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주의] '밤의 해변에서 혼자' 덜 간단한 리뷰
1. 홍상수 감독의 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시작부터 사람을 당황하게 한다. 그동안 주구장창 캘리그라피 크레딧을 고집해 온 홍상수 영화에서(심지어 갈수록 알아보기 힘든 캘리그라피에서) 대단히 낯선 명조체의 크레딧을 보여준다. 검은색 바탕에 등장하는 흰색 명조체 글씨는 이전 영화와 다른 분위기를 풍기며 관객을 사로잡는다(참 별 것 아닌데도 사로잡는다). 그런데 이 '사로잡음'은 뭔가 비장해 보인다. 이전 홍상수 영화가 보여준 원색의 바탕에 유쾌한 캘리그라피와는 다른, 사뭇 진지해 보이는 분위기다. 마치 홍상수 감독은, 대단히 진지하고 심각한 이야기를 풀어낼 것처럼 비범하게 시작한다.
2. 영화는 시작부터 대차게 담배를 피운다. 그동안 대차게 술잔을 기울였던 홍상수 영화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가 홍상수 감독의 이전 영화들과 다른 점, 술 마시는 것보다 담배를 더 많이 피운다. 술기운을 빌어서 이야기하고 싶진 않지만 진지하게 할 얘기가 있어 보이는 분위기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이전의 영화들과는 다르다. 확실히 홍상수 감독은 진지하게 할 얘기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 영화는 홍상수 감독과 김민희의 '할 얘기'로 영화의 상당 부분을 뒤덮어버린다.
3.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영화의 곳곳에서 김민희와 홍상수의 '할 얘기'를 늘어놓는다. 매번 홍상수 감독은 자신의 경험과 그에 따른 생각을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어 낸 사람이다(이 대목 역시 영화에 등장한다). 사실 관객이 이 이야기만 들어줘도 영화는 충분히 제 역할을 다 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김민희가 유럽으로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그녀가 한국에서 받게 될(혹은 받고 있는) 따가운 시선을 견디는 과정, 사랑에 빠지게 되면서도 그렇게 자신을 끝으로 몰고 간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한 원망. 그 모든 것들이 영화의 곳곳에서 셀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게 '항변'처럼 전해지고 있다
4. 그런 항변들을 일일이 다 열거해가며 해석을 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이미 개봉 전부터 홍상수와 김민희의 이야기로 주목을 받은 영화고, 관객을 앞서 언급한 여러 '항변'들 덕분에 김민희와 그 주변인의 모든 대사에 귀 기울이고 해석하려 들 것이다. 그러니 이 부분에는 별로 주목할 필요가 없어보인다. 그저 영화에서 등장하는 '다소 이질적인 몇 가지 상황들'에 대한 이야기가 필요해 보인다.
5. 먼저 영희(김민희)는 영화 내내 배가 고프다. 영화 초반부부터 그녀는 끊임없이 배가 고프고 끊임없이 뭔가를 더 먹는다. 심지어 영화도 이 부분을 유독 강조해서 보여준다. 영화에서 영희는 독일에서나, 강릉에서나 여러 지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그 가운데 영희는 유독 사람들과 같이 있어도 기운이 없어 보인다. 외로움을 느끼고 쓸쓸해 보이며 어떤 때는 혼자 떨어져 있기도 한다. 사실 이 대목은 경험에서 우러나온 해석인데, 사람이 외로우면 배가 고플 수 있다. 정확히는 위장이 허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허해서 위장에 뭔가를 넣을 때가 있다. 아마 홍상수 감독이 관찰한 김민희는 사람들 속에 있어도 외로워 보이는 존재였을지 모르겠다. 몸은 마음의 비어있음을 위장의 비어있음으로 착각해 자꾸 뭔가를 넣으려고 했을 수 있다. 연인의 사랑으로도 채우지 못한 외로움, 대중의 사랑을 받던 연예인이 한 순간 버렸음에 대한 고통. 그것이 '공복'이라는 모양으로 표현이 됐을 것이다.
6. 그 다음으로 트렌치코트를 입고 비니를 쓴 정체불명의 남자다. 이 남자는 독일의 공원에서부터 영희를 쫓아왔으며 강릉에서도 그 모습을 드러낸다. 아마도 홍상수 영화에서 거의 최초로 드러난 '무의식 속 존재'인 셈이다(이 남자는 영화의 유럽 부분을 촬영한 박홍열 촬영감독이다). 이 남자에 대한 영희의 시선을 바라본다. 독일에서 영희는 이 남자를 알아본다. 그리고 '귀찮은 존재' 혹은 '경멸하는 존재'로 인식하며 자리를 피한다. 강릉에서 이 존재는 천연덕스럽게 유리를 닦고 있다. 분명 영희가 봤을 법도 하지만 영희는 이 남자를 알아채지 못한다. 심지어 자신의 숙소 안에 있음에도 말이다.
7. 이 의문의 남자는 '사랑에 대한 불안'이다. 독일에 있는 영희는 '유부남 영화감독과 연애 중'인 상태다. 이때 갑자기 나타나 들이대는 의문의 남자는 충분히 인식 가능한 '불안한 상대'다. 강릉에서의 영희는 유부남 영화감독과 헤어졌다. 그리고 믿을 수 있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하고 있다(숙소에 들어가는 순간에도 말이다). 그 순간 영희는 불안하지 않다. 사랑하는 준희 언니(송선미)도 함께 있으니 더욱 안정감이 든다. 이때 불안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하지만 어느 사람이나 그렇듯, 불안은 늘 주위를 맴돌고 있다. 결국 이 '비니 쓴 남자'는 홍상수 영화 중 유일무이한 '초현실적 존재'인 셈이다. 그는 생전 안 쓰던 이런 존재가 필요할 정도로 절절히 할 얘기가 많은 것이다.
8. 홍상수와 김민희는 기자회견에서 당당히 밝힐 정도로 공공연한 연인 관계다. 하지만 영화에서 영희와 영화감독 상원(문성근)은 헤어진 상태다. 어차피 이 영화는 픽션이고 두 사람은 현실과 달리 헤어진 모습으로 묘사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굳이 "헤어졌다"는 설정을 가져온데는 그만한 이유가 따른다. 이 영화에서 상원은 비중없는 조연이다. 영화의 75% 이상 그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영화의 포스터에는 김민희만 혼자 덩그러니 놓여있다. 즉, 이 영화는 김민희의 속내를 드러내기 위한 이야기인 것이다. 늘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던 홍상수는, 처음으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시작한 셈이다. "헤어졌다"는 설정은 그 속내를 끌어내기 위한 장치다. 강릉에 도착한 영희는 "헤어졌다"는 상황 덕분에 더 자신의 이야기를 드러낸다. 그러니깐 자연다큐멘터리 사진작가처럼 홍상수 감독은 인물을 온전히 관찰하기 위해, 관찰자는 자신의 존재를 감춰버린 것이다.
9. 마지막으로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영화의 후반부에서 실컷 판을 다 벌려놓고 "꿈이다"라며 마무리를 짓는다. 흡사 드라마 '파리의 연인'에서 봤을 법한 깽판이다. 심지어 이 장면 이전에 영희와 상원의 대화는 마치 타란티노의 영화처럼 굉장한 긴장감을 안겨줬다(그게 다 꿈이라니). 이 장면은 두 사람의 긴장감 외에도 재미있는 부분이 많다. 누가 봐도 상원은 홍상수 감독 자신과 닮아있다는 점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홍상수와 김민희는 헤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마치 헤어진 것처럼 영화에서 보여진다.
10. '꿈'으로 묘사된 이 음주장면은 여러가지 의도가 담겨져 있다. 먼저 저질러버린 감정에 대한 나름의 변명이 있다. "후회한다"는 말과 함께 아이처럼 흐느끼는 상원의 모습은 깊숙한 곳의 본심을 끄집어낸 것처럼 보여진다. 또 10여년의 결혼생활에서 그가 행복하지 않았음을 고백하는 것처럼 보여지기도 한다. '부부'라는 존재는 하나의 가정을 이루는 가장 각별한 구성원이긴 하지만 결국 각 개체로 존재하는 인간이다. 한쪽이 결혼생활에 만족해도 다른 한쪽은 결혼생활에 만족하지 못했을수도 있다. 마치 상원(혹은 홍상수)은 "너와의 결혼생활에서 남은 것은 외로움 뿐이야. 이 여자와 사랑에 빠지며 난 그것을 극복했지만 이 고통스런 길에 들어선 것을 후회해"라는 식이다. 물론 이조차 납득하지 못할 사람도 있겠지만 분명 이 장면은 나름의 변명이다.
11. 여기에 영희가 자존감을 찾고 꿋꿋이 걸어가길 바라는 작가의 마음도 담겨져 있다. 술자리에서 고통스럽게 자기 항변을 하던 영희는, 꿈에서 깨자 아무일 없다는 듯 겨울바닷가를 홀로 걸어나간다. 돌이켜보면 앞서 독일에서 영희는 바닷가를 걷다 누군가에게 업혀서 나간다. 사랑을 할 때 영희는 의존적이었지만 홀로 된 그녀는 누구보다 당당하게 바닷바람을 헤쳐 나간다. 이 장면은 '어른' 홍상수가 김민희에게 보내는 '응원'으로 읽힐 수 있다. '아가씨' 이후 아직 복귀하지 못하는 김민희에게 배우로서 자신의 길을 걷길 바라는 메시지인 셈이다. 사실 강릉에서 천우(권해효)와 준희, 승희(안재홍), 그리고 꿈 속 상원의 영화 스탭들 모두 영희가 배우로 돌아오길 응원하고 있다. 별로 안 따뜻해 보이지만 사실 굉장히 따뜻한 응원인 셈이다.
12.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매우 드물게 연애에 대한 이야기를 아낀다. 영희와 상원은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두 사람의 끈덕진 '홍상수식 밀당'은 볼 수 없다(전작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에서 본 게 전부다). 승희와 스크립터 도희(박예주)가 수줍게 손을 잡는게 전부다. 어쩌면 너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서 연애(혹은 가벼운 관계)에 대해 말 할 틈이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홍상수의 영화는 넓은 의미에서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관계 중 가장 복잡하고 난해한 것이 '연인'의 관계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이에 대한 이야기를 아낀다. 그리고 그 자리에 사람과 사람, 소수와 다수,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번 영화에서는 '연인'에 대한 이야기는 아끼면서, 그보다 더 복잡한 인간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은 인격 대 인격으로 존중받지 못한 세상에서 사는 한 여배우가 자신을 오롯이 지켜내는 이야기다. 연인에게 이보다 따뜻한 응원이 어디 있는가.
13. 결론: 홍상수 영화를 난해하게 보는 사람이 많다. 그 중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상당히 난해하고 비정하고 어둡다. 관계의 괴로움에 지친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다 보니 그렇게 됐다. 하지만 실상을 알아보면, 이 영화는 연인에게나, 혹은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나 매우 따뜻한 영화다. 마음을 알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건네는 것, 이것이 홍상수 영화의 관점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