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 아침바다 갈매기는(The land of morning calm, 2024) / 박이웅
1. 아침바다 갈매기는(이하 아침바다)은 아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를 전복하는 이야기이다. 모래의 여자가 외부인을 감금하여 공동체의 생존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이야기가 진행됐다면, 아침바다는 외부인을 통해 죽음이 서서히 진행되는 공동체에서 빠져나가는 내부인의 이야기를 그렸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 차이를 설명하기에 앞서 두 이야기가 가진 공통적인 면모를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우선, 모래의 여자가 그랬듯 아침바다 역시 장소가 아닌 공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장소와 공간은 어떤 차이를 가지는가. 장소가 지리적 환경과 인간의 일대일 대응이라면 공간은 어떤 장소에 축적되어 온 역사, 종교, 문화, 관습과 그 모든 것들을 토대로 구축된 인간과 인간 사이, 인간과 장소 사이의 관계망에 가깝다. '모래의 여자'에서 주인공 니키 준페이가 사구에 갖혀 나가지 못한 이유는 준페이가 빠진(혹은 스스로 들어간) 모래 구덩이에서 외부로 나가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 아니라 주민들이 사구를 오갈 수 있는 사다리를 치워버렸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생각해보자. 외부와의 관계가 단절된 공간에서 우연이 접근한 외부인을 감금하는 것은 그 공동체가 오랜 역사를 거쳐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유일한 생존수단이라고 결론지었기 때문이다. 생존의 주체는 마을 개개인이 아닌 공동체, 즉 공간 자체이므로 마을 주민들은 공동체의 생존에 복무하는 소모품으로 전락한다. 아침바다는 조금 모래의 여자의 기이한 초현실주의를 걷어내고 보다 현실적인 공간을 그린다. 그러나 아침바다의 공간 역시 죽음이 그림자가 너울거린다는 점에서 기이하다. 영국의 딸은 마을을 나가 서울로 상경하고 싶다는 이유로 발가벗겨진 채로 기둥에 묶긴 후, 마을(또는 아버지)에게 저주를 퍼붓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촌마을을 바꾸고자 조합을 조직한 형락은 조합 결성에 실패 후 마을을 떠나 다시 돌아온다. 왜 돌아왔냐는 영락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렇다고 죽을 수는 없잖아요'. 그러나 그의 모습은 공동체가 아닌 공동묘지에서 죽기 위해 돌아온 좀비처럼 보인다. 그는 마을로 들어온 순간 스스로 죽은 자라고 인식하고 있다. 또한 더 이상 마을에서 생존을 모색할 수 없는 용수는 죽음을 위장하여 마을 외부로 도망치려한다. 이처럼 아침바다의 어촌 마을은 죽음을 통과하지않고 나갈 수 없는 마을, 또는 그 마을 자체로 공동묘지로 묘사된다.
2. '모래의 여자'에서 마을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외부인의 감금이라는 방법을 선택했다면, 용수는 죽어가는 공동체를 빠져나가기 위해 죽음이라는 방법을 선택한다. '모래의 여자'에서는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 개인의 실존이 부정되고 본질이 강조된다면 아침바다는 본질의 죽음을 통해 실존의 생존을 선언한다. 따라서 용수의 죽음은 용수 개인의 죽음이 아니라 '공동체의 복무하는 목적을 가진 인간'의 죽음이다. 용수는 죽음은 선언한 후 스크린에서 사라지고 어촌 마을에서 더 이상 용수를 발견할 수 없다. 용수가 사라진 자리를 베트남에서 온 용수의 아내 영란이 채운다.
영란은 모래의 여자의 니키 준페이의 변형적 캐릭터이다. 그녀는 외부인으로 (모래의 여자와는 다른 이유로) 마을 바깥을 빠져나갈 수 없다. 영란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2부에서, 영화는 다시 한번 어촌마을 공간의 기이함을 보여준다. 동향 사람의 넋두리를 인정하지 않을만큼 안전하다고 느꼈던 마을은 용수의 죽음 이후 태도가 돌변한다. 보험금의 의미도 모르는 영란에게 구상권을 청구하고 용수의 빈자리를 채워주겠다며 그녀를 추행한다. 특히 그녀가 영주권을 취득하기 위해 공공기관을 찾는 장면은 카프카적이라고 할만큼 기이하다. '죽은 남편을 데려오라'는 공동체의 실현불가능한 공동체의 요구는 앞으로 그녀가 공동체에 머물 경우 감당해야할 것들이 무엇인지 암시한다. 그로써 그녀는 공동체의 일원도 될 수 없고, 그렇다고 베트남으로 돌아갈 수 없는 디아스포라가 된다. 또한 용수의 사망신고 한 영란에게 용수의 어머니 판례가 보인 반응은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 아들의 죽음에 최종 사망선고를 내린 며느리에 대한 분노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어촌마을이라는 공간을 대리하여 그녀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것으로 읽힐만큼 과잉적이다. 여기에서 어쩌면 판례가 마지막에 용수와 영란과 함께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예측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판례와 영국으로 대별되는 노인들은 이미 오랫동안 어촌마을의 죽음의 그림자에 잠식당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래의 마을을 유지하기 위해 범죄에 가담한 공범들이고, 또 어떨 때는 적극적인 가해자가 될 수 있음을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에 외부로 나갈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한다. 아마도 영화의 영국과 판례의 마지막 대화
갔나
갔지, 그럼
됐네, 그럼
는 그들이 미래를 위해 포기할 수 있는 마지막 임계치로 보인다.
3. 아침바다가 단지 지방소멸만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본질의 죽음을 토대로 실존주의를 선포한 것만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많은 아침바다가 묻는 많은 질문에 답해야 한다. 영란과 용수의 도피(또는 탈출)이 유일한 방법인가. 공동체 안에서 나는 얼마나 공동체에 잠식되어 있는가. 이미 실패한 시도를 어떤 방식으로 되살릴 수 있는가. 그 전에, 우리의 공동체는 거대한 공동묘지인가.
시간내서 봐야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