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리뷰] 박해일,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
사진=CJ ENM
만원짜리 지폐를 펼쳐놓고 세종대왕의 얼굴을 계속 보고 있으면 묘한 기분이 든다. 세종대왕의 업적이나 기록을 살펴보면 결코 눈빛이 공허할 수 없는 사람인데 만원 지폐에 그려진 세종대왕은 유난히 눈빛이 텅 비어보인다(오천원권의 율곡 이이나 천원권의 퇴계 이황도 비슷한 걸로 봐서 작가의 특성인 듯 하다). 공허하고 텅 빈 눈빛은 경우에 따라 치명적인 매력이 될 수 있다. 한국 배우들 중 눈빛이 공허한 배우를 찾으라면 김윤석과 소지섭이 대표적일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지폐 속 인물과 닮은 연예인을 언급할 때 가장 먼저 거론되는 배우다. 박해일이 '조선시대의 인물상'이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다. 데뷔 이후 그는 꽤 오랫동안 현대물을 주로 해왔기 때문이다('모던보이'를 제외하면 그의 첫 사극은 2011년 '최종병기 활'이다). 이후 조선을 배경으로 한 몇 편의 사극에서 그는 주요 인물들을 연기했다. 그제서야 관객들은 박해일이 '조선의 관상이었구나'라고 깨닫게 된다. '한산: 용의 출현'에서 이순신 장군을 연기한 박해일을 보면서 든 생각은 '100원짜리 동전을 뚫고 나온 장군'이라는 점이었다.
연극배우로 데뷔한 박해일은 빠르게 그 재능을 인정받아 2001년 임순례 감독의 '와이키키 브라더스'로 데뷔했다. 박해일이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건 2003년이었다. 이때 그는 두 달 간격으로 두 편의 영화에서 모습을 비춘다. 하나는 '국화꽃 향기', 다른 하나는 '질투는 나의 힘'이다. 관객들은 두 달 간격으로 순정파 멜로남 서인하('국화꽃 향기')와 구질구질 찌질남 이원상('질투는 나의 힘')을 만나게 된다. 이 혼란스런 상황에 관객들은 당황했을 것이다. "이 남자, 변태인가? 아니면 순정남인가?". 그 혼돈에 대해 봉준호 감독은 '살인의 추억'으로 응답한다('살인의 추억'은 '질투와 나의 힘'으로부터 일주일 뒤에 개봉했다). 박해일이 연기한 박현규는 영화 속 경찰들과 관객을 모두 혼돈에 빠뜨려야 했다. 그는 잔혹한 연쇄살인범일 수도 있고, 선의의 피해자일 수 있다. 이미 서인하와 이원상으로 보여준 성공적인 혼돈에 '살인의 추억'은 이렇게 응답한다. "박해일은 순정파 찌질이"라고(봉준호 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박해일에 대해 '비누 냄새 나는 변태'라고 평가했다).
박해일의 20대는 순정남과 찌질남, 진중함과 유머러스함의 반복이었다. 그는 '살인의 추억' 이후 '인어공주'에서 첫사랑 진국을, '연애의 목적'에서 변태같은 유림을 연기했다. 그리고 '괴물'에서의 운동권 남일과 '극락도 살인사건'의 우성을 오갔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20대는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을 찾고 그것을 갈고 닦는 시기다(가끔은 20대, 혹은 그 이전에 재능이 만개하는 사람이 있다). 박해일의 20대는 잘할 수 있는 것을 찾고 그것을 보여주는 데 집중하고 있다. 그와 함께 그의 20대는 '여심을 사로 잡을 준비를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박해일이 20대를 보냈던 2000년대 초반에는 여전히 마초남들이 자리를 잡던 시기였다. 1990년대 조폭영화의 유산이 계승되긴 했지만, 2003년 한국영화 르네상스 시기 이후 다양한 영화들이 등장하면서 다양한 개성의 배우들도 등장했지만, 1990년대부터 각광받던 정우성, 장동건, 이정재 등 마초형 미남배우들이 대세배우로 자리를 잡았다. 박해일은 그들에 비하면 확실히 다른 포지션의 배우였다.
30대의 박해일은 확실히 20대와는 달라졌다. '10억'과 '이끼'로 시작한 박해일은 '타이틀롤'로서 영화를 이끌고 갈 수 있는 힘을 보여준다. 특히 '이끼'는 여러 캐릭터들이 등장해 연기 향연을 펼치는 가운데 사건의 화자이자 관찰자로서 중심을 지킨다. 조성희 감독의 '짐승의 끝'에서 박해일은 그동안 쌓아온 익숙함을 모두 버리고 가장 신비로운 존재로 남는다. 이것은 박해일의 타고난 하드웨어와 그의 재능이 더해져 나온 결과다. 그리고 박해일의 30대를 대표할만한 작품인 '최종병기 활'과 '은교'에서는 다시 한 번 스텝업을 해 스스로의 가능성을 증명한다('은교'에 대한 논란은 잠시 접어두자). 나는 모든 배우가 연기변신을 하거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배우는 다양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라고 하면 "어머, 얘 저기야. 그런 건 다니엘 데이 루이스나 하는거다 얘"라고 말한다. 이미 박해일은 20대에 '가장 자신있는 연기'를 보여줬다. 그러다 '최종병기 활'과 '은교'에서는 "이런 것도 할 수 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액션영웅으로서 역량을 보여준 '최종병기 활'에서는 그의 공허한 눈빛이 빛을 발한다. 박해일이 연기한 남이는 맹수에게 쫓기는 사슴과 같은 눈빛으로 두려움을 느끼고 조바심 나는 몸짓을 보여주지만, 기어이 맹수를 다 잡아먹는 사슴이 돼버린다. 영화의 마지막에 관객은 카타르시스와 슬픔을 함께 느끼게 된다. 이것은 온전히 박해일이 했기에 가능한 장면이다. '은교'에서 박해일은 욕망하다가 시기하고 끝내 스스로 무너지지만, 이때 그는 '연애의 목적'에서 보여준 유림 같은 모습을 완전히 지워버린다. 금기시 되는 감정 앞에 이적요는 당황하지만, 단호하다. 유림의 말과는 비교도 하기 힘들 정도로 자기 욕망에 대한 정당성을 표정으로 드러낸다. 박해일의 굳게 다문 입술과 정확한 말은 듣는 사람에게 신뢰를 준다. 그러나 그의 공허한 눈빛은 그 신뢰에 의문부호를 남긴다. 이적요의 욕망은 정당한 것처럼 보이지만, 온전히 신뢰할 수는 없다. 그렇게 박해일은 '은교' 속 불완전한 욕망의 문학가 이적요를 만들어냈다.
박해일의 30대 끝자락은 '남한산성'으로 마무리된다. '남한산성'의 인물관계는 대단히 도식적이다. 이 영화는 최명길(이병헌)과 김상헌(김윤석)의 관계를 통해 정치의 길을 다루고 있다. 두 사람은 나라가 위기인 상황에서 자신의 신념을 펼치며 정치를 하고 있다. 정치가 변질된 현대사회에서 진짜 정치가 무엇인지 두 인물을 통해 보여준다. 여기서 박해일이 연기한 인조는 정치의 '대상'이다. 이 영화에는 수많은 백성들이 등장하지만, 최명길과 김상헌의 정치는 왕을 향해있다. 왕이 어떤 결정을 하느냐에 따라 백성의 안위가 달린 만큼 왕의 결정을 유도하게 하는 게 이 영화 속 정치다(이 맥락에서는 현대 정치도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이야기에서 인조가 해야 하는 역할은 두 주인공의 말을 받아주고 결정하는 것이다. 박해일은 여기서 온전히 자신을 돋보이게 하지 않는다. 주요 인물들과 앙상블을 훌륭하게 소화하면서 영화가 보여주는 정치가 더 정치다울 수 있도록 '인조'의 역할을 한다. 이때부터 박해일에게는 '완숙함'이라는 게 보이기 시작했다.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에서 박해일은 20대에 '연애의 목적'이나 '질투는 나의 힘'에서 보여준 변태적 이미지를 활용한다. 영화 속 윤영은 선배 송현(문소리)이 돌싱이 돼서 기쁘다. 윤영의 흑심은 송현을 향해있지만, 노골적이지 않고 뭉근하다. 이 감정은 '군산'의 이야기에 적당한 긴장감을 불어 넣어준다. 두 사람의 모호한 관계는 군산 거리를 헤매는 모호한 로드무비를 관객들이 계속 볼 수 있게 만든다. '나랏말싸미'는 (작품에 대한 논란은 잠시 접어두고) 버디무비다. 한글창제라는 과제를 두고 세종대왕(송강호)과 신미 스님의 관계가 이야기의 주를 이룬다. '나랏말싸미'에서 돋보이는 것은 박해일의 눈보다 입이다. 그는 스님의 단호한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유난히 입을 굳게 다문다. 굳게 다문 입을 거쳐 박해일의 눈으로 시선이 향하면, 처음으로 그 눈빛에 '의지'가 보인다는 걸 알게 된다. 몇 개의 작품에서 그는 '의지가 담긴 눈빛'을 보여준 적이 있다. 그러나 '나랏말싸미'는 관객이 그 눈빛을 인지할 수 있는 결정적인 지점이다. 의지가 담긴 그 눈빛은 어쩌면 박해일의 삶에서 나타났으리라. 의지가 담긴 그 눈빛을 알아채기 위해 관객들은 박해일의 영화인생을 쭉 돌아봐야 한다. 필모그라피들이 꽤 훌륭하니 돌아볼 가치는 충분하다.
'헤어질 결심'의 캐릭터 포스터에서 박해일의 얼굴을 처음 봤을 때, 다소 당황스러웠다. "박해일 맞아?"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낯선 표정과 시선이었다. '헤어질 결심'의 캐릭터 포스터는 정말 대한민국 화폐에나 어울릴 것 같은 그림이었다. 영화 속 해준은 반듯한 형사다. 수트를 차려입고 주어진 역량을 넘어 일을 성실하게 하는 편이다. '헤어질 결심'은 그런 해준이 붕괴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춘다. 서래(탕웨이)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위태로운 관계에 몰입하게 될수록, 그러다 서래가 이포에 다시 나타나 그녀를 마주하게 된 순간, 해준의 눈빛은 점점 공허해진다. 일을 완벽하게 처리하려는 의지가 담긴 형사의 눈빛은 서래를 만나고 힘을 잃는다. 그와 반대로 서래는 해준을 사랑하게 되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게 될 수록 눈빛에 그 의지가 드러난다. 이 때문에 '헤어질 결심'은 박해일의 눈에 대한 드라마라고 봐도 무방하다. 한 남자가 붕괴되면서 사랑이 완성되는 비극적 멜로가 완성되는 박해일의 공은 대단히 크다. 그 눈빛의 스펙트럼은 배우가 쉽게 얻기 어려운 자산이다.
'한산'의 박해일은 돈을 찢고 나온 남자가 된다. 이 영화에서 이순신 장군은 대사가 그리 많은 편이 아니다. 그리고 감정을 온전히 행동으로 드러내지도 않는다. 전작의 최민식과 마찬가지로 지휘관 답게 뭔가에 휘둘리지 않는 태도가 돋보인다. 이순신 장군을 연기하는 일은 의외로 말과 행동의 제약을 많이 받는다. 이 때문에 눈빛과 표정은 대단히 중요한 도구가 된다. 내내 굳은 표정을 짓고 있는 이순신 장군의 얼굴은 "감정이 없는 편인가"라는 인상을 주게 한다. 그의 표정과 눈빛에서 감정이 드러난 순간은 꿈 속에서 거대한 성을 마주한 순간뿐이다. 박해일은 내내 굳은 표정과 눈빛을 유지한다. 그리고 이 얼굴은 도화지가 돼 이야기를 끌고 가는 도구가 된다. 박해일의 굳은 표정은 작전 중 일어나는 상황들과 맞물리게 된다. 상황이 일어나고 박해일의 얼굴이 보여지는 몽타주는 서사가 완성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이순신 장군은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그러나 영화는 이순신 장군의 인간적인 고뇌보다 그의 성취에 집중하고 있다. 영화의 절반을 해전 장면에 투자한 이유는 영화의 목적을 더 명확하게 보여준다. 박해일은 그 목적에 걸맞게 스스로를 비우고 이순신 장군의 업적이 온전히 완성될 수 있도록 이야기를 그릴 수 있는 도화지가 됐다.
1977년생인 박해일은 아직 40대 중반이다. 20대 때부터 굵직한 작품에 얼굴을 비춘 이 배우는 벌써 거대한 산을 완성한 분위기다. 그러나 이 놀라운 커리어에도 불구하고 박해일은 아직 보여줄 게 많다. 20대 때 그의 공허한 눈빛은 속을 알 수 없는 냉미남의 눈빛에 가까웠다. 그러나 40대의 공허한 눈빛은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큰 그릇이 됐다. 영화배우를 보면서 이토록 다음 작품을 종잡을 수 없는 배우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이미 그 눈빛은 무엇이든 담을 수 있고 담은 것을 온전히 표현할 수 있게 됐다. 한없이 맑고 투명하며 깊이를 가늠할 수 없다. 남태평양 어딘가에 다이버들을 잡아먹는 블루홀처럼 신비로운 눈빛으로 관객을 유혹하지만, 위험하다. 그 눈빛의 심연에는 무엇이 담겨져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깊이조차 가늠할 수 없다. 이보다 위험한 배우가 한국영화에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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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넘은팬으로서 한가지자신할수있는건
정체되지않은 배우라는것.
앞으로의 배우인생도 응원합니다.^^
이전에 여러 작품을 보면서 관심은 가졌지만 헤결에서 보고는 완전히 붕괴되었네요 ㅎㅎ
박해일의 쌍꺼풀없는 큰 눈이 곧 영화를 보여주고 서래를 보여주고 해준의 마음을 보여주는 스크린이었어요
그의 눈이 다한 영화죠
그래서인지 보고 또 봐도 다시 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