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방 알바의 추억
고양이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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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지금으로부터 15년전
필자가 스무살 풋풋하던(지금보다는) 시절이었다
고2때부터 영화에 빠졌던 필자는
대학 입학후 학업을 때려치우고 PC통신 영화동호회에서 살다시피 했다
자연스럽게 알바도 영화 관련 자리를 찾다가 마침 적당한 자리를 구하게 되었다
비디오방 알바.
위치는 신촌역 근처였고 이름은 <캠퍼스 비디오방>이었다. (이곳은 그후 캠퍼스 DVD방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없어졌을지도 모르겠다)
나 혼자 20여개 정도 되는 룸을 관리하는 중차대한 업무을 맡게된 것이다.
그때 있었던 기억나는 손님들 중에는 우선
휴가나온 군인+그의 여자친구 커플이 있다.
남친과 함께 들어온 여자친구는 한눈에 봐도 삐쳐있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비디오방 따위에서 데이트 하고 싶지 않았던게지.
군인인 남친을 위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남자 본능 자극 스타일로 꾸미고 나와 어두컴컴한 방안에 처박혀 있고 싶지 않았으리라.
그런 여친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친은 헐레벌떡 영화를 골라 내게 주었다. 보니까 빨간 테잎이다.
이 커플 손님이 영활 보고 나간 후
비디오 틀어주기 뿐 아니라 청소까지 해야하는 나는 무심코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놈이 쓰고버린 콘돔을 주워야 했다 이 두 사람은 과연 결혼해서 아들딸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을까?
상상이 잘 되지 않는다
그 다음.
매일같이 혼자 영화 보러 오는 아저씨 손님이 있었다.
그는 의외로 에로 영화를 찾지 않았다. 보통 아카데미에 노미네이트 될 정도의 명작들만 찾아서 보고 갔었다
그 아저씨에게 나는 늘 캔커피를 서비스로 주었다
얌전히 영화만(에로 영화 제외) 보고 가는 단골 손님, 비디오방 알바에게는 참 고마운 손님이었으니까
젊은 여자들끼리 오기도 한다
그리곤 내 눈치를 보더니 슬금슬금 <색정남녀>라는 영화를 골라 내게 틀어달라고 했었다
손님이 오면 고른 영활 틀어주고 방번호를 정해주고 그 방의 불을 끄는 것까지 내 업무다
불이 꺼진후 잠시 지나서 두 여자 손님이 내려와(2층짜리 비디오방이었다) 내게 영화를 바꿔도 되느냐고 물었다
색정남녀, 제목에 비해 많이 약했던 모양이다
난 친절한 비디오방 알바 청년이었기 때문에 흔쾌히 바꿔주었다
때로는 학생 손님들이 내게 영화 추천을 의뢰했다
연대 음대생들이 악기를 메고 오곤 했는데 그들에게 <데드맨 워킹>을 권해주었다
숀 펜이 사형수로 나오고 수잔 서랜든이 그의 죽음을 지켜주는 내용인데
영활 보고 내려오는 음대생들의 눈은 하나같이 벌개져 있었다 그들 중 한명이 나를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왜 이렇게 슬픈 영화를 권해주었냐고 하는듯 했다 '니들이 슬픈 영화 추천해달래매!'
그때 알았다 내가 보통 사람보다 조금 잔인하다는 것을 혹은 슬픔에 무덤덤 하다는 것을
또다른 커플 손님도 생각난다
CC였는데 남자는 고지식한 범생이 타입이고 여자는 키작은 이쁜이 타입이었다 (꽤 착한 성격)
자주 오길래 친해졌다 여기고 있다가 출근길에 비디오방 근처 편의점에서
이 커플을 만났다 내가 반갑게 여자에게 인사하자 여자는 빙긋이 웃으며 아는 척을 해주었다
그러나 남자는 기분이 나빴던 모양이었다
나중에 나에게 복수했다
이후 다시 비디오방에 둘이 왔을때 난 17번에서 볼래요 19번에서 볼래요 라고 물으며
방번호를 선택하게끔 했었다 의례적인 물음이었다 늘 해오던
녀석은 편의점 인사 스캔들(?)을 마음에 담아두었었는지
내게 생전 안 묻던 질문을 던졌다 "두 개가 무슨 차이가 있는대요?"
'무슨 차이가 있긴 숫자가 다르잖아 이 인간아!'
고지식한 녀석 치고 과분하게 이쁜 여친을 사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한번은 출근을 늦게 했다가 여사장님으로부터 호되게 질책을 받은적이 있다
일부러 늦은 것도 아니었는데 어찌 그러냐며 나는 여사장님에게 내가 그동안 비디오방을
얼마나 깨끗하게 만들어왔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난 구석구석 청소하는 비디오방 알바였기에
그말을 듣자 여사장님은 그건 몰랐었다며 화를 누그러뜨렸다
역시 상사에게 무방비적으로 당하지 않으려면 평소에 남이 하지않는 위대한 일을 회사를 위해 하면서
그런걸 했다고 적당히 자랑해야 한다는걸 그곳에서 배웠다
캠퍼스 비디오방은 내게 사회생활과 인간관계의 노하우를 배우게 해준, 인생 학교와도 같은 곳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무수하게 꽂혀있던, 며칠에 한번씩 비닐에 쌓인 새것들이 배달되어 오던
비디오 테이프들이 그립다. 전에는 비디오 대여점에 가는게 인생의 상당한 낙이었다. 보고 싶었던 영활 고르는 재미가 쏠쏠했었는데.
DVD는 더 좋은 화질을 보장해주었지만 비디오 테이프만큼 재밌지가 않았다.
프로메테우스와 미션 임파서블: 고스트 프로토콜 등 극장에서 미처 못본 영화들을
비디오 테이프로 빌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며칠 전 들었었다
부엉이가 살던 영화마을과 으뜸과 버금 차트가 그리운 저녁이다
주성치 영화 테이프를 모으기 위해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지하철역에 있었던 할아버지 비디오 대여점도 생각이 난다
지하철역은 그대로 그 자리에 있는데 비디오 대여점은 온데간데 없다
슬픈데 퇴근길에 맥주 사오는걸 깜빡 잊었다 흑흑
내일 조조로 아이언맨 볼거니까 괜찮아 ㅠㅜ
(사실 난 아이언맨보다 스파이더맨이 더 좋은데 -_-b)
p.s. 익무님들 편안한 밤 보내세요. ^^
고양이맨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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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깃거리 많은 좋은 경험 하신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