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플린이 일본에서 암살당할 뻔했던 일화

일본의 스마트플래시라는 사이트에서
89년 전, 오늘 날짜에 찰리 채플린이 일본을 방문했다가 암살당할 뻔했던 일화 소개와 함께 채플린과 절친했던 일본인 비서에 관한 이야기를 공개해서 옮겨봤습니다.정말로 영화 같은 일화였네요.
그리고 채플린이 일본 튀김 덕분에 암살을 피했단 얘기가 유명한데.. 아래 글 보시면 사실은 와전된 이야기란 걸 알 수 있습니다. 정확히는 스모를 보러 가면서 목숨을 건졌네요.
https://smart-flash.jp/sociopolitics/142063
채플린을 테러로부터 지켜라! 성심성의껏 그를 모신 일본인 이야기
채플린과 고노 토라이치 (1927년 경)
1932년 5월 14일, 희극왕 채플린을 태운 배가 고베항에 도착했다. 항구에는 채플린을 보려는 수만 명의 팬들과 기자들이 몰려들어서, 일본 방문을 환영했다.
배에서 나온 채플린 옆에는 그의 형 시드니와 함께 또 한 사람, 일본인 남성 고노 토라이치(高野虎市)가 있었다. 그는 운전기사 겸 비서로서 채플린을 오랫동안 모신 인물이었다.
일본 채플린 협회 회장으로, 6월에 <디즈니와 채플린>을 출간하는 오노 히로유키는 이렇게 말했다.
“히로시마에서 태어난 고노 씨는 낡은 인습들을 싫어해서, 불과 15세의 나이에 먼 친척에 의지해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일본인이면서도 현지 짐꾼들의 업무를 총괄하는 일을 하는 등, 협상력이 무척 뛰어난 인물이었던 것 같아요.
다양한 직업을 경험했지만, 주로 기업가의 운전기사 일을 했대요. 그러다가 고객이 갑자기 사망해서 다른 일거리를 찾던 중, “지금 한창 잘 나가는 할리우드 배우가 운전기사를 찾는다”고 해서 소개 받은 이가 채플린이었던 거죠.“
채플린과 고노의 면접은 단 세 번의 말로 끝났다. 당시 27살이었던 채플린은 호텔 침대 위에서 아침식사를 하던 중 고노를 보자마자 “자네 운전 할 줄 알아?”라고 물었고, 고노가 “예”라고 대답하자 “난 못 해! 자네 멋지군”하면서 방긋 웃었다고 한다.
“왠지 영화에 나올 법한 에피소드인데, 거기서 고노의 인종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것이 무척 채플린답다고 생각됩니다.
당시 미국에선 일본계 사람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인이냐?’ 식으로 묻지 않았어요. 다른 여러 인종에 편견 없이 공평하게 대하는 채플린의 성격이 느껴지죠.” (오노 히로유키)
무사히 합격한 고노는, 채플린의 운전기사로서 착실히 업무를 수행해서 신뢰를 얻어갔다. 서류에 ‘채플린’이라고 대리로 사인하는 것까지도 허락됐고, 1917년에는 <모험>(The Adventurer)이란 작품(아래 사진)에 운전사 역으로도 출연했다. 채플린에게 뭔가를 부탁하려면 먼저 고노에게 이야기를 하라는 말이 업계에서 돌 정도였다.
“물론 채플린이라는 천재를 모시느라 고생한 일도 많았겠죠.
저는 채플린 연구자로서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직접 관련된 사람들한테서 채플린 욕을 들은 적은 한 번도 없어요.
다들 “그 사람은 재밌고 천재였다”라고 이야기했는데요. “하지만 시간 개념이 없었다”고 대부분 말씀들을 하셨죠. (웃음) 스케줄대로 움직이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변덕스러웠던 것 같아요.”
고노 본인은, 채플린에게 휘둘리면서도 비서로서 곁에 있을 수 있다는 것에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까다롭지만 매력적인 사람이다. 머리 회전도 빠르다. 나를 이렇게까지 만들어 준 채플린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고노는 1932년 채플린의 일본 방문길에도 동행했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다. 실은 그때 채플린을 암살하려는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에는 군국주의가 대두하면서 전쟁의 기색이 짙었죠. 해군 소속 고가 기요시 중위가, 육군사관후보생들을 꾀어서 의회를 습격할 계획을 세웠죠.
그런데 채플린이 일본을 방문한다는 뉴스가 나오자, 그를 습격한다는 새로운 계획을 세운 거죠. 그런데 변덕스런 채플린이 좀처럼 일본에 오질 않자, 고가는 일단 그를 타깃에서 제외시킵니다. 그러다가 5월 15일 환영회가 열린다는 소식이 들리자, 고가쪽 사람들은 다시 술렁거리게 됩니다.” (오노 히로유키)
일설에 따르면 고노는 “채플린이 암살 대상인 것 같다”라는 정보를 파악하고 있었다고 한다. 때문에 미리 일본에 와서 이누카이 쓰요시 수상의 아들인 수상비서관과 만나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수단을 강구했다.
예컨대 국수주의자들을 회유하기 위해 황궁 앞에서 채플린이 예를 표하게 하고, 그 모습을 신문 사진에 나오게 하여, 황실에 대한 경외심을 세상에 알리자는 식이었다.
“일본에 온 두 번째 날이 수상이 주최하는 환영회였죠. 지금 생각하면 고베나 교토에서 한바탕 즐기고 왔다면 좋았을 텐데, 곧장 도쿄로 오게 한 것이 채플린을 위험에 빠트린 결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노 히로유키)
변덕스러운 채플린은 5월 15일로 예정돼 있던 이누카이 수상의 환영회를 갑자기 취소한다. 마음이 바뀌어서 “스모를 보고 싶다”는 말을 꺼낸 것이다.
채플린(우측 에서 세번째)과 고노(우측에서 두 번째)
환영회는 취소됐지만, 그 정보를 몰랐던 해군장교들은 수상 관저로 침입해 이누카이 수상을 암살하고 만다. 이른바 5.15 사건이다. 주모자 고가는 채플린 암살을 기도한 이유에 대해 재판에서 이렇게 말했다.
“5월 15일, 수상 관저에서 채플린 환영회가 열린다는 걸 신문을 보고 알았다. 그때 여러 지배계급 사람들이 모일 테니까 공격하기에 안성맞춤이라고 여겼다. (채플린을 암살하면) 일본과 미국의 관계가 나빠져서 인심이 동요할 것이고, 이후에 혁명을 신속하게 진전시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다음날, 사건을 알게 된 채플린은 “내일이라도 돌아가겠다”며 난리를 피웠지만, 16일 오후가 되자 갑자기 “튀김!”을 찾으며 긴자로 향했다. 전통 예능을 좋아했기 때문에 가부키, 분라쿠를 구경하는 등 실컷 관광을 즐겼다.
채플린은 자서전에서 “일본에서의 추억이 괴이한 사건과 불쾌감만 있었던 건 아니다. 오히려 전체적으로는 무척 즐거웠다.”라고 밝혔다.
“그 뒤로도 고노 씨는 채플린의 비서로 일했는데, 첫 만남으로부터 16년 후 두 사람에게 이별이 찾아옵니다.
채플린의 새 애인(폴렛 고다드)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다툰 것 때문에 채플린이 “자넨 해고야!”라고 말하자, 고노 씨가 화가 나서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 버린 거죠.
그리고 고노 씨는 그 뒤로 단 한번도 (채플린의) 촬영소에 가지 않았습니다. 채플린은 고노 씨가 바다낚시를 하는 곳에 몇 번 찾아옵니다만 잡담만 꺼냈고 돌아오라는 소리는 일절 없었다고 고노 씨가 인터뷰에서 밝혔죠.
이후로 둘은 결별했지만 채플린이 막대한 퇴직금을 주었으니 ‘해고’라는 말은 적절치 않은 것 같습니다. 원만하게 퇴사한 셈이죠.”
말년에 채플린은 다시금 일본을 찾았다. 1961년이었다. 그때 일본에 돌아와 있던 고노 씨에게 주변 사람들이 “만나러 가보라”며 권유했지만 완강히 거절했다.
“고노 씨의 말년에 대해 잘 아는 분에게 들었는데, 고노 씨는 그때 ”이미 지나간 일이야. 안 만날 거야”라며 눈시울을 붉히고 울면서 말했다고 해요.
한편 채플린의 딸 조세핀 씨는 “아버지께선 고노 씨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셨죠. 비서에 대해 말한다기보다 마치 친구처럼 이야기하는 듯한 표정이셨죠.”라고 하셨어요.
두 사람 다 만날 생각이었다면 만날 수 있었겠지만, 고집과 자존심이 있었던 거겠죠. 두 사람의 관계는 희극왕과 비서로서가 아닌, 남자들 간의 우정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gol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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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플린이 변덕이 심해 이 가방을 차에 실어라 한 뒤 낑낑거리고 비서가 올려놓으면 아니 이 가방 내리고 저 가방... 이런 식으로 변덕을 부리는데 그 장면이 재밌었다는 아들의 회고가 기억나네요.
1932년 채플린의 방일 때 몰래 배에 승선했던 인물이 인물이 일본의 전설적 영화 평론가 요도가와 나가하루입니다. 나중에 채플린과 친해져서 채플린 전문가로 명성을 얻게 되지요.



와...뭔가 영화같이 아련한 이야기네요.
근데 아무리 전쟁 중이었어도 배우를 암살할 생각을 하다니...!!!

해석 감사합니다!
변덕스럽다고 표현되는 성격 덕분에 목숨을 건졌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