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자신과 당신의 것> 리뷰 및 해석 (스포 다량)

극장에서 영화를 본 지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났다. 앱으로 극장 시간표는 꾸준히 확인했지만 그다지 보고 싶은 영화가 없었다. 그러던 중 홍상수의 신작을 발견했고, 주저없이 예매를 했다. 예고편은 보지 않았다. 제목도 상관이 없었다. 오프닝 크레디트가 올라가기 전까지 내가 확인한 정보라곤 포스터의 이미지와 배우진의 이름 정도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스크린을 통해 홍상수의 작품을 볼 수 있다는 흥분감에 사로잡혔던 것 같다.
극장을 나오면서, 블로그에 글을 쓰기 위해 확인해보니 제목이 어딘가 부자연스럽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 분명 이상한 제목이다. 우선 띄어쓰기가 거슬린다. '당신자신'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라는 건 누구나 안다. 의미도 중의적이다. 쉼표의 위치에 따라 의미가 달리 해석된다. 쉼표를 정가운데 위치시킬 경우 제목은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이 된다. '당신에 대한 이야기와, 당신이 소유한 것에 대한 이야기'를 뜻한다. 쉼표를 뒤에 찍으면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이 된다. 이러면 '오로지 당신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애초에 해석의 오해를 막으려 했다면 '당신의 것'도 '당신자신'처럼 '당신의것'으로 표기했으면 될 일이다. 분명 제목은 의도되었다. 그리고 제목처럼, 내용도 중의적이다.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은 어떻게 보면 ①'당신자신'과 '당신의 것' 모두에 대한 영화이며, 어찌 보면 결국 ②'당신'이라는 하나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당신'을 누구로 보느냐에 따라 해석의 방향은 무한히 확장된다.
화가인 영수(김주혁)에게는 여자친구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민정(이유영). 둘 사이에는 약속이 하나 있다. 술만 먹으면 통제가 안 되는 그녀를 위해 주량을 정해 놓은 것. 영수 앞의 그녀는 분명 술을 절제한다. 영수는 그녀가 혼자서도 잘할 거라고, 그렇게 믿는다. 하지만 영수의 친구들은 그녀가 다른 남자와 술자리를 하며 심하게 취했다는 복수의 목격담을 전한다. 이로 말미암아 둘은 대판 싸우고 민정은 '생각할 시간을 갖자'고 말한다. 영수는 방황한다.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푸념하듯 늘어놓는다. 한편 민정은 이 남자 저 남자를 만나고 있다. 그녀의 특기는 구면인 남자가 말을 걸어도 일단 모른다고 잡아떼는 것, 그리고 술을 먹는 것이다. 술자리에서 그녀는 입버릇처럼 말한다. "좋은 남자가 없어요. 제가 남자 보는 눈이 없나봐요." 얼마 간의 시간이 지나고 영수를 다시 만났을 때에도 민정은 시치미를 뗀다. 모르는 사람인데 왜 말을 놓냐며, 존댓말을 쓰라 말한다. 하지만 영수는 다시 그녀를 만난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거부감 없이, 생경한 높임말로 말한다. "당신이 기준이고 당신에게 맞춰서 살 겁니다."
이 대사에 따라 먼저 '당신'을 민정이라 보고, 그녀의 관점에서 영화를 해석해보자. 이 때의 해석은 ②이 적절할 것 같다. 당신은 술을 먹고 싶다. 오직 한 남자와 마시는 건 싫다. 다른 남자랑 마신다고 남자친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남자친구는 '당신의 것'이 아니며, 당신 또한 '남자친구의 것'은 아니다. '당신자신'은 '당신의 것'이다. 결혼을 한 것도 아닌데, 자유롭게 살고 싶다. 그런데 남자친구라는 사람이 자꾸 구속을 하려 든다. 그와 당신이 한 약속은 딱 하나 뿐이지만 이것조차 지키기가 버겁다. 차라리 약속을 안 하면 안 되나싶다. 결국 당신은 그와 떨어져 있기로 한다. 하지만 외롭다. 좋은 남자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 때 다시 그 남자가 다가왔다. 이제 "당신이 기준"이라 말한다. 비로소 '당신자신'을 그에게 맡겨보아도 좋을 것 같다.
이번엔 영수가 '당신'이라고 해보자. 이 때의 해석은 ①이 합당할 듯싶다. 당신은 여자친구와 "결혼까지 생각했다." 약속 하나는 지켜주었으면 좋겠다. 그녀가 다른 남자와 술 마시는 건 싫다. 술을 많이 마셔서 만드는 긁어부스럼도 싫다. 그녀는 '당신의 것'이니까. 그런데 헤어지고 나서 생각해보니 당신이 그녀를 너무 달달 볶았던 것 같다. 술 좀 마시면 어떤가. 아니, 애초에 그 소문은 잘못되었던 것 같다. 당신의 눈으로 본 적이 없기에 믿을 수가 없다. 당신이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말했던 것처럼 "그 사람을 보고 그 눈을 보고 그 말투를 본 게 아니다." 결국 당신은 그녀를 찾기로 결심한다. 당신의 말처럼 "사랑만이 가치가 있다." 수소문 끝에 겨우 그녀와 닿을 수 있었다. 잠시 생각할 시간을 가졌음에도 여전히 그녀는 '당신의 것'이다. 그렇게 믿는다. 하지만 당신은 이제 관점을 달리해보려 한다. 사랑의 방식을 조금 바꾸려 한다.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 모두를 위하여.
'당신'이 꼭 주인공이란 법이 있는가. 주변인물들도 '당신'이 될 수 있다. 영수의 친구들을 편의상 '당신'이라고 보면(영수의 친구들은 하나의 묶음처럼 비슷한 성격을 지니기에) ②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당신에게는 친구 한 명이 있다. 영수라는 친구이다. 착하지만 고지식하다. 여자친구를 너무 믿는다. 분명 당신은 그녀가 다른 남자와 술을 마시는 것을 보았다.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유혹하는 눈빛을, 똑똑히 목격했다. 그런데도 영수는 당신을 믿지 않는다. 울화통이 터질 지경이다. 분명 내가 봤는데 왜 못 믿는 거지. 걔가 뭐라고 감싸만 도는 걸까. 영수의 생각을 바로잡아주고 싶다. 마치 그가 '당신의 것'인 것처럼 구속하려 드는 스스로를 발견한다.
민정과 술을 마신 두 남자―재영(권해효)·상원(유준상)―도 '당신'이 될 수 있다. 이 때는 ①로 해석할 수 있다. 당신은 카페에서 우연히 아는 여자를 만났다. 분명 아는 사람인데, 그녀는 당신을 모른다. 모른 척하는지도. 상관은 없다. 그녀는 예쁘고 상냥하다. 게다가 당신에게 관심이 있는 것 같다. 그녀는 말한다. "제가 남자 보는 눈이 없나봐요." 그러더니 난데없이 당신을 향해 칭찬을 한다. 귀엽다거나, 몸이 좋아보인다고 하거나. 이런 그녀를 '당신의 것'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뭐든지 다 할 것이다. '당신자신'의 자존심은 잠시 버려도 좋다.
홍상수의 영화는 색깔이 뚜렷하다. 그는 언제나 기교와는 거리를 두어 왔다. 조명은 자연광과 가까우며 디졸브, 와이프 등으로 쇼트를 부자연스럽게 전환하는 일도 없다. 카메라는 철저히 정적이다. 우리의 시점 높이에서 내내 고정되어 있다. 기껏해야 간헐적으로 클로즈업을 할 뿐이다. 영화라는 매체에서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여겨지는 음향효과조차 결여되어 있다. 언제나 작품별로 딱 하나의 음악만을 단조롭게 사용한다. 이렇게 그는 차갑다. 자신의 가치 판단을 철저히 감추고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려 한다. 말하자면 그의 영화는 자연식과도 같다. 건강에 좋다는 무조건적인 장담은 못하지만, 최소한 먹고 체할 일은 없다.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은 자연식을 유지하되, 좀 더 맛있게 만들었다. <오! 수정>처럼 불편하지도, <북촌방향>처럼 난해하지도,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처럼 지루하지도 않다. 그의 단골 소재인 '기억'을 다루면서도 플롯은 선형적이다. 사건과 사건이 뒤엉켜 관객을 헷갈리게 하는 일이 없다. 영수와 민정을 교대로 보여주는 교차편집은 친절하기까지 하다. 이 또한 그의 영화에선 예외적인 일이다. 유난히 그의 영화를 볼 때면 놓친 것이 없을까, 이 쇼트는 무엇을 의미할까 생각하기 위해 신경이 곤두선 기억이 있지만 이번만큼은 편하게 감상했다. 후반부 재원이 상원과 떠들던 대화에서는 극장에 있던 그 누구보다도 내가 가장 많이 웃었다고 장담한다.
홍상수는 배우의 능력을 극대화하는 데도 도가 튼 감독이다. '이 배우에게 이런 매력이 있었나'를 새로이 느끼게 하는 것. 극중 김주혁은 분명히 처음 본 모습이다. 배우로서의 18년보다 예능프로그램에서의 2년이 더 강렬했던 그이기에 홍상수와 함께 하는 그의 모습은 어떨지 우려와 기대가 공존했었다. 다행히 그는 영화가 요구하는 것을 충실히 이행해냈다. 그의 작품 속 다른 모든 남자들이 그렇듯, 반드시 어디엔가 존재할 것 같은 사실적인 모습이다. 도도함과 당돌함을 두루 갖춘 극중 이유영은 <오! 수정>의 수정(이은주)을 떠오르게 한다. 홍상수 작품에의 출석률이 높은 유준상과 김의성의 연기 역시 말할 것이 없다. 감독과 배우의 시너지가 놀랍다.
별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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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영의 재발견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