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 미제라블>이 보여주는 원인모를 사회적 난제.
정말 좋은 영화였습니다. 이 영화를 본 뒤 많이들 언급하시는 카소비츠 감독의 걸작 <증오>, 저는 그것보다도 본 영화가 더 좋았습니다. 프랑스의 사회적 문제이자 유럽, 더 넓게는 지구 전역의 난제인 이 딜레마를 영화가 묘사하는 방식이 여간 흥미로운 것이 아니었기에 이렇게 글을 써봤습니다. 아무쪼록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스포일러)
2018년 여름 즈음, 그러니까 프랑스가 월드컵에서 우승하는 시점에서 영화는 시작한다. 온 국민이 승리의 성취감과 환희에 젖어 하나로 화합한 상태임을 보여주는 영화의 프롤로그는 자유, 평등, 그리고 박애라는 프랑스를 상징하는 이 세 관념이 지금의 프랑스에서 온전하게 작동하고 있음을 일견 드러내 보인다.(영화의 시작부에서 이사가 축구선수 음바페를 자신의 영웅처럼 언급하는 것은 이 장대한 국가적 성취에 이민자 출신의 스포츠 스타가 그 근간을 이루고 있다는 진보적 뉘앙스로 읽힌다.) 하지만 레쥬 리 감독은 단언한다. 그 단합은 찰나의 허깨비 같은 것이라고. 그 일시적 단합력에 덮인 허울을 걷어낸 뒤 영화는 증오가 증오를 낳고 불신이 불신을 부르는, 어디서부터가 문제인지 그 근원을 도통 알 수 없는 혼돈의 장소로 관객을 우겨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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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한 사건에 의해 조성된 일시적 사회적 혼란이 아닌 오랜 시간 동안 축적된 혐오와 불신의 딜레마를 영화는 어떻게 2시간이라는 짧은 시간 내에 관객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 <레 미제라블>이 선택한 전략은 누적된 시간을 배제하는 동시에 이를 타자의 시선을 빌려 관객에게 전달하는 방식이다. 영화는 하루 이틀 정도의 시간대만을 다루며 그 하루를 혁명과, 혁명의 순간에 이르기까지의 시간대로 양분한다. 관객에 따라서는 전반부에 묘사되는 경찰의 과민한 대응과 후반부를 장식하는 소년들의 폭력적 행위가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느낄지도 모르나 우리는 그 하루에서 이틀 남짓한 시간대에서 벌어진 파국의 기원을 보지 못했음을 상기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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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들이 방문할 때마다 시민들은 꼭 다음과 같은 수식을 덧붙여 말한다. ‘이번엔’, ‘또’. 반대로 경찰들은 이곳 몽페르메유는 예전부터 각종 범죄가 빈번한 험악한 곳이라 말한다. 극중 인물들의 입장에선 이 모두가 숱하게 겪은 곤혹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관객인 우리의 입장에선 모든 것이 처음 대면하는 에피소드들에 불과하다. 기저에 도사린 온갖 혐오의 뉘앙스들을 암시만 한 채 파국의 발단, 전개 및 절정을 단 하루 분량으로 축약시킨 영화의 선택은 결론적으로 사건의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모호하게 흩으려버린 셈이 된다. 이 사건을 처음 접한 우리에게 먼저 제시되는 것은 경찰들의 과한 진압이지만 우리는 이에 앞서 시민들의 잦은 범법행위가 숱하게 선행되었고 경찰들의 폭력성은 이 누적된 결과가 초래한 어쩔 수 없는 차선책이었을지도 모를 가능성을 절대 배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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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인과관계의 불분명함은 이 증오와 불신의 딜레마가 단순히 특정 집단이 불러온 어떠한 원인을 제거함으로서 해결될 성질의 문제가 아님은 물론 어느 개인을 단죄함으로서 해결될 문제도 아닌 총체적 난제임을 말한다. <레 미제라블>은 지독히도 이례적인 특수한 날의 비극에 대한 영화가 아닌, 긴 시간으로부터 비롯된 증오감의 누적에 의해 언젠간 찾아올 필연적 하루에 대한 영화적 구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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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극중 사건을 내부자의 시선이 아닌 외부에서 전근을 온 스테판의 시점을 경유하여 관객에게 전달한다. 어디서부터 시작인지도 모르겠는데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아수라장이 되어 있는 곳을 처음 마주하는 이의 당혹감, 우리는 스테판의 이러한 어찌할지 모름의 감정에 마음을 기대 사건을 통과한다. 영화는 그가 아들 하나를 둔 이혼남이라는 설명을 간략하게 하긴 하나 그의 개인사를 이 이상으로 파고들어가지 않는다. 그는 좁게는 몽페르메유 외부에 거주하는 프랑스 인의 시선, 넓게는 프랑스라는 국가를 특정 이미지로만 어렴풋이 인식하며 그들이 처한 상황에 무지한 익명의 외부자들 시선 전체를 대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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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존재유무조차 알지 못했는데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사회는 곪을 대로 곪아 붕괴되기 일보직전이다. 여기서 문제를 이제 막 직시한 외부인이 응당 갖추어야 할 자세는 무엇일까. 자연스레 관객의 난처한 반응을 자아내는 스테판의 시선은 그 자체로 하나의 질문에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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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영화가 비단 스테판이라는 외부자의 시선에만 국한되어 사건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드론촬영을 통해 사건이 발생하는 공간 전역을 조망하는 뵈즈의 시점, 절대 간과할 수 없는 하나의 포인트다. 요컨대 우리는 이 모두 사건을 방관자의(뵈즈) 눈과 외부인의(스테판) 심정으로 접하게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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뵈즈의 시점 숏이 처음 제시되는 순간, 그 순간에 뵈즈는 자신의 드론을 이용해 동네 여자 아이의 신체를 관음하고 있다. 영화의 메인플롯과 아예 동떨어진 곳에서 출발하는 이 시점 숏은 뵈즈라는 인물이 영화의 서사에서 위치하고 있는 곳을 드러낸다. 그는 몽페르메유라는 극중 공간에서의 내부자이나 서사의 관점에서 철저히 핵심에서 유리되어 있는 외부자에 다름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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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레 미제라블>이 흥미로운 것은 영화의 플롯이 이러한 외부자의 방관성에 의해 작동된다는 점이다. 자신은 이 사건과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방관자 뵈즈의 시점, 그 시점(뵈즈가 찍은 경찰의 영상) 하나를 쟁취하기 위해 이전부터 사회의 기저에 깔려있던 모든 이해관계가 여기저기서 충돌하고 극중 공간이 근원 모를 증오와 혐오가 집산하는 각축장으로 변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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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영화는 뵈즈가 초래한 이 한바탕의 파국을 통해 방관자들의 무책임함을 힐난하고 있는 것인가? 마냥 그렇다고 볼 수는 없다. 뵈즈의 영상촬영은 사소한 행위 하나에 쉽사리 흔들리는 이 사회의 얄팍한 기반을 반증하는 사례였을 뿐 이 모든 사태의 근본적 발단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허나 뵈즈의 방관이 본의 아니게 이 비극의 한 복판에 위치하게 되는 순간, 이 모든 난제 속에서 팔자 좋은 방관은 결코 지혜로운 처사가 될 수 없으며 외려 더 큰 화를 불러 올지도 모른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것이 <레 미제라블>의 플롯이 은근하게 취하고 있는 역설적인 알레고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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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 미제라블>은 해답을 제시하는 데에는 무관심하며 그저 이 진퇴양난의 사태를 냉정한 시선으로 다층적으로 조형하는 데에 몰두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이 모든 비극의 심각성을 자각하게 만드는 영화다. 나아가 영화는 일말의 가능성이 엿보이는 순간에서 조차 그 일시적 화합이 가진 한계를 구태여 꼬집어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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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끼사자를 훔친 이사를 찾기 위해 경찰들이 그의 가정을 방문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경찰 크리스와 이사의 어머니 사이의 골이 깊은 갈등을 마주한다. 이때의 영화는 이민자 출신인 이사의 어머니가 하는 대사의 자막을 부러 스크린에 표기하지 않는다. 줄곧 스테판의 시점에서 진행돼오던 본 영화가 내린 이러한 결단의 함의는 또렷하다. 여기엔 명백한 타자화의 의도가 있는 것이다. 그 순간, 마찬가지의 이민자로 보이는 또 다른 동료경찰 그와다가 나선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와다와 어머니의 대화, 그들은 불어가 아닌 서로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대화하며 이번 역시 자막은 제시되지 않는다. 그러기에 여전히 우리는 그들의 대화를 해석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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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상황은 얼핏 보기에 그와다의 예의바른 태도로 인해 그럭저럭 잘 마무리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화합은 그와다와 이사의 어머니가 속한 타자화의 영역에서만 일시적으로 일단락된 것에 불과하다. 이는 공권력과 민중의 화합으로 나아가는 근본적 전진이 아니다. 되려 증오와 불신의 정서는 점차 누적되고 타자와 나 사이를 구분짓는 경계는 더욱 선명해진다. 그렇게 곧이어 당도할 비극은 잠시 유예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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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이와 대구를 이루는 장면이 등장한다. 겁에 질린 뵈즈는 살라를 찾아가 메모리카드를 전달하고 경찰들과 그 외의 세력들은 이를 살라로부터 쟁취하려 힘쓴다. 살라는 혐오가 기본 베이스로 깔린 크리스와 시장과의 협상을 모두 거절하며 스테판과의 대화에서 일종의 절충안을 내놓는다. 폭력, 의심, 혐오의 지독한 굴레 끝에서 마침내 이성적인 두 사람간의 합리적 타협이 성사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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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라와 스테판이 협상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영화는 이를 먼발치서 지켜보는 시장의 무리들과 경찰 크리스와 그와드의 시점 숏을 배치한다. 그들의 시점에서, 살라와 스테판의 이성적 대화는 좀처럼 들리지 않는다. 오랜 세월을 거처 마을이 처한 사회적 난제를 온 몸으로 통과한 그들의 시선에서 이 사태를 이성적 사고로 해결한다는 속편한 발상 자체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방안인 것이기에 그 순간 그들의 시점에서 살라와 스테판은 다시금 타자의 자리에 놓이며 영화는 양자 간의 틈을 부러 강조하는 것이다. 살라 역시 이 사실을 익히 아는 듯하다. 메모리카드를 스테판에게 건네면서 그는 말한다. 그럼에도 막을 수 없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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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문드문 제시되는 정보를 통해 우리는 살라가 폭력의 세계에 몸을 담았다 회개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의 일관적 태도로 보건대 그는 정말 마음을 고쳐먹은 듯하다. 하지만 중요한 순간이 찾아오자 그의 주변 이들은 여지없이 그의 과거를 들먹이며 그를 겁박한다. 순간순간의 합리적 태도가 사건의 근본적 해결책이 되기엔 이미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악화된 상태이며 마을의 역사는 번번이 그들의 발목을 잡는다. 우리는 보지 못했지만 분명히 존재했을 수많은 불신과 혐오의 사례들, 영화가 묘사하는 하루 이틀의 시간대는 쌓이고 쌓인 이 화면 밖의 무게감에 늘 압도당한 채 위태롭게 존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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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일말의 되돌릴 여지 하나 없이 이제는 너무도 늦어버린 걸까? 과연 우리는 이 막막한 벽 앞에서 어찌해야 되는가. 영화가 구사하는 서스펜스는 바로 이 어찌할지 모름의 감정으로부터 추동된다. 예컨대 경찰과 이사의 추격 장면, 이 장면에서 서스펜스가 발생하는 이유는 굉장히 모호하다. 우리는 그 순간 경찰의 편에 서서 이사가 잡히기를 바라지도, 혹은 이사가 그들로부터 탈출하기를 바라지도 않는 굉장히 애매한 위치에서 이 추격씬의 격동을 감각한다. 마침내 이사의 무리들이 떼를 지어 경찰들을 위협하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도 우리는 공권력의 편도 아닌 동시에 민중들의 편도 아닌, 제3자의 입장에 서서 무언가 굉장히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상황에 대한 인식만을 대강 한 채 그저 점차 고조되는 이유모를 서스펜스의 혼란을 체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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뵈즈의 메모리카드가 회수되고 모두가 집으로 돌아간다. 이때의 영화는 아주 사소하고도 정석적인 연출로 이 아스라한 정서들을 효과적으로 한데 모아낸다. 크리스, 스테판, 그와드, 그리고 그 외의 인물들까지. 이 지극히도 피곤했던 하루를 마친 뒤 모두가 자신의 집에 돌아가 고뇌에 잠긴다. 단일한 사건에 대해 저마다 다 다른 고민이 담긴 힘없이 푹 죽은 얼굴들, 그 얼굴들의 합이 자아내는 혼란스런 상념은 관객이 이 하나의 사건을 보다 더 다층적인 차원에서 숙고하도록 유도한다. 명확한 원인 없이 무작정 끓어오르는 서스펜스, 이를 갈무리하는 담담한 연출, <레 미제라블>은 들끓는 감정들의 총합을 장르적으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극의 핵심 화두로 환원시킨다는 점에서 과연 탄복스러운 결과물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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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동으로도 읽히는 동시에 혁명으로도 읽히는 영화의 클라이맥스 역시 이와 궤를 같이한다. 무차별적으로 폭약을 터트리는 동시에 경찰들을 공격하며 소년들은 굉장히 격한 시위를 이어간다. 그리고 그들의 무자비한 공격은 시장에게로도 향하기에 이른다. 평소 그들과 그다지 적대적인 관계이지 않아 보였던 시장에게도 그들이 폭력을 가했다는 것은 그들의 시위가 공권력에 대한 정당한 투쟁과는 거리가 있어 보임을 시사한다. 부풀대로 부풀어 언젠가는 터지고야 말았을 그들의 증오감, 경찰들의 격한 진압은 이것에 결정타를 가했던 것이다. 표출에 대한 일종의 명분을 획득한 증오, 이것이 폭력적 매커니즘을 거쳐 산발될 때 어떠한 결과가 초래되는지에 대해 <레 미제라블>의 클라이맥스는 한 치의 타협 없는 결과물을 선보인다. 앞서 새끼사자를 훔친 죄로 어른사자의 우리에 갇혀 심리적 고문을 당했던 이사의 에피소드는, 사소한 행위가 언젠간 큰 재앙을 초래하리라는 영화의 명백한 직유로 읽혔다. 이 메타포에 내포된 비약이 실제로 가능한 까닭은 그들이 딛고 서있는 사회의 토대가 그 보잘 것 없는 사건 하나에 처참하게 가라앉을 만큼 심각히 허물어져 있기 때문일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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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마지막, 우리에게 세 가지의 시점이 제시된다. 화염병을 든 이사, 그에게 총을 겨눈 스테판, 이 모든 상황을 또 다시 방관하는 뵈즈의 시점. 그 누가 어떠한 선택을 하던 이는 최악을 일시적으로 회피하기 위한 차악의 선택에 불과하다. 이사가 화염병을 내려놓든, 스테판이 그에게 겨눈 총구를 거두든, 혹은 뵈즈가 스테판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네든, 셋 중 하나의 경우만 실현되더라도 최악의 참극은 면할 수 있겠지만 핵심은 이 셋 모두가 성사되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비극을 잠시 유예시키는 것 정도 외에는 별다른 개선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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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국민이 하나로 투합한 오프닝의 허상이 지워진 엔딩의 자리에서, 우리는 이사와 스테판, 그리고 뵈즈 이 셋의 분할된 시점을 통해 갈갈이 찢겨진 프랑스의 실체를 마주한다. 자유, 평등, 박애. 그 순간엔 이미 허울이 돼버린지 오래인 것들이다. 이 막연한 난제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기껏해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는 무책임한 말 한마디를 다시금 되뇌이는 것 외에 별 다른 수가 있을까.
참 이 영화의 엔딩에 대해서 뭐라 말을 해야할까요... 엔딩이 던지는 질문을 생각할 수록 착잡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