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이브 마이 카>-장문리뷰입니다.
영화가 너무 좋아서 간만에 긴 리뷰를 써봅니다.
오타점검이 안 된 글이라 양해 부탁드려요.
읽어주심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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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영화가 시작하면, 가후쿠와의 관계를 끝마친 오토가 그에게 자신이 구상중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남몰래 흠모하는 동급생의 집에 침입한 한 여학생의 이야기다. 기본적인 배경설명조차 생략하고 영화의 시작과 동시에 다짜고짜 들려오는 이 이야기는 관객의 입장에서 그 함의를 헤아릴 수 없기에 그저 아리송할 뿐이다. 혼란스러운 이는 관객뿐이 아니다. 영화의 메인 캐릭터인 가후쿠에게 역시 오토의 이야기가 과연 무엇을 은유하는지는 굉장히 중요한 맥락이 아닐 수 없다. 오토가 쓴 이야기가 그녀의 최근 심리상태가 다분히 반영된 결과물이 정황상 분명한 상황에서, 오토의 이야기를 해석하는 것은 가후쿠에게 있어 자신을 속이고 속이다 결국엔 홀연히 곁을 떠나버린 그녀를 이해하기 위한 유일한 자구책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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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오토와 혼외관계를 맺고 있던 다카츠키를 통해 오토가 가후쿠에게 미처 말하지 못한 이야기의 결말부를 듣고 나면 우리는 그녀의 이야기를 현실과의 상관관계를 따져 재검토하게 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이야기 속 여고생의 은밀한 일탈행위는 명백히 오토 본인의 불륜과 겹쳐 보이게 되며, 그런 그녀가 CCTV앞에서 자신의 범죄행위를 자백하는 대목은 그간 가후쿠를 속여 온 것에 대한 본인의 죄의식이 명백히 투영된 설정으로 보이는 것이다. 나아가 가후쿠가 녹내장 진단을 받은 이후의 시점에 이르러 이야기 속 여고생이 또 다른 침입자의 눈을 찌른다는 설정을 추가한 까닭 역시 오토가 스스로의 일탈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가 일견 엿보이는 대목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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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모든 정황의 총합이 오토라는 한 개인을 오롯이 설명할 순 없다. 우리는 오토라는 미스터리한 인물을 그녀의 주변 이들에 의해 재구성 된 형태로 가늠하거나 그녀가 쓴 이야기라는 픽션의 포맷을 통해 어렴풋이 상상할 수만 있을 뿐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가후쿠라는 한 남자를 진심으로 사랑한 동시에 수시로 다른 남성과 혼외관계를 맺어온 오토의 기이한 행적에 대해 관객 저마다의 판단이 가능할 테다. 허나 그럼에도 우리는 오토가 직접 본인의 과오를 해명하거나 설명한 장면을 단 한 순간도 보지 못했음을 상기해야만 한다. 오토라는 한 개인의 내면에 완전히 가닿을 수 있으리란 생각은 차라리 우리의 착각에 가깝다. 숨 막히도록 완벽히 조율이 된 이 영화의 명장면 중 하나인 가후쿠와 다카츠키의 차 안 대화 신의 막바지에, 다카츠키는 가후쿠에게 말한다. 타인을 온전히 헤아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감독의 전작 <아사코>와 마찬가지로 <드라이브 마이 카>는 인간의 이러한 무능에서 출발하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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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노력해도 온전히 헤아릴 수 없는 것이 사람 속이라는 것이 영화 속 일종의 대전제처럼 설정이 돼 있는 상황에서, 영화는 가후쿠라는 캐릭터를 마음속에 상처를 내장하며 타인에 대한 이해를 포기한 인물로 설명한다. 이유인즉슨, 가후쿠는 오토의 삶을 이해하려 무던히 노력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도래할 관계의 엇나감을 극도로 경계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아이의 장례를 치룬 뒤 가후쿠는 여느 날처럼 오토와 관계를 가지고 그녀가 창작한 이야기를 듣는다. 다음 날, 본인이 말한 이야기의 디테일이 가물가물해진 오토는 가후쿠에게 이를 되묻지만 가후쿠는 본인 또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답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의 노트북 모니터를 통해 그가 오토의 이야기 소재인 칠성장어를 구글링 중이었음을 확인한다. 가후쿠는 오토의 이야기에 무심하지는 않다. 다만 그는 오토의 이야기의 실체에 다가가 그 이야기가 은유하는 바를 온전히 깨닫고 이에 대한 의견을 오토와 함께 공유하는 순간 그녀와의 관계가 이전과 같아질 수 없으리라 판단하며 이를 극도로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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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처럼 외출을 준비하는 가후쿠에게 오토는 긴히 들려줄 말이 있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그 순간 극도로 무덤덤해 보이는 가후쿠의 내면은 심히 요동친다. 추측컨대 오토가 그에게 하려던 말은 칠성장어 스토리의 뒷얘기였을 것이며 이는 자연스레 그녀의 불륜에 대한 고백으로까지 이어졌을 터다. 가후쿠 역시 내심 이를 짐작한다. 따라서 마음의 준비를 미처 하지 못한 가후쿠는 용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거리를 배회하며 대사 연습이라는 자신의 루틴만을 허무히 반복한다. 마침내 돌아온 집 앞 주차장에서, 가후쿠는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희곡 <바냐 아저씨>의 결말부 대사를 멍하니 경청한다. 어찌됐든 살아갈 수밖에 없지 않겠냐고 말하는 소냐라는 캐릭터의 위로의 대사는 그 순간 녹음된 오토의 음성으로 발화되고 있다. 그때 그 위로의 메시지는 오토와의 진솔한 소통을 부러 차단하고 있는 가후쿠에게 조금도 와닿지 못한다. 영화 역시 그 순간 희망찬 대사와는 판이하게 다른 분위기를 조성하며 극에 무한한 고독함을 불어넣는다. 그렇게, 무언가로부터 번번이 회피하던 가후쿠는 끝내 오토를 잃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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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40분간이나 지속된 길었던 프롤로그가 끝이 나고 영화 속 2년의 시간이 흐른다. 영화는 현재의 가후쿠가 2년 전의 가후쿠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음을 지속적으로 보여준다. 여전히 그는 마음 속 한 구석에 쓰라린 상처를 봉해두고 있으며 특유의 워커홀릭적 성향으로 통증을 억지로 진통하며 하루를 근근이 버텨내는 사내다. 그런 그의 삶에 모종의 균열을 드리우는 인물은 다름 아닌 2년 전 오토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던 다카츠키다. 다카츠키와 재니스의 오디션에서, 다카츠키가 재니스에게 과감히 스킨쉽을 하는 순간 가후쿠는 의자를 벌떡 차며 일어선다. 그 순간 가후쿠는 다카츠키와 오토의 성적인 관계를 연상하여 반사적으로 흥분했던 것일 테다. 이후 가후쿠는 본인이 준비하는 연극에 다카츠키를 캐스팅한다. 이러한 선택은 가후쿠가 여전히 오토라는 인물의 존재감에 종속돼 있는 사람임을 방증한다. 여기서 결코 지나칠 수 없는 하나의 설정이 있다면 그건 바로 가후쿠가 다카츠키를 이전에 본인이 줄곧 연기해온 ‘바냐’라는 역에 캐스팅 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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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가후쿠의 선택은 그저 의아할 뿐이다. 그 선택 뒤에 숨겨진 그의 의중에 대해 가설을 하나 펼치자면 다음과 같다. 나는 가후쿠가 다카츠키와 연극이라는 형식을 이용해 일종의 심리 실험을 꾀했던 것이라 생각한다. 가후쿠가 다카츠키를 캐스팅한 이유에서 오토라는 인물을 배제할 수 없듯, 연극의 연출자가 가후쿠임을 뻔히 알면서 오디션에 지원한 다카츠키의 입장에서도 오토라는 인물을 간과할 수 없다. 가후쿠는 다카츠키가 이 오디션에 지원한 진정한 동기를 알 수 없다. 그건 한 명의 예술가로서 가후쿠에 대한 순수한 동경일수도 있는 동시에 한 여자를 사랑한 또 다른 남자로서의 도발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가후쿠 역시 다카츠키 또한 이 순간 오토라는 인물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음을 안다는 것이다. 앞선 2년 전 시간대의 막바지에, 가후쿠는 심리적 트라우마로 인해 바냐를 성공적으로 연기해내지 못한 바가 있다. 한 명의 바냐로서 그는 소냐의 위무에 감화되지 못하고 끝없는 무력감에 잠식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는 생각한다. 만약 다카츠키가 바냐를 연기한다면? 그는 어떨까. 자신의 여자를 사랑한 남자를 자신이 처했던 상황에 똑같이 밀어 넣어 그 경과를 살피는 것. 말하자면 이것은 장례식장에서 불륜남의 낯짝을 마주하고도 그 흔한 일갈 한마디 못하는 이 내향적 남자가 이 삼각구도의 관계를 해부하기 위해 고안한 제 나름의 묘책인 것이다. 그리고 두말 할 것 없이 이는 그가 그토록 두려워했으나 동시에 내심 욕망했던 오토라는 인물에 대한 이해의 과정과 긴히 결부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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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적 영역에서 가후쿠의 삶에 균열을 일게 한 이는 비단 다카츠키 뿐만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거론해야할 또 하나의 이름이 있다면 그건 바로 한국에서 온 배우 유나일 것이다. 희곡 <바냐 아저씨>속 바냐를 연기해온 가후쿠에게 있어 그간 소냐는 언제나 오토였을 것이다. 삶의 곡절과 시련에 좌절한 바냐에게 소냐가 일말의 위안과 안식을 선물하듯이, 오토는 가후쿠에게 있어 아이를 잃은 슬픔을 이겨내고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할 이유와 힘을 주는 사람이었을 테니까. 가후쿠가 바냐를 더 이상 연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현재의 그는 소냐를 잃은 바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한 명의 바냐로서 극에 온전히 동화되지 못한다. 언제나 오토의 음성으로 녹음된 소냐의 대사를 들으며 하루하루를 보내곤 했던 그의 앞에 목소리를 잃은 소냐가 등장한다. 그것이 바로 유나다. 오토가 말하는 소냐의 대사를 질리도록 들어온 가후쿠에겐, 다른 이가 연기하는 소냐는 별다른 울림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같은 뜻이 담긴 텍스트를 수화라는 이색적인 방식으로 연기한 유나의 소냐는 분명 그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을 테다. 물론 유나가 가후쿠의 삶 속 오토를 대체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순간 가후쿠가 유나의 소나를 보며 좀처럼 느껴보지 못한 남다른 여운을 느꼈다는 것까지 부정할 순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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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장면인 유나와 윤수의 집에서의 에피소드 역시 가후쿠의 내면에 주요한 영향을 가한다. 유나가 이전에 가후쿠와 마찬가지로 아이를 잃은 경험이 있다는 사실은 가후쿠의 입장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하나의 사실이다. 자신에게 뜻깊은 감흥을 준 이에게 자신과 유사한 상흔이 있었다는 사실, 아울러 그녀가 보란 듯이 그 상처를 이겨내고 하루하루를 멋지게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가후쿠에게 또 다른 위안으로 다가왔을지도 모른다. 익숙한 이의 불가해함에 대한 좌절로부터 시작한 영화는 낯선 타인에 대한 막연한 이해에 도달해 그곳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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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가후쿠와 더불어 또 다른 축을 담당하는 드라이버 미사키는 앞서 말한 맥락의 연장에 있는 인물이다. 미사키는 상실의 경험을 공유하고 있을뿐더러 일에 몰두하는 기질로 삶의 고독을 버텨낸다는 측면에서도 가후쿠와 퍽 닮은 구석이 있다. 이쯤에서 둘의 연대감이 본격적으로 고조되는 황홀한 시퀀스 하나를 언급해 보고 싶다. 뒷자리에 앉은 가후쿠와 다카츠키가 오토의 칠성장어 스토리에 대해 말을 주고받을 때, 그 순간 미사키는 일견 영화의 흐름에서 배제된 듯 보이나 실은 그렇지 않다. 가후쿠가 다카츠키에게 자신의 딸에 대한 이야기를 고백할 때 그는 자신의 딸이 여태껏 살아있었다면 지금 23살이 되었을 거라 말한다. 그 순간 영화는 앞좌석의 거울 속 미사키의 얼굴을 포커싱한다. 그녀의 현재 나이가 23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제야 가후쿠의 내면에 애초부터 있었던 미사키의 초상을 어렴풋이 가늠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을 기점으로 미사키의 입장에서도 가후쿠는 이전과 다른 인물로 다가올 터이다. 다카츠키가 가후쿠에게 오토의 이야기를 할 때 역시 앞좌석에 있는 미사키는 이야기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은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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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의 이야기 속 여고생은 익명의 대상을 살해하고 결국엔 죄의식을 이기지 못해 자신의 죄를 고백한다. 분명 이 여고생은 오토 본인을 모티브로 한 인물처럼 보이기에 언뜻 보면 죄의식을 느끼는 주체역시 오토 본인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해당 시퀀스 속 차량에 탑승한 3명의 인물들 역시 저마다 다 다른 죄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가후쿠가 아직 모르는 이야기의 후반부의 내용을 발설하는 다카츠키의 행위는 이야기 속 여고생이 본인의 범죄를 자백하듯 사실상 자신의 불륜행위를 가후쿠에게 자백하는 것과 진배없다. 오토의 이야기는 언제나 성적인 관계가 성사된 이후에 창작되니까. 하지만 이를 듣는 그 순간의 가후쿠에게 중요한 건 다카츠키와 오토의 부적절한 관계가 아니다. 그는 자신이 오토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어쩌면 자신이 오토를 죽였을지도 모름으로부터 비롯된 본인의 죄의식을 다시금 되새겼을 것이다. 또 한 명의 인물, 미사키. 그녀 역시 산사태의 현장에서 어머니를 방기하여 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사례가 있다. 미사키는 그 순간을 자연스레 곱씹었을 것이다. 결국 오토가 본인의 삶에 근거하여 써내려간 살인에 대한 픽션은 다수의 삶에 흡수가 돼 각각의 기구한 삶의 맥락을 등에 업어 각기 다른 판본으로 재해석되기에 이른다. 오토가 아이를 잃은 아픔을 시나리오 창작으로 치유해 왔듯, 가후쿠가 오토를 잃은 아픔을 연극으로 치유해 나가듯 결국 <드라이브 마이 카>는 우리가 예술을 우리 삶 속 어디에 위치시킬지를 굉장히 주요한 문제라 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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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후의 장면인 가후쿠와 미사키가 썬루프 위로 담배를 태우는 장면은 누가 봐도 감탄이 절로 나오는 명장면 중의 명장면이다. 이 장면이 감탄을 자아내는 까닭은 단순한 시각적 멋들어짐이 아니다. 이를 말하기 위해 그 이전의 몇몇 장면들을 경유해보자. 대화의 말미에, 다카츠키는 굉장히 의미심장하면서도 핵심적인 말 한마디를 가후쿠에게 남긴다.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우니 중요한 건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는 부단한 노력이지 않겠냐고. 이후 다카츠키는 폭력 행위로 경찰에 압송돼 극에서 퇴장한다. 평소 여러 여자에게 집적대는 흔하디흔한 속물적인 남자로 보이다가도 예술에 임할 땐 굉장히 프로페셔널한 면모를 보이는, 그러면서도 사적 영역에선 폭력성을 도통 주체하지 못하는 인물. 다카츠키는 본인의 말 그대로 극중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의 자리에 위치된다. 가후쿠는 다카츠키로 하여금 바냐를 연기하게 하는 방식으로 그를 끝내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극에서 퇴장하기 이전 그가 가후쿠의 마음을 움직일 말 한마디를 던졌다는 사실이다. 시종 뒷좌석을 고집하던 가후쿠가 다카츠키가 차에서 내린 뒤 미사키의 옆인 앞좌석으로 이동한 설정은 다카츠키와의 대화 이후 그의 마음속에 모종의 변화가 시작됐음을 명백히 드러내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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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서 앞, 이 사소한 변화가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가후쿠와 미사키가 나란히 담배를 태우는 직후의 장면은 그들이 담배를 태우는 또 다른 장면과 대조를 이룬다. 차 내부에서 그들의 위치가 철저히 앞과 뒤로 분리되어 있듯 그들의 위치는 차 외부에서도 동등하지 못하다. 이를테면 히로시마의 곳곳을 미사키가 가후쿠에게 안내할 때 역시 이들의 위치는 철저히 앞과 뒤로 나뉘어져 있는 식이다. 드라이버와 고객, 가이드와 안내를 받는 이. 이처럼 가후쿠와 미사키의 관계 사이엔 격식이라는 이름하에 언제나 보이지 않는 선이 존재하는데, 이는 타인에게 좀처럼 마음을 열지 못하는 가후쿠의 성향을 적극 반영한 설정이다. 그들이 함께 담배를 피는 순간 역시 계단을 사이에 두고 가후쿠가 저 멀리에 서 있는 미사키에게 라이터를 던져주며 이들의 거리감이 강조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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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고려할 시 우리는 앞좌석으로 이동한 가후쿠의 선택에서 모종의 결기를 읽어내 봄직하다. 스스로를 이해해 볼 필요가 있지 않겠냐는 다카츠키의 말, 유나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가후쿠는 또다시 낯선 타인의 막연한 부분에 감화된다. 관계의 어긋남이 두려워 소통의 문을 닫은 채 내면의 괴로움을 무덤덤함이라는 표정의 가면으로 감추며 여태 살아온 가후쿠지만 미사키와 나란히 앉아 썬루프 위로 담배를 태우는 그 순간에서는 이전과 다른 뉘앙스가 읽힌다. 나는 현재 괴로움에 신음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내심 누군가와의 소통을 갈구하고 있다는 것. 가후쿠는 이를 인정하며 곪을 대로 곪은 상처의 맨얼굴을 직시하기 시작한다. 앞서 말했듯 미사키의 나이가 23살이라는 설정은 극중에서 가후쿠와 미사키의 관계를 유사 부녀관계로 읽도록 은근히 유도한다. 역시 자신처럼 상실의 상처를 품고 사는 딸의 나이를 한 소녀, 가후쿠는 또 다시 낯선 타인에게 슬픔을 매개삼아 연대의 정서를 보낸다. 그런 의미에서 이 모든 것을 함축하는 듯 보이는 차 지붕 위 두 개비의 담배는 <드라이브 마이 카>속 가장 처연한 동시에 아름다운 시각적 이미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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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미스런 사건으로 다카츠키가 프로젝트에서 하차한 뒤 자신이 바냐를 연기해야 할 상황에 놓이자 가후쿠는 연극 관계자에게 마음을 정리 할 몇 일간의 시간을 요구한다. 유나라는 새로운 소냐를 얻은 그이지만 곧바로 다시 바냐를 연기하기엔 “그럼에도 살아가야 돼.”라는 소냐의 말에 제대로 감응할 자신이 아직은 없는 탓일 테다. 미사키와의 소통을 구원의 창구로 삼는 가후쿠는 미사키에게 그녀의 고향으로 안내해 줄 것을 부탁한다. 히로시마에서 훗카이도까지, 영화는 길고도 긴 그들의 드라이브를 편집으로 생략하기는커녕 도리어 유사한 주행 장면을 지속적으로 반복 배치하여 그들의 여정을 물리적으로 강조한다. 그토록 수다스러웠던 영화가 잠시 과묵해지고 그들의 차는 달리고 또 달린다. 이어서 항해장면까지 등장해 두 공간의 거리감을 강조하더니 배에서 내린 뒤에도 영화는 아무 말 없이 도로를 주행하는 자동차의 연속으로 숏을 이어나간다. 마침내 그들은 훗카이도에 도착한다. 그러자 관객의 이목을 사로잡는 순간이 불현 듯 도착한다. 갑자기 차량 배기음과 배경소리를 포함한 영화의 모든 사운드가 일체 오프 된다. 훗카이도라는 공간이 영화의 주를 이루는 히로시마라는 곳과 얼마나 멀리 떨어진 곳인지를 지속적으로 강조하던 영화는 그 순간 음소거를 통해 경건하도도 영적인 무드를 불러 온다. 영화는 지나가는 행인조차 등장하지 않는 그곳의 공간성을 가후쿠와 미사키에게 있어 유일무이한 것으로 자리매김한다. 히로시마에서 훗카이도, 이는 가후쿠와 미사키에게 있어 현재를 붕괴한 아픔의 근원지로 거슬러가는 지난한 여정이다. 그곳에서 그들은 인생의 주도권을 복권해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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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세상의 끝자락에 단 둘이 서있는 느낌을 주는 훗카이도에서의 시퀀스는 마치 그 분위기만으로도 모든 것이 설득될 것만 같다. 설원 위에 서서 미사키는 본인의 아픈 과거를 고백한다. 이때 미사키는 어머니의 의아한 마지막에 대해 명확한 결론을 내지 않는다. 그저 그 모든 것을 고백하며 여전히 그녀를 이해하지 못함을 진솔히 토로할 뿐이다. 그런 그녀를 가후쿠가 꼭 안아준다. 자신들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채 떠나간 여인들을 끝끝내 이해하지 못한 그들은 서로의 무능력함을 매개로 연대의 순간에 이른다. 타인을 이해하기는커녕 제 자신조차 온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그 불가능함에 무던히 도전하는 과정에서 기이한 감동과 희망이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영화는 놓치지 않는다. 미사키를 품에 안은 가후쿠는 그녀에게 나직하게 말한다. “살아야 돼, 그래도 우린 살아야 돼.” 이건 사실상 소냐의 대사를 그가 대언하고 있는 셈이다. 그 순간 가후쿠는 소냐의 희망적 메시지를 체득한 바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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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에서 훗카이도로 행하는 길을 지독하게 오래 전시한 영화는 그 반대의 길은 조금도 묘사하지 않는다. 삶의 묵은 상처에 대한 온전한 치유는 불가능하지만 미약하게나마 희망이 엿보이는 곳, 그들은 이전의 세계로 돌아가지 않고 그 공간에서 앞으로 생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이어서 가후쿠의 연극이 상연된다. 연극의 말미, 소냐가 된 유나가 바냐가 된 가후쿠에게 위로의 대사를 건낸다. 영화는 이를 듣는 가후쿠의 모습에 이어 객석에 앉아 있는 미사키를 차례로 보여준다. 그 순간 살아나가야 함을 강변하는 소냐의 무언의 대사는 그 어느 때보다 생명력이 강해 보인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그 무엇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하는 동시에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이가 나 뿐만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한다. 그리하여 해피엔딩도 새드엔딩도 아닌 우리의 삶이 아직은 살아갈 만 한 가치가 있음을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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