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예고편 속 전투들 소개(예고편 분석)
맨스저널이라는 매체에서 어제 공개된 리들리 스콧 감독의 <나폴레옹> 예고편 속 전투들에 대해 소개해줬습니다.
예고편 분석이라고 해도 괜찮을 것 같은 좋은 내용이라서 발췌해서 옮겨봤습니다.
https://www.mensjournal.com/streaming/napoleon-trailer-battles
더 자세히 알아보실 분들을 위해 각 전투들의 위키백과 링크도 추가했습니다.
툴롱 포위전 (1793)
https://ko.wikipedia.org/wiki/%ED%88%B4%EB%A1%B1_%ED%8F%AC%EC%9C%84%EC%A0%84
툴룽 포위전은 나폴레옹을 프랑스 혁명정부에서 주목할 만한 인물로 만들었다. 20대 중반의 코르시카 출신 장교가 이 전투를 통해 자신의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이다. 공화파 정부에 반대하는 왕당파 반란군이 툴룽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영국-스페인 함대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툴룽에는 프랑스 함대의 1/3이 있었기 때문에 적의 수중의 들어갔다는 것은 신생 공화국에 치명적인 상황이었다.
나폴레옹은 도시 탈환을 위해 파견된 공화국군의 장교였다. 나폴레옹은 툴롱의 항복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적인 계획을 세웠고, 예고편에서도 그에 관한 대사가 나온다. 나폴레옹은 포병대가 적 함대를 철수시킬 수 있는 중요한 언덕을 점령하는 데 결정적인 아이디어를 낸 것 외에도 도시 자체에 대한 공격을 주도함으로써 개인적인 용맹함을 보여주었고, 그 과정에서 부상을 입기도 했다.
포위전 동안 대령으로 진급한 나폴레옹은 전투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후 젊은 나이에 준장으로 진급한다.
방데미에르 13일 쿠데타(1795)
https://ko.wikipedia.org/wiki/%EB%B0%A9%EB%8D%B0%EB%AF%B8%EC%97%90%EB%A5%B4_13%EC%9D%BC_%EC%BF%A0%EB%8D%B0%ED%83%80
혁명의 혼란은 프랑스를 계속해서 어지럽혔고, 툴롱 포위전이 끝나고 2년이 지난 후에도 모든 사람이 새로운 체제를 받아들이고 구시대적 방식에서 벗어나는 것을 반기는 것은 아니었다. 나폴레옹도 로베스피에르와 같은 과거의 후원자들이 급진적인 방식으로 처형되면서 당시의 복잡한 정치에 휘말렸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성공적인 길을 걸을 수 있었다. 파리에서 왕당파의 봉기가 국민공회를 위협하자, 나폴레옹은 방어 임무를 맡았고, 파리 거리에서 대포로 반란군을 살육하는 잔인한 효율성으로 임무를 완수했다. 이 ‘전투’(학살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는 프랑스 혁명 달력에서 방데미에르 13일 쿠데타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이에 감사한 정부가 나폴레옹에게 진급 및 이탈리아 파견군의 지휘권을 부여하면서 그의 경력은 곧바로 상승세를 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당대 주요 정치인 중 한 사람의 전 정부였던 조제핀 드 보아르네를 만났다. 권력 중심부와 가까운 그녀의 인맥은 벼락출세한 나폴레옹에게 매우 유용하게 작용한다.
피라미드 전투 (1798)
https://ko.wikipedia.org/wiki/%ED%94%BC%EB%9D%BC%EB%AF%B8%EB%93%9C_%EC%A0%84%ED%88%AC
이탈리아 원정에서 더 많은 성공과 권력을 얻은 나폴레옹은 이집트를 침공, 영국이 인도를 통해 얻는 이익을 방해하기 위해 그곳에 프랑스 식민지를 건설하기로 결정한다. 이로 인해 피라미드 전투가 벌어지는데, 그 명칭에는 약간 오해의 소지가 있다. 실제로는 예고편에서 나오는 것과 같이 파라오의 무덤 바로 아래가 아니라, 그 기념비적인 무덤에서 약 24km 떨어진 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하지만 리들리 스콧 감독이 (피라미드를 담고 싶은) 유혹에 굴복한 점은 충분히 이해된다. 나폴레옹은 약 2,000명의 적군을 죽이는 동안 30명의 병력도 잃지 않으면서 오스만군을 괴롭혔지만, 결국 영국 해군의 우세로 인해 이집트 원정을 포기해야 했다.
여담으로 예고편에는 장레옹 제롬의 그림 '스핑크스 앞에 선 보나파르트'(1886)에 대한 아름다운 오마주 장면이 담겨있다.
이집트에서 돌아온 나폴레옹은 약하고 분열된 정부, 위태로운 군사적 상황, 무질서한 민중과 마주한다. 나폴레옹은 몇몇 핵심 인물들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공화국의 초대 집정관(통령)으로 “선출”되는데, 여기서 집정관이라는 명칭은 고대 로마의 직책명에서 발굴한 것이다.
사실상 나폴레옹은 군사 독재자였기 때문에 그 역시 협잡이었다. 나중에 나폴레옹은 자신에 대한 일련의 암살 음모를, 절대 통치의 구실로 삼아서 프랑스 황제로 즉위한다.
아우스터리츠 전투 (1805)
https://ko.wikipedia.org/wiki/%EC%95%84%EC%9A%B0%EC%8A%A4%ED%84%B0%EB%A6%AC%EC%B8%A0_%EC%A0%84%ED%88%AC
제국이 된 프랑스 공화국에 대항한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은 나폴레옹에 의해 꾸준히 밀려났고,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군대를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한다. 오늘날 체코 지역에서 벌어진 아우스터리츠 전투(독일어권 국가에서는 흔히 ‘삼제회전’으로 불림)는 사관학교에서 영원히 가르칠 만큼 빛나는 승리 중 하나이며 나폴레옹의 위대한 업적 중 하나로 꼽힌다.
하지만 예고편을 보면 나폴레옹의 군사적 재능이, 관객이 더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포장될 것 같다. 대포들이 숨겨져 있다가 발사되고, 적군이 있는 얼어붙은 강을 깨트려 그들을 익사시키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아우스터리츠 전투 중에서 프랑스 포병이 도망치는 러시아군을 상대로 호수의 얼음을 깨트린 실화를 바탕으로 했지만, 그것이 전투를 승리로 이끈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아우스터리츠는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을 종식시켰고, 나폴레옹에게 중부 유럽의 지배권을 주었으며, 신성 로마 제국의 해체로 이어진다. 나폴레옹은 이제 권력의 정점에 선다.
워털루 전투 (1815)
https://ko.wikipedia.org/wiki/%EC%9B%8C%ED%84%B8%EB%A3%A8_%EC%A0%84%ED%88%AC
나폴레옹의 마지막 전투도 예고편에 등장한다. 영국 국기를 휘날리는 보병 방진이 프랑스 기병대의 공격을 방어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워털루 전투 중 미셸 네 원수의 돌격 장면으로, 영화적인 격렬한 액션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아우스터리츠 전투와 워털루 전투 사이에는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나폴레옹은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제6차 대프랑스 동맹에 패하여 지중해로 강제 유배되었는데, 오스트리아의 한 외교관이 “지구상에서 가장 큰 아기”이자 당시 가장 무능한 통치자라고 했던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에게 감사해야 할 정도로 가벼운 처벌이었다. 그곳에서 나폴레옹은 다시 귀환했고, 옛 동지들은 그를 죽이는 대신 두 팔 벌려 환영하며 예고편의 또 다른 장면을 연출한다.
‘백일천하’로 알려진 나폴레옹의 짧은 재집권은, 웰링턴과 폰 블뤼허의 영-프로이센 군대가 벨기에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을 완전히 격파하면서 끝이 났다.
이후 나폴레옹은 훨씬 더 혹독한 유배지인 세인트헬레나로 가게 됐고 그곳에서 여생을 보낸다.
gol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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