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맨 이야기 #1. 노인과 바다 "Good luck, old man."

안녕하세요. 소나기가 내리던 변덕스런 하루의 늦은 밤, 익무에서의 첫 영화 이야기를 시작해봅니다.
어떤 영화 이야기를 가장 먼저 남기면 좋을까 생각해보니 이 영화가 가장 먼저 떠오르더군요. 제 닉네임 '올드맨'의 출처, <노인과 바다("The Old Man and the Sea" by Aleksandr Petrov, 1999)>입니다.
혹 <노인과 바다> 이야기를 모르시는 분을 위해 아주 간략히 내용을 말씀드리자면, 무려 84일 동안 물고기를 낚지 못한 늙은 어부(산티아고)가 바다 한 가운데서 아주 커다란 청새치를 잡게 되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상어떼들에게 그 청새치를 모두 빼앗기고 빈 손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언뜻보면 무척이나 허무한 내용처럼 보이는 이 이야기의 진짜 내용은 노인의 이 말에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패배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어. 파멸할 수는 있어도 패배는 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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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원작 소설의 작가 헤밍웨이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만들어진 20여분 길이의 애니메이션 영화입니다. 2000년 7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단편 애니메이션으로 선정되기도 한 작품이지요. 이 영화는 페트로브 감독과 그의 아들이 유리 위에 파스텔 오일을 붓과 손으로 찍어 바르는 방식으로 만든 29,000장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영화를 직접 보시면 그 독특한 질감을 바로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주로 바다가 나오다 보니 푸른 계열의 물감이 가득한데도 영화 전반에 따뜻한 온기가 가득 느껴지는, 참 신기한 영화입니다.
이 영화가 제게 특별한 의미를 가지게 된 건 사실 이보영 배우 덕분이기도 합니다. 이보영 배우는 2012년 드라마 <적도의 남자>에서 시각장애가 있는 남자주인공을 위해 책을 읽어주는 낭독 봉사를 하는 캐릭터로 나온 바 있습니다. 이후 극 속에서 짧게 읽었던 <노인과 바다> 전문을 낭독하여 오디오북을 발표하였지요. 이보영 배우가 읽는 <노인과 바다>를 혹시 들어보셨나요? 제가 지금껏 들은 오디오북 중 단연 최고입니다. 처음 이 오디오북을 들은 이후, 저는 이보영 배우가 읽어주는 산티아고와 소년(마놀린)의 이야기를 들으며 수많은 불면의 밤을 외롭지 않게, 조금은 덜 힘들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이 영화를 보게 되었고, 목소리로만 들어오던 노인의 꿈 속 사자들, 노인과 함께 배를 타지 못해 아쉬워하는 풀 죽은 소년의 모습, 거대한 청새치의 힘에 끌려가는 낚싯줄을 힘겹게 잡아채며 버텨내는 노인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게 되었지요. 영화를 처음 본 날의 느낌이 지금도 생생하네요. 그 날에만 이 영화를 몇 번이나 다시 봤던지..!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이른 새벽, 소년과 노인이 등불을 비추며 어두컴컴한 산길을 내려오는 장면과 뒤이어 나오는 푸른 새벽 하늘에 하얀 별들이 빛나는 항구의 모습입니다. 정-말 아름답습니다. 청새치와 노인이 힘겨루기를 하는 장면도 단연 최고입니다. 서로 밀고 당기고, 끌어당기고 끌려가는 모습과 그 뒤의 성난 파도를 아주 멋지게 그려냈습니다. 아직 이 영화를 못 보신 계신 분이 계시다면 꼭 한 번은 볼 만한 작품이라고 추천해드리고 싶습니다. (20분이면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딱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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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영화의 핵심 이야기인 청새치와 산티아고의 이야기도 멋지지만, 사실 저는 노인과 소년의 이야기를 더욱 좋아합니다. 매 순간 노인을 살뜰히 챙기며 걱정해주는 소년과, 커다란 청새치를 마침내 제압하고 가장 먼저 소년을 떠올리는 노인의 모습을요. 언젠가 인생의 전성기를 모두 보내고 늙고 지친 노인이 된 저에게도 누구보다 제가 최고라며 저에게 용기를 주는 마놀린 같은 친구가 생길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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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밤은 <노인과 바다>를 보고 잠들어야겠습니다. 익무 여러분들의 밤에도 소년의 다정한 인사가 함께 하길 바랍니다.
"물론 고기를 잘 잡는 어부랑 훌륭한 어부도 많아요. 하지만 할아버지 만한 분은 없어요. ... 안녕히 주무세요,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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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 잘읽었습니다
못본 애니메이션인데 기회되면 챙겨봐야겠어요 ㅎㅎ
글읽다보니... <나무를 심은 남자>가 생각이 났습니다.
일본 애니와 디즈니가 최고야라고 생각하고 있을때 충격먹은 애니였습니다.


지난 주말 천안에서 이자람님의 판소리 노인과 바다를 보고 감동에 겨워 자람님의 책까지 샀는데 노인과 바다 글을 보니 신기하네요ㅎ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