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주의] '레드 로켓' 간단 리뷰
1. 미국은 넓은 나라다. 영토 면적 기준으로 중국보다 근소하게 넓고 캐나다보다 근소하게 작은 3위다. 당연히 이 넓은 나라에서는 우리가 아는 뉴욕, L.A, 시카고, 보스턴, 샌프란시스코, 시애틀같은 대도시만 있지 않을 것이다. 설령 대도시를 살펴본다 하더라도 도시의 변두리에는 언제나 살펴보지 못한 낯선 공간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서울의 빌딩숲이나 오래된 주택단지에 익숙해져있던 나에게 서울 강남구 청계산로(a.k.a. 내곡동)는 낯선 동네였다. 산과 들판, 밭이 전부고 편의점 대신 구멍가게가 위치한 이곳은 "서울이 맞나?" 싶은 생각이 들게 했다(그럼에도 전직 대통령이 가고자 했던 기회의 땅이다). 내곡동에 처음 발을 딛었을 때, 나는 이제까지 알던 서울의 이야기와 전혀 다른 새로운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었다. 서울이면서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서울은 익숙한 서울의 이야기와 다른 것을 떠올리게 한다. 션 베이커 감독의 영화들도 그런 식이다.
2. '탠저린'부터 그의 영화를 봤다. '탠저린'과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각각 L.A.와 올랜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들 도시는 미국의 대표적인 관광·휴양도시다. 그러나 영화가 다루는 이야기는 휴양지의 중심에서 펼쳐지는 낭만적인 것들이 아니다. 오히려 영화의 배경이 되는 도시는 황폐하고 허름하다. 그곳에서 들려주는 이야기 역시 성소수자나 마약중독자, 빈곤층 등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다. 마치 도시의 그림자에 노골적으로 후레쉬를 비추고 들여다 보는 느낌이다. 션 베이커의 새 영화 '레드 로켓'은 이런 전작과 별로 다르지 않다. 이번에는 텍사스로 향한다. 영화는 미국 메이저 스튜디오인 유니버셜 스튜디오의 화려한 로고로 시작된다. 이는 이 영화를 통틀어 가장 화려한 장면이다. 흔들리는 정체불명의 형태를 비추면서 오프닝 크레딧이 등장한다. 급격하게 줌아웃이 되자 그것은 주인공 마이키(사이먼 렉스)가 타고 있는 버스의 카시트였음이 드러난다. 마이키가 향하는 곳은 텍사스 시티다. 정유공장 단지가 마을을 감싸고 있는 동네다. 이번에도 션 베이커는 도시의 변두리로 향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3. 마이키는 L.A.에서 포르노 배우를 하다 빈털터리가 되고 별거중인 아내의 집으로 돌아온다. 아내 렉시(브리 엘로드)와 장모(브렌다 데이즈)가 사는 집에 사정해서 얹혀살기 시작한 마이키는 월세를 보태기 위해 일을 찾다가 고등학교 시절 친구의 어머니인 레온드리아(주디 힐)를 찾아간다. 레온드리아는 지역의 마리화나 공급책을 맡고 있다. 마이키는 마리화나를 떼어와서 판매하는 일을 하게 되고 그럭저럭 살림에 보탬이 된다. 큰 돈을 번 마이키는 아내와 장모에게 "오늘 내가 쏜다"를 시전하고 도넛 가게에 데려간다. 그러다 도넛 가게의 어린 점원 스트로베리(수잔나 손)를 알게 되고 그녀에게 작업을 건다. 스트로베리와 연인 관계로 발전한 마이키는 성인이 되기까지 3주 남은 스트로베리를 꼬셔서 포르노배우로 데뷔시키고 그녀를 매니지먼트하며 재기할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레온드리아의 경고를 무시하고 정유공장 직원들에게 마리화나를 팔게 된다. 이제 마이키는 스트로베리와 함께 L.A.로 떠날 계획을 하지만 일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4. '레드 로켓'은 표면적으로 철없는 남자가 난처한 상황에 처해지는 이야기다. 마이키는 자신에게 처해진 상황이 더 나아지기를 바라며 거짓말도 해보고 도박도 벌이지만 현실은 더 나락으로 떨어질 뿐이다. 대단히 특별할 것이 없는 이야기지만, 성실하고 뚝심있게 이야기를 써내려간다. 그렇게 쓴 이야기는 엄청난 대사량, '웃픈' 사건들과 맞물려 도저히 눈을 뗄 수 없게 한다. 그런데 이 이야기와 사건들을 감싸는 뉴스는 결코 흘려 들을 수 없게 된다. 이 이야기의 배경은 도널드 트럼프와 힐러리 클린턴이 대통령 선거전을 벌이던 시기다. 즉 트럼프의 시대도 도래하기 전이다. 영화를 만드는 현실적인 여건과 별개로 왜 트럼프의 시대가 도래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이 영화가 공개된 현 시점은 트럼프의 시대마저 저물어버린 '바이든의 시대'다. 이를 두고 '몰락한 트럼프의 시대에 대한 자화상'이라고 해석해야할 지 고민하게 된다.
5. '레드 로켓'의 배경묘사는 넷플릭스 영화 '힐빌리의 노래'를 연상시킨다. '힐빌리의 노래'는 실리콘밸리의 자수성가한 사업가 J.D.밴스의 자전적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J.D.밴스는 몰락한 공업 지대인 러스트벨트 출신이다. 이곳은 트럼프 지지층의 기반이 된 백인 저소득층이 밀집한 지역이다. '힐빌리의 노래'가 보여주는 J.D.밴스의 성공신화는 가난한 마을에서 자신을 지킬 수 있게 해준 할머니와 어머니, 누나에 대한 존경과 찬사다. 그는 자신의 성공을 주변에서 희생하며 도와준 여인들에게 돌리며 감사하고 있다. '레드 로켓'의 배경이 되는 텍사스시티 공업단지에도 백인 저소득층이 모여있다. 이들이 트럼프의 지지자인지 알 수는 없지만, 텍사스주는 공화당의 오래된 텃밭이다. 공화당의 텃밭에서 '힐빌리의 노래'는 백인의 성공신화를 다루고 있다면 '레드 로켓'은 몰락한 백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심지어 사이먼의 몰락을 주도한 사람은 아내 렉시와 장모 릴이다(여기에 레온드리아와 그녀의 딸 쥰도 가세한다).
6. '몰락한 백인남성' 마이키는 고속도로를 밤새 걸어와 스트로베리의 집앞에 도착한다. 스트로베리는 빨간색 비키니를 입고 섹시하게 그를 맞이한다. 영화는 그 장면이 현실인지 마이키의 상상인지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그가 스트로베리의 L.A.로 향하는 장밋빛 미래는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는 확신은 하게 된다. 이미 트럼프의 시대는 저물었기 때문이다. '레드 로켓'에서는 재미있는 장면이 등장한다. 마이키가 스트로베리의 권유로 정유공장 직원들에게 마리화나를 판매한다. 이 소식은 레온드리아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고 레온드리아는 정유공장 직원들에게 마리화나를 팔지 마라고 한다. 표면적인 이유는 정유공장 바로 옆에 경찰서가 있어서 걸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실체에는 지역 경제의 기반이 되는 정유공장을 마리화나로 물들일 수 없다는 의지가 반영돼있다. 미국은 자본주의 나라다. 당연히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성공의 절대적 기준이며 미덕이 된다. 그러나 돈을 벌기 위해 넘어선 안될 선을 넘는 것은 지역의 기반을 오염시킬 수 있다. 트럼프가 내세운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는 자본주의적 사고를 중심으로 글로벌 외교를 벌이면서 이뤄졌다. 그 결과 조 바이든이 대통령이 되는 결과로 돌아왔다.
7. 이 영화는 돈을 버는 일만이 절대적 성공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돈 버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니냐"라고 반박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성실한 정유공장 직원들도 있었고 도넛 가게를 운영하는 팬(신 칭-초우)도 있었다. 마이키 역시 처음부터 마리화나를 팔 생각은 없었다. 일자리를 구하려고 했지만, 포르노배우의 경력은 아무 도움이 안됐고 실업급여를 받을 여건도 되지 않았다. 사실상 시스템이 마이키를 코너로 내몰았다. 미국은 땅이 넓은 나라다. 당연히 시스템은 넓은 나라 곳곳을 살펴보지 못한다. 그럼에도 시스템은 지금보다 조금 더 꼼꼼했어야 했다. 미국은 지난해 대규모 인프라 투자계획을 발표했다. 이제서야 시스템을 조금 더 촘촘하게 만들겠다는 의지다. 오바마의 시대(트럼프 당선 이전)에서 시스템의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트럼프의 연설을 본다. 그리고 트럼프의 시대가 도래하겠지만, 더 나아진 삶을 기대하긴 어렵다. 트럼프의 시대를 지나고 바이든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시스템을 보완하기로 한다. 이는 자본주의의 맹점을 드러내거나 공화당 지지자들을 비난하는 게 아니다. '레드 로켓'은 정치색을 가진 영화가 아니다. 대신 산업화와 정보화의 빠른 흐름에서 소외된 것, 사람들을 바라본다. 이는 션 베이커 영화의 오랜 화두이자 주제의식이다. 다만 '레드 로켓'에 이르러서는 그것을 역사와 정치로 확장시킨다. 이 영화에서는 간간히 텍사스 킬링 필드나 노예무역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마치 '드라이브 마이 카'처럼 시대와 역사에 대한 시선을 가진 채 소외된 사람들을 대한다. '레드 로켓'은 더 진화한 션 베이커의 영화라고 볼 수 있다.
8. 이야기꺼리가 많은 영화가 풍부한 담론을 가진 영화지만, 많은 관객과 만나게 하는 데는 두려운 점이 있다. 이 영화에서 마이키와 스트로베리의 관계는 엄밀히 따지면 미성년자와 성관계를 갖는 것에 해당한다. 비록 스트로베리를 연기한 수잔나 손은 뉴질랜드 출신의 배우 겸 가수로 1995년생이다. 그러나 여고생으로 봐도 무리가 없는 외모 덕분에 마이키와 스트로베리의 정사는 꽤나 아슬아슬해보인다. 심지어 마이키는 스트로베리를 포르노배우로 만들려고 한다. 이런 위험한 전개 덕분에 극장에 섣불리 걸었다가는 흠씬 두들겨 맞을 수 있다. 심의에서 그나마 자유로운 영화제를 통해 공개됐기에 극장에 무리없이 걸 수 있었지만, 정식 개봉이라면 심의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지도 장담하기 어렵다. '레드 로켓'은 션 베이커의 영화들이 늘 그랬던 것처럼 재야의 영역에서 관객을 만나는 게 나아보인다. '레드 로켓'은 '플로리다 프로젝트'보다 유쾌하지만, '플로리다 프로젝트'처럼 화사하지 않고 부도덕하다. 이건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니다.
9. 결론: 정치적 배경이 드러난 영화인 만큼 이 부분을 신경써서 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철 없는 남자 마이키가 폭망하는 이야기 그 자체로 즐겨도 충분히 매력이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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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는 있는데 이걸 웃어야하나 하는 묘한 영화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