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인의 후예 (1968). 해방 후 공산당이 북한을 접수하던 시절 사랑이야기. 스포일러 있음.
실제 북한 평양 출신 황순원의 원작을 영화화한 것이라서,
815해방 이후 공산당이 북한을 어떻게 점령했고 토지개혁을 통해 기존 농촌부락을 개조해갔는지 상세히 표현되어 있다.
카메라를 들고 당시 벌어지는 일들을 현장에서 찍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디테일과 사실성을 보여준다.
그러고 보니, 원작자 황순원도 감독 유현목도 모두 북한에서 남하한 사람들이다.
해방이 되자 북한 어느 농촌에서는 축제가 벌어진다. 무슨 일이 장차 벌어질 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지금 당장은 신나는 것이다.
하지만 곧 들이닥친 공산당 간부는 당장 달려가서 학교부터 접수한다. 일제시대 지주의 아들 박훈이 자기 돈을 들여세운 학교인데,
학교 간판을 떼어버리고 공산당 지부를 거기 만든다. 그리고 그 학교는 반동세력의 본부라는 소리를 한다. 마을사람들은 어리둥절하다.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인텔리 박훈이다. 공산당간부는 박훈이 반동세력이고 반동적인 사상을 학교를 통해 인민들에게 세뇌시키고 있다고 떠든다. 박훈은 반론 겸 자기변호를 해보려 시도하다가 이내 포기한다. 공산당 간부는 이미 답을 정해놓고 박훈을 서서히 옭아매려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박훈에게 동정하는 것은 당성이 약한 것이다. 박훈을 처단하는 것은 역사가 원하고 인민이 원하는 거대한 역사의 소명이다. 사실 아닌 누명을 씌워서라도 박훈을 처단하는 것이 바로 역사의 진보에 부응하는 것이다. 박훈 개인의 도덕성보다 더 큰 역사의 진보가 여기 있다."
여기 반론하는 사람은 "당성이 약하고 상상력이 빈곤하다" "공부 더 해라"하고 면박 준다.
마을사람들은 처음에는 이게 뭐야 하는 반응이지만, 공산당 간부가 토지를 공짜로 나눠준다고 하자 이내 환호한다.
마을사람들에게 그동안 많은 것을 베풀어 온 지주의 집을 털라고 강요하자, 마을사람들은 처음에는 망설인다.
하지만 지주의 집을 털면서 대패, 낫같은 것을 훔칠 수 있다는 것을 알게되자 싱글벙글 웃으면서 지주의 집을 턴다. 평평한 돌같은 것이
뭐라고, 그 돌을 숫돌로 쓴다고 서로 다툰다. 공짜라면 돌 한 조각도 신나서 훔친다. 곳간을 털면 내게 공짜로 떨어지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안 것이다.
양심이니 그동안 친분이니 같은 것들은 너무나도 쉽게 사라진다. 농촌공동체같은 것은 신기루같은 것이다.
마을사람들은 왁자지껄 웃으면서, 내일은 뭐가 생길까 하고 기대에 부풀어 기다린다. 박훈과 친하게 지내던 마을사람들은 하루 아침에
그를 무시하고 왕따시킨다.
무지하고 동네에서 무시 받던 하인에게 감투를 씌워주자, 그는 신나서 같은 동네 주민들을 핍박하고 다닌다. 돈을 빌리고도, 돈 갚으라고 찾아온 채권자를 오히려 때리는 기고만장을 부리다가, 채권자에게 살해당한다. 공산당 간부는 이 사건이
박훈이 조종해서 반동세력을 강화하려는 정치적 음모라고 갖다붙인다. 공산당 간부가 욱박지르자, 이 엉터리같은 말이
권위적인 진실이 되어 버린다. 박훈은 반동에다가 수구세력 그리고 자기 이익을
위해 역사의 진보에 반해서 음모를 꾸미는 살인자가 되어간다. 공산당 간부가 주도자 그리고 우루루 시키는 대로 몰려가는 마을사람들이
공범이다. 사실 그는 자기 돈 들여 야학을 일제시대 동안 운영한
전형적인 양심적 식민지 지식인인 데 말이다.
당시 벌어졌던 일들이 굉장히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당시 사람들은 무지하고 어리석어서 이런 공산주의의 유혹에 넘어갔다고 생각해선
안된다. 황순원이나 유현목이나, 인간 본성의 문제라고 본 듯하다. 제목을 카인의 후예라고 한 것을 보니 말이다.
이 영화는 등장인물들을 그리기 이전에, 이런 사회적 격변의 현장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것이 목적인 듯하다.
이 영화는 호러영화에 가깝다. 바디 스내쳐 같다. 자고 나면 외계인에게 침략 당해서, 내가 아는 사람들이 하나 하나 기이한 생물이 되어가고 나 혼자 남는 것 말이다. 농촌공동체에서 내가 수십년 간 알고 지내던 사람이 맞는가? 주인공이 살인자 겸 반동으로 몰려나가는데,
이것을 외면하는 것도 모자라 동조까지 하게 되는 사람들이다. 비정함과 비도덕이, 이 새로운 사회에서는 오히려 정상이 된다.
주인공 박훈은 잔인한 밧줄이 자기 목에 서서히 조여드는 것을 느끼며 하루하루 살아간다.
월남한 황순원이나 유현목이나 이 영화를 만들면서 떨었을 것 같다. 사실 원작소설을 쓴 황순원의 묘사에 더해서 굉장한 디테일과 현장감을 부여한 것은 유현목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주인공 박훈 역을 맡은 김진규와 오봉녀 역을 맡은 문희 그리고 악역 박영감 역을 맡은 박노식 등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대배우 김진규가 주연을 맡은 최후의 걸작영화라고 알고 있는데, 좀 약한 배우가 주연을 했다면 이 영화는 인간드라마보다
당시 현실 생중계가 주목적인 르포 비슷한 것이 되었으리라.
공산화되어 가는 사회가 조여오는 가운데, 김진규는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한다. 당연히 이 사회를 떠나야 하는 것이 분명한데, 김진규는 지식인답게 주저한다. 같은 지주 출신인 사촌동생이 찾아와 월남할 배를 준비했으니 같이 가자고할 때까지.
김진규는 늘 그렇듯이, 지식인 역할을 아주 잘 해낸다.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가 무대인데도, 대배우 김진규의 존재감은 뚜렷이 살아난다.
그는 고뇌한다. 무엇 하나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역동적인 인물들은 악역 박영감 (박노식)과 그의 딸 오봉녀(문희)다.
박영감의 딸 오봉녀는 시골 아낙네치고는 너무 깨끗하고 고결하게 묘사되어 있어, 이 영화에 빛을 준다. 원래 원작소설도 오봉녀가 언제 나오나 기다릴 정도로 순결하고 빛나는 매력의 인물이다. 문희는 너무 도회적이고 세련된 사람이라서 시골아낙네 역할을 하기 적당한가 의문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원작의 오봉녀가 그런 사람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십여년 동안 김진규만을 바라보며 애절하게 짝사랑을 한다.
오봉녀의 짝사랑이 이 영화에 서정성을 부여하는 한 축이다.
오봉녀는 이 영화에서 카인의 후예들인 마을사람들에게 대응되는 존재가 된다. 기능적인 역할도 수행한다는 것이다.
마을사람들이 다 악마가 되어가도 오봉녀는 변하지 않는다. 전과 똑같이 진심으로 김진규를 돌봐주고 사랑한다. 마을사람들이 린치를 하러 김진규 집에 몰려왔을 때에도 자기 목숨을 걸고 악다구니를 써서 마을사람들이 물러가게 만든다. 이순재가 자기가 본 가장 아름다운 여배우였다고 회고한 문희가 가장 아름답게 나온 영화가 바로 이 영화일 것이다. 이 영화가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그려낸 호러물인 그 만큼이나
이 영화는 아름답고 애절한 로맨스물이기도 하다.
영화는 김진규가 마을을 탈출해서 남한으로 건너가려고 결단을 내리는 데에서 끝난다. 그는 오봉녀의 사랑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고
그녀를 데리러 달려간다. 하지만 "그는 이리하여 자유 대한민국의 품에 안겼다"하는 분위기가 아니다.
그의 옆구리는 칼에 찔려 피가 흐르고 있고, 오봉녀는 열병에 걸려 먼 길을 갈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하지만 어찌 됐든 김진규는
남한으로 목숨을 걸고 밀입국하려 할 것이고, 오봉녀는 그를 따라 갈 것이다. 이거 해피엔딩인가? 아니면
김진규나 오봉녀나 시대의 검은 격류에 휘말려 익사하고 마는 내용일까? 열린 결말이다.
상당히 잘 짜여진 작품이고, 대가 유현목은 그 특유의 묵직하고 존재론적인 스타일로 전율적인 카인의 후예들을 그려낸다.
영화가 가볍게 휘날리지 않고 묵직하고 진중하게 주제를 파고드는 유현목 특유 스타일이 여기서도 빛을 발한다.
대배우 김진규나 문희나 그들의 대표작들 중 하나가 될 만하다. 액션배우 장동휘도 공산당 간부로 출연해서
그의 대표 연기라고 할만한 명연을 남긴다. 비유하자면, 바티스타가 블레이드 러너 2049에 잠깐 출연해서 섬세하고 세련된 연기를 남긴
것과 비슷하다.
추천인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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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몰랐던 좋은 작품들도 알아가네요😊
https://www.youtube.com/watch?v=l6IXWBAV4sM&t=3249s
좋은 작품 소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