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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나더 라운드>: 그래서 키에르케고르가 누군데? (스포O)

뇽구리 뇽구리
4404 15 9

*이 글에는 영화에 대한 주관적 해석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철학 잘 모릅니다.. 오류가 있다면 댓글로 얼마든지 지적해주세요.

 

 

다운로드 (2).jpg

 

영화는 키에르케고르의 명언으로 시작합니다.

젊음이란 무엇인가? 하나의 꿈이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꿈의 내용이다.

 

이 명언은 곧 영화의 주제를 관통합니다.

 

 

 

227px-Søren_Kierkegaard_(1813-1855)_-_(cropped).jpg

 

키에르케고르라는 이름이 익숙하신 분들도 있을 겁니다. 주로 니체와 함께 언급되는 실존주의 철학자입니다. (왜 하필 키에르케고르를 골랐을까 했더니 이 분이 덴마크인이었더라구요..) 니체와 키에르케고르의 생철학, 실존주의는 ‘절대적 진리 탐구’라는 서양 철학의 유구한 전통을 뒤엎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키에르케고르는 특히 변증법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헤겔의 철학을 강하게 비판합니다.

 

 

 

정    -    반

       ㅣ

     합(정)    -    반

                 ㅣ

                 합    …

 

 

정-반-합이라는 엄격하게 정립된 규칙으로 세계가 변화하고 이어진다고 주장하는 헤겔은 인간의 이성을 통해 합리적, 절대적인 도식을 도출해냄으로써 세상을 이해하려 했고 당대에 굉장한 영향력을 가진 철학자였습니다. 모든 철학 사조가 다 그렇지만 헤겔의 변증법은 유독 그럴 듯 하게 들립니다. ‘원래의 것이 있으면 반대되는 게 나오고, 이 둘이 종합되면 또 새로운 게 나오는 거야. 그럼 이게 정이 되고 또 다른 반이 나오는 거지.’ 요즘 우리가 사는 세상에 적용해 봐도 말이 되는 것 같죠? 그러나 헤겔의 철학에도 맹점이 있습니다. 세상을 지나치게 엄격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이성적으로 깔끔히 정리하려 한 탓에 인간 개인의 고유성을 간과한 것입니다. 이런 헤겔의 사상은 나치의 이념적 배경으로 가져다 쓰여 오해를 받기도 했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헤겔과는 정반대의 주장을 내놓습니다.

 

진리는 지극히 주관적이다.


그는 인간의 개별성과 주체성에 주목하며 인간은 절대적인 원칙에 의해 작동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인간은 개개인이 처한 상황과 고유성을 따라 사유하며 선택을 내린다는 것입니다. 각자의 내면에 대한 깊은 사유와 통찰이 곧 진리 탐구이고, 세상에 절대적 진리라는 것은 애초에 존재조차 하지 않는다는 거죠. 개인의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탐구가 인간을 나아가게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나는 누구인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어떤 선택을 해야하는가? 와 같은 질문들에 답을 하는 과정이 곧 진리에 이르는 길이며 인간을 실존하게 합니다. 여기까지 보면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을 굉장히 강인하고 주체적인 존재로 보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사상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개념이 '불안'이거든요. 페테르가 술을 먹인 학생의 시험 답변에도 이 내용이 짧게 등장하죠. 위에 언급된 실존적인 질문들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지만 이렇게 얻은 자유는 곧 불안은 불러일으킵니다.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불확실성에서 기인하는 불안으로 쉽게 치환되고는 하기 때문입니다. 제 개인적인 예를 들어보자면 인생에서 극심한 불안을 느꼈던 때가 고등학교 야자 시간에 빨대 텀블러에 소주를 담아 친구와 홀짝이던 날들이었습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영화와 관련있는 예시를 찾다보니.. 이 때 저는 ‘고등학생 신분으로 술을 마시는’, 일종의 죄악으로 여겨질 수 있는 행동을 선택할 자유가 있었습니다. 그 선택지가 존재한다는 걸 깨닫고 나면, 학교에서 술을 먹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 내가 그런 대담한 행동을 취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열리고, 필연적으로 그 가능성이 불안으로 이어지는 겁니다. (그 불안에 대한 반발로 결국 행동을 하면 그게 다시 또 짜릿함으로 연결되긴 하지만요,,)

 

 

 

다운로드 (3).jpg

 

이제 드디어 영화 얘기로 돌아오겠습니다. <어나더 라운드>의 네 친구는 권태로운 일상 속에서 중년의 위기까지 겪고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외로움을 느끼고, 교사로서 일도 잘 안 풀리고, 아빠와 남편으로서의 가정생활도 위태롭습니다. 이 때까지 이들은 자신이 주체적으로 무언가를 선택해서 변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저 주어진 일상을 꾸역꾸역 살아낼 뿐이죠. 그러다 니콜라이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모였던 자리에서 어떤 심리학자의 ‘0.05%’ 가설을 언급하며 자신들에게도 변화를 모색할 자유가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인지합니다. 그 수단이 바로 인간을 가장 본능적이고 비이성적인 존재로 서게 하는 술이죠. 업무 시간에 한해 취해 있겠다는 이 선택은 이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 자유를 향한 문을 열어주고, 또다른 금단의 영역을 침범할 자유 역시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키에르케고르의 사상에서처럼 이 자유와 가능성에는 늘 불안이 뒤따릅니다. 이 경우에는 스스로 세운 규칙을 언제든 어겨버릴 ‘가능성’과 그에 따른 ‘불안’이죠.

 

그리고 그 불안은 머지 않아 수면 위로 드러납니다. 본인의 선택을 통해 달콤함을 맛본 마르틴은 어느새 혈중알코올농도 0.05%를 훌쩍 넘겨 버리고, 다른 친구들은 그를 따라하다가 영화의 원제인 ‘druk’, 즉 폭음을 통해 우리의 한계를 넘어보자고 제안합니다. 이 때 마르틴은 이 제안을 거절하죠. 자신의 선택에 뒤따를 결과가 불확실하고 두려워서 불안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국 그의 본능은 이성을 이기고 친구들의 제안에 응하게 됩니다. 여기서 키에르케고르의 철학이 다시 등장합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은 무한성유한성이 동시에 내재된 존재라고 보았습니다. 인간은 유한하면서 무한한, 그 사이 어디쯤 존재하면서 개인이 스스로를 어떻게 정의 내리느냐에 따라 본질이 달라지는 존재라고요. 이게 무슨 말장난인가 싶죠. 영화에서 네 친구들이 폭음을 하며 미친듯이 달리는 모습은 인간의 무한성을 보여줍니다. 술을 얼마나 퍼붓든 그건 개인에게 무한히 펼쳐진 자유의 영역이고, 네 친구들은 다같이 무한의 경지, 완전한 자유를 향해 달려갑니다. 그러나 인간은 신이 아니기에 필연적으로 물리적인 제약을 갖습니다. 쉽게 말하면 아무리 말술이라도 어느 정도 이상은 못 마신다는 거죠. 육체가 해독할 수 있는 알코올의 양은 개인마다 달라도 정해져 있으니까요. 결국 이들은 이 실험을 통해 인간의 유한성을 깨달으며 폭음의 대가로 곤경에 빠집니다. 이 단계가 곧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죽음에 이르는 병, 절망입니다. 이 때 톰뮈는 실제로 죽음에 이릅니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는 바로 이 절망 속에서 비로소 인간이 실존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유한성을 깨닫고 밑바닥을 마주하는 바로 그 순간, 자신의 내면에 대한 매우 깊은 통찰과 ‘신 앞에 단독자’로 무한한 존재인 신을 독대함으로써 실존의 궁극적인 단계인 종교적 실존에 이를 수 있다고요. 영화가 이렇게 흘러 갔다면 약간은 불편한 종교 영화가 되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신’의 자리에 ‘사랑’, 혹은 ‘관계’를 대입하여 해답을 내놓습니다. 절망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음을 택한 톰뮈를 제외한 친구들은 어떻게 다시 딛고 일어설 수 있었을까요? 영화의 시작을 열었던 키에르케고르의 명언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젊음이란 무엇인가? 하나의 꿈이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꿈의 내용이다.

 

절대자의 무한함에 호소하기 보다 유한한 존재들이 관계사랑을 통해 서로의 불안을 현명하게 다스림으로써 비로소 실존하게 된다는 거죠. 영화는 제자에 대한 스승의 믿음, 스승에 대한 제자의 존경, 친구와의 우정, 배우자 간의 사랑과 같이 지극히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것들이 인간을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끌어 낸다는 깊은 울림을 줍니다.

 

 

What a life, what a night

What a beautiful, beautiful ride

Don't know where I'm in five but I'm young and alive

Fuck what they are saying, what a life

 

어쨌든 나는 아직 젊고 인생은 아름다우니 니가 뭐라 하든 상관없다. 정말 아름다웠던, 매즈 미켈슨이 춤 추는 엔딩씬에 깔리는 음악의 가사입니다. 키에르케고르의 말처럼 이들의 젊음을 채우는 것은 곧 사랑이고, 반복적으로 절망에 빠짐에도 인간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 역시 사랑이겠죠. <어나더 라운드>, 술을 빌려 인간과 인생을 노래하는 정말 멋진 영화였습니다.

뇽구리 뇽구리
17 Lv. 26154/29160P

@99_fi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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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
영원
관리자가 삭제한 댓글입니다.
07:24
22.01.12.
profile image
뇽구리 작성자
영원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술을 통해 절망을 경험하고 다시 일어나는 인물들이 실존주의 철학과 잘 맞아 떨어져 보였어요.
11:47
22.01.12.
profile image 2등

좋은 글 감사합니다. 실존주의? 라고만 교과서로 배운 기억 나는데.. 이참에 좀 찾아봐야겠네요.

08:55
22.01.12.
profile image
뇽구리 작성자
golgo
실존주의 철학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가시면 감상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ㅎㅎ 감사해요!
11:48
22.01.12.
3등
엔딩씬은 아모르 파티의 느낌이 강하게 들기도 하네요
좋을글 감사합니다
09:02
22.01.12.
profile image
뇽구리 작성자
올나사
정말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지 않고 사랑하는 모습으로도 보이네요 ㅎㅎ
11:49
22.01.12.

니체도 살짝 생각나더라구요 ㅎㅎ 키에르케고르도 공부해봐야겠어요

20:08
22.01.22.
profile image
뇽구리 작성자
XFJin08
맞아요 니체와 키르케고르 사상의 결이 많이 비슷합니다 ㅎㅎ
23:17
22.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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