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키17] SF 버전의 라짜로, '아힘사'의 숭고미
봉준호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SF 역사상 이렇게 불쌍하고 찌질한 캐릭터가 있었는가? 나는 이런 정도의 대규모 SF 영화에는 거대한 우주적인 서사를 짊어질만한 영웅적인 인물이 등장해야만 한다는 고정관념에 반기를 들고 싶어하는 청개구리 기질이 있다. 아직은 뭔가 찌질하고 좀 불쌍하기도 한 캐릭터가 좌충우돌하면서, 또 그러다가 영웅적인 행동을 하기도 하는 그런 캐릭터와 이야기에 끌리는 것 같다." 미키 역을 맡은 로버트 패틴슨도 미키가 자신은 깨닫지 못하지만 영웅적인 면이 있는 매우 특별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봉 감독의 영화는 제작비가 얼마이든 규모가 얼마나 크든 작든 늘 처음 작품인 '플란다스의 개'의 원형이 녹아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것은 '사람 냄새'이다. 물론 서사적 재미, 장르적 재미, 블랙 코미디까지 모든 요소가 갖추어져 있지만, 거기서 중심은 늘 사람이다. 봉 감독은 심지어 괴물이나 크리쳐에게서도 캐릭터를 부여한다. 이것을 놓치고 <미키17>에서 <듄>과 같은 우주적 장대한 서사를 기대한다면 실망할 수도 있다. 나는 <미키17>을 <기생충>만큼 재미있게 보았고, 사회적 측면에서도 철학적 측면에서도 <기생충>을 넘어섰다고 생각한다.
"미키17은 과연 누구인가?"
SF 블록버스터로서의 기대감을 버리고 "미키17은 과연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화두로 영화를 본다면 영화 속의 모든 디테일들이 미키17을 중심으로 온전히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영화는 휴먼 프린트 기술이 개발되어 말 그대로 인간 복제가 가능해진 시대의 이야기이다. 이 논쟁적인 기술은 지구에서는 아직 법률적 승인을 받지 못했지만, 지구 밖의 우주 개척 상황에서 제한적으로 사용된다. 독재자 부부, 마샬과 그웬은 이 기술을 자신들의 행성 개척 사업에 이용하기 위해 '익스펜더블(소모품)'이라는 하나의 직업으로 포장하여 지원자를 모집한다. 미키는 여러 가지 개인 사정으로 몰리다 못한나머지 소모품처럼 극한 작업에 투입되어 계속 반복해서 죽어야 하는 이 직업에 자원한다.
미키는 끊임없이 끔찍한 죽음을 겪으며 17번째까지 프린트되었는데, 17이 죽은 줄 알고 18 버전이 다시 프린트 되면서 두 명의 미키가 동시에 등장하며 멀티플 상황이 된다. 미키17과 미키18은 여러모로 대비되는 인물들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기억을 공유하고, 똑같은 육체를 가지고 있지만 심리적으로는 정 반대의 캐릭터가 출현한 것이다.
오리지널 미키에서 미키17까지는 작은 차이는 있지만 다소 불쌍하고 수동적이며 무해한 캐릭터였으나, 미키18은 두려움 없고 먼저 돌진하고 공격하는 캐릭터이다. 18은 미키의 무의식 속에 깊이 감추어진 잠재된 공격성이 똘똘 뭉쳐서 돌연변이처럼 발현된 것 같다. 그러나 일반인의 시각에서 미키18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캐릭터이다. 끔찍한 죽음을 반복해서 경험해야 하는 악몽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저항하고 자기방어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자신을 이용하기만 하는 친구도 아닌 친구인 티모(스티븐 연)를 죽이려 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미키18은 속터지는 미키17이 드디어 성장한 모습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화 제목은 <미키18>이 아니라 <미키17>이다. 미키17이 엄연한 주인공이지만,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기 어려우며, 따라서 우리가 감정이입하기 어렵다. 나는 영화를 보며 문득 <행복한 라짜로>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아! 미키17은 SF 버전의 라짜로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가 2018년도에 개봉했을 때 봉준호 감독의 추천 영화 목록에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라짜로도 '한심한 루저'하면 미키17과 자웅을 겨룰만하다. 주변 사람들은 라짜로와 미키17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그냥 이용하고 무시하거나 동정할 뿐이다.
<라짜로와 미키17>
<행복한 라짜로>에서 소작제도가 폐지된 현대에 무지한 농부들을 속여서 고립된 소작 농장을 운영하는 후작부인은 <미키17>의 독재자의 부인 그웬(토니 콜렛)과 닮았다. 이들은 자신이 영리하다 자부하며 사람들을 뒤에서 조종하고 세뇌하지만, 자신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는 꿈에도 모르는 뻔뻔한 인물이다. 자신이 세상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믿지만 사실 'X물에 불린 뇌'를 굴리고 있을뿐이다.
후작부인의 아들인 탄크레디는 엄마에 대한 반항심과 라짜로에 대한 일시적인 호기심으로 라짜로를 이용했을 뿐인데, 라짜로는 끝까지 진실된 우정으로 탄크레디를 대한다. 티모는 탄크레디의 더 영악한 버전이다. 그러나 철없는 미키17은 자신을 이용하고 매번 궁지에 몰아넣는 뺀질이 친구를 자신의 하나뿐인 친구라 생각하며 죽을 위기에서 구해준다. 티모는 그웬처럼 사악한 인물은 아니며 단지 자기애가 너무 강한 인물일 뿐이다. 미키17이 좀처럼 볼 수 없는 인물형이라면, 티모는 우리 주변에 적지않게 널려 있는 속이 훤히 보이는 사기꾼형이다.
라짜로와 미키17은 같은 인간에게는 공감받지 못하지만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들과 소통가능하다. 라짜로가 절벽에서 떨어졌을 때, 늑대가 다가와서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을 드러내며 그를 잡아먹으려 하지만 처음 맡는 냄새에 주춤거린다. 그것은 '선한 사람의 냄새'였다. 미키17도 외계 행성에서 임무 수행 중에 절벽에서 떨어졌을 때 행성 원주민(?)들이 그에게 다가온다. 미키17은 저항할 생각은 전혀 안하고 단지 자신을 깔끔하게 먹어주기만을 바라지만, 원주민들은 의샤의샤하며 미키17을 무사히 절벽 밖으로 밀어준다.
미키가 매번 당하는 죽음의 묘사는 무척 잔인하다. 고통스러운 죽음의 순간들이 기억 속에 새겨져서 매번 프린트될 때마다 업데이트된다는 것은 마치 전쟁 후 PTSD를 겪는 상황이 16번 반복된 것과 같다. 미키17은 자신에게 주어진 이 모든 상황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 수동성에는 특별한 점이 있다. 미키는 누구를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자포자기하며 되는데로 사는 것도 아니다. 나름대로 삶의 틈새의 순간들을 즐긴다. 연인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까마 수뜨라와 비슷한 섹스 교본을 연구하고 실험하기도 한다.
미키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들을 끝까지 수행하는 모습에서는 일종의 '숭고미'마저 느껴진다. 미키들은 미지의 행성의 바이러스 백신을 개발하는 실험체가 되어 죽고 또 죽으며 백신 개발 성공의 밑거름이 된다. 만약 코로나 펜데믹 시기에 누군가가 이러한 일을 했다면 영웅 내지는 성인으로 추앙받았을 것이다. 중국의 삼황(三皇) 중 한 사람인 신농(神農)은 백초를 직접 맛보고, 몸으로 독을 실험하고 해독해 내어 한의학의 아버지라 불리우며 존경받는다. 그러나 아무도 미키에게 존경은 커녕 고마워하지 않는다. 우리가 프린터 용지와 같은 소모품을 쓰면서 고마워하지 않는 것처럼. 미키도 자신의 공을 딱히 내세울 생각도 없다.
라짜로는 소작농들의 소작농이다. 후작부인에게 착취당하는 농부들은 자신들이 라짜로를 착취하는 것을 당연시한다. 라짜로는 온갖 굳은 일을 다 하면서도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한탄하지도 않는다. 라짜로 역시 원망이나 적의와 같은 감정은 찾아볼 수 없으며, 자신의 비밀 동굴 속에서 웰빙커피를 마시며 잠깐의 삶의 여유를 즐긴다.
미키17과 라짜로는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에 제때 편승하지 못할지라도 바보 멍청이는 아니다. 그들은 누구도 해치지 못하고 자신의 사소한 실수도 사과하고 다닌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남탓이 아닌 자신의 탓으로 돌리기 때문이다. 이들은 인간 사회의 호구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특별한 호구이다. 단지 평범한 호구들은 확실하고 완전한 기회가 주어지면 가해자가 되어 다른 호구들을 짓밟을 수 있다.
라짜로를 보며 후작부인은 "저 애도 기회가 되면 다른 사람을 착취할거야."라고 말한다. 탄크레디는 라짜로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 단언한다. 자신의 어머니를 뼛 속까지 잘 알고 증오하면서 자라온 터라 어머니와 전혀 다른 라짜로를 본능적으로 알아본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랑을 모르고 이기적인 탄크레디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대해는 방법을 모른다. 미키는 자신을 첫눈에 알아보고 진심으로 아껴주는 나샤(나오미 아키에)를 만나서 다행이다. 게다가 나샤는 무력, 지력, 성품 모든 것이 탁월한 능력자이기도 하다!
<아힘사의 완전히 실현, 적이 없는 자>
티없이 해맑은 호구와 성자는 과연 구분될 수 있을까? 우리가 전형적으로 생각하는 성자나 깨달은 자는 현대에 출몰하는 영적 사기꾼들과 구분되지 않는다. <행복한 라짜로>는 '현대 사회에 성자가 나타난다면 어떤 모습일까?'라는 상상을 모티프로 한 영화이다. <행복한 라짜로>의 마술적 리얼리즘은 <미키17>의 SF적 리얼리즘과 연결되는 것 같다.
나는 라짜로를 보면서 '아힘사'를 계속 떠올렸다. 요가의 제1 계율인 '아힘사(ahiṁsā)'는 '비폭력, 불살생' 등으로 번역되는데, 진정한 뜻은 '어떠한 해로운 의도도 부재한 것'이다. 우리가 몸, 말, 마음으로 크든 작든 폭력을 행하려면 해를 끼치고자 하는 '의도'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무해한 인간들인 라짜로나 미키17은 자신이 위험한 상황에서도 폭력적으로 되지 못한다. 미키17은 자신을 죽이려는 18에게 아령을 들어올린 것이 고작이다.
우리는 비폭력적이어야 하며 서로 사랑하자고 쉽게 말하지만, 사랑은 이러한 심리적 필요보다 훨씬 큰 것이다. 진정한 사랑의 바탕에는 아힘사가 있어야 한다. 나에게 우호적이고 잘해주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나에게 적대적이며 폭력적인 사람에게 비폭력으로 대응하는 것은 어렵다.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 사람들은 호구라고 불리우며, 인간 사회의 탈락자가 되기 십상이다.
아힘사는 세속의 삶을 위한 계율이 아니라, 영적 삶을 위한 계율이다. 세속의 거친 에너지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폭력과 적의가 자신의 영적 에너지를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불행의 이유가 내 안의 폭력과 적의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아힘사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위해서 행하는 계율이다. 행복하지 않은 마음은 결코 명상의 결실인 삼매(사마디)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요가 수뜨라 2-35절에서는 "아힘사로 확고하게 다져진 사람 앞에서 모든 적개심은 사라진다.(ahiṁsā-pratiṣṭhāyāṁ tat-sannidhau vairatyāghaḥ)"라고 말한다. 아힘사의 기반에 확고하게 서 있는 사람의 주변에는 일종의 자기장이 형성되어, 그의 주변에 다가오는 누구에게든 영향을 준다. 결과적으로 주변의 모든 적개심이 사라지며, 그는 '적(enemy)이 없는 자'가 된다. 마치 사나운 늑대가 라짜로를 구해준 것처럼. 행성 원주민들이 처음 보는 낯선 생물체인 미키17을 도와준 것처럼.
아힘사가 제1 계율인 이유는 가장 어렵고 가장 중요한 덕목이기 때문이다. 가장 어려운 이유는 우리의 에고(ego) 때문이다. 나와 타인을 나누는 경계가 바로 에고의 본질이다. 나와 타자의 구분은 긴장과 투쟁을 낳는다. 경계선 안의 나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 바로 '폭력(hiṁsā)'의 본질이다. 에고는 끊임없는 불안과 경계를 낳기 때문에, 인류 역사상 폭력과 전쟁이 끊어진 적이 없었고 없을 것이다.
에고의 불안의 최고봉은 '죽음'이다. - 육체적, 정신적 경계선이 붕괴되는 것. 미키의 주변 사람들은 끊임없이 묻는다. "죽는 기분이 어때?" 이 사람들은 매번 자신에게는 최고의 재앙인 죽음을 체험하는 미키가 왜 별일없는듯 살고 있는지 정말 궁금했을 것이다. 반면 미키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어떠한 성찰이나 생각이 없다. 나뭇잎이 나무에서 떨어질 때 별 생각이 없듯이, 에고의 경계가 약화되거나 사라지면 죽음도 역시 사라진다.
에고 경계가 사라질 때 아힘사는 완전하게 구현될 수 있기 때문에, 아힘사는 가장 어렵고 가장 중요한 계율이다.
지금까지 미키17의 캐릭터를 요가적 관점에서 주로 해석했지만, <미키17>은 여러 가지 주제들을 풍성하게 제시한다.
서양인들이 미국에 도착해서 원주민들을 '인디언'이라고 착각해서 이름붙였듯이, 인간들은 행성의 원주민들을 '크리퍼'라고 멸칭했다. 이것은 <기생충>에 등장하는 인디언 모티프의 연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주민 리더의 감정이 담긴 눈을 보여주고, 통역기를 통해 생각을 들려준 부분은 사실 대단한 반전이었다.
미키17이 통역기를 통해 왜 자신이 절벽에서 떨어졌을 때 죽이지 않았냐는 질문에 리더는 어이없어 하며 말한다. "그럼 죽여?" 생각해 보면 너무 당연하지 않은가? 우리가 낯선 사람을 만났다고 느닷없이 죽이지 않는 것처럼, 다른 종끼리 만났다고 무턱대고 폭력적으로 나올거라는 가정은 너무나 인간적이다. ('인지상정'이다!)
그웬의 엽기적인 소스 집착은 고작 향신료나 설탕, 초콜릿 따위 때문에 제국주의적 만행을 정당화한 역사를 상기시킨다.
그 외에도 구석구석에 봉준호표 유머가 난무해서 너무 좋았다!
추천인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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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짜로가 성경의 라자로(나사로)에서 이름을 따온 걸로 아는데...
그 라자로에 보다 가까운 인물이 미키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확실히 보고 나서 시간 지나 곱씹어 봤을 때 더 많이 읽히는 영화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