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fan. 스포주의] '곡비' 간단 리뷰
1. '공포는 비극으로부터 나온다'. 이 말은 대런 애로노프스키의 영화 '레퀴엠'을 봤을 때 처음 떠올린 말인다. '레퀴엠'은 우리가 흔히 아는 '공포영화'라는 장르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작품이다. 그러나 나는 이 영화를 정말 무섭게 봤으며 지금도 어떤 공포영화보다 무서워한다. '레퀴엠'은 한 가족의 이야기다. 이 가족은 행복을 꿈꾸며 각자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그러나 그 방법은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고 가족은 처참히 몰락해버린다. 행복이 파괴되는 비극 앞에 누구의 책임을 물을 겨를도 없다. 그저 행복을 꿈꾸다 망가져버린 가족의 비극을 마주하는 일이 소름돋을 정도로 무서웠다. 이 영화를 보고 "공포영화가 왜 무서울까?"라는 고민을 했다. 단지 이상한 괴물이 나와서? 피와 내장이 난무해서? 깜짝 놀켜서? 그것은 영화를 다 보고 극장 밖으로 나설 때 휘발될 공포다. 차라리 그런 공포라면 다행스럽다.
2. 공포는 비극으로부터 나온다.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무엇일까? 신화적인 존재나 끔찍한 괴물, 잔혹한 연쇄살인마는 당연히 두렵다. 다만 단순히 그 존재 자체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그것이 삶을 파괴할 수 있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낀다. 슬래셔 영화를 볼 때 살인범에게 이입해서 영화를 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만약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를 멀리 하는 게 좋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피해자를 주인공으로 놓고 그에게 이입해서 영화를 보도록 한다. 그래야 피해자가 느끼는 두려움이 관객에게 전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피해자가 느끼는 두려움은 무엇일까? 살인마 존재 그 자체가 아니라 살인마에게 자신의 신체가 훼손당하고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 삶이 파괴될 수 있다는 공포다(존 맥노튼의 '헨리: 연쇄살인범의 초상'은 매우 드물게 살인범의 시선으로 전개되는 영화다. 이 영화에서는 최소한의 예의로 관객이 주인공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도록 연출한다. 살인범의 행위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도록 한 연출이다). 슬래셔 무비뿐 아니라 모든 공포영화는 삶을 파괴할 수 있는 하나의 사건이나 존재의 출현을 다룬다. 관객에게 끔찍한 실체나 잔혹한 사건을 마주하게 해 그 근원을 바라보지 못하게 한 것은 다행일지도 모른다. 공포의 실체를 마주하고 그것을 인지하는 순간, 세상에는 무서운 게 꽤 많아지기 때문이다.
3. 롭 자바즈 감독의 대만영화 '곡비'는 잔혹한 고어영화다. 어느날 갑자기 출현한 바이러스로 인해 사람들이 미쳐버린 도시를 배경으로 젊은 남녀커플이 생존을 위해 싸우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영화의 시작은 앨빈 바이러스에 대해 "과장됐다"고 주장하는 유튜버의 주장을 들려준다. 그는 "앨빈 바이러스로 인한 사망자도 없는데 과학자들이 공포를 조장하는 게 아니냐? 총통 선거가 얼마 안 남아서 이러는 것이냐?"라고 묻는다. 방송에서 출연한 바이러스 학자(람위화)는 앨빈 바이러스의 무서움에 대해 설명하지만, 유튜버는 이를 듣지 않는다. 조금 과장됐지만, 이 장면은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초창기를 떠올리게 한다. 이 바이러스는 우리의 일상을 파괴할 정도로 강한 전염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일상이 멈출 수 있다"는 경고는 두려워서 믿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우리는 달라진 일상에 적응하며 마치 그것이 원래 삶이었던 것처럼 살고 있다. 그나마 코로나 바이러스의 높지 않은 치명률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4. 앨빈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강한 폭력성이 드러난다. 마치 좀비 바이러스처럼 이성을 상실하게 만들지만, 그들은 말도 하고 생각도 한다. 심지어 바이러스의 공식적인 증상이 강한 폭력성으로 폭행과 살인, 강간 등을 저지를 수 있다고 한다. 꽤 색다른 바이러스다. 공식적으로 드러난 바이러스의 증상인 '폭행, 살인, 강간'은 뉴스에서 자주 보던 내용이다. 사회의 발전속도가 빨라지고 경제가 급성장하면서 강력범죄도 더 잔인해지고 있다. 지금 40대 이상들은 다들 기억할 '박한상 존속살인사건'을 예로 들어보자. 1994년 있었던 이 사건은 재벌집의 유학파 아들 박한상이 자신의 부모를 끔찍하게 살해한 사건으로 강우석 감독의 영화 '공공의 적' 속 조규환(이성재)의 모티브가 됐다(사형이 확정됐지만, 현재까지 형이 집행되진 않았다). 당시 박한상 존속살인사건은 세간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연일 뉴스의 헤드라인을 차지했다. 종이신문을 펼쳐봐도 1면부터 최소 5~6면까지는 박한상 존속살인이 도배할 정도였다. 만약 2022년인 현재에 박한상 존속살인과 유사한 형태의 살인사건이 일어난다면, 종이신문에 몇 개 면을 차지할 수 있을까? 아무리 좋게 봐줘도 사회면 중간톱 정도로 예상해본다.
5. 현대사회는 윤리의 도덕성이 강조되고 있다. 연예인이나 운동선수, 정치인에게도 완전무결한 도덕성이 중요한 덕목으로 작용하고 있다. 더 윤리적이도 도덕적이어야 하는 시대에 강력범죄는 더 잔인해지고 있으며 사람들은 거기에 무감각해졌다. 부모를 죽인 패륜아 못지 않게 자식을 죽인 패륜 부모도 심심치 않게 등장하지만, 자식 살해는 부모 살해만큼 가중처벌을 받지 않는다. 그만큼 우리는 잔혹한 일에 무감각해졌다. 일상이 파괴될 수 있다는 공포는 과거보다 더 피부로 가까이 와닿아있다. 삶이 붕괴되는 비극이 일어날 수 있다는 두려움은 이성적 사고를 멈추게 했다. 그 결과 어떤 사람들은 비이성적인 행동을 한다. '곡비'처럼 완전히 이성이 마비돼 사람을 죽이고 길에서 강간을 저지르지는 않더라도 끔찍한 범죄의 피해자 앞에서 막말을 하고 조롱하는 댓글을 단다. '곡비'에 등장하는 미쳐버린 존재들은 영상으로 표현된 악플러와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다. 악플이 진화하면 앨빈 바이러스가 될 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6. '곡비'는 바이러스에 의한 재앙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영화는 이 바이러스에 대해 감염경로를 설명하지 않는다. 통상 바이러스라면 호흡기로 감염되거나 타액, 혈액, 피부접촉 등으로 감염될 수 있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앨빈 바이러스의 감염경로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리고 영화 내내 바이러스 걸린 사람들과 싸우다가 도망치는 두 주인공은 감염자와 접촉도 있었고 밀폐공간에도 있었지만, 감염되지 않았다. 이들이 감염되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아저(주헌양)는 스쿠터를 타고 감염자들을 피해 카이팅(뇌가납)에게 간다. 터널이 막히면서 산길로 향하던 중 카이팅과 우여곡절 끝에 통화가 된다. 이때 아저는 극심한 두려움으로 헛것까지 본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을 때 그가 본 광경은 불타서 폐허가 된 타이페이의 모습이다. 영화 내내 살아있던 카이팅은 바이러스 학자에게 잡혀 배양액까지 강제로 투입당하지만, 감염되지 않는다. 끝까지 생존자로 남아있던 카이팅은 바이러스에 감염돼 자신을 죽이러 오는 아저를 피해 도망치며 그의 끔찍한 말들을 듣는다. 좌절하며 울던 카이팅은 결국 침을 흘리며 실성한다. 면역자인 줄 알았던 카이팅이 감염된 아저를 보자마자 감염돼버린 것이다.
7. 이 바이러스는 삶이 붕괴되는 비극을 마주했을 때 발생한다. 게다가 감염자가 보이는 증상은 폭력과 살인, 강간이지 않은가. 끔찍한 강력범죄로 죽지 않는다면 다치거나 망가진 상태에서 이성의 끈이 풀리면서 바이러스에 감염돼버린다. '곡비'는 정말 색다른 바이러스를 만들어 낸 영화다. 특히 영화가 후반부로 향하면, 더 이상 감염자와 비감염자를 구분하기 힘든 지경에 이른다. 예를 들어 병원 대기실 장면에서 두 명의 시민이 몸싸움을 일으킨다. 잔뜩 예민한 상황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이 장면은 마치 감염자들이 침입한 것처럼 연출된다(지하철 직원 아저씨까지 카이팅에게 전화기 내놓으라며 머리채를 잡는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는 누구도 감염되지 않았다. 그리고 바이러스 학자는 감염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불안한 모습을 보인다. 자신의 연구를 증명하기 위해 그는 신생아실에 버려진 아이들까지 실험에 이용한다. 학생들에게 폭행당하고 있는 남성을 아저가 구해주지만 알고 보니 그 역시 감염자였다. 이 바이러스는 감정에 의해 발현된다. 감염내과 전문의들에 따르면, 좀비 바이러스는 감염자가 외형적으로 명확하게 드러나서 구분이 쉽다. 그러나 코로나 바이러스처럼 감염자와 비감염자를 구분하기 어렵다면 이는 통제하기 어렵다. 앨빈 바이러스는 감염경로도 명확하지 않고 감염자를 구분하는 것도 쉽지 않다(눈동자를 보고 구분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비감염자도 감염자 같은 짓을 한다는 데 있다). 이 바이러스에 대한 감염내과 전문의들의 의견이 궁금하다.
8. 무섭다고 소문난 몇 개의 공포영화를 떠올렸다. '미드소마'의 마을은 공포의 공간이 아니다. 단지 문명사회와 문화가 다른 오지마을이다. 영화에서 보여진 온갖 비이성적인 행위들은 그저 '다른 문화'일 뿐이다. '미드소마'는 다른 문화를 접하는데서 오는 두려움을 다루고 있다. 이 문화는 다니(플로렌스 퓨)와 그 일행들이 아는 일상과는 다른 곳이며, 일행들은 자신들이 알던 삶과 다른 것을 마주하는데서 두려움을 느낀다. 관객이 느끼는 두려움도 바로 거기에서 기인한다. '마터스: 천국을 보는 눈'은 기이한 존재들이 등장하다가 후반부에 끔찍한 고문장면으로 공포를 선사한다. 이 고문장면에서는 대사가 한마디도 없다. 목적이 드러나지 않은 폭력에 관객들은 어쩔 줄 모를 지경에 이른다. 관객은 그저 의자에 감금된 채 이 폭력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끔찍한 폭력으로 무너지는 한 여성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 관객은 끔찍하게도 그 여성이 당하는 폭력과 그 폭력으로 인해 무너지는 여성의 삶을 체감한다. 무섭다고 소문난 영화들은 대부분 삶이 무너지는 공포에서 비롯된다.
9. 결론: 공포영화를 좋아했던 나는 나이가 들면서 더 이상 공포영화가 무섭지 않다. 만약 누군가 "공포영화가 왜 안 무섭냐?"라고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뉴스 틀어봐라, 그게 더 무섭다"라고 답한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재확산 조짐을 보이고 있다. 물가는 역대급으로 치솟고 있고 세계는 가난한 나라부터 붕괴되고 있다. 역대급 무더위와 기상이변이 찾아왔다. 환경학자들은 100년전보다 지구온도가 1.5도 올랐고 앞으로 8년 이내에 이를 낮추지 못한다면 지구에서 다음 세대의 삶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길 한복판에서 끔찍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변호사에게 불만을 품은 한 사람이 변호사 사무실에 불을 질러 몇 명이 사망했다. '공포'를 느끼고 싶다면 뉴스보다 무서운 게 세상에 없다. '곡비'의 감염자들을 현실에서 보고 싶다면 포털 뉴스나 유튜브 댓글창을 보면 된다. 고어씬에 가려졌지만, '곡비'에서 진짜 무서운 장면은 이성의 끈을 놔버린 존재들을 마주하는 일이며 그들로 인해 무너진 도시와 무너진 삶을 마주하는 일이다. 이것이 세계의 끔찍한 범죄와 전쟁들, 잔혹한 정치가들, 악랄한 기업가들을 마주하는 일과 뭐가 다른가. '곡비'는 폭력적이고 끔찍한 장면들보다 그것을 저지르는 인간들을 보는 게 더 무섭다. 그리고 그 인간들로 인해 붕괴되는 일상을 마주하는 일도 무섭다. 사실 '곡비'에서 제일 무서운 장면은 모든 TV채널에서 '정규방송을 중단합니다'라고 나오는 '붉은 화면'이다(하필 붉은 색이다).
추신) 의외로 영화 속 한 장면 때문에 던킨도너츠 스트로베리필드가 생각날 수 있다.
추천인 25
댓글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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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염 안 됐다고 볼 수도 있고요.
영화 초반에는 영상의 색감이 청색, 녹색이 많았는데 감염사태 이후 핏빛 빨강으로 물드는 것도 흥미로웠습니다. 생각해보니 말씀하신 것처럼 방송중단 화면도 빨강...
어찌보면 '불편하라고'만든 영화에 불편함을 느꼈다면 성공같기도 하고요. (삐빅 인간입니다)
그런 점에서 가스파 노에가 《돌이킬 수 없는》 상영 이후 뿌듯해(!)했던 일화도 생각나고요 ㅎㅎ
여담이지만 미국에서 대통령 죽는 장면은 안나올 것 같은데 대만영화에서 총통이 (그것도 끔살로) 죽는 장면은 신박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