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과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를, 끝사랑과 <피그>를!

코폴라 가문이면서도 후광에 기대기 싫어 마블의 루크 케이지에서 이름을 가져와 니콜라스 케이지로 활동하는 그에게, 단순히 <피그> 한 편으로 "인생 연기"라는 찬사를 붙인 기사를 보니 약간은 통찰이 떨어지는 문장과 너머의 직관에 반감이 생기는군요. 보도자료 가져와서 적당히 믹스해서 냈을 기사이겠지만 적어도 니콜라스 케이지가 100여 편 가까이 연기해왔던 과거를 살폈다면, 이토록 나이브한 기사 제목은 뽑아내지 않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원래 연기 잘했던 배우, 니콜라스 케이지
아마도 개봉한 니콜라스 케이지의 영화는 전부 보았다고 생각합니다. 공부를 하기 위해 또는 평론가 같은 "자격증"을 위해 공부를 한 게 아니라 그 시기, 시절에 맞게 "니콜라스 케이지의 영화를 즐기며 향유하며 느끼며" 함께 했습니다.
처음으로 니콜라스 케이지를 눈여겨 본 영화는 <버디>였습니다.
'80년대 초반 저에게, 하나의 난제는 월남전에 참전한 삼촌이었습니다. 평소는 말도 없이 수더분하게 지냅니다만, 술만 먹으면 포악한 동물로 변해 사람을 패는 삼촌은 그야말로 형언하기 힘든 화두였습니다. 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술에 취하면 삼촌은 꼭 저희 집에 왔습니다. 맞벌이였던 아버지와 어머니가 없는 집에서 장남인 저는 동생들이 폭력에 노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삼촌에게 "일부러" 맞아야 했습니다. 삼촌은 저를 때리다 번뜩 정신이 들면 두 손을 펼쳐 바라봅니다. 마치 피라도 묻었다는 듯 그리고 이렇게 울부짖었습니다.
"내가 월남에서 그 사람들한테 무슨 일을 했는고 아나!"
그즈음 <버디>를 보았습니다. 알과 버디의 모습이 삼촌과 겹쳐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알에게서 저와 같다는 동질감을 느꼈습니다. 이게 PTSD라는 걸 알게 된 것과, 삼촌이 울며 제게 외치던 말이 무섭게 느껴진 것은 한참이 지나 성인이 된 뒤였습니다.
<페기 수 결혼하다>와 <아리조나 유괴사건>을 지나 한국 팬에게 눈도장을 각인했던 영화는 <아파치>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탑건>의 성공에 고무된 아류작으로 분명 흥행에서는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는 극장보다 비디오의 시대였습니다. 상당한 2차 시장 흥행을 이루어냈을 걸로 짐작합니다. 그리고 <퍼스트레이디 특수경호대>나 <흑백소동> 같은 가벼운 코미디를 지나 드디어 이 영화를 만나게 됩니다.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한때 잘나갔던 시나리오 작가와 지옥을 탈출하고 싶은 창녀의 사랑을 다룬 이 영화에서, 작가인 벤으로 분한 니콜라스 케이지는 그간 자신에게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코미디란 옷을 입고 있었는지를 항변하듯 연기를 분출해 냅니다. 웃음, 눈물, 술을 마시는 손짓, 그 모든 하나하나가 억눌려왔던 연기 인생의 전환점이 될 것임을 영화를 보는 순간 직감하게 합니다. 이 당시 니콜라스 케이지에 대한 연기 찬사는 전무후무한 수준이었습니다.
침대에서 눈물을 흘리는 엘리자베스 슈와 눈을 감고 마지막이 된 니콜라스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저는, 다음 상영이 시작된 때까지도 앉아 있었습니다. 곁에 있던 첫사랑이 제게 이 영화로 인해 그만 만났으면 좋겠다는 쐐기를 박았던 기억도 함께입니다. 그녀는 극장 앞 경양식 가게에서 이렇게 제게 묻더군요.
니 이런 영화 보고 우나? 머스마 상종 못하겠네. 그리 약해빠지서 어데 쓰겠노?
아마도 지금이었다면 저는 이렇게 항변했을지도요. 알코올에 빠진 니콜라스 케이지의 광기 어린 연기를 보고서도 아무 느낌이 없다면, 너는 영화를 볼 자격도 없는 거야.
니콜라스 케이지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이후 약 15년 정도, 블록버스터를 책임지는 배우로 자리매김합니다. 이즈음 짚어 볼 만한 영화라면 <더 락>, <콘 에어>, <페이스 오프>, <시티 오브 엔젤>, <8미리>, <패밀리 맨>, <월드 트레이드 센터>, <고스트 라이더>, <내셔널 트레져>, <넥스트> 등 이루 셀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토록 많은 영화를 찍으면서도 그에게 연기로 딴죽을 걸지 않았던 데에는 그가 연기로 더 증명할 것이 없음을 기자나 평론가, 웬만한 관객까지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내리막이 찾아옵니다. 파산설이 나돌던 2010년 즈음을 기점해서였지요. 영화를 통해 부와 명예, 그 모든 인간의 욕망을 다 이룬 듯했던 니콜라스 케이지에게도 결국 영화가 족쇄가 되어 서서히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영화자판기 니콜라스 케이지
급전직하라고 보기는 어려울 테지만 그의 연기에서 블록버스터가 사라진 시점이 그의 몰락과 궤를 같이 합니다. 비록 몰락이라는 말을 쓸 정도는 아니거나 틀렸다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더 락>이나 <페이스오프>를 기억하는 올드팬에게 제목을 열거하기도 미안한 극악의 완성도를 자랑하는 최근 영화에 주연으로 이름을 올리는 니콜라스 케이지의 모습은 상전벽해가 아닐 수 없습니다.
누군가 저에게 이런 표현도 서슴치 않더군요.
영화자판기!
그도 그럴 것이 2018년에서 2020년 사이에 이름을 올린 영화만 해도 17편이나 됩니다. 이즈음 영화들에는 제가 보지 못한 영화도 있습니다. 물론 본 영화들조차 한숨이 푹푹 터지더군요. 돈 때문이다, 라는 몇몇 기사가 딱히 틀리지 않을 거라 생각하지만 니콜라스 케이지를 기억하는 팬들에게는 낯설기만 한 상황입니다.
세상 모든 배우에게 죽을 때까지 허락되는 영광은 극히 소수에 불과합니다. 사생활 문제나 재산 관련 이슈, 영화에서 다소나마 부침이 있다고 해도 니콜라스 케이지가 니콜라스 케이지가 아닐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올해, <피그>가 나타났습니다.
연기파 배우 니콜라스 케이지의 돼지보다 못한 인생, <피그>
영화 <피그>는 상실로 인해 재기하지 않으려는 인간에 관한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영화가 되지 않겠지요.
돼지와 함께 트러플을 채취하는 것만으로 삶을 연명하는 남자에게서 누군가 돼지를 강탈해 갑니다. 연명하며 아니 그저 숨만 쉬며 살던 남자는 자신이 살기보다 돼지를 살리기 위해 상실의 끝 절망의 나락에서 인간 세상으로 발을 들입니다. 그리고 그에게서 돼지를 빼앗아가 남자를 찾아냈을 때 마치 거울 반대편에서 자신을 보는 듯한 한 남자를 만납니다. 다른 세상, 다른 삶을 살지만 절망이라는 공통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두 남자!
영화 <피그>에서 니콜라스 케이지는 시종일관 무표정합니다. 딱히 큰소리를 내지도, 그렇다고 미친 듯이 과장된 연기를 하며 관객에게 전달하려 들지도 않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최고의 연기라는 마냥, 니콜라스 케이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 최고의 연기를 보여줍니다. 절절하게 눈물을 흘리거나 손에 땀을 쥐며 안절부절못할 정도의 영화는 아니라지만 <피그>를 보고나면 아마도 저와 똑같은 말을 할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사색에 잠기게 하는 좋은 영화를 만났다!
첫사랑과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를, 끝사랑과 <피그>를!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는 남자에게 두 가지 정도를 고민해 보게 합니다. 낭비, 그리고 사랑. 낭비, 라고 썼다고 해서 물질적인 낭비를 말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익히 아실 겁니다. 그리고 사랑 역시 낭비하고마는 인생에 대해 돌아보게 합니다.
첫사랑, 그저 환상에만 젖어 무엇이 사랑인지도 분간하기 어려운 그때에,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를 보십시오. 아마도 인생의 끝에 다다른 "나"와 그때 곁에 있어 줄 사랑에 대해 보게 될지 모릅니다.
영화 <피그>는 부디 끝사랑과 보십시오. 극악의 영화적 상실감이 내 것이 아님을 안도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내 옆자리에 있을 끝사랑에게 감사하게 될 겁니다. 당신이 내 사랑이어서, 그리고 내가 당신의 사랑이어서! 아마도 또 언제인가는 찾아오게 될 상실에 대해 서툴더라도 또 아주 약간의 소모적인 감정에 머무른다 할지라도 <피그>는 그러한 사색이 반드시 필요함을 일깨워 줄 겁니다.
길게 써놓고 보니, 참으로 오랫동안 그의 영화를 봐왔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제 인생 상당한 시간이 그에게 지분을 두고 있다는 사실 역시 알게 되네요.
언제든 어느 때든 니콜라스 케이지의 영화는 환영입니다. 비록 그가 돈에 쫓겨 삼류영화를 찍든 독립영화 감독과 첫 장편을 함께 하든 소위 짬바가 어디 가겠습니까. 그가 한달 만에 찍었다는 전설의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영화를 본 관객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니콜라스 케이지, 그는 과거에도 연기 천재였고, 지금도 연기 천재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연기 천재일 테니까 말입니다. 물론 그가 연기하는 슈퍼맨을 보지 못한 것은, 두고두고 생각 날 아쉬움이겠지만요.
추천인 8
댓글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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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큐브 이동진 김중혁님 토크회차 기대중입니다!😊

재미있게 관람하시기 바랍니다!!!

월남전은 저로선 책이나 영화로만 간접적으로 접했는데...
그런 경험이 있으셨군요.
생생하게 좋은 글, 그리고 니콜라스 케이지에 대한 추억담 공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최선을 다해!!! 열심히 쓰겠습니다.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오늘도 좋은 일 가득하십시오.

개인적으로는 트레이드 마크라 할 수 있는 특유의 혼란스러운 표정 연기가 기억에 남는 배우네요.
(자본주의 표정 연기..)
하지만 연기로 흠 잡을데가 없다는데 동의합니다.

아마도 후대에도 좋은 평가를 받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네요.
익무에서 처음 뵙나요? 자주 익무에서 뵈어요.
오늘도 좋은 날 되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