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쬐금 스포] '헌트' 간단 리뷰
1. 거대한 힘에 휩쓸리는 개인의 처절한 삶을 다루는 영화는 아주 많다. 아니, 대다수의 이야기는 불가항력적 힘에 대한 개인의 투쟁을 다루고 있다. 이런 이야기는 카타르시스를 줄 때도 있지만, 개인의 무력함을 적나라하게 까발리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20세기말에서 21세기초의 한국 상업영화는 조폭영화가 주류를 이뤘다. 이 조폭영화들 중 웰메이드라고 평가받는 어떤 영화들은 거대한 힘에 휩쓸리는 개인의 무력함을 보여준다. 대표적으로 장현수 감독의 '게임의 법칙'이나 '걸어서 하늘까지', 김영빈 감독의 '테러리스트', 김성수 감독의 '비트', 조폭영화는 아니지만 배창호 감독의 '젊은 남자'는 활기가 넘치는 것 같지만, 무력하게 치이는 청춘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간단하게 말해 그 시절 잘 만든 조폭영화는 해피엔딩인 법이 없다. 마치 '카타르시스'라는 것은 관객에게 사치라도 되는 듯 개인의 무력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이는 훗날 유하 감독이 '비열한 거리'와 '강남 1970'을 통해 다시 한 번 재연해낸다.
2. 개인의 무력함을 보여주는 이야기는 대단히 흔한 방식이다. 그러나 유난히 한국영화에서 개인의 무력함을 드러내는 작품이 많다. 이는 시대의 영향이 크다. 전쟁과 독재, 격변하는 시대 속에 살면서 한국인은 개인의 무력함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오늘날 자기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고 개인을 중요시하는 시대에 살 수 있게 된 데는 거대한 시대의 흐름과 그 속에서 기회를 잡은 권력자에 휘둘리면서도 끝까지 저항하고 싸운 자들의 공이 크다. 한국 근현대사의 역사적 사건들은 우리의 창작물에 카타르시스를 허락하지 않았고 최소한 그런 흐름은 2003년 한국영화 르네상스가 오기 전까지 이어졌다. 정우성과 이정재는 그 시대를 관통한 배우들이다. '비트'로 스타덤에 오르고 '본투킬'을 지나온 정우성과, '젊은 남자'를 거쳐 '불새'를 지나온 이정재는 '태양은 없다'에서 만나 오늘날까지 친구가 됐다. 정우성과 이정재는 조폭영화가 주류를 이루던 한국영화의 암흑기에 데뷔해 청춘의 아이콘이 됐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흘러 중년이 된 두 사람은 어두웠던 시대를 담은 영화 '헌트'에서 다시 만났다.
3. '헌트'의 시대적 배경은 1980년부터 1983년까지다. 광주 민주화 운동을 거쳐 혼란스러운 가운데 군부독재가 절정에 오른 시기다. 영화는 그 시기를 적나라하게,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여기에 두 주인공 김정도(정우성)와 박평호(이정재)를 배치시킨다. 두 사람은 안기부에서 각각 국내팀, 국제팀 차장을 맡고 있다. 사실상 안기부 내에서는 서열 2위를 두고 견제하는 사이다. 안기부라면 납작 엎드리던 시절에 이들은 무려 안기부의 서열 2위를 두고 경쟁한다. 밖에서는 경찰도 숙이게 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권력자다. 그러나 한국영화에서는 이런 권력자도 안심하기 어렵다. 적어도 세계관 전체에서 서열 1위가 아니라면 언제든 시대의 흐름에 휘둘릴 수 있는 인물이다. '헌트'는 개인이 가장 무력한 시대에 두 남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당연히 관객은 이들도 무력한 개인에 머무르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한국영화를 본 관객들은 1990년대와 2000년대 조폭영화들을 거쳐가며 카타르시스를 거세당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런 기조는 2003년 한국영화 르네상스 이후에도 이어지고 있었다.
4. 그런데 '헌트'는 조금 다른 노선을 취한다. 김정도와 박평호는 시대의 흐름에 휘둘린 인물이다. 안기부에 차장으로 일하며 간첩조작이나 해외 첩보활동 등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헌트'는 사실상 이들이 주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언제나 무력한 개인이 주인공이었던 한국영화에서 이들은 가장 주체적인 주인공이다. 더군다나 이들은 개인이 가장 무력한 시대의 한복판에 서있다. 1980년대 초반 대한민국에서 개인의 주체성을 떠드는 게 가당키나 했을까. 그 안에서 김정도와 박평호는 자기 행동에 대해 끝까지 주체성을 유지한다. 이는 두 인물이 마지막에 한 선택에서 잘 드러난다. 사실은 카타르시스를 기대하기 어려운 최후를 맞이했지만, 그 선택은 외부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 김정도는 스스로 뜻한 대로 선택했고 박평호는 다음 세대에 자신의 의지를 전달했다. 외형적으로 해피엔딩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두 사람의 최후지만, 가장 무력한 시대에 가장 주체적인 인물로 남게 됐다. 이 대목에서는 '헌트'가 시대에 대한 위로를 건네는 게 아닌가 생각도 들었다.
5. 앞서 언급한대로 이런 두 캐릭터를 정우성과 이정재가 연기하는 건 대단히 의미가 깊다. 1990년대 후반 청춘의 아이콘으로 데뷔한 두 배우는 체계도 온전하지 않던 연예계의 낮은 곳에서 성장했다. 김성수 감독의 '태양은 없다'에서도 두 배우는 무력한 청춘의 밑바닥을 연기했다. '태양은 없다'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정우성은 자신의 인기를 걸고 정의로움을 말하는 배우가 됐고, 이정재는 세계 무대에 영향력을 가진 배우가 됐다. 청춘의 아이콘으로 처음 만난 두 배우는 시간이 흘러 시대의 아이콘이 됐다. 그렇게 시대의 아이콘으로 다시 만난 두 배우는 신념을 바탕으로 주체적인 선택을 하는 캐릭터를 연기하며 삶의 방향을 스스로 정하고 나아가는 의지를 다음 세대에게 전달한다. 한국영화계에 대표적인 미남배우로 등극하며 시대를 풍미했던 대스타들은 벌써 다음 세대에 물려줄 말을 연습하고 있다. 시대가 빠르게 변하는 만큼 필요한 작업이라 생각된다(그럼에도 두 배우가 좀 더 오래 청춘의 아이콘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이 때문에 영화에서 두 캐릭터의 마지막 모습은 그 어떤 영화의 엔딩보다 감동적인 해피엔딩이다.
6. '태양은 없다' 시절의 정우성과 이정재를 기억하면 '헌트'에서의 두 사람은 꽤 재미있다. 그 당시 정우성은 복싱선수 도철을, 이정재는 흥신소 직원 홍기를 연기했다. 두 사람은 외형적으로도 하와이안 셔츠와 은갈치 정장을 입으며 상반된 모습을 보여준다. '헌트'에서 김정도와 박평호도 꽤 상반돼있다. 김정도는 과묵하면서 과감하고 직선적이지만, 박평호는 신중하면서 감성적이다. 세기의 절친인 두 배우는 두 편의 작품에서 만나며 늘 서로 상반된 캐릭터를 연기했다. 예전부터 정우성과 이정재를 보면 미모에 취해서 "두 사람의 이미지가 달랐던가"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이제 두 배우와 같이 늙어가는 처지가 되고 나니 정우성과 이정재가 상반된 이미지였던가 고민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오징어 게임'의 성기훈을 정우성이 연기하고 '증인'의 순호를 이정재가 연기했다면 어땠을까? 사실 이건 두 사람에게 직접 물어보고 싶은 이야기다. 서로를 보면서 "나와 다르다"라는 생각을 할 지.
7. '헌트'는 감독 이정재의 역량을 여실히 보여준 영화다. 꽤 정교하고 복잡한 시나리오를 훌륭하게 시각화하면서 액션 연출에도 신경을 쓴 눈치다. 영화 1편으로 감독 이정재를 정의하긴 어렵지만, '헌트'에서 보여준 그의 연출 스타일은 '조심스럽다' 한마디로 정의될 수 있다. '헌트'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극영화임과 동시에 '정우성과 이정재, 24년만의 만남'이라는 상징성도 가지고 있다. 적어도 감독에게는 후자의 상징성은 철저히 배제된 눈치다. 캐릭터의 감정을 관객에게 전달하고 장면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연출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위트가 넘치는 구간은 한국영화 남자배우들이 총출동한 것 같은 화려한 카메오군단이 나올 때다. 그 외의 장면에서는 '감독 이정재'의 개성을 찾기 어렵다. 어쩌면 신인감독이기에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한 셈이다. 아마도 앞으로 두세작품 정도 더 연출한다면 '감독 이정재'의 연출 스타일을 정의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그때쯤 되면 누군가는 '이정재 감독론'에 대해서 글을 쓸 수도 있을 것이다. ...써보고 싶다, '이정재 감독론'). 당장 '감독 이정재'에게 할 수 있는 말은 "고생하셨다", "영화 잘 만드셨다"가 전부다. 감독 이정재의 개성이 드러나는 순간이 궁금하다. 그러나 '오징어 게임' 이후 정신없이 바빠진 이 대배우에게 차기작(연출)을 기대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 배우 이정재도 보고 싶은 게 많고 감독 이정재도 보고 싶은 게 많다.
8. 결론: 시대의 거대한 흐름에 많은 사람들은 무력해진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고 시대의 흐름이 지나가길 기다린다. 고개를 든 사람이 있다면 시대의 파도에 휩쓸려 사라졌을 것이다. '헌트'는 그 가운데 무력하지 않은 두 인물을 보여준다. 안기부 차장이라는 거대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보다 더 높은 권력에 휩쓸려가고 있었다. 그렇게 뻔하게 흘러갈 뻔한 사람들은 기어이 자신의 의지를 드러내고 산화하거나 시대 앞에 스스로 해야 할 일을 한다. '헌트'가 그려낸 두 인물은, 시대에 휩쓸려가지 않고 무력하게 희생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근래 본 한국영화 속 어떤 캐릭터보다 매력적이다. 촘촘한 각본과 과감한 액션, 숨막히는 첩보전의 긴장감을 즐기기에도 충분하지만, 두 주인공의 행동과 선택을 쫓아가더라도 충분히 감동적인 영화다.
추신1) 영화 데뷔는 '헌트'로 처음 한 고윤정은 어려운 연기를 과감하게 잘 해낸다. 다시 한 번 고윤정의 소속사 MAA는 대단한 회사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연기 재능 충만한 얼굴천재는 어디서 찾은걸까?
추신2) 엔딩크레딧에서 '제작진이 감사한 사람' 이름에 배우 이선균의 이름이 있다. 새삼스럽지만, 이선균이 이 영화에 어떤 도움을 준 건지 궁금하다. 아내가 영화촬영에 집중할 수 있도록 배려해준 것에 감사한 것일까?
추신3)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신세계'에서 정청(황정민)과 이자성(이정재)의 마지막 대화가 떠올라서 피식했다. 가만 보면 이정재는 '신과 함께-인과 연'에서도 마지막에 수홍(김동욱)에게 "너, 나하고 일하나 하자"라고 제안한다. 이정재에게서 이자성을 지우는 일이 이렇게 어려운지 생각도 못했다. ...아니면 본인이 이자성의 변주를 즐기는 건가?
추신4) '헌트'에서 피식한 대목: '헌트'에는 차기 안기부장으로 배우 김종수가, 박평호의 정보원으로 이성민이 출연한다. 두 사람은 각각 '킹메이커'와 '남산의 부장들'에서 (이름을 정확하게 밝히지 않은) 한 인물을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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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진출 얘기도 있고... 몸이 여러개로도 부족한 사람일텐데.. 어쨌든 차기 감독작 빨리 보고 싶네요.^^
3,4번 이야기 너무 좋네요. 무력감 관련 써주신 글들에 많이 공감됩니다.
리뷰 잘 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