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크모드
  • 목록
  • 아래로
  • 위로
  • 댓글 4
  • 쓰기
  • 검색

'베네데타' 간단 리뷰

수위아저씨
2744 17 4

movie_image (19).jpg

 

1. 영화 유튜버들이 자신의 콘텐츠 제목에 '완벽해석', '총정리'라며 영상을 올리는 걸 보면 조금 같잖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 중 일부는 역사책을 펼쳐놓고 콘텐츠를 재생산하는 수준의 재미있는 영상을 올리기는 하지만 대체로 '과한 해석'이 많다. 영화를 과하게 해석하는 일은 자칫 이야기가 산으로 가는 참사를 맞이할 수 있다. 영화를 이해하는데 있어 지나친 해석은 경계하는 게 좋다. 최근에는 '영화 평론'에도 트렌드가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어릴 때 재밌게 읽었던 책 '영화보기의 은밀한 매력: 비디오드롬'(훗날 '박찬욱의 오마주'로 재출간)은 당시 영화평론가들이 쳐다보지도 않을 비디오 영화를 기호와 상징으로 재해석한 책이다. 책을 쓴 박찬욱 감독은 프랑스에서 영화공부할 당시에 그렇게 배웠을 것이다. 박찬욱 감독이 배웠을 그런 영화보기가 지금은 블로거, 유튜버의 주요 트렌드가 돼버렸다. 

 

2. 영화를 보는 이 같은 방식이 '트렌드'가 될 수 있었던 데는, 관객이 영화에 개입하고 싶은 욕구가 반영됐다. 멀뚱멀뚱 앉아서 영화만 보고 돌아서는 일은 메인디쉬를 다 먹고 후식을 먹지 않은 기분이 든다(일단 이건 내가 그렇다). 평론가라는 직업은 영화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평론가가 자신의 글을 통해 영화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것은 영화의 완성 너머의 새로운 창작이 된다. 관객은 관찰자를 넘어 그 지점까지 영화에 개입하고 싶어한다. 그런 욕구가 오늘날 블로거와 유튜버를 통해 반영되고 있다(나도 그렇다). 이런 관객의 욕구가 사실이라면 폴 버호벤의 영화는 대단히 매력적이다. 그의 최신작 '베네데타'는 관객이 적극적으로 영화에 개입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의외로 이런 방식은 그가 전성기 시절 만들었던 몇 개의 SF영화에서도 나타난다. 

 

3. '베네데타'는 16세기 이탈리아 수녀 베네데타 카를리니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레즈비언 수녀였던 베네데타(비르지니 에피라)가 어떻게 수녀원에 들어갔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 보여준다. 이 이야기에서 관객이 개입할 여지는 딱 하나다. '베네데타는 정말로 성흔(聖痕)을 입은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해 영화는 두 가지 답변의 힌트를 모두 제공한다. 베네데타가 봤을 환상을 그대로 재현하기도 하고 성흔을 조작하는데 사용했을 병조각도 제시한다. 심지어 '예수가 성흔을 조작하라고 시켰다'는 답도 말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베네데타는 실존인물이고 영화의 엔딩 이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 자막으로 보여준다. 그 자막에서조차 베네데타의 수녀원이 있었던 이탈리아 페샤에는 흑사병이 발생하지 않았다고 언급한다. 정말로 그녀는 성녀였을까?

 

4. 영화를 본 관객은 단 하나의 물음을 떠안게 된다. 그리고 그 물음에 대해 나름의 단서와 자신만의 견해로 해석해야 한다. 이는 폴 버호벤의 몇 가지 영화에서 등장했던 방식이다. 가장 대표적으로 1990년 영화 '토탈리콜'은 퀘이드(아놀드 슈왈제네거)의 영웅담이 펼쳐진다. 그러나 그 전에 퀘이드는 '리콜'이라는 기억이식 프로그램(여행사)에 참여했다. 관객은 영화의 결말에 이르러서도 퀘이드의 영웅담이 리콜에서 이식된 기억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 이전에 만들어진 '로보캅'은 윤리적인 물음을 던진다. 인간 머피(피터 웰러)의 기억을 이식받은 로봇은 인간인가, 로봇인가. 이는 인공지능이 고도화 된 사회에서 인공지능을 대하는 윤리적 문제와도 연결된다. '원초적 본능'은 끝내 범인을 흐리면서 마무리된다. 영화 내내 캐서린(샤론 스톤)을 범인으로 지목하지만, 아닐수도 있다는 가능성도 던진다. 관객은 이 이야기에 대해 적극적인 해석을 해야 한다. 

 

movie_image (20).jpg

 

5. '베네데타'의 물음은 '그녀가 정말 성녀일까?'다. 영화는 끝내 여기에 대한 해답을 던지지 않는다. 영화는 베네데타가 보는 환영을 그대로 재현해내지만, 이는 어딘가 어설프다. 성인이 된 베네데타가 다른 수녀들과 선보이는 연극과 별반 다르지 않은 수준이다. 게다가 성흔이 생기게 된 과정도 보여주지 않는다. 단지 피묻은 병조각이나 논리적 비약("성흔은 머리에 면류관 자국도 있어야 한다"는 말을 듣자마자 머리에 상처가 나는 경우)에 의해 성흔이 아닐 수도 있다고 암시한다. 다만 베네데타는 마리아상에 깔려도 다치지 않았고 그녀가 "저 새가 성모"라고 말을 하자 새가 악당에게 똥을 싼다. 그리고 페샤에는 흑사병이 생기지 않았다. 베네데타의 정체성을 해석하는 일은 신의 정체성을 해석하는 것과도 연결된다. 만약 베네데타가 사기꾼이라면 그녀의 사기행각에 놀아난 교회는 신의 뜻을 실현하지 못한 무능한 기관이 된다. 반대로 베네데타가 정말 성녀라면 신은 성욕이 가득찬 변태에 불과하다. 만에 하나 신이 베네데타에게 성흔을 조작하고 동성을 탐하라고 시켰다면 인간은 죽었다 깨도 신의 뜻을 알 수 없게 된다. '베네데타'가 던지는 물음은 어느 방향으로 답을 내더라도 교회와 신의 익숙한 관계는 무너진다. 

 

6. 무신론자인 나는 베네데타를 사기꾼으로 해석하는게 맞다. 이는 사기꾼을 제대로 걸러내지 못한 교회는 신의 뜻을 실현하지 못한다는 결론과도 연결된다. 사기꾼을 걸러내는 과정에서 신의 섭리는 전혀 작용하지 않았다. 만약 신이 정말 존재한다고 해도 그는 결국 방관자인 셈이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지옥'에는 지옥의 사자가 등장하는 현상을 왜곡하는 세력이 등장한다. 그리고 택시기사는 "저는 신이 어떤 놈인지도 잘 모르고, 관심도 없어요. 제가 확실히 아는 건, 여긴 인간들의 세상이라는 겁니다. 인간들의 세상은 인간들이 알아서 해야죠"라고 말한다. 본래 종교는 인간이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을 견디기 어려워 기댈 수 있는 곳을 만들기 위해 생겼다. 종교는 '힘들 때 기대는 곳' 그 이상의 가치는 없다. 신도 인간에게 그 이상으로 관심이 없다. 마치 디즈니플러스 '로키'에 등장한 TVA 요원들 대사처럼 "종말은 대략 수십번 일어났다"는 말과 통한다.

 

7. 결론: '베네데타'는 '레즈비언 수녀'라는 정체성에 묶여있다. 확실히 이것은 자극적인 발상이다. '레즈비언'은 '수녀'의 반대쪽 끝에 위치하면서 '수녀'의 정체성을 묻는다. 이 물음은 결국 신의 정체성과도 이어진다. 신은 정말로 존재할까? 신은 인간세상에 얼마나 관심이 있을까? '베네데타'가 제기하는 진짜 물음이다. 

 


추신1) 베네데타 카를리니라는 실존인물의 기록을 모두 찾아보진 않았지만, 16세기 인물인 만큼 기록이 온전히, 상세하게 남아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게다가 영화 '베네데타'에서는 기록으로 남기기 어려운 부분까지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즉, 이 영화는 온전히 실화로 볼 게 아니라 작가의 상상력이 상당 부분 가미된 이야기다. '베네데타'를 이해할 때는 그 점을 유의하는 게 좋다. 

 

추신2) 베네데타 카를리니는 종교개혁에 반대한 인물이라고 설명돼있다. 이 점이 어떤 형태로든 영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은데 16세기 종교개혁의 역사를 다 뒤져야 할 것 같아서 포기했다. 

 

추신3) '베네데타'는 이탈리아 수녀 베네데타 카를리니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고 영화의 배경이 되는 지역도 이탈리아 페시아다. 그러나 이 영화는 프랑스어를 사용하고 감독은 네덜란드 사람이다. 이탈리아가 배경인 영화에서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이 기이한 조합은 프랑스 영화사 SBS프로덕션이 제작해서 그렇다고 볼 수 밖에 없다. 만약 기회가 닿는다는 이탈리아어 더빙으로 보고 싶어지는 영화다. 

 

추신4) 폴 버호벤이 세계무대에서 평가를 받기 시작한 것은 할리우드 생활을 청산한 뒤였다. '블랙북'과 '엘르', '베네데타' 등 연이어 유럽의 국제영화제에 초청되면서 명성을 알렸다(이전에 '원초적 본능'도 칸 영화제 개막작으로 초청된 적이 있다. 그러나 당시 칸 영화제는 평단에서 온갖 욕을 들어야 했다). 이 때문에 상대적으로 폴 버호벤의 SF영화들은 저평가되는 편이다. 세계 SF영화사에 큰 영향을 준 '토탈리콜'이나 '로보캅'도 매니아들 사이에서 높게 평가받는 편이고 '스타쉽 트루퍼스'나 '할로우맨'도 그저 그런 영화 취급을 받는다. ...사실 나는 폴 버호벤의 SF영화들을 더 좋아한다. 

신고공유스크랩

추천인 17

  • 멜로디언
    멜로디언

  • PDL
  • J달
    J달
  • 해리엔젤
    해리엔젤
  • aiuola
    aiuola
  • 빅찐빵
    빅찐빵
  • solfa
    solfa
  • 쥬쥬짱
    쥬쥬짱
  • Nashira
    Nashira
  • golgo
    golgo
  • 시노아도
    시노아도

댓글 4

댓글 쓰기
추천+댓글을 달면 포인트가 더 올라갑니다
정치,종교 관련 언급 절대 금지입니다
상대방의 의견에 반박, 비아냥, 조롱 금지입니다
영화는 개인의 취향이니, 상대방의 취향을 존중하세요
자세한 익무 규칙은 여길 클릭하세요
1등
제 리뷰는 아직도 갈길이 멀군요...
정말 재밌고 알찬 리뷰 감사합니다
10:40
21.11.25.
profile image 2등
폴 버호벤 SF 영화들은 지금 봐도 에너지가 넘치죠.
10:55
21.11.25.
profile image 3등
ㅋㅋㅋ2등으로 요청 올렸는데,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영화 많이 궁금했거든요. 폴 버호벤 감독 영화 좋아해서+_+비르지니 에피라도 궁금했고.
개봉하면 얼마나 관이 배정할지 모르겠으나 꼭 봐야겠네요.
11:00
21.11.25.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에디터 모드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댓글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

공유

퍼머링크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로데오] 시사회에 초대합니다. 8 익무노예 익무노예 25.04.29.11:58 2397
공지 [케이 넘버] 시사회에 초대합니다. 9 익무노예 익무노예 25.04.24.11:24 4562
HOT <바이러스> 애매하네요. 3 뚠뚠는개미 28분 전14:10 276
HOT '릴로 앤 스티치' 리갈 시어터 팝콘 버킷 / 뉴 클립 1 NeoSun NeoSun 47분 전13:51 151
HOT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블러드라인> 간단 후기 11 마이네임 마이네임 1시간 전12:45 1144
HOT <명탐정 코난: 척안의 잔상> 100억엔 돌파 1 중복걸리려나 2시간 전12:13 529
HOT (*스포) <썬더볼츠*> 비하인드: 등장하지 않은 히어로... 2 카란 카란 5시간 전08:54 1225
HOT 마블을 다시 한번 추락시킬 작품이 곧 나오네요 10 울프맨 2시간 전11:56 2228
HOT 하마구치 류스케 신작 <急に具合が悪くなる> 2026년 개봉 4 중복걸리려나 3시간 전11:27 959
HOT <썬더볼츠*>: 공허한 우울의 미로에서 널 구할 결심 3 해변의캎흐카 12시간 전01:44 1121
HOT (약스포) '썬더볼츠*' 엔딩 크레딧 이스터에그 4 golgo golgo 5시간 전09:25 1456
HOT 오늘의 쿠폰 소식입니다 ^-^ 수요일 화이팅!! 4 평점기계(eico) 평점기계(eico) 4시간 전09:48 870
HOT [무대인사] 4K 60p HDR 거룩한밤 데몬헌터스 1주차 영등포 C... 3 동네청년 동네청년 6시간 전07:55 426
HOT 자밀라 자밀-원지안,실화 드라마 <평양 홈 비디오> 출연 3 Tulee Tulee 6시간 전07:39 1219
HOT 디플 '나인퍼즐' 첫 포스터, 예고편 1 NeoSun NeoSun 5시간 전09:01 899
HOT 스티븐 킹 원작 더 롱 워크 포스터 5 호러블맨 호러블맨 8시간 전06:11 745
HOT [무대인사] 거룩한밤 데몬헌터스 1주차 무대인사 - 사인&amp... 2 동네청년 동네청년 6시간 전08:05 463
HOT 워너브라더스,산드라 블록-니콜 키드먼 판타지 드라마 <... 1 Tulee Tulee 6시간 전08:02 657
HOT 수지 백상 10번째 출근 완료 1 e260 e260 7시간 전07:23 658
HOT The Conjuring : Last Rites' 컨저링: 라스트 라이츠 ... 1 호러블맨 호러블맨 8시간 전06:22 558
HOT ‘드래곤 길들이기‘ 실사판 뉴 IMAX 트레일러 NeoSun NeoSun 13시간 전01:06 784
HOT ‘메간 2.0‘ 첫 스틸 2 NeoSun NeoSun 13시간 전01:02 850
1174956
image
NeoSun NeoSun 14분 전14:24 77
1174955
image
NeoSun NeoSun 16분 전14:22 92
1174954
image
이안커티스 이안커티스 26분 전14:12 137
1174953
image
뚠뚠는개미 28분 전14:10 276
1174952
image
NeoSun NeoSun 45분 전13:53 159
1174951
image
NeoSun NeoSun 45분 전13:53 220
1174950
image
NeoSun NeoSun 47분 전13:51 151
1174949
image
마이네임 마이네임 1시간 전12:45 1144
1174948
image
중복걸리려나 2시간 전12:13 529
1174947
image
울프맨 2시간 전11:56 2228
1174946
image
중복걸리려나 3시간 전11:27 959
1174945
image
NeoSun NeoSun 3시간 전11:06 528
1174944
image
NeoSun NeoSun 4시간 전09:58 591
1174943
image
NeoSun NeoSun 4시간 전09:49 617
1174942
image
NeoSun NeoSun 4시간 전09:49 538
1174941
image
NeoSun NeoSun 4시간 전09:49 365
1174940
normal
평점기계(eico) 평점기계(eico) 4시간 전09:48 870
1174939
image
golgo golgo 5시간 전09:25 1456
1174938
image
호러블맨 호러블맨 5시간 전09:23 561
1174937
image
NeoSun NeoSun 5시간 전09:17 831
1174936
image
NeoSun NeoSun 5시간 전09:13 1330
1174935
normal
NeoSun NeoSun 5시간 전09:10 361
1174934
image
NeoSun NeoSun 5시간 전09:05 536
1174933
image
NeoSun NeoSun 5시간 전09:01 899
1174932
image
카란 카란 5시간 전08:54 1225
1174931
image
NeoSun NeoSun 5시간 전08:53 686
1174930
image
동네청년 동네청년 6시간 전08:05 463
1174929
image
Tulee Tulee 6시간 전08:02 657
1174928
normal
아이언하이드 아이언하이드 6시간 전08:02 456
1174927
image
Tulee Tulee 6시간 전08:01 265
1174926
image
Tulee Tulee 6시간 전08:01 332
1174925
image
동네청년 동네청년 6시간 전07:55 340
1174924
image
동네청년 동네청년 6시간 전07:55 426
1174923
image
Tulee Tulee 6시간 전07:41 346
1174922
image
Tulee Tulee 6시간 전07:40 3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