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이브 마이 카-리뷰(스포)
원작이 있는, 일본 영화입니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 영화입니다. 원작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자 없는 남자들> 중 동명의 단편 <드라이브 마이 카>입니다.
이 글에서, "원작이 있는, 일본 영화"라는 문장을 처음에 적어둔 이유는 일본은 자국 소설의 영화 제작에 관한 한 세계 최고일 겁니다. 다만 제약도 분명합니다. "원작의 테두리" 안에서 멋지게 영화나 드라마로 활용하지만 웬만해서는 그 테두리를 깨부시지 않습니다. 한계를 스스로 둔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 원작을 고스란히 영상으로 옮겨놓는 것을 오히려 일본 관객이 좋아한다고 판단해 볼 수도 있습니다. 이 말을 결론하면 그만큼 일본의 소설은 세계적으로 뛰어납니다.
뒤집어 보자면, 아무리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라고 해도, 원작 작가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아우라를 뛰어넘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이 아니라 시도조차 안 해봤을지 모른다, 같은 섣부른 짐작을 하게끔 합니다. 첫 장편을 출간한 더불어 미래가 촉망되는 작가의 작품을 자기 식으로 해석해 작가와 감독 역시 상생하는 나카시마 테츠야 같은 감독도 떠오르는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를 하나의 사례로 보기에는 미미합니다.
어쨌든 일본 영화가 원작이 있다는 것은, 다르게 말해 상당한 제약이 존재한다는 말씀을 드리며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로 들어가 봅니다.
원작소설 <드라이브 마이 카>는 상당히 침잠하고 쓸쓸합니다. 으레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 그렇듯 맞서기보다는 회피하고 구체적이라기에는 실체가 약합니다. 시야 결손과 음주로 운전을 하지 못하는 가후쿠와, 카센터에서 소개한 운전사 미사키라는 틀에, 가후쿠의 과거가 겹칩니다. 특히 선을 넘지 않고, 고용주와 기사의 관계에서 덤덤하게 맺는 결말은 상당한 여운을 남깁니다. 소설을 덮고 나서도 한동안 침잠하고 쓸쓸한 기분에 휩싸여 계속해서 가후쿠와 부인에 대해 곱씹어 보게 합니다. 하루가 지난 다음날도, 또 그 다음에도 부인을 사랑하면서도, 부인에게 진실을 묻지 않고 "연기"한 가후쿠의 마음에 대해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배우이면서도 어떻게 보면 자신에게 제약을 두는 연극배우로만 지내는 가후쿠의 인생이 나와, 또는 우리와 다르지 않음, 그것에 대해서도요.
50여 페이지 정도의 단편 소설, 이를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어떻게 179분짜리 정극으로 바꾸었을까요?
영화에 들어가기 전에 문득 든 생각은 '불가능하지 않나,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었나', 상충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영화 <버닝>도 스쳐갑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원작 <헛간을 태우다>를 이창동 식으로 완전히 재해석한 <버닝>은 말하지 않는다면 알지 못할 정도로 감독을 거쳐 다른 작품으로 탄생했습니다. 그러하기에 앞서 단서를 달았던 "원작이 있는, 일본 영화"의 제약이라는 선입견이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영화를 봅니다. 보냅니다. 함께 합니다. 공감합니다. 그래서 느낍니다.
179분을.
결론을 가장 먼저 던지면!
179분은 온전히 하마구치의 것이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드라이브 마이 카>라는 틀을 빌어오되 안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를 끝까지 밀어넣어 하마구치 류스케 식으로 재 창조한 완연한 다른 세계였습니다. 안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는 현실 즉 세속적이며 타락적인 생활과 타협하지 않는 주인공을 통해 보편 타당한 도덕의 경지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 보편 타당함을 위해 과거를 매일 곱씹으며 홀로 타협하지 않는 가후쿠와 미사키를 등장시킵니다.
언뜻 보기에 가후쿠와 미사키는 비슷합니다. 철저히 홀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둘을 알아가 보면 완전히 다른 "섬"으로 기능합니다. 가후쿠는 어울려 삽니다. 그러나 그 어울림 속에서 스스로 냉대하거나 조소하며 섞이지 않으려 듭니다. 가후쿠가 다카츠키를 보는 시선의 끝을 그려보면 이해 가능합니다. 가후쿠는 배우이면서도 연출만을 하고, 그가 어울리는 사람들과 결을 달리 합니다. 이에 반해 미사키는 철저히 어울리지 않는 삶을 삽니다. 다시 말해 보자면 가후쿠는 닳고 닳은 명분만을 앞세운 세속적 도덕인인 반면, 미사키는 철저히 고립되어 도덕을 어기지 않으려는 도덕적 세속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둘이 운전이라는 매개를 통해 만나게 됩니다. 여기에 원작에 등장하던 차 사브900컨버터블은, 사브900 터보로 바뀌었습니다. 아쉽게도 영화에서 컨버터블을 열고 다니는 모습을 보지 못합니다만 단 둘만 존재하는 공간을 통해 고립된 섬 하나를 보여준 연출은 오히려 나았다고 하겠습니다.
영화 중간, 연극을 연출하는 가후쿠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담으려는 다카츠키에게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읽으라"고 명합니다. 아무리 연출자라지만 배우에게 대본을 그냥 읽기만 하라는 것은 배우에게 모욕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작은 나"가 아닌 "온전한 나"를 세상에 투영하기 위한 하마구치 류스케의 반어가 아닐까 떠올려 보게 됩니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던 가후쿠가 온전히 영화 전체에 감정을 싣고 미사키의 집 터에서 자신을 내던지듯 잉여된 감정이 투영될 때에는 아주 약간이나마 몸둘바를 모를 정도이기도 했으니까요.
그리고 이어지는 영화의 백미이자 압권! <바냐 아저씨>를 연기하는 가후쿠였습니다.
<바냐 아저씨>를 통해 배우로 복귀한 가후쿠는 과거에만 매몰되거나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는 세속적 도덕인의 한계와 거짓된 인생을 연기하는 사람을 넘어, 스스로 하나의 인격으로 발돋움합니다. 과거와 부인이라는 세계 하나를 깨뜨리고 온전히 스스로 자립해 <바냐 아저씨>라는 연극으로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묵시적인 주제를 설파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영화 속 관객에게 던지는 대사이지만 그 액자 바깥 관객에게 내뱉은 가후쿠의 대사 하나하나는 화살처럼 날아와 가슴에 꽂힙니다. 가후쿠 역의 니시지마 히데토시 그는 그대로 화살이 되어 관객과 합일합니다.
많은 이들이 이 대목에서 흐느끼거나 눈물 흘리지 않을까.
영화에서는 에필로그일 대목은 가슴에 꽂힌 화살을 감독이 걷어가는 듯합니다. 수줍게 손을 내밀면서 악수를 청하는 듯하게도 느껴집니다. 어디 그뿐이었을까요. 스스로 무너진 집에서 자신을 용서하며 도덕적 세속인이 아닌, 진정한 도덕인으로 바뀌어가는 미사키에게서 눈부신 "성장"을 보게 합니다. 많은 특히 그 또래 여성 관객에게 상당한 공감을 불러일으킬 영화적 카타르시스였습니다.
<아사코>밖에 하마구치 류스케를 알지 못한 터라, 감독을 이러저러 평가한다는 것은 이 글을 적는 저에게도 부담입니다. 다만 무라카미 하루키의 원작에 기죽지 않고, 오히려 자신만의 <드라이브 마이 카>를 액자로 깔고 고전인 <바냐 아저씨>를 비틀어 용서와 화해를 말하는 하마구치 류스케에게서, 섣부른 평가는 오히려 덧없고 무색하다는 말을 저 자신에게 하게 됩니다. 다만 누구나 그러하듯이 내 차를 맡긴다는 것은, 결국 내 인생을 맡긴다는 것에 다르지 않습니다.
내 차를 운전하는 미사키에게서 가후쿠가 느낄 그 이상의 미래에 대해 역시나 섣부른 판단은 덧없고 무색할 뿐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바냐 아저씨>를 세계 각국 특히 한국어와 수어 등으로 표현한 대목은 하마쿠치 류스케 식의 화해와 용서에 대한 제스쳐가 아니었을까. 또한 왜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원작으로 두었는지도 미약하나마 짐작하게 합니다. 그래서 그가 말하는 결론을 앞으로 열렬히 보고 싶다는 갈망을 가지게 합니다. 더욱이 영화 마지막에서, 용서와 화해를 넘어 새로운 세계로 나간 미사키와 가후쿠를 상상하는 일은, 이 영화를 온전하게 감상한 관객에게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가 작게나마 내준 감사가 아니었을까, 그저 짐작해 볼 따름입니다.
덧. 극 중 언어 장애, 정확히는 말 장애가 있는 이유나 역을 맡은 박유림 배우의 수어로 결론 맺었던 <바냐 아저씨>는 영화의 백미였습니다. 눈물이 흐르려는 감정을 꾹 지르누르느라 호된 고생을 하였답니다. 박유림 배우님, 오래 기억하도록 할게요.
추천인 15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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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유림 배우의 소냐 대사가 공허한 가슴을 차곡차곡 채워주더군요.
하루끼원작보다 바냐아저씨 이야기가 더 궁금했던 영화였어요.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