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과대 평가 받은 감독이라고 생각합니다.
르네상스 시대부터 예술 비평사에 크게 두 가지가 대립되었죠. 형식과 내용 중 어느 것이 위냐?
물론 형식>내용이 정설이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고 그래서 비평이 혼탁할 때가 많습니다.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회화 역사에서도 풍경화가 인물화에 비해서 항상 저평가를 받을 일이 었었죠. '풍경'을 그렸기 때문입니다.
영화에서 내용이라함은 일차적으로 줄거리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특히 비 상업영화로 분류할 수 있는 영화들은, 영화에 대한 감독의 태도입니다. 코프스키가 그런 감독입니다. 저도 예전에 코스프스키를 좋아했고 그래서 그에 관한 책도 읽고 별 생각을 다했지만, 간단하게 코프스키의 영화에 대한 태도는 영화를 찍으면서 각본이나 정해진 것이 아닌 어떤 현상을 담는 것에 역점을 뒀다는 것입니다. 뭔말이냐하면 어떤 사람들이 대화하고 있는 데 갑자기 '쾅'하고 천둥이 친다던가, 이런 상황을 영화에 보여주고자했죠. 물론 타르코프스기는 그런 천둥과 같은 외부적인 요소를 작위적으로 끌어오지 않고 최대한 자연스레 보여주고 했습니다. 아래 3컷을 보시면 그런 상황이 나오죠.
2~3번 컷을 보면 바람이 불어서 잔디들이 휘날리는 모습이 보이죠. 간단한 예이지만, 이런 상황을, 우연적이든, 뭐든 타르코스프기는 자기 영화에서 많이 보여주고려고 했죠. 그리고 바로 이런 태도로 인해 비평가들이나 창작자들은 타르코프스키의 작품이 참으로 리얼리틱하다고 칭송했죠. 이는 내용에 대한 찬사입니다.
제가 문제삼는 것은 타르코스프키의 표현의 수준입니다. 타르코프스키의 야외 촬영에 대한 구도적 수준은 형편 없는 수준까지는 아니나, 대체로 평범하죠. 저 세 컷처럼요. 강렬하게 바람이 부는 현상을 그저 방관자처럼 멀찍이 찍고 있습니다. 타르코프스키가 야외 촬영에서 롱테이크나 롱숏을 남발하는 이유는 별 다른 것 없습니다. 자연 현상의 우연적 현상을 최대한 많이 담고 싶은 욕심 때문에 그렇죠. 그 누구냐...몇년전에 한국에서 몇몇 평론가들이 격찬한 토리노의 말의 바람처럼 말이죠.
사실, 자연현상을 잘 찍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건 자연을 제대로 관찰해야 잘 찍을 수 있죠. 그리고 그 현상을 예측해서 찍어야합니다. 가령 바람이 불어 하늘위로 새나 벌레가 날아간다던가....이런 현상을 예측해야죠. 아래 로버트 플라허티의 "루지애나 이야기'의 4컷을 보겠습니다.
2~4 컷들을 보면 바람에 날리는 것들을 매우 구체적으로 담고 있죠. 이것을 코프스키것과 비교해보세요. 코프스키는 한 화면에 그 현상을 뭉뜽그려 보여줄뿐이지만 플라허티 것은 매우 생동감있습니다.
플라허티는 자연현상을 매우 장기간 관찰해서 영화를 만듭니다. 그래서 저런 멋진 컷들이 많죠. 저런 현상은 자연 현상을 예측하지 않으면 찍기 불가능합니다. 다큐멘터리감독들이 누구보다 잘 알겠죠. 우연적으로 저런 컷들이 아주 운이 좋을 때 걸린 합니다만, 플라허티 영화에는 저런 컷들이 작품 전체에 넘처납니다. 이건 운이 좋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진짜 그 이치를 알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죠.
하지만 타르코스프키는 내츄럴하면서도 신비러운 현상이 있으면 그걸 제대로 찍지 못합니다. 플라허티처럼 '예측'을 못해서죠. 예측을 못하니까 롱숏이나 롱테이크같은 물량공세로 아무거나 걸려나 하는 식으로 찍읍니다. 그래서 항상 비쥬얼이 벌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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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에 진지하게 임하실 것이면 하나하나씩 답변을 드리죠. 그냥 찔러보시는 것은 아니죠?

찔러보는 거 절대 아닙니다. 그리고 전 토론이라기 보단 일종의 수업으로 생각하고 질문했습니다.
급히 쏟아낸 질문이라 궁금증이 온전히 담기진 않았지만, 우문현답이 되길 바라며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그렇다면 질문하신 6번부터 말씀드리죠. 그 컷들에서 바람이 부는 것과 잔디에 역점을 둔 것은 잔디가 바람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아 구도적으로 볼때 그 변화가 가장 두드러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과 나무도 있습니다만 그들은 무게가 있기에 바람이 불어도 그 변화가 그리 크지 않지만 잔디밭은 두드러지죠. 변화가 큰 것은 그만큼 영화의 전반적 화면 구성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죠. 이에 동의하실 수 있는 지요? 이에 대한 토론부터 하죠.

관객은 화면 내에서 크게 변화하는 것을 보는가, 작게 정지한 것을 보는 가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첨부한 이미지와 같은 장면을 몇몇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셨을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저같은 화면에서 '군중'이라는 거대한 변화에 집중하나요, 멈춰 있는 작은 개인에 집중하나요? 두드러지게 변화하는 대상이라고 관객도 두드러지게 그 변화하는 대상에 집중하나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위의 첨부된 이미지는 포커스를 활용해 특정 남자를 부각시킨 사진으로, 예시로 거론하신 〈거울〉의 포커스 아웃된 솔로니친과 움직이는 잔디 장면과는 동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정지된 예술이 아닌 움직이는 예술이므로, 앞장면의 움직임(혹은 정보)과 이어서 볼 수 있으며, 그 앞장면은 서사를 간직하고 있고, 그 서사는 솔로니친을 향합니다. 베니치아 님께서 거론한 3컷의 장면을 만약 서사적 차원에서 관객이 이해한다면, 오롯이 솔로니친에게 시선이 향하겠죠.
본문의 3컷을 서사와 분리해서 본다고 해도, 과연 바람에 역점을 둬야 할까 의문이 조금 듭니다. 잔디는 무개성과 동일성으로 인해 불특정 다수로 눈에 인식되며, 솔로니친은 그에 구분되는 색감과 형상을 지니고 있어 특정 소수로 인식됩니다. 이런 식으로 인식했을 때, 보는 이가 어디에 중점을 둘 진 벌써 정해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물론 그 주변의 잔디 움직임도 관객에겐 보일 겁니다. 사람의 시야가 그토록 좁지는 않으니까요. 허나 화면을 인식할 때 '잔디'에 집중할지, 바람이 부는 잔디 속 '솔로니친'에 집중할지는 별개의 것입니다. 또, 플래허티와의 비교가 과연 적당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플래허티는 바람과 그로 인한 움직임'만'을 포착했지만, 반면 타르코프스키의 풍경 안엔 시선을 집중시키는 인물과 사물이 같이 있어, 바람을 포착하려 애썼다고 보기가 애매합니다. 현상을 포착하긴 했지만 부수적이었죠.
허문영 평론가가 KMDB에서 연재하고 있는 존 포드 칼럼의 〈역마차〉 토막에서 문단을 인용합니다. 제 의견에 대해 충분한 뒷받침이 될 것 같네요.
- 우리가 하나의 그림을 그려져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기대와 습관에 따라 보게 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곰브리치는 정신적 반응기제(mental set)라는 인지심리학의 용어를 원용했다(「예술과 환영」). 정신적 반응기제는 우리의 인식에 영향을 행사하여, 다른 것보다는 바로 이것을 보거나 듣도록 예비시키는 마음의 자세나 기대를 뜻한다. 우리는 이 기제 없이는 그림을 볼 수 없지만, 그것이 한번 확립되고 나면 일종의 경직성을 갖고 있어서 한 번에 복수의 기제를 작동시킬 수 없다. 곰브리치가 예시하는 유명한 토끼-오리 그림(아래)에서 우리는 이 그림을 토끼로 볼 수도 있고 오리로 볼 수도 있지만 토끼와 오리를 동시에 볼 수는 없다.
토끼-오리 그림
이 논의를 영화에 고스란히 적용시킬 수 있을까.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 유비(類比)에는 무언가 빠져 있다. 우리는 토끼-오리 그림에서 토끼와 오리를 동시에 볼 수는 없지만 번갈아 볼 수는 있다. 그림은 멈춰서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모나지라’를 볼 때 우리는 인물 모드와 풍경 모드를 동시에는 아니라도 번갈아 작동시킬 수 있다. 하지만 영화 관람에서 그럴 수 있는가.
영화는 흐른다. 실험영화가 아닌 극영화에서 우리의 관람 습관은 사건의 진행을 따라가는 것이다. 모던 시네마가 그러하듯 사건을 중단시키고 풍경을 따로 비추지 않는 한, 영화가 어떤 풍경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보여주고 있을 때 우리는 사건과 풍경을 동시에 바라볼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그림 관람에서와는 달리 번갈아 바라볼 수도 없다. 하스미 시게히코도 언젠가 “한 편의 영화를 보고 나면 이야기는 바로 잊어버리지만, 몇몇 장면들은 오래 기억한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 위대한 비평가 역시 서사 모드와 풍경 모드를 동시에 작동시키지 않는다는 뜻이다. - 「역마차 Stagecoach (1939)③ - 논리와 마술의 이중주」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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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좀 흐르니 궁금증이 정리되네요. 드렸던 질문들을 정돈해서 다시 묻겠습니다.
타르코프스키는 과대평가 받은 감독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로 '비주얼'을 꺼내셨죠. 그런데 문제는, 타르코프스키가 높이 평가받는 이유가 과연 비주얼이냐는 겁니다. 제가 주워 듣고 직접 겪은 바에 따르면, 타르코프스키에 대한 평가는 그 작품 뿐만 아니라 그 태도와 신념, 그에서 우러나온 영화적 실험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 같은데도요.
저는 타르코프스키가 우연한 순간에 포착된 현상의 아름다움에 집중한 게 아닌, 아름답든 아름답지 않든 현상 그 자체가 중요하다 여겨 그와 같은 미학을 추구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베니치아 님의 심미적 접근은 객관적·공적 평가에 던지는 지적이라기 보단, 그저 베니치아 님의 주관적 취향에 대한 고백이 되지 않나요?
몇 분, 몇 시간, 며칠이 걸려도 상관없으니, 되질문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핵심적인 답변 바랍니다. 그리고 전 이 대화를 절대 토론이라 여기지 않습니다. 저는 베니치아 님의 가르침을 얻기 위해 질문을 한 겁니다. 부디 베니치아 님의 견해를 맘껏 펼쳐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한, 쟁점만 말하고 있는데, 다른 것들까지 말씀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구요. 실례지만, 브릭님부터 ‘핵심’과 약간 동떨어진 말씀을 하고 계신 데 저한테만 그걸 요구하시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일단, 저 바람의 변화가 구도의 핵심이나 아니냐 이것만 집중합시다.
위에 올리신 컷은, 그 컷만 볼때 제가 위에 올린 컷과 판이하게 다릅니다. 저건 수많은 인물들이 포커스 아웃되어 '주변'에서 ‘움직'이고, '정 중앙'에 인물을 포커스한 상태에서 ‘정지’한 상태로 있기 때문에 대비가 크게 되어, 정지한 인물이 자연스레 핵심이 되죠. 저 컷의 구도는 대비가 핵심입니다. 제가 올린 코프스키 컷과 전혀 달라요.
코프스키 3컷이 구도적으로 대비가 있습니까? 여기서 보이는 잔디들이 올리신 사진의 인물들처럼, 양복 옷을 입은 인물과 대비가 되나요? 심지어 옷색깔과 형상을 말씀하시는 것은 약간 농담으로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옷색깔과 형상은 바람에 부는 잔디의 변화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이미 양복의 색은 바람 불기전 부터, 즉 원래부터 이 장면에서 뚜렷하게 보이는 것이지, 이 양복이 바람의 변화 때문에 굳이 더 부각되는 것은 없습니다.
저 3컷에서 가장 크게 면적을 차지하는 것은 잔디밭입니다. 그래서 바람이 불때 가장 크게 면적을 차지하는 잔디밭이 휘날릴 때 구도적으로 가장 강조될 수 밖에 없죠. 특히 전경에 보이는 잔디(꽃인?)가 휘어지는 것을 보세요. 화면에서 가장 크고 많게 보이는 것들이 '가장' 큰 변화를 이루고 있는데, 이것이 부수적으로 보인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영화의 표현을 보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보고 싶은대로 보는 것이죠. 관객은 자기 마음대로 볼 수 있지만 영화를 분석하려고 할때 그러면 안 되죠. 타르코스프스키가 바람을 포착한 것은 부수적이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타르코스프키는 왜 바람에 가장 영향이 큰 잔디밭을 화면에서 가장 크게 보였을까요? 저렇게 한 이유는 타르코프스키가 자연현상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타르코프스키가 저 바람을 예측하고 얻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저렇게 일단, 롱숏이나 롱테이크를 찍으면 바람과 같은 현상이 ‘얻어’걸릴 ‘수’도 있으니까요. 타르코스프기는 저런 방식을 이용해서 저런 컷과 비슷한 컷들을 많이 보입니다.
물론 화면에서 크다고 해서 무조건 중요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앞에 올리신 장면처럼 대비를 이루면, 작은 것이라도 강조가 될 수 있죠. 하지만 타르코프스의 컷은 대비이든 뭐든 그런 기능을 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죠. (옷색깔은 앞서 말했듯이 말이 안 되구요.)
한편 허문영 평론가의 글은 여기서 논의하는 것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듯 보입니다.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인지?
브릭님의 답변을 확인하려고 왔는데, 아직도 없으시군요. 아마도 오늘 안에는 브릭님의 답변을 못볼 수도 있을 것 같네요. 당분간, 저는 오늘 밖에 답변드릴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브릭님이 말씀하신 마지막 질문에 답변합니다.

다시 돌아왔습니다. 제 답변을 드리죠.

제가 말하려는 것은, 베니치아 님께서 뭔가를 간과하고 계신 것 같다는 겁니다. 제가 저 장면에서 본 것을 문장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 남자는 집으로부터 멀리 걸어가다 문득 풀밭 한가운데에 섰다. 그 순간 풀밭에 바람이 일었다."
그런데 베니치아 님께선 다음처럼 장면을 보고 계신 것 같습니다.
"풀밭에 바람이 분다."
즉 베니치아 님께서 되려 장면 속 많은 요소들을 놓치고 계신 것 같다는 겁니다. 네, 바람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거울〉의 저 장면은 바람'만' 찍은 게 아닙니다. 그 복합적 요소들을 한꺼번에 찍은 것이죠. 그런데 베니치아 님은 계속 논픽션 영역의 예시까지 끌어와 특정 장면에 대해서만, 바람에 대해서만 논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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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시를 하나 더 끌어와 보겠습니다. 이번엔 〈거울〉의 3컷과 동일한 상황의 예시입니다.
한 남자가 언덕 위에 가만히 서서 아래를 내려다봅니다. 남자는 멈춰있습니다. 그리고 화면 전체에 거대한 산들바람이 지나갑니다.
피터 보그다노비치, 마틴 스콜세지, 태그 갤러거 등이 이 장면에 대해 평했는데, 그들 모두가 나무와 옷가지를 움직이는 거대한 바람에 대해서가 아니라, 언덕 위에 조그마하게 서있는 남주인공에 대해서 평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화면에서 가장 큰 걸 놓쳤으니 영화를 잘못 본 걸까요? 아닙니다. 제대로 본 겁니다. 저 언덕 위의 남자가 이야기의 중심이고, 상황의 중심이며, 장면의 중심이니까요.
화면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커다란 '현상'이 있는데, 왜 관객은 화면 안쪽에 자그마한 '사람'을 본 걸까요? 허문영 평론가의 글은 여기서 효력을 발휘합니다. 허문영 평론가의 글은 "우리는 하나의 그림을 그려져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기대와 습관에 따라 보게 된다"라고 했는데, 영화에선 그 기대와 습관이 '이야기'라는 요소로 발동하기 때문에, 관객은 '본능적으로' 앞뒤 장면이 연결되는 요소를 찾아내 보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라는 강한 기대와 습관이, 〈거울〉에선 솔로니친이라는 남배우에 집중하게 만드는 것이죠.
물론 (다시 한번 강조해서 말하지만) 관객의 눈에는 바람도 보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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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금 한 쟁점만 말하고 있습니다' 라고 베니치아님께서 다시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굳이 포괄적이고 전체적인 시야를 요구하는 이유는 제목이 '영화감독'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동차 공장장에 대해 말하면서 자동차 바퀴의 미적 우열만 논하는 건 잘못된 거죠. 저는 지금 왜 자동차 바퀴의 심미성이 자동차 공장장의 평판에 무지막지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묻고 있는 겁니다.
일단, 예를 드신 구도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저 구도의 예시도 잘못됐습니다. 코프스키 것과 전혀 다릅니다. 저것은 큰나무를 보이며 남자와 극적 대비를 시키는 것이죠. 저 구도는 바람이 아니라 나무와 남자의 대비가 가장 크죠. 이건 피터보그다도비치, 필립 던, 태그 갤러거 다 나무를 언급하죠.
저 시퀀스에서 바람은 모린 오하라의 면사포를 날리는 것에서 크게 기능하지, 목사가 있는 큰 나무에는 별 영향이 없는 것이죠. 저 나무가 바람에 휘날리는 모습이 강렬히 나오나요? 하지만 코프스키 것은 풀밭이 전경까지 일제히 휘날리는데, 이걸 강조 안 한다고 보면 안 되죠.

1. 필립 던의 각본에도 '나무'가 언급되는지는 몰랐네요.
2. 혹여 오해가 있을지 몰라 다시 밝힙니다. 저는 풀밭에 이는 바람을 단 한 번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솔로니친과 화합하여 시각적 에너지를 낸다고 주장한 것이죠.
3. 〈거울〉 속 풀밭 바람이 사실은 헬리콥터를 이용해 인공적으로 만든 바람이라면서요? 알고 계셨나요?
필립던의 각본에는 나무가 강조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필립던은 나무를 강조한 존포드의 구도를 보고 나는 그런식으로 쓰지 않았다.....바로 그런 장면이 존 포드라고 했죠. 그리고... 코스프키에 대해서는....아 그랬나요? 제가 몰랐습니다. 몰라서 자연현상이라고 말했죠. ㅋㅋㅋ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여하튼 인공적으로 만든 바람이라면, 더욱 바람의 효과를 강조한 것이죠. 여하튼 남자와 '화합'하여 시각적인 에너지(?)를 낸다면 그거에는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앞 댓글에서 분명히 바람에 휘날리는 '잔디밭'이 '부수적'이라고 말씀하셔서 말이죠.
앞 덧글에서 " 반면 타르코프스키의 풍경 안엔 시선을 집중시키는 인물과 사물이 같이 있어, 바람을 포착하려 애썼다고 보기가 애매합니다. 현상을 포착하긴 했지만 부수적이었죠." 말씀하셨기에 제가 그런 답변을 달았습니다. 여하튼 그 바람은 '인공'적으로 나온 것이라고 하니까, 이 말씀은 잘못됐음을 인정하시겠네요.

인공적이지만 그래도 현상은 현상이니, 관객 입장인 우리로선 '우연한 현상'이라 이해해도 무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크레딧에 제작노트가 끼어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무슨 수로 그걸 알아내겠습니까.
두 번째로 이야기에 관한 습관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건 그럴 수 있어요. 이야기에 집중하는 사람은 저 바람에 날리는 잔디밭이 아니라 양복 입은 사람에 집중할 수 있고, 뭐 다른 자기 보고 싶은 것을 선택해서 집중할 수도 있죠. 그건 자기 자유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영화의 '표현의 분석'으로 볼때는 아니라는겁니다. 작품의 표현에서 어떤 것이 강조되었느냐, 어떤 것이 key인가 하는 것은 상대적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저 오리와 토끼 그림은 애초부터 그렇게 이중적으로 볼수도 있도록 그린 것이죠. 애초에 상대적으로 볼수 있도록 그린 그림입니다. 그러나 이 관점을 가지고 세상의 모든 그림을 그렇게 보는 것은 넌센스 아닙니까? 그런 이중적인 의도를 가지지 않고 그린 그림들이 더 많을텐데요.

첫째로, 영화는 제한시간이 있기에 화면 안의 모든 요소를 파악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관객의 입장에선 서사에 부합하는 이미지만 고를 수 밖에 없겠죠.
둘째로, 타르코프스키 영화를 '읽어내려는' 시도를 저는 조금 반대합니다. 제가 목격한 타르코프스키는 전적으로 '체험'을 중시하는 사람이었지, 숨겨둔 몇몇 키워드에 의존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그 읽어내려는 시도하는 사람들을 모두 나무랄 생각은 없습니다.
베니치아님이 과연 타르코프스키를 '읽어내려고 '시도했는지는 조금 의문이 듭니다만.
관객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관객이라면 말이죠. 그러나 영화를 분석하는 사람들이 그런식으로 접근하면 잘못됐다는 것이죠. 물론 그런 분석적 관점으로 접근해도, 화면의 모든 요소를 파악하기는 힘듭니다. 그런 것은 많이 분석해보고 많이 경험하고 공부해야 알 수 있죠. 그러면 조금만 봐도, 화면의 모든 요소까지는 무리겠지만 꽤 많은 것이 눈에 들어오죠.
두번째 말씀은 이 논의와 큰 상관은 없는 듯 합니다.

저는 고도화된 전문성보단 대중적인 소통을 더 중시해서요. 이 부분에서 베니치아님과 약간의 견해 차가 있네요.

오늘을 마지막으로 한동안 뵙지 못해도 저는 괜찮습니다. 익무를 떠날 생각은 없으니, 며칠이고 몇 주고 몇 달이고 기다릴 수 있으니까요.
많은 사람들에게 타르코프스키가 높이 평가 받는 이유는 비쥬얼인지 아니면 다른 것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그 사람에 대한 비평이나 관련 문서를 안 본지가 오래되서 말이죠. 아마 브릭님이 말씀하시는 태도와 신념, 실험때문에 높이 평가받을 수도 있겠죠.
그런데 저는 창작자의 태도, 실험 ‘자체’ 같은 것으로 영화나 다른 창작품들이 높게 평가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표현’의 결과물 자체가 아름다워야 높게 평가받을 수 있는 것이죠. 크로체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 있습니다.
“비록 주제가 고상치 못하더라도 화가가 그것을 순수한 표현으로서, 다시 말해 예술로서 변형시킬 수 있는 한, 그에게는 어울린다고 해야한다. 화가는 단지 주제만을 ‘순화’하는, 즉 걸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자기의 예술 속에 표현할 때는 광대, 허풍쟁이, 악당, 심지어 자기자신까지도 정련해내기 때문이다.”
예술의 표현을 가장 중점으로 하는 비평사를 본다면 예술가가 어떤 것을 다루는 것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습니다. 그 다루는 것이 어떤 것이라도 어떻게 정련시키고, 그래서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지 보는 것이죠.
저는 브릭님이 말씀하신대로 타르코프스키는 자신이 다루는 세계를 정련화시키는 것보다, 다루는 것 자체를 중히 여기는 창작자일 확률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과대평가받았다고 생각하구요.
만약 타르코스프키의 작품이 별 볼일 없다라는 것을 반론하고자한다면 예술의 관점이 내용>표현으로 바뀔 때 가능하겠죠.

교통정체가 뚫린 것 같이 시원하네요. 이러한 답변을 원한 것이었습니다. 답변 감사합니다.

댓글을 통해 대화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저는 원래 일방적으로 답만 받아가려 했는데, 베니치아님께서 태도를 숙여 눈높이를 맞춰주시니 즐거운 대화로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일단 타르코프스키가 외부적 자연요소를 최대한 담으려는 지점에 방점을 둔 연출가란 것과 그러한 부분에서 타르코프스키가 비평가와 창작자들에게 높이 평가받고 있다는 진단이 의아합니다. 물론 타르코프스키가 자연에 대해 큰 관심을 기울인 감독인 것은 사실이나 타르코프스키가 진정 집중한 것은 자신의 정념과 고민을 어떻게 이미지로 온전히 담을 수 있을까에 있다고 생각하며 이러한 부분을 훌륭히 표현했기 때문에 비평가와 창작자들이 타르코프스키를 높이 평가하는 것이라 사료됩니다. 형식이란 그릇이 있어야 예술이란 개념이 성립하며 예술의 형식이 예술 장르의 개성을 담보하기에 형식이 내용에 우선한다는 논조에 동의하나 예술에서 형식과 내용을 철저히 구분 짓는 것은 불가능하다 생각되며 간단한 개념으로 재단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같은 주제, 소재 다뤄도 다루는 방식의 따라 천지차이의 결과물 나오는 것처럼 구체적인 내러티브와 플롯 또한 내용을 표현하는 형식의 영역에 포함될 수도 있습니다. 영화에서 통상적으로 작가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이미지 이외에도 연출과 편집, 내러티브의 개념이 존재하기에 타르코프스키에게 이미지를 걷어 낸다면 남은 것은 내용(주제 의식, 태도)뿐이란 지적은 비약적입니다. 앞서 말했듯 저는 타르코프스키가 본인의 추상적 혹은 관념적인 내용을 이미지로 탁월하게 구현하였기 때문에 훌륭한 예술가라고 말했는데요, 근데 이 이미지란 것이 베니치아님이 거론하신 자연현상의 경이를 포착하는 능력이나 카메라 앵글에 당연히 국한되지 않고 즉물적인 미[美]와는 다른 층위에 이미지의 아름다움 또한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미지가 무엇이냐 하면 저는 작가의 정서나 인물의 내면을 총체적 미장센 -미술, 소품, 앵글, 카메라 워크, 인물의 동선, 자연의 움직임- 으로 최대한 반영한 이미지라 생각합니다. 예시를 들어보면 <희생>의 발화씬, <안드레이 류블료프>의 타타르족의 침공 이후 주인공 홀로 남겨진 성당 숏, <노스텔지아>의 촛불씬 등은 표상적인 아름다움을 넘어서 영화 안의 내러티브를 영화 속 인물과 같이 밟아온 관객이라면 감독의 시선과 인물의 상황이 이미지와 훌륭하게 조응하여 생기는 이미지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고 봅니다 (또한, 타르코프스키는 <이반의 어린 시절>의 엔딩이나 <거울>의 발화씬 같은 그 자체로 직관적으로 아름다운 영상을 담아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부류의 이미지는 단순히 비주얼 이외의 연출 영역과 결부되어있는 것이기도 하죠. 물론 그러한 연출 또한 '형식'의 좌표 안에 위치합니다. 지금까지 제가 말한 이야기들은 단순히 좋은 메시지와 작가의 태도의 궤로 이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며 절대 예술의 '내용'만으로 귀결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저의 반론에도 불구하고 타르코프스키의 이미지가 어떤 방면에서 보든 뛰어나지 않다 느끼시면 타르코프스키가 과대평가 되었다는 베니치아님의 주장은 온당하지만, 타르코프스키가 롱숏을 자주 사용하는 경향을 두고 그저 물량 공세란 수식어로 폄하하는 것과 타르코프스키의 작품이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는 것이 내용적인 측면에만 있다는 비판은 부당한 지적이라 생각합니다.

소피스트 vs 칸트
창작자 vs 비평가
선민의식 vs 위선자
예술 vs 철학
올드비 vs 뉴비
에 대한 홍상수 키드의 정리 댓글
_갓벽 존잼 ㅎㅎ
질문이 있습니다. 총 10개입니다.
1. [1번째 문단] 형식과 내용이 무엇인지 알려주세요. 풍경화를 예시로요.
2. [1번째 문단] 왜 내용보다 형식이 앞서나요?
3. [2번째 문단] 왜 타르코프스키는 현상을 담으려 했나요?
4. [3번째 문단] 타르코프스키의 작품은 '리얼'한가요?
5. [3번째 문단] 현상을 택해서 영화에 담는 것은 '내용'에 해당하나요?
6. [4번째 문단] 예시로 거론한 3컷에선 자연현상 뿐만 아니라 사람과 나무 등의 개별 피사체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바람과 풀밭에 역점을 두고서 컷을 보셨나요?
7. [5번째 문단] 바람이 부는 장면에서, 타르코프스키의 풀밭과 플래허티의 새떼는 우열로 구분되는 관계인가요?
8. [6번째 문단] 타르코프스키가 뭉뚱거림을 의도한 건 아닐까요?
9. [7번째 문단] 플래허티의 '멋진 컷'들은 다큐멘터리라는 범위 내에서 시각을 휘감는 장면들인데, 타르코프스키가 개별 장면보단 종합된 영화에 집중했다는 걸 생각하면 비교가 부적절하지 않나요?
10. [8번째 문단] 타르코프스키의 비주얼엔 현상을 제외한 것들도 많습니다. 그에 대한 비주얼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뒤늦게 답해주셔도 되고, 디테일없이 짧게 핵심만 답해주셔도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