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어네어 보이즈 클럽]에서 제일 거슬렸던 부분, 오역(약스포)

영화의 스토리나 완성도는 뭐 애초에 기대한 바가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케빈 스페이시가 천하의 몹쓸놈일지언정 메타크리틱 30점이라는 게 쉽게 나오지는 않으니까요. 캐릭터나 내러티브 모두 설득력이 부족해서 망작이긴 한데 배우들의 연기가 조금은 위안이 되기도 했고요. 그러나 자막 오역만큼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많이 거슬렸습니다. 전문적으로 통번역을 공부하지 않았음에도 귀에 영어가 들리는 것과 한글 자막이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불일치하는 부분들이 많이 있었거든요. 번역하신 분이 누군지 이름 봤지만 굳이 거론하지는 않겠습니다. 꼭 번역가만의 잘못은 아닐 거라 추측되는 부분들도 있거든요. 아시는 분들도 댓글로 언급하지는 말아주세요. 오역 사례들을 나열하기 위해 약간의 스포일러를 각오하고 적습니다.
1. 'hold'라는 동사의 주체를 착각해서 빚어지는 촌극.
영화 초반 론 레빈(케빈 스페이시 분)이 처음 등장하던 그의 집에서의 씬에서 조 헌트(안셀 엘고트 분)를 놀려먹기 위해 가짜 불라(Bulla, 수메르인들이 쓴 최초의 선물 계약 증표 - world's first futures contract - 라고 설명한 골동품)를 넘겨주면서 이런 대사를 칩니다.
"Do you want to hold it?"
이는 레빈의 대사이므로 "한 번 들어볼래?"로 번역되어야 옳습니다. 그러나 자막상으로는 엉뚱하게도 "소장하고 계실 건가요?"라고 나옵니다. 조 헌트의 대사로 착각해서 'hold'라는 동사가 '헌트가 들어보는 행위'에서 '레빈이 소장하는 행위'로 바뀌어버린 것이죠. 뭐 사실 이렇게 화자를 착각한 정도는 애교입니다.
2. 'nastiest thing on the Autobahn'이 '아우토반에서 최악'?
독일에서 BMW 차들을 중고로 밀반입하는 씬에서 내레이션을 통해 특정 모델(635-CSi)을 설명하면서 'nastiest thing on the Autobahn'이라고 수식합니다. 이건 '아우토반에서 제일 끝내주는(or 죽여주는) 물건' 정도의 늬앙스로 번역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최악'이라고 번역해버리면서 혹자에 따라서는 그 차량이 '안 좋은 물건'인 것처럼 오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버렸죠. 심지어 그 모델은 바로 이어지는 씬에서 론 레빈에게 바치는 최고급의 차종이었는데 말이죠.
3. 'twenty-one'이 자막에서는 '12'로 나오는 기초적인 실수.
론 레빈이 자신이 SEC(증권거래위원회)에 어떻게 안 걸렸는지 자랑하는 씬에서 이런 대사를 칩니다.
"21 stories and none of them good, so I came clean."
'21 stories'라는 부분이 자막에서는 '12가지'로 탈바꿈되어서 나오더군요.
사실 이건 스크립터가 오타를 낸 것일 공산이 크겠지만 중학교만 졸업해도 누구나 알아차렸을 치명적인 오역입니다.
4. 'in a pit in the middle of nowhere'가 '잠수'일리가.
론 레빈이 빌리어네어 보이스 클럽(BBC)의 뒤통수를 치자 레빈을 어떻게 처리할까를 논의하는 씬에서 개를 죽이자는 의견이 나온 직후 "구덩이를 파자(Dig a pit)"는 제안까지 나오자 딘 카니(태런 에저튼 분)가 이렇게 말합니다.
"What's worse for the BBC? Ron Levin out for revenge, or Ron Levin in a pit in the middle of nowhere?"
자막에서는 'Ron Levin in a pit in the middle of nowhere' 구절이 '잠수 탄 론 레빈'으로 번역되어 나옵니다.
아니 빤히 그 앞의 맥락상 보복 수단으로 "Dig a pit"이 나오는데, 'a pit in the middle of nowhere', 즉 아무도 모르는 곳의 구덩이 속에 있는 론 레빈이 잠수를 탄 거겠냐고요. 론 레빈을 죽여서 암매장해버리자는 뜻으로 해석해야죠.
5. 추격자가 추종자로 둔갑하는 기적.
조 헌트가 자신의 보디가드인 문지기 출신 팀 피트(보킴 우드바인 분)를 데리고 론 레빈을 협박하러 그의 집에 들어가는 씬에서 그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하는 대사 중에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There are people in Chicago who are after me."
자막은 이 문장이 "시카고에 나를 따르는 사람들이 있어요."라고 나옵니다. 그런데 이 뒤에 이어지는 헌트의 대사의 마지막 문장, 즉 팀이 론을 습격하기 직전 순간의 문장이 "They said they were coming after you."입니다. 게다가 애초에 돈이 후달려서 시카고의 회사 코젠코(Cogenco)의 인수대금을 못 낼 상황이었기에 다급한 톤으로 대사를 했었던 이상 "There are people in Chicago who are after me."는 명백히 "나를 뒤쫓는 시카고 사람들이 있어요."라는 의미로 번역되었어야 합니다.
6. 'seven figure'가 7명이라고?
후반부 BBC 멤버들이 '페르시아 왕자' 소리를 듣는 이지 사메디(바니 해리스 분)에게 손을 벌리기 위해 찾아간 씬에서, 이지는 자신의 아버지(왈리드 주에이터 분)를 LA로 옮겨다주면 BBC에 투자하겠다고 약속하는 대사에 이런 부분이 나옵니다.
"guarantee a seven figure investment into BBC."
이 부분이 자막에서는 "7명의 투자자를 보장"한다고 번역이 되었습니다. 물론 figure가 인물이라는 뜻도 될 수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굳이 figure라는 단어를 인물이라는 뜻으로 쓰면서 7명을 지칭하려고 했었다면 'seven figures'라고 했어야지, 'a seven figure investment'라고 했을리가 없지요. 게다가 바로 뒤이어지는 대사가 이렇습니다.
"A million bucks?" / "Yeah, at least."
"100만 달러?" / "그래, 최소한."
즉 'a seven figure investment'는 '100만불 짜리(단위) 투자'로 해석해야 옳습니다.
7. 'extortion'은 어째서 '고문'이 되었을까.
막바지 부분 딘이 수사 담당자들 앞에서 자백하면서 다음과 같은 언급을 합니다.
"The Persian sneak was kidnapping, extortion..."
'kidnapping'은 '납치'라고 멀쩡히 번역했는데, 그 다음 부분인 'extortion'이 자막에는 '고문'으로 나오더군요. 이 단어는 '갈취'라는 뜻은 될 수 있을지언정 '고문'이라는 뜻은 도출되지가 않습니다. 스크립터가 '-tortion'부분을 'torture'로 오인했을 거라 억측하게 되지만, 그렇게 본다면 'ex-'라는 접두어는 통째로 건너뛰고 '-tion'이라는 울림소리로 끝나는 발음을 무시하고 'torture'로 둔갑시킨 건 좀 너무한 실수라고 생각되네요.
영화를 단 한 차례만 감상하고도 이 정도로 치명적인 실수들이 많이 발견되는 건 실로 오랜만입니다. 가뜩이나 그 좋은 배우들 써놓고도 영화 평이 안 좋길래 어느 정도일까 싶은 마음에, 롯데시네마 단독개봉이라도 일부러 좀 발품 팔아서 보러 갔는데, 영화 자체로도 모자라서 자막 부분에서까지 불만족스러우니 한층 더 억울하네요. 99%의 번역은 잘했는데 1% 틀려먹은 거 갖고 쪼잔하게 군다고 비쳐질지도 모르겠지만, 제가 거론한 저 7가지는 자막 번역에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였으면 결코 안 나왔을 오역들입니다. 다시 말해 그 1%는 나머지 99%의 신뢰도도 뒤흔들 정도로 치명적인 실수들이고요. 자막번역 업계의 현실을 쥐뿔도 모르는 비전문가고, 통번역도 일절 공부하지 않은 비전공자지만, 그런 쌩 문외한 일반인에게 이런 것들 걸릴 정도로 틀려먹어서는 안 될 거 아닙니까.
LinusBlank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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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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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븐 피규어는 저도 알겠는데.. 기초적인 실수가 많네요..-_-;


볼까 했는데,안보는 걸로 맘을 굳혔네요.

저야 뭐 아무리 욕 먹는 작품이라도 배우들 보고 싶어서라도 보러 갔는데 애먼 곳에서 스트레스 받았네요.

미쳐버린 자막;;

숫자부터 잘못 번역된거부터가ㄷㄷㄷ하두 악평이 많아서 보진않으려고햇는데 여러모로 헛점이많은가보네요
커어.. 엄청 상세하네요@ 오역이 정말 심하네요.. 전 아마 자막그대로 봤을텐데.. 참고해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