 암시한 데이빗 핀처
실제 사건에서,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아서 리 앨런'이라는 인물이다. 영화도 사실상 아서 리 앨런이 범인임을 주장하는 강력한 암시를 주면서 끝을 맺는다. 그것은 단지 도입부에서 조디악 킬러에게 공격을 받았지만 살아남은 피해자 '마이크 마조'가, 마지막 장면에서 아서 리 앨런의 얼굴을 조디악 킬러의 얼굴로 지목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건의 수사진이 아서 리 앨런과 대면하는 장면에서, 이미 핀처는 단서를 드러낸다. 아서 리 앨런이 형사들을 만나기 위해 다가가는 동선은, 오른쪽에서 왼쪽을 향한다. 무엇보다 이 장면에서 핀처는, 굳이 기어코 아서 리 앨런의 시점 쇼트 하나를 집어넣는다. 아서 리 앨런이 걸어오며 형사들을 바라보는 시선의 수평 트래킹 쇼트다. 이 쇼트의 동선 역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향한다. 바로 조디악 킬러의 시선이다. 하지만 그를 비웃기라도하듯, 컷이 바뀌고 나면 아서 리 앨런은 화면상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걸어나온다. 이것은 형사들의 무력한 시선이다. 강한 심증은 있으나 결정적인 물증이 없어 애가 타는 형사들의 심정을 반영한 쇼트이자, 평범한 시민의 모습을 한 조디악 킬러의 위장된 동선이다. 그렇게 데이빗 핀처는, 조디악 킬러가 누구인지 '형식'적으로 지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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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애정하는 영화인데 흥미로운 글 잘읽었습니다 +_+
영화가 다시 보고 싶어지는군요
도입부는 음악 사용도 좋았어요! 마치 차 안에서 들리는 듯 차와 함께 등장하는 Hurdy Gurdy Man은 다시 돌아옴을 예언하듯 차가 사라져도 영화 안에 남아있죠. 두 연인이 안도하는 잠깐의 순간에도 관객은 놓아주지 않는 핀처의 연출이 놀라웠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에고 결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스코티님께서 쓰신 글은, 전부터 좋은 글들 올려주셔서 자주 읽었습니다.^^
제가 2000년대의 데이비드 핀처 작품을 봤던 순서가 잘 기억은 안 나는데, 제 기억이 맞다면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가 먼저였고, 그 다음에 <조디악>, 마지막이 <패닉 룸>이었을 거예요. 확실히 핀처 작품을 보면 동선이나 편집이 나중으로 갈수록 휠씬 더 절제되고 정돈된 느낌이 있었습니다.
<패닉 룸>을 예로 들어볼게요. 조디 포스터가 잠들어 있던 2층 침실을 비추던 화면이 1층으로 이동하면서 문과 창문 밖에서 침입 시도를 하는 괴한 3인방을 보여주죠. 그러다 주방으로 이동해 괴한들이 그 근처에 있는 문을 따려는 시도를 하는 걸 보여주고 다시 2층을 보여주다가 괴한 중 한 명이 외부 계단을 올라 지붕으로 침입하려는 걸 채광창을 통해 보여줘요. 그런데 이 장면을 2분 20초가 넘는 (CG가 결합된) 롱테이크로 표현을 하더군요. 과장된 데가 다소 있긴 해도 보여줄 건 확실히 보여주는 카메라 워킹 때문에 기억에 남던 장면이었어요.
<조디악>에서도 역시 보여줄 건 다 보여주는 건 여전한데, 이전작들에 비해 카메라 워킹이나 편집이 매우 정적으로 흘러가는 걸 볼 수 있었어요. 사건 추적을 하는 인물들을 요란하게 보여주는 대신 옆에서 조용히 관찰하면서, 기록물을 작성하듯 하나하나씩 써내려가는 느낌이었죠.
이후에 핀처가 내놓은 <소셜 네트워크>에서의 조정 장면이나, <나를 찾아줘>에서의 로저먼드 파이크의 행방에 대한 진실 장면을 보면 여전히 빠른 편집이 필요한 부분에서는 꽤나 극적으로 지나가더라고요. 그럼에도 속도감을 잘 조절해 관객의 집중을 이끌어내 장면 자체에 균형이 이뤄지는 볼 수 있었고요.
이런 걸 볼 때마다 역시 데이비드 핀처답다는 걸 보며 감탄하죠. 60세가 넘어서도 꾸준히 좋은 영화를 만들어주길 바랍니다.
갑자기 이 영상이 생각나네요. 핀처 블루레이 코멘터리 들어보면 완벽주의자적 성향을 갖고 있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