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옥] 간략후기
김혜수, 이선균, 이희준 주연의 액션 느와르 영화 <미옥>을 보았습니다.
성과 폭력이 넘실대는 어둠의 세계 한가운데에 있는 주인공이 여성이라 하여 이목을 끈 이 영화는,
남성중심적 현장에서 여성을, 그것도 부차적인 인물이 아닌 중심인물로 그리는 데 있어서
어떤 지향점을 가져야 할지 고민한 흔적이 곳곳에 묻어 있습니다.
워낙에 쉽지 않은 문제이기 때문에 여러 시선이 있을 수 있겠지만,
독특한 세계관과 김혜수라는 독보적인 배우가 어우러져 눈에 띄는 여성의 초상이 만들어졌습니다.
<미옥>이 잘 만든 영화, 좋은 영화냐고 물으신다면 선뜻 그렇다고 답하기는 어렵습니다.
두 시간은 가뿐히 넘는 요즘 한국영화들 사이에서 보기 드물게 90분에 딱 맞춘 러닝타임이지만,
영화의 호흡이 그에 맞게 날렵하기보다 기존의 2시간 이상 되는 영화와 차이가 크게 없습니다.
사연으로 늘어지는 영화가 되지 않기 위한 나름의 노력으로 보이지만서도
영화가 밀도 있다기보다는 겅중겅중 건너뛰는 느낌이라 그 노력이 온전히 결실을 보진 못한 듯 합니다.
'액션 느와르'를 표방하고 있지만 막상 액션 장면의 비중이 크지 않아서
90분의 러닝타임이 예상외로 후딱 지나가지 않는 느낌이 드는 것도 같고요.
하지만 <미옥>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미로운 지점이 있는데,
그것은 남성 위주로 이루어진 폭력 사회에 뚝 떨어진 듯한 주인공과 사회의 관계입니다.
주인공 나현정(김혜수)은 재벌형 기업이 된 조직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권력을 행사하지만,
그녀를 둘러싼 조직 사회의 면면은 여성이 철저히 성적으로 소비되는
기존의 남성 중심 폭력조직 사회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습니다.
눈 하나 깜짝 않고 같은 여성의 성을 남성을 협박하는 데 사용할 만큼 냉혹하지만,
주변의 남성들은 여전히 그를 동료나 경쟁자가 아닌 '여성'으로서 바라봅니다.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이웃 조직의 우두머리는 그녀 면전에다 대놓고 "불알 있는 척"이라며
그녀의 행보를 '남성으로 가장한 여성'의 모습으로 조롱합니다.
동료 임상훈(이선균)이나 보스 김재철(최무성) 같은 조직 내의 남성들은
그녀를 업무적인 관계 그 이상의 애틋한 시선으로 그녀를 대하고요.
이쯤 되면 '조폭을 배경으로 한 멜로'인가 싶겠지만, 따지고 보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나현정이 이성에게 받는 감정만 잘 보일 뿐, 그녀가 이성에게 주는 감정은 잘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현정이 다른 남성 동료들에 비해 포용력이나 인간성을 좀 더 갖춘 것으로 보이는 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감정에 휩쓸리다 일을 그르치는 물렁한 인물로 그려지진 않습니다.
감정 때문에 이성을 잃고 일탈과 폭주를 일삼는 이들은 오히려 그녀 주변의 남성들이죠.
그들과의 과거가 어떻고를 막론하고 나현정은 그들을 어디까지나 동료와 보스로서 대할 뿐입니다.
영화 속에서 볼 수 있는 가장 단단한 연대도 김여사(안소영)-나현정-웨이(오하늬)로
이어지는 여성들 간의 관계에서 나타나고요.
그토록 침착한 그녀로 하여금 격렬한 행동을 유발하는 것은 '모성'인데,
그렇다고 모성이라는 감정이 여성 중심 영화에서 떼어내야 할 강박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역대급 여성 액션 영화로 칭송받는 <킬빌>의 주인공도 모성에 의해 움직이듯이 말입니다.
말하자면 저는 <미옥>을 철저히 남성중심으로 세팅된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남게 된 여성이,
그런 사회가 여전히 지키고 있는 습관적인 인식 속에서 그 생존을 이어가려는 분투로 보았습니다.
가혹한 성장 과정 속에서 어렵게 눈에 띄는 지위에 올랐지만 그 세계를 충실히 통솔할 뿐
끝내 변화시키지 못해 벗어나려는 여인의 쓸쓸한 주관 같은 것이 느껴졌습니다.
이건 어떻게 보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해석일 수도 있을 겁니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주인공만 여성이지 그 배경은 남성중심적 영화와 다를 바 없다는 지적도,
남성중심적 세계관에서 생존한 여성이 끝까지 바뀌지 않는 그 세계 안에서
벌이는 자기 나름의 싸움을 보여준다는 평가도 가능할 겁니다.
<미옥>이 이런 흥미로운 여성의 모습을 보여줌에 있어 김혜수 배우는 거의 모든 것에 가깝습니다.
지극히 인위적인 헤어스타일을 하고도 이 영화가 판타지처럼 보이지 않게 하는,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증발시켜버린 감정의 끝을 붙잡은 강인한 여인의 모습이 눈부십니다.
중간중간 유혈낭자하고 아찔한 액션을 소화할 때의 카리스마도 명불허전이지만,
자신을 보란듯이 억누르던 상대방을 보란듯이 비웃는 어떤 장면에 이르면
'진짜 겁나 멋있다'라는 마음이 육성으로 튀어나올 정도입니다.
영화 자체에 대한 평가를 떠나, <미옥>은 김혜수라는 배우의
가장 멋진 초상을 볼 수 있는 영화 중 하나로 남기 충분합니다.
(다만, 일상의 피로감과 관성적인 폭력성이 버무려진 <차이나타운> 속 캐릭터보다는
좀 더 팬시한 느낌으로 나현정이란 인물이 구현된 부분도 없지 않습니다.)
저열하다고 할지 열렬하다고 할지 알 수 없게 끓어오르는 감정을 분출하는 임상훈 역의 이선균 배우,
정말 한대 때려주고 싶을 만큼 악랄한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최대식 검사 역의 이희준 배우,
나현정을 보필하는 김여사를 연기한 '1대 애마부인' 안소영 배우와
'택이 아빠'임을 믿기 힘든 김재철 역의 최무성 배우, 김민석 배우, 오하늬 배우까지
배우들의 연기는 이의를 달기 쉽지 않게 만족스러웠습니다.
오늘 <미옥>이 첫 시사를 가진 후 항간에서 쏟아진 다소 폭력적이기까지 한 평가는
'남성 감독이 여성 액션영화를 만든다는데 얼마나 잘 만드나 보자'라는 경계도 영향을 미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엔딩 크레딧을 보니 의외스럽게도 이 영화의 각색을 담당한 이가
박찬욱 감독과 여러 작품을 함께 하고 최근 <비밀은 없다>를 쓰기도 한 정서경 작가더군요.
그 영향인지는 모르겠으나, 남성성으로 가득한 사회에 놓여진
<미옥> 속 나현정의 모습은 그 흔한 남성 느와르의 모사라기보다는,
정형화된 남성 느와르에 균열을 가하려는 시도로 보여 흥미로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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