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고인: 지아 장커 [헤살꾼]
이 글엔 이 작품의 결말이 언급되어 있으니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1. 지아 장커의 신작 ‘산하고인’을 봤다. 확실히 이번 신작은 현재 중국 최고의 거장인 지아 장커의 이전 걸작들에 비해서는 그 밀도가 조금 약하다. 거기다 미래편의 도식적인 전개 방식은 살짝 아쉽기까지 하다. 국내 공개 당시 평론가 사이에서 왜 호불호가 갈렸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이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여온 급속한 산업화로 인한 중국 인민의 정신적 황폐화라는 주제를 멜로라는 새로운 화법으로 풀어내는 솜씨는 꽤나 섬세하다. 또한 도식적이고 다소 거칠지만 하나의 주제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뚝심은 역시 그가 왜 거장인지를 알려준다. 즉 이 작품은 걸작은 아니지만 그래도 평균 이상은 하는 수작이라는 것이다. 이용철 평론가가 씨네21 20자평에 별 한 개 주면서 ‘영화는 저열한 야심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라는 해괴망측한 말을 들을 정도로 후진 작품이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저런 인격 모독적인 발언을 하는 이용철 평론가의 자질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작품은 꽤 준수하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적으로 별 세 개 반을 주면서 ‘서쪽으로 미래로. 중국의 어지러운 고속 장정에 동승한 지아장커’라고 쓴 김혜리 씨의 글이 이 작품에 대한 가장 적절한 평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2. ‘산하고인’의 이야기는 대략 이러하다. 1999년: 타오는 어릴 적부터 친한 친구였던 리앙즈와 진셩 둘 모두에게 구애를 받는다. 본의 아니게 삼각관계가 된 것이다. 하지만 타오는 그런 삼각관계가 불편한지 양측의 구애를 애써 외면한다. 그 결과 친한 친구 사이에서 연적이 되어버린 리앙즈, 진셩 두 친구는 타오를 둘러싸고 싸우게 되고 결국 절교를 하게 된다. 이후 타오는 가난한 리앙즈 대신 부유한 진셩과 결혼하여 달러는 낳는다.
2014년: 진셩과 이혼한 타오는 고향에서 나름의 사업으로 꽤나 성공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사랑하는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신다. 그래서 타오는 외할아버지 장례식에 아들 달러는 부른다. 이미 새로운 가족에 적응한 아들 달러는 친엄마 타오와 서먹서먹한 관계를 유지하다, 아버지의 계획에 의해 호주로 떠난다.
2025년: 대학생이 된 달러는 피는 중국인이지만 정신은 서양인이 된 자신의 모습에 정체성의 혼란을 일으키고 그것을 야기한 아버지 진셩과 대립하게 된다. 그런 와중 달러는 부드럽고 자애로운 선생님 미아를 만나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3. ‘산하고인’은 거장 지아 장커의 작품 세계에서는 이례적으로 꽤나 달달한 멜로 영화이다. 중국 개봉 당시 가장 크게 흥행한 지아 장커의 작품이라는 사실이 그 반증이다. 일단 ‘산하고인’의 뜻은 ‘산이 사라지고 강이 말라도 너의 대한 내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이다. 그리고 이 작품의 과거, 현재, 미래의 중심적인 인물은 타오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의 핵심은 주인공 타오가 어떠한 경우에도 변치 않는 사랑을 하는 대상이 무엇인지가 중요하게 된다.
4. 일단 이 작품은 아주 특이하게도 과거, 현재, 미래 이 세 부분의 화면 비율이 틀리다. 먼저 과거는 1.33:1, 현재는 1.85:1, 미래는 2.39:1로 되어있다. 최근 일련의 영화들이 상황에 따라 화면 비율을 조정하면서 작품의 주제 의식을 표출한 점을 상기한다면 ‘산하고인’의 화면 비율 조정이 의미하는 바를 명확히 알아야 작품을 이해하는데 용이할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펫 샵 보이즈의 ‘go west’가 있다.
5. 작품의 처음 시작인 1999년. 새로운 천년에 대한 희망으로 청년들이 신스팝의 최고 거장인 펫 샵 보이즈의 대표곡 ‘go west’에 맞춰 춤을 춘다. 거기에 타오도 있다. 서쪽에 희망이 있다는 내용을 가진 이 곡은 해석에 따라서는 서구 우월적인 노래로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꽤나 노골적이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타오를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은 흥겨운 노래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춘다. 과연 그들은 단순히 노래가 신나서 춤을 추는 것일까. 아니면 시장 개방을 통해 급속히 유입되는 서구 자본주의의 달콤함을 흠모해서 신나게 춤을 추는 것일까. 물론 그들은 전자의 이유로 춤을 췄을 것이다. 그러나 작품은 후자에 방점을 찍으며 자신의 이전 주제인 서구 자본주의에 의한 급속한 산업화로 인해 중국인들이 겪는 정신적 혼란을 이번에도 반복해서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 속에 흘러나오는 펫 샵 보이즈의 ‘go west’ 두 가지 상이한 의미를 가진다. 약동하는 젊은 청춘들의 희망과 서구 자본주의에 대한 중국인들의 선망과 동경이다.
6. 1999년 과거 편에서는 1.33:1이라는 좁은 화면 비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좁은 화면 비와 달리 그 안에는 꽤나 많은 인물들이 북적거린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작품의 핵심 인물인 타오, 리앙즈, 진셩이 모두 함께 하고 있다. 즉 비록 화면 비는 가장 작지만 인간미라는 측면에서는 가장 충만하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 공간에서는 중국인의 정체성이 그대로 묻어나 있다. 문제는 그런 상황에서 부유한 진셩이 서구식 자본주의를 동경하며 무분별한 탐욕을 부린다는 것이다. 돈으로 탄광을 헐값에 매수하는 것을 시작으로 심지어는 자신이 사랑하는 타오를 돈으로 유혹하며 가난한 친구 리앙즈의 자존심을 뭉갠다. 친한 친구인 두 사람이 돈을 매개로 사랑을 쟁취하려는 진셩의 만행으로 관계에 금이 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타오는 가난하지만 자신에게 조심스럽게 사랑을 고백하는 리앙즈에게 마음을 두지만 밀려오는 서구식 자본주의의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지 못 하고 결국 부유한 진셩과 결혼하여 아들을 출산하는데 그 이름이 가관이다. 미국 화폐인 달러인 것이다. 거의 노골적으로 중국인들의 서구식 자본주의에 대한 동경을 드러낸 것이다. 그렇게 타오는 펫 샵 보이즈의 ‘go west’에서 리앙즈로 대표되는 약동하는 젊은 청춘들의 희망 대신 진셩으로 대표되는 서구 자본주의에 대한 중국인들의 선망과 동경을 선택한다. 이후 자본의 증식에 대한 일종의 증표라도 되는 듯이 작품은 서구 자본주의가 정착한 2014년 현재에는 화면 비를 1.85:1로 변화시키고 그것이 완전히 내면화된 2025 미래에는 2.39:1로 변화시킨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 속, 화면 비율크기는 서구식 자본주의를 얼마나 많이 습득하느냐에 달려있다. 즉 화면 비율이 커질수록 중국의 서구식 자본주의화가 더욱 더 빨라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대가로 타오를 비롯한 주변 인물들, 특이 아들 달러의 정체성 혼란과 고독은 극에 달한다.
7. 2014년. 화면 비율이 1.85:1로 변한 현재에서 타오는 진셩과 이혼하고 혼자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며 꽤나 부유하게 산다. 하지만 타오는 아들 달러의 미래에 대한 고민 때문에 결국 양육권을 진셩에게 넘긴다. 비록 부부의 연을 끊었지만 타오의 내면에도 진셩과 마찬가지로 서구식 자본주의에 대한 환상이 남아있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타오는 이름을 피터로 바꾸며 완전히 서구식 자본주의로 이동한 진셩과 달리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만큼은 결코 버리지 않는다. 외할아버지의 장례식 날 자신을 엄마가 아닌 영어식 마미로 부르는 아들 달러를 호통 치거나, 또는 중국식 전통 장례식 절차를 강제하는 타오의 모습이 그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오는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서구식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정체성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면서 결국 아들 달러의 호주 이민을 승낙한다. 이번에도 타오는 펫 샵 보이즈의 ‘go west’ 서구 자본주의에 대한 중국인들의 선망과 동경 쪽에 손을 들어 준 것이다. 그렇게 서구식 자본주의 확장에 맞춰 화면 비율도 커지게 됐지만 인간관계는 오히려 역으로 축소되어 버린다. 자본의 힘은 커졌지만 그 대가로 인간관계가 단절되어 소외 효과도 마찬가지로 커진 것이다.
8. 2025년. 화면 비율이 2.39:1로 더 커진 미래에는 정신적으로 완전히 서양인이 된 아들 달러가 중심에 있다. 이름에서 보듯 달러는 서구 자본주의에 대한 아버지 진셩의 의지가 반영된 인물이다. 그리고 그런 아버지의 소원에 맞춰 달러는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며 호주에 안정적으로 생활한다. 문제는 비록 정신은 서양인일지언정 피는 엄연히 중국인이라는 것이다. 이 불일치는 달러에게 정체서 혼란을 부추긴다. 더욱이 그렇게 서양을 동경하면서도 정작 아버지 진셩 본인은 영어 한마디 하지 못 하면서 아들 달러에게 중국어로 말하라는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한다. 그렇게 완전히 서구식 자본주의에 완벽히 적응한 대가로 얻은 2.39:1 최대 화면 비율 속 인물 관계는 처참하게 깨져 산산조각난다. 온전한 가족도, 진심으로 나누는 친구도 연인, 심지어는 자신의 정체성마저도 없다. 오직 파편화된 고립된 고독한 개인만이 있을 뿐이다. 그 때 달러의 앞에 새로운 선생인 미아가 찾아온다. 미아는 명백히 달러의 헤어진 어머니 타오에 대한 상징적 대체물로서 그가 억지로 서양인이 되면서 잃어버렸던 모든 것을 나타낸다. 즉 미아는 달러의 텅 빈 내면을 채워 줄 정체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닌 게 아니라 미아는 중국어와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몸은 중국인이지만 정신은 서양인인 달러의 불완전한 상황을 조율해준다. 그 때문인지 달러는 미아에게 잠시 연심으로 가지지만 성숙한 어른인 미아는 그런 달러를 차분하게 달래며 그의 어머니 타오 곁으로 보낸다.
9. 그리고 마지막 2.39:1 화면 비율 속 완전히 서구식 자본주의화가 된 미래에서 완전히 혼자가 된 타오는 고독한 모습으로 만두를 만든다. 그 때 자신으로 부르는 아들 달러의 목소리가 들린다. 물론 이것은 두 모자의 해후에 대한 일종의 암시이다. 그리고 타오는 불현 듯 눈 내리는 밖으로 나가 그 옛날 1999년 때처럼 펫 샵 보이즈의 ‘go west’에 맞춰 혼자 춤을 춘다. 처음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춤추던 때와 비교하면 참으로 살풍경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오의 이 처연한 춤 동작은 이상하게도 보는 이에게 감정적 울림을 전달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타오에게 있어 ‘산하고인’이 무엇인지 명징하게 보여 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타오가 아주 먼 길을 돌고 돌아 펫 샵 보이즈의 ‘go west’가 가진 두 가지 의미인 청춘의 희망찬 미래와 서구식 자본주의의 동경 사이에 갈팡질팡하다가, 드디어 전자로 복귀했기 때문이다. 즉 가장 순수했던 시절의 그 때 그 모습을 스스로 혼자 재현한 것이다. 시대의 조류와 나이 듦에 맞춰 스스로 서구식 자본주의에 편승했던 타오가 그것을 조용하지만 확실하게 거부한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아들 달러의 존재가 있다. 타오는 아들 달러의 환청을 듣고 춤을 춘 것이 그 일례이다. 그렇게 타오는 서구식 자본주의에 의한 인간관계의 파괴를 뒤로 하고 아들 달러와 함께 할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다.
추신: 위에 이용철 평론가를 거론하면서 안 좋은 소리를 적었지만 결코 개인적으로 그 분에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단지 이 두 눈으로 ‘산하고인’을 감상할 결과, 별 한 개 받을 정도로 처참한 작품이 절대 아님에 따른 반대 의사로 그런 것입니다. 진심으로 만약 ‘산하고인’이 별 한 개 받을 정도면 역대 등장한 모든 걸작 중 별 세 개 이상 넘는 작품은 없을 겁니다. 여하튼 거듭 말하지만 저는 결코 이용철 평론가에게 개인감정이 없으며 그럼에도 그로 인한 감정적 상처가 있다면 진심으로 사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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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모쪼록 님에게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_^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결국 후에 리앙즈는 시대에 뒤쳐져 탄광에서 계속 일을 하다가 결국 폐암을 얻어서 타오에게 돈을 빌리는데 결국은 감독 자신도 옛 중국에 대한 아련한 향수나 신념이 부질없는 것이라고 냉정히 생각한 건지 그것에 대해서 궁금한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중국의 서구식 자본주의화는 어쩔 수 없는 시대 상황이라는 일종의 체념같은 것으로 봤습니다. 리앙즈를 선택하자니 미래가 없고, 진셩을 선택하자니 인간적인 삶이 없고, 한마디로 현재 중국에서 산다는 것은 진퇴양난에 빠져 허우적거린다는 것이죠.
이용철 평론가가 딱히 지아 장 커 감독에게 악감정이 있던분은 아닌데 (지난 영화들에 대한 평에서도 그렇구요) 왜 저런 평점을 남겼는지가 저는 참 궁금하더라구요.. '저열한 야심' 은 어느 대목을 지목하는것일지.. 때때로 감정에 휩쓸려서 지나치게 악평을 하는게 아닌가 싶은 경우가 있는분이지만 저런 평을 남긴 연유에 대해서 궁금증이 생기네요.
직접 이 두 눈으로 확인한 결과 절대 평점 1개 봤을 정도의 졸작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못 해도 최소한 별 3개 반은 봤을 정도의 수작이었습니다. 거기다 이 작품보다 더 형편없는 졸작들도 웬만해서는 별 1개는 잘 받는데 그보다 훨씬 뛰어난 이 작품이 별 1개를 받으니 정말 너무 이해가 안 가서 화가 났습니다.
추신: '영화는 저열한 야심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라는 말을 했는데 제 개인적으로는 과도한 보여주기 식 형식에 매몰된 것에 대한 비판으로 봤습니다. 만약 그게 맞다면 자비에 돌란,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는 능지처참을 당해야 할 수준입니다. 진짜 이 작품 시대 별로 화면 비율이 바뀌는거 빼고 전체적으로 굉장히 얌전합니다.

이용철 평론가님이 굉장히 주관이 뚜렷한 분이어서...
왜 이 영화를 별로라고 생각했는지
나중에 한번 뵙게 되면 물어볼게요..^^
예 부탁드립니다. 저도 정말 궁금합니다.
좋은 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제겐 설정이나 상징적인 연출이 다소 과하다는 느낌을 줘서 아쉽긴 했지만, 마지막 장면의 울림만큼은 절대 부정할 수 없는 작품이었습니다.
이 영화가 호불호가 크게 갈리고, 충분히 싫어할수도 있다는 생각은 들지만, 이용철 평론가가 1점을 준건 도저히 이해가 안가네요. 순간적인 감정으로 저렇게 준 걸까요.
막말로 산하고인이 별점 1개라면 시민 케인은 별 2개 반입니다. 그 정도로 이번 이용철 평론가의 20자평은 말도 안 될 정도로 터무니없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평정심을 잃은 것 같습니다.
좋은 글 대단히 감사합니다. 일단 스크랩하고 영화 감상 후에 꼭 읽어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