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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포드 vs 히치콕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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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의 제목엔 '2부'가 붙어있지만, 그것이 "존 포드 vs 히치콕"(이하 '1부')의 후속글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이 글엔 1부를 답습하거나 반박하는 내용도 있으나,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2부는 아예 처음부터 새로이 시작하는 글이라 보는 것이 더 알맞기 때문이다.


 1부는 부끄러운 글이었다. 1부를 쓸 때에도 그 부끄러움을 알았는지 머리말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혹여 거장들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건 아닐까..." 하지만 1부의 부끄러움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우선, 글 자체가 너무 뜬금없었다. 나 자신의 예고도, 익스트림무비 사람들의 요구도 없었는데, 갑작스레 긴 글을 툭 던지듯 업로드했다. 애초에 익스트림무비는 소소하게 영화를 즐기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지, 영화에 대한 장광설을 늘어놓으려 모인 공동체가 아닌데 말이다. 이따금씩 독창적인 감상을 지닌 사람들이 잘 다듬어진 글로 영화에 대한 생각을 공유하곤 하지만, 그마저도 가까운 시일에 개봉한 영화들로 한정되었지 생뚱맞게 수십 년을 넘나드는 작품으로 얘기를 꺼내진 않았다. 이런 곳에서 나는 수십 년 전 영화를 넘어 '감독'에 대한 얘기를, 그것도 두 명이나 글로 다루려는 시도를 느닷없이 했으니 나나 익무인들에게나 갑작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운영자의 공지글 축복이 있지 않았으면 무관심 속에 잊혀질 게 당연했다. 게다가, 내용도 횡설수설했다. 아직 정돈되지 않은 생각을 열심히 나불대는 데에 집중하다보니 글도 덩달아 오락가락하고 갈피가 없었다. 제목은 "존 포드 vs 히치콕"이라 써놓고 이 둘의 우열을 가리는 것도 아니었고, 문장도 형편없어서 쉬운 내용조차 어렵게 포장되어 글의 문턱을 높이고 있었다.


 무엇보다, 1부는 어눌했다. 생각을 밀고 나가려는 힘과 억누르는 힘이 충돌하여 글의 정체성을 흐리게 만들었다. 그 모양새가 마치 겁을 잔뜩 먹고 우물쭈물하는 어린아이와 같았는데, 시원시원한 걸 선호하는 나로서는, 내가 써놓고도 답답함을 느꼈다. 때문에 2부를 쓰기 위해 고민할 때, 내용에 대한 고민보다는 쓸지 말지에 대한 고민이 앞섰다. 익무가 내 글을 원하는 것도 아니요, 글을 쓰는 가운데 생각이 정리되는 것도 아니다. 써봤자 못마땅할 글을, 도대체 왜 나는 써야 하는가?


 고민하는 중에도 나는 많은 영화를 보았다. 개중엔 한 번 더 보고 싶을 정도로 좋은 것도 있었고, 중간에 극장을 나가고 싶을 정도로 나쁜 것도 있었다. 영화가 시작할 때의 기대감이 항상 충족되는 건 아니니 그럴 수 있었다. 그러다 시선을 달리하여, 스크린 바깥의 움직임에 주목하였다. 영화의 좋고 나쁨을 가르는 나의 두 눈, 그런데도 계속 걸작의 희망을 품고 극장을 향하는 나의 두 발. 이들을 주관하는 내 마음 속 불꽃...


 매끈한 평론과 같이 논리정연한 설명글이 아닌, 어린아이가 연필 가는 대로 쓴 투박한 동화와 같이 하나의 이야기로서 글이 쓰여져야 한다는 것을 한참 지나서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존 포드나 히치콕보다 더 큰, 영화 그 자체를 향하기 위함이라는 것 또한 뒤늦게 알게 되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존 포드 vs 히치콕 2부"는 시작됐다.

 

 


1. 왜 포드와 히치콕인가?


 1부에서 포드와 히치콕에 대해 다루면서 크게 놓친 것이 한 가지 있었다. 그들은 왜 위대한가, 즉 그들은 왜 다른 감독들과 구분돼 고평가를 받냐는 것이었다. 1부에선 온통 히치콕과 포드에 대한 잡담 뿐이었지, 다른 감독과 비교하는 구석이라곤 조금도 없었다. 있는 말이라곤 서두의 몇 문장 뿐이었다. - "내겐 이 둘이 영화의 신이다. 이 둘의 영화는 단 한 쇼트의 낭비도 없이, 모든 쇼트에 감흥이 담기고 생각이 담긴다. 무한한 힘이 매장면마다 압축되어있다고 할까. 영화가 도달할 수 있는 어떤 정점이 이 둘에게선 보인다."


 왜 그들이 위대하냐는 질문에, 깊은 탐구 없이 툭 던지듯 답하는 것은 쉽다. '그들이 만든 작품이 위대하니까, 그들의 영화는 정말 훌륭하니까', 그러면 또 다른 질문이 뒤따라온다. '훌륭한 영화란 무엇인가?', '어떤 영화가 위대한 영화란 말인가?'


 이토록 핵심적인 질문들에 답하지 않은 이유는, 그 질문에 명쾌하게 답하기엔 나 자신의 생각이 턱없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질문을 고의적으로 회피한 것이다. 그래도 질문의 범위를 좁히고 타인의 발상을 끌어오면 그나마 설명이 가능해지니, 여기서 그 시도를 조금 해볼까 한다.


 포드와 히치콕 중 포드를 표본으로 선정하여 구로사와 아키라와 견주어보고, 왜 포드가 더 뛰어난지에 대해 해설해보겠다. 외부에서 글을 하나 끌어와 원석 삼고, 내용을 다듬고 첨삭하여 간편하고 쉬운 글로 제공한다. 원문의 제목과 링크는 다음과 같다.


《구로사와 아키라와 존 포드의 차이점》 - 작성자 messidona
{http://cafe.naver.com/seoulartcinema/4049}


 위 글을 비교를 위한 초석으로 삼은 이유는, 두 감독의 연출 차이를 드러내는 데 매우 명확한 예시를 거론하고 있기 때문이다. (글의 주장엔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꽤 있다) 존 포드의 1946년작 〈황야의 결투〉와, 구로사와 아키라의 1954년작 〈7인의 사무라이〉엔 놀랍도록 유사한 장면이 나온다. 유사함에서 보이는 차이는 마땅히 실력 차이를 알아볼 수 있는 지표가 될 것이다. 그 장면의 줄거리인즉 다음과 같다.


 "어느 평범한 마을에 난봉꾼이 나타나 집 하나를 통째로 거점 삼고서 난리를 일으킨다. 마을의 평화를 위해 사람들은 그 난봉꾼을 어떻게든 처리해야 하지만, 그 난봉꾼에게 혹여 해코지 당할까 두려워 아무도 당당하게 나서지 못하고 난봉꾼이 있는 곳만 멍하니 바라본다. 그때, 지나가던 고수가 참다 못해 나서서 그 난봉꾼을 손쉽게 처리하고, 한바탕의 난리를 불식시킨다."


 차이점이라곤 각 영화의 장르에 따른 직업적 차이로, 포드와 구로사와의 영화에서 고수는 카우보이와 사무라이로, 난봉꾼은 인디언과 도둑으로 치환되어 등장한다. 독자의 이해를 위해 이 글에선 계속 고수와 난봉꾼이라는 말을 사용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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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를 보라. A장면들은 〈황야의 결투〉에서 따온 장면들이고, B장면들은 〈7인의 사무라이〉에서 따온 장면들이다. A와 B장면은 난봉꾼이 요새를 치고 있는 곳이고, A-와 B-는 그 요새를 바라보며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여기서부터 연출의 차이가, 더 나아가 실력의 고저가 현저히 드러나지만, 요까지 얘기하면 설명이 길어지니 그저 상황을 개괄하는 장면으로 퉁치고 넘어간다.


 〈7인의 사무라이〉에서 참다 못한 고수가 상황을 정리하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난봉꾼이 있는 요새의 문을 두드린다(B-1). 열린 문을 매개로 고수는 차분한 말로 난봉꾼을 진정시킨다(B-2). 그러는 중에 갑작스레 난봉꾼을 덮친다(B-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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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면 알겠지만, 장면에 멋이 없다. 긴장감도 없다. 안에서 누가 어떻게 위협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멋진 실력을 뽐낼 고수도 어정쩡한 옆·뒷모습만 보여 그 위세가 대단하지 않아 보인다. 그에게서 존경심을 자아낼 만한 힘은 시각적 이미지가 아닌, 난봉꾼을 제압하는 상황에서만 나온다. 구로사와 아키라도 영화를 만들면서 장면의 인상이 약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다. 그는 위 세 장면이 이어지는 중에 끊임없이 사람들의 반응, 즉 리액션 쇼트를 꾸역꾸역 어떻게든 집어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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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의 작성자 messidona는 이 반응 장면들을 두고 '땜질 장면'이라 표현했는데, 내 생각도 이와 같다. 고수가 난봉꾼을 제압하는 장면이 강력한 인상을 주고, 사람들이 이를 지켜보는 장면이 그를 보조하는 식이 되어야 합당한 연출이 되는데, 고수가 나오는 장면이 너무나 약하니 이를 '땜질'하기 위해 자잘한 반응 장면들을 우겨넣어 어떻게든 분위기를 감동적으로 변화시키려 하고 있다. 즉 음식 고유의 맛은 안 나고 이를 위장할 양념맛만 가득 쌓여있는 것이다. 그래도 어떻게든 장면은 완성되어 관객에게 '이야기'는 전달해주지만, 그 과정에서 영화 속 장면들은 너무나 지저분해져 버렸다.


 이에 반해, 〈황야의 결투〉에서 참다 못한 고수가 상황을 정리하는 과정은 참으로 간단하다. 고수가 요새에 진입하곤(A-1) 주먹 오가는 소리가 몇 번 나더니(A-2) 고수가 당당히 걸어 나온다(A-3). 진입하는 과정에서 계단을 통해 잠입하는 장면이 살짝 지나가지만, 요새를 찍는 앵글과 유사하기에 아무런 무리 없이 관객들에게 자연스레 받아들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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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입-해결-퇴장, 고수가 들어가고 나올 때는 고수에게 초점을 맞추어 장면의 중심이 튼실하고, 난봉꾼을 진압하는 과정은 생략돼 있지만 주먹소리와 사람들 반응을 넣어 생략된 상황을 상상하게끔 한다. 시작-중간-끝, 간단하게 조각된 삼박자로 인해 장면은 마치 우아한 발레처럼 보이며, 반응 장면도 〈7인의 사무라이〉와 다르게 딱 필요한 만큼만 쓰여 진압 장면이 내뿜는 매끈하고 단단한 맛만 오롯이 남게 된다.


 각 영화에서 한두 장면을 빼내는 것이 가능할까? 〈7인의 사무라이〉는 가능하다고 본다. 각 장면이 스스로 힘을 가지지 못해 양념과 같은 장면들을 듬뿍 쳤는데, 그 막대한 양념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래도 몇몇은 편집해도 될까 생각이 든다. 오해는 말라, 나는 〈7인의 사무라이〉를 아주 재밌게 봤다. 허나 저 장면들을 모두 객석에 앉아 보기엔 3시간 30분이라는 러닝타임이 조금 길게 느껴진다. 차라리 양념을 좀 덜어낸 짧은 버전을 보는 게 낫지 않을까.


 허나 〈황야의 결투〉는 그 어떤 장면도 편집해선 안된다. 각 장면의 힘이 너무나 강렬하여 만약 조금이라도 훼손할 경우 영화의 줄거리가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직접 경험했다. 흔히 알려진 〈황야의 결투〉의 러닝타임은 97분으로, 존 포드가 다 편집해둔 '감독판'에서 제작자가 직접 10~30분 가량 잘라낸 '극장판'인데, 이 버전을 보았을 땐 이 영화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전달하려는지 이해하질 못했다. 한참이 지나고서 잃어버린 5분 장면이 복원된 버전, 즉 감독판에 가까운 버전으로 영화를 다시 보게 되었는데, 각 장면 간의 아구가 정확히 맞아 떨어지면서 그제서야 영화가 본래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꼴을 제대로 보게 되었다. 단 5분의 장면이 97분을 좌지우지한 것이다.


 일본의 영화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는 다음 말로 (구로사와를 얕잡으며) 존 포드의 위대함을 표현했다.


 「존 포드는 무성영화의 끝자락에 걸쳐 있는 감독이다. 무성영화는 언어가 안 되니까 시각적 소스, 이미지로 전달한다. 존 포드는 시각으로 전달하는 능력이 매우 뛰어나다. 일본의 구로사와 아키라만 해도 무성영화의 경험이 없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다르다.」1


 구로사와 아키라와 존 포드의 차이에 대해 조금 더 덧붙여 보겠다. 영화를 만들기 전 각본 상태에서의 이야기를 '서사'라고 불러두자. 그렇다면 편집을 마치고 완성된 영화는 서사를 전달하는 것에서만 역할을 다하는가, 서사를 능가하는 힘을 갖추고 있는가? 구로사와 아키라의 경우 서사와 영화에 큰 차이가 없다. 간혹 구로사와의 미적 재능이 발휘되어 그림 같이 아름다운 화면이 객석을 압도하나, 그저 '예쁘다, 화려하다, 멋지다'는 형용사에서 멈추는 경우가 많다. 반면 존 포드는 영화가 서사를 능가한다. 각본에선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세세한 감정과 뒷이야기, 그리고 체계적인 미학이 그의 영화에선 드러난다. 다시 하스미 시게히코의 발언이다.


 「히치콕이나 (하워드) 혹스, 존 포드는 무성영화 때부터 영화를 만들어온 사람들이다. 무성영화란 것은 이미지로만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대단히 섬세하지 않으면 안 되는 면이 있다. 무성영화를 한 감독들의 경우는 언어 대신 운동, 행위를 사용한다. 그 감독들의 영화에서 대사만 들으면 뭐 이런 영화가 있나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운동과 행위를 같이 본다면 뛰어난 영화들이 된다.」2


 나쁜, 혹은 평범한 감독들은 이미지를 만들 때 개념을 충실히 전달하는 데만 힘쓴다. 하지만 포드와 히치콕과 같은 거장은 개념을 넘어서는 이미지를 만드는 데 집중하고, 종국엔 이미지 자체가 개념이 되도록 한다. 이것이 내가 거장들에게서 발견한 위대함이다. 물론 이조차도 포드와 히치콕이 위대한 이유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왜 그들은 위대한가'라는 질문엔 어찌어찌 답했지만, 타인의 견해를 빌려 답한지라 글을 써놓고도 호가호위의 못마땅함이 찌꺼기가 되어 내심을 휘젓는다. 게다가 이들은 단편적 답변일 뿐이다. 몇몇 장면과 대표작들에 한해선 이정도로 충분하겠지만, 그 위대한 거장들 가운데서도 왜 특히 포드와 히치콕은 위대한지, 왜 그토록 그들의 언어와 사상이 영화사에 중요한지에 대해선 적당한 답이 되지 못한다.

 

 나는 순간적인 의문에 변호하기 위해 내놓는 짧은 답을 넘어, 그들의 작품과 세계관을 정의할 총체적인 미학과 철학으로서의 답변을 원한다. 그리고 두 거장의 세계를 넘어서서, '좋은 영화란 무엇인가', '영화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거대한 질문에 대해서도 나만의 답을 내놓고 싶은 것이다.


 몇몇은 눈치챘을 것이다. 이 다음부터 쓰여질 내용은 모두를 위한 강좌나 두 거장에 대한 잡담이 아닌, 나 자신이 구도하기 위해 쓰는 글이자 영화라는 거대한 세계를 훑는 개인적인 순례기가 될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내 글에 문턱이 없길 바라왔지만,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이 진입장벽을 높인다. 허나 독자를 밀어내는 현학적인 혼잣말은 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 그러니 나와 같이 호기심과 지적 갈증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이 글이 작은 도움 되길 바라며, 나보다 앞서 나아간 이들은 가르침과 격려를 건네주길 바란다.


 의존을 꺼려하는 만큼, 내용은 저명한 평론 혹은 이론의 도움을 받지 않고 쓰여질 것이다. 이런 말을 하는 나조차도 지식인들의 날개 아래에서 성장했고, 이 글에서도 필요에 따라 인용을 곁들일 생각이지만, 그런데도 내가 굳이 명시적으로 도움을 거부하는 까닭은 내 자신의 사상적 독립을 위함이며, 그리고 또 하나, 우리가 대면할 것은 오직 '영화' 뿐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기억하자, 극장에 불이 꺼지면 언제나 영화를 보는 행위는 혼자가 된다.3 어차피 영화도 태어날 땐 그 어떤 학자나 지식인의 도움 없이 홀로 태어나지 않았나.


 오직 스스로를 등불 삼아 더욱 정진하라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글은 다음 문단으로 넘어간다.

 

 


2. 영화의 불시착


 「진정 인간에게는 보고 알아야 할 것이 많기도 하도다. 하지만 보기 전엔 그 어떤 예언자도 미래의 일이 어떻게 될지 알 길 없도다.」 ― 〈아이아스〉 中4


 무언가의 의미를 쫓는 과정에선 필연 그 기원을 알아야 한다. 그 기원에 의의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가령 싹둑싹둑 가위는 뭔가를 자르기 위해 만들어졌다. '가위'라는 물건이 태어나는 데엔 '자른다'라는 목적이 스며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기원에 목적이 있는지 아리송한 것들이 몇몇 있다. 이를테면 나무는, 어떤 특정 목표를 이루기 위해 뿌리를 뻗치고 하늘로 솓는가? 또 사람은 필생의 뜻을 지니고 이 땅에 태어나는가, 아무 이유 없이 태어나는가? 그렇다면 영화는, 특별한 뜻을 위해 만들어졌을까, 아니면 아무 뜻 없이 태어났을까?

 

 


 19세기 후반, 그러니까 1800년대 후반, 신세기를 앞둔 대서양 주변은 듣도보도 못한 놀라운 발명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이전엔 전혀 없던 새로운 것으로, 여러 장의 사진을 이어붙이면 사진 속 물체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는 효과가 발명의 단초였다.


 명민한 이들은 일찍이 그 가능성을 알고 발명에 뛰어들었다. 미국의 토머스 에디슨, 독일의 막스 스클라다노프스키 등, 서구의 여러 재주꾼들이 이에 도전했고 성공했지만, 역사는 누구보다도 화려하게 언론과 여론을 뒤흔든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에게 최초의 영광을 수여했다. 여기까지는 알 사람은 다 아는 얘기일 것이다.

 


hand_movement.gif

 

 

 그 여러 발명자들이 만든 '움직이는 사진'은, 지금 보면 영화라 부를 수 있는 것인지조차 의문이 들 정도로 단순하며 빈약하다. 아무 의미없이 움직이는 물체를 찍어 '움직임'을 강조한 것이 전부이며, 한 편의 영화라기엔 지나치게 짧고, 쇼트도 단 한 개 뿐이다. '영화'라는 나무가 있기 전에 '활동사진'이라는 씨앗이 있었다는 것은 알겠지만, 그 씨앗의 초라함은 그것을 나무라 부르는 것을 주저하게 만든다. '영화의 시작'이라기 보단 차라리 '영상의 시작'이라 보는 게 더 알맞지 않을까.


 최초로 '영사가 가능한' 활동사진을 만든 뤼미에르 형제는, 1895년에서 1896년으로 막 넘어갈 겨울, 그 신기한 발명품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 수익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들은 거기서 만족했고 그것은 돈벌이로만 충분했다. 그렇게 갓 태어난 세기의 발명품은 자신의 아비들을 위해 이유 없는 걸음마를 반복하고 있었다. 허나 그 반복의 끝은 그다지 머지 않았다. 최초의 영화관이라 부를 만한 것에 사람들은 계속 몰려들었고, 개중 한 사람이 그 갓난 발명품에게서 미처 드러나지 않은 위대함을 보았다. 바로 마술사 조르주 멜리에스였다.

 


 (편집, 합성, 이중노출 등을 개발한 멜리에스의 천재성은 둘째치고) 개인적으로, '활동사진'에 '이야기'를 불어넣어 지금 우리가 아는 '영화'라는 것을 만들어낸 멜리에스의 아이디어는 그다지 기발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전까지 그는 전문 마술사였고, 실내공간을 무대/객석으로 나누어 이야기를 '공연'하는 서양의 극문화 전통에 익숙했기 때문이다. 고로 '제4의 벽'이란 것이 익숙한 그에게 뤼미에르가 만든 '스크린'이란 것은 무대와 유사하게 보였을 것이고, 활동사진을 '연출'하고자 하는 생각을 떠올리기 쉬웠을 것이란 것이다. 허나 그 단순한 아이디어의 여파는 상상을 초월했다. 태초에 조물주가 흙덩이에 숨결을 불어넣어 '사람'을 만들었듯이, 멜리에스의 아이디어는 이유 없는 움직임에 '이야기'라는 숨결을 불어넣어 '영화'라는 본질을 부여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영화는 두번째 아버지를 만나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영화는 예정일에 맞춰 얌전하게 태어나지 않았다. 영화는 던져졌다. 불현듯이 우리 곁에 찾아왔고, 얼떨결에 걸음마를 시작했다. 멜리에스가 무대예술의 힘을 빌어 영화에게 존재의 명분을 주긴 했지만, 그조차도 풍전등화와 같이 초조한 시작이었다. 당시엔 번듯한 영화관도, 열성적인 시네필도 없었고, 법과 자본의 도움도 없었으며, 여러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이 다량으로 수입된 것도 아니었다. 척박한 환경에서 삶을 개척해야 했던 서부극 속 인물들처럼, 최초의 영화인들은 준수한 이론이나 명망있는 학문의 도움없이 '활동사진'이라는 이름 없는 물체를 '영화'라는 것으로 재발명해야 하는 운명에 처해 있었다.


 돌이켜보면 초기 영화사는 기적의 연속이었다. 영화라는 전혀 새로운 것이 툭 튀어나온 것부터가 기적인데, 이를 발전시킬 이름들이 수두룩했던 기적이 또 있었다. 그리피스, 무르나우, 채플린, 키튼, 에이젠슈타인, 랑, 비더, 슈트로하임, 스턴버그, 루비치, 쇠스트롬... 아직 소리가 도착하지 않은 때에 이들은 각자의 재능과 역량에 맞춰 영화의 범위를 드넓히고 영화의 저변을 다지려 노력하였으며, 그만큼(혹은 그 이상으로) 그들은 성공을 거두었다. 이들을 통해 '움직이는 사진'은 비로소 '영화'라는 견고한 입지를 가지기 시작했고, 영상문법과 기술의 발전으로 영화는 저 스스로의 위대함을 서서히 실현할 수 있게 되었다.


 아직 소리가 영화에 도착하지 않은 때에, 영화는 스스로 독립된 존재가 되기 위해 힘썼고, 영화 산업은 점점 불어나 많은 재능들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출신도 국적도 다른 두 젊은이가 그들의 경력을 그제 막 시작하고 있었다.

 

 


3. 두 젊음과 32년


 무성영화로 대표되는 초기영화사를 한 문장으로 요약해보겠다.


 "1895년에 뤼미에르 형제가 '활동사진'을 만들었고, 1915년에 그리피스의 〈국가의 탄생〉가 개봉했으며, 1927년에 무르나우의 〈선라이즈〉가 개봉했다."


 32년동안의 복잡다단한 역사를 너무 과격하게 압축한 모양새지만, 논의를 펼치기엔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진짜 한 문장으로 소개를 끝내면 아는 사람만 알아듣는 거만한 모양새가 되니, 소개한 3개의 사건을 좀 더 펼쳐서 설명해보겠다.


 1895년의 사건은 이미 앞에서 얘기했다. 뤼미에르, 그리고 멜리에스. 이 이상의 설명은 없어도 될 듯 싶다. 대신 노파심에 첨언을 조금 하겠다. 앞글에서 뤼미에르 형제의 발명품을 '영화가 아닌 영상'이라 표현하며 평가절하한 감이 없잖아 있는데, 제대로 평가하자면 멜리에스만큼 뤼미에르 형제도 높임 받아야 한다. 하지만 내가 이 글에서 펼치는 견해는 〈시민 케인〉·〈탐욕〉 등으로 대표되는 '멜리에스적' 영화들에 대해서지, 〈리옹 공장에서의 퇴근〉·〈북극의 나누크〉로 대표되는 뤼미에르적 영화들에 대해서가 아니기에 의도적으로 얕잡아 설명했다. 게다가, 나는 그 '뤼미에르 계보' 영화들을 아직 많이 보지 못해 그에 대해 말할 능력도 밑천도 부족하다. 즉 이런저런 사정으로 논외가 된 것이다. 추후에 파고들 여지는 있다.


 1915년 개봉작 〈국가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는 정성일 평론가의 문장을 빌려 소개한다.


 「1915년 2월 8일 D. W. 그리피스의 〈국가의 탄생〉이 개봉하였다. 처음 상영되었을 때 16mm 프린트로 상영 시간이 3시간 10분에 달하는 이 대작은 '영화'를 단편영화들의 '묶음'으로부터 장편영화로 옮겨놓았다. 영화사는 〈국가의 탄생〉을 오늘날 상업영화의 표준 모델의 등장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피스는 이 영화에서 여러 가지 영화 '기법'을 사용하고 있으며, 그 효과는 단지 미국뿐만 아니라 지금 막 시작하고 있던 소비에트의 젊은 예술가들에게도 인상적인 영감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동시에 엄청난 흥행 성공을 거둔 이 영화는 사회적인 영향을 야기하면서 이야기 속에서 다루고 있는 흑인 문제를 놓고 이데올로기적으로 첫 번째 '비평적'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진정한 의미를 설명한 사람은 영화배우 매리 픽포드일 것이다. "〈국가의 탄생〉은 사람들이 영화산업을 비로소 진지하게 생각하게 만든 첫 번째 영화예요."」5


 그래도 부족하다 싶어 첨언한다. 〈국가의 탄생〉을 둘러싼 흥행과 논란은 〈국가의 탄생〉의 것만이 아니었다. 〈국가의 탄생〉이 개봉한 1915년은 유럽에서 영화가 탄생한지 어언 20년이 흐른 해였고, 유럽은 한창 '모든 전쟁을 끝낼 전쟁'을 치루고 있던 참이었다. 대륙적 혼란으로 유럽 영화계는 무너졌고, 무성영화를 쏟아내던 회사들도 군수창고로 바뀐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 미국에선 아돌프 주커나 루이스 메이어 등의 사업가들의 가호로 영화계가 부쩍부쩍 자라나고 있었고, 관객의 신분이나 지역의 경제력에 상관없이 전국적으로 수 천 개의 영화관이 세워지고 있었다. 그때 〈국가의 탄생〉은 개봉하였고, 무려 1년동안이나 장기 상영하며 그 힘과 깊이를 과시하였다. 그렇게 〈국가의 탄생〉은 하나의 분기점이 되었다. 매리 픽포드의 말처럼, 영화는 더 이상 단순한 소일거리가 아니었다. 영화 스스로 '시간 때우는 소일거리'라는 한계를 부수고 재탄생한 것이었다. 그 순간 영화는 미래를 지배할 거대한 예술이자 문화가 되었으며, 국가를 지탱할 산업이 되었다. 내가 권위있는 영화사가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1915년을 판단하자면, 〈국가의 탄생〉의 성공과 잡음은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거대 문화 산업의 첫 포효가 아니었나 싶다. 유럽이 정치싸움으로 힘을 소모하는 가운데, 미국은 평안 속에서 스스로 영화의 왕관을 차지한 것이었다. 그리고 영화에 대한 논의, 즉 '비평' 또한 조용히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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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라이즈 Sunrise: A Song of Two Humans〉 (1927)

 

 1927년, F. W. 무르나우의 〈선라이즈〉가 미국에서 개봉하였다. 독일에서 한창 이름을 날리던 거장 무르나우의 첫 할리우드 진출작이었으며, 무성영화였고, 야심작이었다. 이 영화가 개봉하고 2주 뒤, 상영극장 인근의 또 다른 극장에서 세계 최초의 유성영화 〈재즈 싱어〉가 개봉함으로 인해 〈선라이즈〉는 얼떨결에 '무성영화 시대 마지막 작품' 비스무리한 취급을 받게 되었다. 영화기술이 어떻게 발전했는가를 궁금해하는 이들에겐 〈재즈 싱어〉가 더 익숙하겠지만,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은 〈선라이즈〉라는 이름 앞에 엄숙히 무릎 꿇고 경배할 수 밖에 없다. 이 영화는 비록 흥행에선 큰 재미를 보지 못하였지만, 〈선라이즈〉가 선사한 경이로움은 당대 할리우드 영화인들의 뇌리에 불멸의 인상을 남겼으며, 곧바로 할리우드의 전설이 되었다. 무성영화의 마지막 불꽃은 무척이나 강렬했던 것이다. 물론 이후에 온전히 유성영화가 자리 잡기까지 몇 년이 걸렸고, 그 격변기에 무성영화 걸작들이 꽤 쏟아졌지만, 결국 '진짜' 무성영화의 시대는 1927년에 〈선라이즈〉와 함께 막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까지 존재했던 '무성의 힘'만은 어찌어찌 살아남아, 몇몇 영화인들을 통해 대대로 전승된다.


 당연히 32년이란 세월이 뉘집 개이름은 아닌 만큼, 과격하게 세 단락으로 압축시킨 이 무성영화의 역사 속엔 수많은 이름이 잠들어 있다. 그리고 수많은 영화언어 또한 이 시간 속에서 뜨고 졌다. 그리피스로 대표되는 미국의 고전주의 기법, 무르나우로 대표되는 독일의 표현주의 기법, 에이젠슈타인으로 대표되는 러시아의 몽타주 기법, 프랑스의 미장센 기법 등... 이 시기 끝자락에 살아남은 감독들은 이 기법들을 제각각 물려받았고, 이후 만들어 갈 유성영화의 시대에서 그 시각언어들을 소리와 함께 심화·발전시켜야 했다. 우리가 아는 두 거장도 이 운명 가운데 서있었다. 운명에 던져진 그들은 그때만 해도 그저 운없이 영화계에 흘러들어온 두 젊은이였을 뿐이었다.


 알프레드 히치콕은 1899년,(영화가 만들어지고 5년 후) 영국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도매 상인이었고,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알프레드는 태생적으로 겁많고 내성적인 아이였는데, 부모는 이를 더욱 부추기는 교육법을 행했다. 아버지는 알프레드가 조금만 잘못을 저질러도 크게 타일렀으며, (고성을 지르거나 회초리를 사용하지 않고, 어떤 점을 잘못했는지 조목조목 말해 압박하는 식으로 훈육했다고 한다) 어떨 땐 동네경찰에게 부탁해 몇 분 정도 유치장에 가두는 벌을 주기도 했다. 어머니도 그와 비등했다. 아니, 더 심했다. 매일 저녁마다 자신의 침대 앞으로 알프레드를 불러 하루동안 무슨 일을 했는지, 어떤 죄를 지었는지 낱낱이 고한 뒤에야 잠자리에 들게 했다. 이러한 강박적인 부모 아래에서 알프레드는 바깥에서 뛰놀기 보다 방에서 그림 그리며 혼자 몽상하는 걸 더 즐기는 아이로 자라났다.


 이후 히치콕은 가톨릭 계열 학교에서 공학을 배운 후 런던대학교에 미술전공으로 진학하게 되지만,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 학업을 그만두고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전공을 살려 기능공으로 일했고, 출중한 그림 실력을 통해 광고업계에서도 일했다. 이런저런 직종을 번갈아 가며 일하다 그는 우연히 영화 일을 시작하였고, 연단위의 성실함으로 점차 영향력을 키워 이윽고 전문감독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일생의 동반자를 만난 것도 이때였다)

 

 보는 바와 같이, 히치콕도 꽤 방랑하는 시기를 보냈지만, 존 포드도 만만찮았다. 존 포드는 1894년,(영화가 발명되기 1년 전) 미국에서 태어났다. 서열로는 6남매 중 막내였고, 부모는 둘 다 순수 아일랜드 혈통이었으며, 혈통답게 독실한 가톨릭 집안이었다. 가족들의 생계는 술집과 농장 일로 유지됐으며, 중산층과 중하층을 자주 오갔다. (존 포드가 자기 유년기에 대해 '가난'과 '시골'로 말한 걸 생각하면 중산층으로서의 시간이 많이 짧았던 듯 싶다) 가족의 경제적 불안정으로 인해 포드는 학교를 다닐 때에도 일을 병행해야 했고, 고등학생 때는 독서광으로 살며 언어와 미술에 재능을 보였다. 고교 졸업 후, 해군사관학교에 지원했으나 수학에서 낙제해 불합격했고, 차선책으로 메인 대학교에 입학하지만 수업내용이 형편없어 얼마 안 가 자퇴하게 된다. 학업과 헤어지고 잡일을 전전하던 젊은 날의 포드는, 몇 년 전 생이별한 13살 위의 친형을 다시 만나게 된다.


 존 포드의 형 프란시스 포드는 16살에 결혼하고서 가족과 헤어졌었다. 프란시스가 없는 시기, 포드의 가족은 멜리에스의 영화에서 배우로 등장하는 프란시스 포드를 보며 놀라기도 하였다.

 

 대학을 자퇴하고 방황하던 존 포드는 할리우드로 향했는데, 그곳에서 친형 프란시스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재회 당시 친형 프란시스는 이미 번듯한 제작사를 소유하고 있는 유명 영화인이었으며, D. W. 그리피스 등과 함께 할리우드의 손꼽히는 실력자 중 하나였다. 그 시기에 존 포드는 형의 도움을 통해 허드렛일부터 차근차근 영화 일을 시작했고, 총감독이 술에 취해 출근하지 못한 1917년의 어느 날, 얼떨결에 임시감독직을 맡은 것을 계기로 전문감독의 길을 걷게 되었다.


 둘 다 영화의 발명 전후로 태어났고, 할리우드가 형성될 즈음에 데뷔했다.(포드 1917년/히치콕 1922년) 그리고 무성영화의 황혼이 다가올 때까지 영화언어를 갈고 닦았다. 존 포드는 그리피스와 무르나우의 추종자로서 그들의 기법을 훔치기 위해 힘썼고, 알프레드 히치콕은 유럽과 가까운 영국에서 활동한 만큼 러시아의 몽타주 기법까지 곁들여 익히고 또 익혔다. 마냥 싸게 많이 찍는 걸 선호했던 무성영화 시절 제작 시스템은 그들에게 있어 더없이 좋은 연습장소였고, 수련의 시간은 퍽 넉넉했다.


 무성영화가 사라진 후에도 정점을 향한 그들의 여정은 계속됐다. 다른 여러 감독들도 이 여정의 길까진 도달했으나, 그들과 달리 존 포드와 알프레드 히치콕은 그 여정의 끝에 도달해 무언가 깨달은 듯 보인다. 그들은 무엇을 깨달았을까.

 

 


4. 目


 대사가 없던 시절을 겪었기에 포드와 히치콕은 영화가 지닌 순수한 시각적 쾌감을 알았다. 소리의 등장으로 영화 만들기는 쉬워졌지만 그들은 그에 안주하지 않고 어떻게든 이미지로, 말이 아닌 행동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려 노력하였다.

 

 하지만 과연 그뿐이었을까. 그저 무성영화처럼 대사보단 이미지에 집중해 영화를 만들어 위대하다면, 대사 없는 영화를 찍은 그 모든 이들도 '거장'이라는 칭호를 받아야 되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미지를 다룬 것 이외에 포드와 히치콕이 위대한 이유는 무엇인가? 움직임만 찍은 감독들과 그들은 어떻게 구분되는 것일까? 질문이 여정의 갈림길이 되는 이때, 기원은 또 다시 불려온다.

 

 


 1918년 여름, 러시아 모스크바였다. 이론가 레프 쿨레쇼프는 자신의 학생들과 함께 한 가지 실험을 설계했다. "전혀 상관없는 두 쇼트를 이어붙이면 어떤 심리효과가 날까?" 실험은 곧바로 행해졌고 서로 상관없는 쇼트가 앞뒤로 붙여졌다. 탁자 위의 음식과 무표정한 얼굴, 관에 누운 아이와 무표정한 얼굴, 누워있는 여자와 무표정한 얼굴.

 


〈Kuleshov Effect〉


 분명 아무 상관없는 쇼트들이었다. 헌데 그들이 서로 만나자 뜻하지 않은 화학작용을 내뿜기 시작했다. 분명 모두 똑같은 남자의 얼굴이었는데도 음식과 만나자 '배고픔'이 되었고, 아이와 만나자 '아버지' 내지는 '보호자'의 역할이 부여됐다. 그날, 쿨레쇼프와 학생들은 미지의 영역을 개척하였다. 이 미지의 영역은 곧 '쿨레쇼프 효과'라 불리며 연구의 대상이 되었고, 훗날 러시아를 대표하는 영화 이론 '몽타주 이론'의 씨앗이 되었다. 실험 당시 학생들 중에는 에이젠슈타인, 푸도프킨, 지가 베르토프 등이 있었는데, 이후 그들은 각자의 해석에 따라 그 효과를 발전시켜 나아갔다.


 위 역사적 사실과 관계없이 의문이 하나 생긴다. "왜 하필 사람의 얼굴이었을까?" 음식과 칼을 연결할 수도 있었고, 아이와 의자를 연결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왜 널리고 널린 것들 중에서 '클로즈업된 얼굴'을 각 쇼트실험의 분모로 삼았던 걸까?


 이 의문을 풀기 위해 나는 이곳에서 또 하나의 실험을 제안한다. 실험은 간단하다. 쿨레쇼프가 이미지를 시간 순서로 직렬연결한 것을 뒤집어, 나는 이미지를 공간 순서로 병렬연결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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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를 보자마자 눈에 띄는 것들이 몇 개 있을 것이다. 꽃, 1815년, 토성, 마테호른, 십자가... 여기서 질문 하나, 저 중에서 가장 '생명력'이 느껴지는 이미지는 무엇인가? 저 멈춰진 사각형 속에 시간이 흐르는 순간 움직일 것 같은 모습은 어떤 것인가? 나는 '사람의 얼굴'이 그 답이라 생각한다.


 왜 하필 사람의 얼굴일까. 다른 것에서도 미약하게나마 움직임이 있을 터인데 도대체 왜 '사람의 얼굴'에서 생명력이 느껴진 걸까. 답은 뻔하지 않나, 사진을 보는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를 설명하는 데엔 복잡한 이론이나 철학적 개념 같은 것들은 필요치 않다. 그저 피와 살과 뼈에 새겨진 우리의 본능을 기억하자 - 사람은 사람을 본다. 눈치를 보더라도 사람을 보고, 대화를 해도 사람을 보며, 일상 속에서 항상 사람을 본다. 물론 우리는 사물도 보고 동식물도 본다. 허나 사람은 사람을 볼 때 가장 몸이 긴장하고 마음이 반응한다. 취미나 직업과 같은 고차원적인 관심사를 거론하는 게 아니다. 무언가를 한눈에 보았을 때, 우리의 본능이 어디로 향하는 지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그 '사람'이라는 것 안에서도 우리는 특히 복잡다단한 외피인 '얼굴'로 우리 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향한다. 이미지 속 휴대전화를 쥔 손과 얼굴을 놓고 볼 때, 어느 것이 더 생명력이 느껴지고 감정을 일으키는가? 답은 이미 나와있다.


 사람은 사람을 보고 얼굴을 본다. 그 사람의 외모를 판단하든 하지 않든, 사람의 얼굴은 사람의 정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굴 중에서도 어디를 보려할까? 두번째 즉석 실험이다. 다음 이미지들 중 어떤 이미지가 유별나게 이질적인가? 어느 이미지가 가장 생기없게 느껴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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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의 얼굴에서 중시 여겨지는 입, 코, 눈을 각각 하나씩 제거한 이미지다. 입이 없는 이미지는 마스크를 한 것 같고, 코 없는 이미지는 일본만화의 이미지를 떠올리면 그럭저럭 익숙해지지만, 눈이 없는 이미지는 정말 친숙해지기가 힘들다. 눈 없는 이미지가 가장 이질적이다. 흔히 하는 말로, 눈 없는 얼굴은 정말 영혼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고로 최종적인 답이 나온다. 사람은 사람을 보며, 그중에서도 사람의 '얼굴'을, 그중에서도 '눈'을 보려 한다. 그리고 그 눈의 유무는 영혼의 유무로까지 이어진다. 눈이 왜 '영혼의 창'이라 불리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진짜로 사람의 눈은 영혼의 창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즉 눈은 보기 위한 기관이자, 동시에 보여지기 위한 기관이다. 눈은 그 자체로 카메라이자 스크린인 셈이다.


 '눈'이 지닌 주체성, 혹은 영혼의 성질은 무의식 중에 영화언어를 활용하고 받아들이는 우리의 감각을 지배하고 있다. 다음은 그 예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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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 〈007 스카이폴〉, 〈닥터 지바고〉, 〈보스턴 교살자〉,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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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 〈싱글맨〉, 〈현기증〉, 〈케빈에 대하여〉


 눈과 입이 카메라에 집중되는 장면들만 포착해 나열해보았다. 그림자 혹은 프레임으로 닫힌 눈은 얼굴 대부분이 가려져 있는데도 '그 인물'이라는 주체성과 정체성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이에 비해 입만 나오는 장면은 타자화돼있으며, 뜨거운 피가 흐르는 몸의 일부가 아닌 물체의 일부분처럼 느껴지고, 그 직후에 이어질 행동이나 말을 예측하기가 힘들다. 영화 속에 나오는 사람을 볼 때에도 사람을 보는 우리의 감각은 변치 않는 것이다.


 비현실적인 장르의 영화에서도 눈이 '영혼의 창'이라는 성질은 변하지 않는다. 다음은 그 예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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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 〈닥터 스트레인지〉, 〈엑스맨: 아포칼립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스타워즈: 시스의 복수〉

 

 예시의 인물들(혹은 물체)은 작품 속 설정으로 인해 눈이나 눈 주변이 정상과 다르게 변한 것이다. 사실, 그들의 몸이나 심경에 변화가 생겼다는 걸 굳이 눈으로 보일 필요는 없다. 혈색이 바뀌거나, 겉으로 보이는 몸 어딘가에 보기 힘든 상처가 생긴다든가 하는 게 차라리 더 그럴듯 하다. 현실에서는 변해봤자 몸의 어딘가가 변하지, 눈이 변하는 모습을 보기란 불가능에 가까우니까. 그런데도 예시의 인물들은 눈이 변하였고 우리는 그 눈을 통해 인물의 정신을 유추한다. 외부에서 오는 배움으로서의 관상학이 아닌, 우리 안에 선천적으로 담긴 감각의 관상학이 발휘된 까닭이다.

 

 위 이미지에 포함된 조금 특이한 사례로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HAL 9000'이 있겠는데, 이는 분명 사람이 아닌 컴퓨터로 등장하는데도 '눈' 역할을 하는 붉은 빛이 표면적 상징으로 등장한다. 손이나 입, 코의 역할을 하는 기관이 아닌, '눈'의 역할을 하는 기관이 그의 외피이자 얼굴이다. 그리고 그 '얼굴 없는 눈'에 우리는 쉽게 익숙해진다.


 (예외적인 '신체변형' 인물로는 〈해리 포터〉 시리즈의 '볼드모트'가 있겠다. 그는 눈이 아닌 털과 코가 없는 것으로 정상과 구분되나, 그의 눈은 영화 내내 변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변론하자면, 태생부터 볼드모트는 사악했고 오직 몸만 저 자신의 악행으로 얼룩졌기에, 눈이 아닌 코와 털이 변한 것(없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즉 영혼이 크게 변한 적이 없으니, 눈이 변할 일이 없었단 거다. 꽤 그럴듯한 변론이지만, 내가 해당 시리즈의 창작자가 아니므로 자세한 내막은 알 길이 없다.)


 이제 답을 얻을 수 있는 힌트들이 모두 모였다. 다시 쿨레쇼프의 실험으로 돌아가자. 관 속의 아이와 연결된 무표정한 남자의 얼굴을 다시 불러와보자. 그 얼굴을 보고 '아버지의 역할이 부여됐다'고 표현했는데, 어떻게 이런 해석이 나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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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관없는 두 쇼트를 이었을 때 우리는 주로 '충돌한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허나 이는 두 쇼트의 의미가 모두 육중하고 그 연결이 과격한 효과를 발휘할 때 쓰임직한 표현이지, 무표정한 남자와 관에 누운 아이가 만났을 때 사용할 것은 아니다. 게다가 '충돌했다'라는 것엔 '상호성'이 전제돼있기에, 무미건조한 정보로 읽히는 '아이 쇼트'와, 감정적 해석의 대상이 되는 '얼굴 쇼트'를 모두 아우르기엔 모자른 표현이다. 예시의 두 쇼트는 충돌하는 게 아니다. '관 속에 누운 아이'라는 정보를 '무표정한 남자'가 받아 새로운 의미를 낳은 것이다.


 그렇다면 무표정한 남자는 아이와 어떤 의미로 연결되는 걸까? 어떻게 그는 '아버지'가 되는가? 그 둘이 '충돌한다'라는 어휘로 결합하지 않으면, 우리의 눈은 그 둘을 어떤 동사로 엮을까. 답을 얻어낼 힌트는 이미 주어졌다. 연결된 두 쇼트를 보았을 때 우리는 즉각적으로 남자가 아이를 '보고 있다'고 판단하게 된다. 이 둘은 아무 인과관계 없이 쿨레쇼프가 정한 시간순서에 따라 연결되었을 뿐, 그들이 같은 공간에 있는 건지조차 알지 못하는데도, 그 둘이 연결되는 순간 남자가 아이를 '바라보고 있다'는 착시가 발생하게 된다. 남자의 입이나 코가 아니라, 남자의 '눈'에서 쇼트의 뜻을 파악한 것이다.


 물론 이같은 직관적 해석이, 우리가 수많은 영화관람을 통해 쇼트와 쇼트를 분석하는 능력을 충분히 길러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쿨레쇼프 실험 당시의 사람들도 과연 우리와 같은 반응을 보였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무표정한 남자의 '시선'이 아이의 모습과 이어지기엔 앵글이 어정쩡하며 편집도 의도적이지 않으니까. 이 쿨레쇼프 효과를 목격한 학생들(에이젠슈타인, 푸도프킨 등)이 제각각 다른 방향으로 이 효과를 정의하고 활용한 것을 보면 굳이 남자의 '시선'에만 주목하진 않았다는 것이 드러난다. 하지만 우리는 그 세대로부터 수많은 세월을 흘려보냈고, 여러 영화인들에 의해 끊임없이 단련된 쿨레쇼프 효과의 정수를 맛보고 있다 - 바로 '시점 쇼트'의 탄생이다.


 시점 쇼트라는 것도 짚어보면 기이한 개념이다. 화면 안에 배우의 얼굴·목·어깨 등이 한꺼번에 담겨있어도 그의 두 눈이 어딘가 향하고 그 시선에 상응하는 대상이 존재하면, 그 화면은 '시점' 쇼트라 불리게 된다. 그 큰 화면에서 두 눈이 차지하는 크기라 해봐야 얼마되지도 않는데 말이다.


 영화는 무엇을 찍어야 하는가? 무엇을 보여줘야 하는가? 이미지를, 움직임을 보여줘야 한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사람'을 찍어서 보여줘야 한다. 사물도 필요하면 찍을 수 있지만, 결국 우리가 '영화'라고 부르는 유기체의 뿌리이자 기둥은 '사람'이다. 사람의 몸 중에서도 특히 '눈'을 찍어야 한다. 어딘가를 응시하는 사람의 눈을 찍어야 한다. 눈이야말로 쇼트에 영혼을 불어넣을 수 있는 유일한 피사체인 까닭이다.


 존 포드는 영화의 정수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가장 중요한 건 사람의 눈을 찍어야 한다는 겁니다.」6


 이로써 우리는 거장의 생각에, 영화의 정수에 한 발짝 더 다가간 것이다.


 그럼 영화에 사람은 안 나오고 사물만 주구장창 나오면 어떤 영화가 나올까. 내 생각에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가 그에 가장 근접한 영화가 아닌가 싶다. 이에 관해 조금 덜 알려진 담론을 소개하겠다. - 일반적으로 〈2001~〉은 영화사 최정점에 위치한 SF걸작으로 평가받는데, 일부 이름난 평자들은 이 영화를 좋게 평가하지 않는다. 혹평은 이 영화가 세상에 나올 적부터 있었다. 1960년대 후반, 〈2001~〉이 한창 사람들에게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놀라운 체험을 선사하고 있을 때, 존 사이먼·레나타 애들러 등이 나서서 영화를 혹평했고, 그 유명한 앤드류 새리스는 화끈하게 "재앙(disaster)"라는 표현을 쓰며 영화를 비판했다. 그런데 우연찮게도 〈2001~〉을 비판한 이들은 '원로 평론가'라 불리는 부류였고, 그들의 혹평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젊은 평자와 관객들에게 '꼰대'라는 인장이 찍혀 무시되었다. - "꽉 막힌 어른들의 평가를 진취적인 젊은이들이 뒤집었고, 그렇게 영화는 역사가 되었다." - 아름다운 이야기다. 하지만 절반만 맞는 이야기다. 그 '원로 평론가'들이 어떤 논리로 〈2001~〉을 혹평했는지 조금만 살펴보면, 역사에서 승리한 것처럼 보이는 젊고 열린 시각이 사실은 일방적인 간과였음을 알 수 있다. 〈2001~〉를 혹평한 원로 평론가의 대표주자, 폴린 카엘은 영화를 평하며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사람보다 사이비과학과 영화제작기술이 예술가에게 더 중요해지면, 과연 예술은 가능한가? (그것을 과연 예술이라 부를 수 있는가?)」
 {원문: Is a work of art possible if pseudoscience and the technology of movie-making become more important to the 'artist' than man?}


 이 문장과 함께 쓴 표현들을 보면, 폴린 카엘은 이미 마음 속에 질문에 대한 답을 내린 것처럼 보인다. - "예술로 가장한 쓰레기(trash masquerading as art)", "놀랍도록 부족한 상상력(monumentally unimaginative)"...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왜 이런 평가를 받았을까? 근거를 드러내고 결론만 말하자면, 진짜 말그대로 영화가 '사물만 주구장창 보여줬기 때문'이다. 앞에서 다룬 '아이와 무표정한 남자'를 되짚어보자. 아이는 해석의 대상이 아니다. 아이의 표정을 관찰하기엔 화면이 너무 흐리고, 아이보다 앞서 제시된 상황이 없어 아이가 나오는 쇼트는 말그대로 무(無)상황이다. (억지로 상황을 이끌어내봤자 관이 주는 죽음의 이미지 뿐이다) 따라서 해석이 불가능한 게 아니라, 해석할 게 따로 없는 빈 쇼트인 것이다. 이 쇼트로 관객이 얻을 것은 '아이'라는 무미건조한 정보 뿐이다. 뒤이어 등장하는 무표정한 사내의 얼굴은 이 건조한 정보를 건네받아 '상황'이 된다. 우리의 눈은 재빨리 앞뒤를 연결지어, 있지도 않는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그를 '아버지' 내지는 '보호자'로 판단하는 것이다. 단순한 사물로 나온 '아이'만으로는 이러한 효과가 발생하지 않는다. 감정 또는 심리적 효과가 발생하려면 결국 '사람'과 '눈'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쿨레쇼프는 음식과 칼을 연결할 수도 있었고, 아이와 의자를 연결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하지 않았다. 무미건조한 정보를 연결해봤자 아무 작용도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 까닭이다. 우리는 그 사례를 이미 보았다. "농구공, 꽃, 1815년, 토성..." 별 다른 뜻 없이 그냥 나열된 이미지들일 뿐이었다. 그곳엔 사람이 사람을 볼 때 발생하는 감각의 드라마도 없고, 파고들 만한 사상도 없다. 정성일 평론가는 〈2001~〉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스탠리 큐브릭은 기술문명의 황홀한 상상력에 마치 나르시시스트처럼 빠져 든다. 문제는 그 기술문명의 상상 속에 별다른 철학이 없다는 것이다.」7


 사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철학이 없기 때문에 대단한 영화라 볼 수도 있다. '이야기'나 '심리'로 읽힐 만한 요지가 영화에 전혀 없으니, 영화를 보는 관객은 어떻게든 머리를 쥐어짜면서 관람하게 되고, 한 영화를 보았어도 관객마다 얻은 답이 완전히 다르게 나오지만, 끝내 명확한 정답은 나오지 않게 된다. 즉 답이 없기 때문에 뭐든지 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2001~〉을 미래 다큐멘터리라 이해하든, 혹은 관능적인 포르노로 읽든, 뒷받침되는 논리만 충분하면 무엇이든지 정답이 되는 것이다. 〈2001~〉가 미국에서 개봉했을 당시,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 모두가 극찬했다는 일화도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가 된다. (보수는 '과학기술'에 혹해, 진보는 '초월적 메세지'에 혹해 극찬했다고 한다) 그래선지 안목 있는 사람들은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가 왜 훌륭한지 논할 때 절대 '심오한 철학' 때문이라 하지 않는다. 다음은 허문영 평론가의 말이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위대성은 장황한 형이상학이나 45년 전 영화라고 믿기 힘든 장대한 스케일과 경이로운 세공술의 프로덕션 디자인에 있는 게 아니라(물론 그것도 훌륭하지만), 무중력 공간에서 완전히 새로운 영화적 리듬을 창안했다는 데 있다.」8


 그래도 난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을 좋아한다. 그 완벽주의를 좋아하고 우아한 음악과 느릿한 리듬을 사랑한다. 누군가 이 영화를 욕하면 당장 나서서 변호할 것이다. 허나 〈2001~〉가 영화사 최정점에 있느냐고 물었을 때 자신있게 '그렇다'고 말하긴 힘들겠다. 〈2001~〉이 주는 경외감의 비밀을 알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사람이 중요하고 또 눈이 중요하단 사실을 너무 오해하진 말았으면 한다. 영화에서 중요한 '눈'이라는 것은 물리적·의학적 생체기관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다음 이미지들을 봐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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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 〈레퀴엠〉, 〈현기증〉,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 〈석양의 무법자〉

 

 먼저 왼쪽 위 이미지를 보자. 부수적인 외피를 모조리 제외하고 '눈'만 촬영한 것인데, 저 이미지에서 어떤 생명력이나 감정이 느껴지는가? 나머지 이미지에도 같은 질문을 던져보자. 저 중에서 미약하게나마 감정이 느껴지는 이미지는 어떤 것인가? 내 딴엔, 위에 두 이미지는 감정이 없는 것 같고 아래 두 이미지는 감정이 있는 것 같다. 그 차이는 간단하다. 위에 두 이미지는 배우의 눈을 사전적으로 포착하였다. 그 모든 얼굴장식들을 뒤로 하고 오로지 눈'만' 찍은 것이다. 반면 아래에 두 이미지는 눈과 눈 주변을 모두 찍었다. 오른쪽 위에 이미지도 눈 주변까지 포착하여 그 범주에 드는 것 같지만, 애석하게도 눈에 초점이 없다.


 즉 영화가 사람의 눈을 찍어야 한다는 것은 기관으로서의 '눈'을 말하는 게 아니라, 카메라 앞에 선 배우의 '눈빛'을 찍어야 한다는 것이다. 눈 자체엔 흰자와 검은 눈동자 뿐이지만, 살아있는 사람의 눈에선 형언할 수 없는 빛이 발한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는 '영혼' 내지는 '눈빛'이라 부르는 것이다. 카메라는 그를 포착해야 한다. 눈빛에는 무언가를 하거나 이루고자 하는 욕구가 담겨있으며, 방향이 있다. 배우가 눈에서 내뿜는 방향은 어쩔 수 없이 대상을 가지게 되는데, 이 눈의 방향과 보는 대상이라는 시선의 정수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사건이 발생하고 반응이 나타나며 결국엔 이야기가 된다. 우리는 그를 '영화'라 부르는 것이다.


 배우들의 눈으로만 영화가 완성돼 살아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또 다른 눈이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질문은 영화인의 역할에서 끌어낸 질문이었다. 영화계에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만 있는가? 아니다. 영화를 보는 사람들도 있다. 바로 우리, 관객이 있어야 영화가 완성된다. 그 아무리 걸작이라도 필름통이나 디스크에 담겨 상영되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보여지지 않으면 그 영화는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영화는 내적으로도 눈이 필요하고 외적으로도 눈이 필요하다. 영화는 눈빛을 통해 뿌리 내리고 가지를 치며 열매를 맺는다. 눈빛은 영화를 통해 배우-카메라-필름-영사기-스크린-관객 순으로 시공간을 넘어 전달된다. 이것이 바로 각본으로서의 이야기가 스며들기 전에 이미 존재했던, 영화의 태생적 성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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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다', 우리 얼굴에 뚜렷히 박힌 두 눈을 뜨고 만물을 본다. 그 대상은 사물이 될 수도 있고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그 무엇을 보든 우리의 눈은 어딘가를 향하여 본다. 방향이 있는 것이다. 그 방향은 길을 만들 것이고 그 길은 직선이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를 시야가 만든 선, '시선'이라 부를 수 있을 테다. 시선은 불특정한 주변을 탐색한 후, 원하는 것을 정하여 그리로 향할 것이다. 고로 화살표는 시선에 대한 가장 단순한 기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시선은 주변에 있는 어느 것에라도 향할 수 있다. 그래도 시선이 가장 큰 화학작용을 뿜어낼 때는 역시나 사람을 향할 때이다. 그럼 사람이 사람을 볼 때, 그 대상이 되는 사람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그 감성이 달라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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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을 보는 첫번째 경우의 수, 서로가 서로를 보는 경우다. '대면'이라고 볼 수 있는 이 시선의 일치는, 양자간의 친밀함이 전제되지 않으면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우리의 기억을 반추해보자. 누군가와 서로를 지긋이 볼 때 우리는 어떤 상황이었으며 어떤 감정이었는가. 그 사람은 당신에게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 경험을 지금 당장 모조리 열거할 필요는 없다. 그저 그때의 진실된 감성을 되새겨주길 바랄 뿐이다. 우리는 이같은 시선의 일치를 동사로 '바라본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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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을 보는 두번째 경우의 수, 시선이 일치하지 않고 어긋나는 경우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겐 너무나 익숙한 시선일 것이다. 특히 도시에 사는 이들에겐 굳이 설명할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될 것이다. 매일 길을 나설 때마다 낯선 사람들과 같은 공간에 있는 경우가 허다하며, 눈을 조금만 돌리면 어긋난 시선이 만들어질 테니까. 우리는 이같은 시선의 불일치를 '훔쳐본다'라는 말로 묶을 수 있을 것이다.


 '바라봄'과 '훔쳐봄'. 사람이 사람을 볼 때 생길 수 밖에 없는 두 동사다. 그리고 "존 포드 vs 히치콕 (1부)"을 읽은 사람들은 그 내용이 떠오를 것이다. 그렇다, 이 두 동사는 각각 '존 포드'와 '알프레드 히치콕'이라는 이름으로 치환된다. 여기서 그 내용을 다시 곱씹어보도록 한다.

 

 


5. 그들의 시선

 

 아무래도 남성 감독들이다보니, 포드와 히치콕의 영화에선 주인공이 남성인 경우가 대다수인데, 이 남성 주인공이 여주인공을 볼 때 어떤 시선을 취할까. 놀랍게도, 감독에 따라 주인공의 시선은 일정하다. 포드의 남주인공은 여주인공을 '바라보며' 말하거나 행동한다. 그 상황이 여주인공과의 결투가 될 수도 있고, 갑작스러운 사랑고백이 될 수도 있다. 여자에게 무슨 말을 할까 수줍게 고민하는 모양이 될 수도 있고, 들끓는 분노 속에서 욕을 내뱉는 태도일 수도 있다. 허나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 어떤 분위기 속에서도 존 포드의 남자는 여자를 바라본다. 바라본다는 것은 상호성을 요구하므로, 포드의 여자는 마찬가지로 남자를 바라본다. 그렇게 포드의 영화에선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의 일치를 끝까지 잃지 않는다. 그 시선의 합일 속에서 포드는 사람 속내에 있는 그 모든 감정을 연출하고, 희로애락을 지휘한다.


 반면 히치콕의 남주인공은 여주인공을 '훔쳐보며' 말하거나 행동한다. 그렇다고 항상 남자만 훔쳐보는 것은 아니다. 남자가 몰래 하는 행동을 여자가 되려 훔쳐보는 경우도 있다. 이 '훔쳐본다'는 것은 상대방의 은밀한 행동을 관찰한다는 의미도 되지만, 시선의 불일치를 의미하기도 한다. '히치콕 키스'라고 통칭할 수 있는 히치콕 영화 속 연인들의 밀접한 애정행각들을 살펴보면 그 의미가 제대로 보인다. 서로 사랑하는 듯한 남녀가 포옹하고 키스하지만, 정작 그들의 눈은 다른 곳을 향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육체성에서 비롯된 강력한 애호의 감정과, 상대방을 배반하려는 듯 보이는 시선의 교활한 감정이 충돌하여 놀라운 긴장감을 자아낸다. 그렇게 히치콕은 단일 상황 속에서도 애증을 뒤섞어 연출해내는 재능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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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드의 〈젊은 날의 링컨〉 / 히치콕의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영화 속 인물의 행동과 시선이, 감독의 개인적 경향에 따라 일정한 패턴을 보인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들이 카메라를 사용할 때에도 같은 시선을 띈다는 것이다. 그들의 카메라엔 인격이 들어있다. 예를 들어, 포드의 카메라는 배우들을 바라보고 상황을 바라본다. 영화 속 인물들의 언행을 마치 친구나 가족의 언행을 바라보듯이 본다. 포드의 카메라엔 애정과 우정이 서려있는 것이다. 반면 하치콕의 카메라는 배우들의 행동과 상황을 훔쳐본다. 반대편 건물에서 망원경으로 몰래 상황을 들여다보듯 주인공들의 언행을 본다. 히치콕의 카메라엔 의심과 음흉함이 깃들어있는 것이다.


 1부에선 여기까지 언급하곤 그 이유를 제대로 이끌어내지 못했다. 이유라고 읊은 것은 그들의 영화 속 주인공들이 카메라에게 어떤 피사체로 다가오는지에 대한 것이었지, 근본적인 효과, 즉 왜 포드와 히치콕은 모두 '시각'의 감독이었는데 그 감성이 달랐느냐에 대한 답이 되진 못했다. 이후 몇 번의 사유를 거친 후에야 그나마 정답에 가까운 결론에 이르게 되었는데, 여기서 그를 토해내볼까 한다.


 답을 하기 위해선 우선 범위를 좁혀야 한다. 그들 영화에 나오는 모든 상황에 대해서가 아니라, 끔찍하고 반인륜적인 상황만 추려내서 사유해야 답에 이를 수 있다. 설명의 용이함을 위해 예화를 한 가지 가져오겠다. 포드의 〈웨건 마스터〉를 탐구하는 중에 알게 된 일화로, 비록 성경에 있는 예화지만 나의 사유 속에서 포드와 히치콕의 차이를 구분지어 주는 길잡이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기에, 여기서도 서슴없이 그를 참고하려 한다. 다음은 그 예화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에게 '다말'이라는 예쁜 누이가 있었는데, 다윗의 다른 아들 '암논'이 다말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다말은 아직 처녀여서 좀처럼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암논은 애만 태우다가 병이 나고 말았다. (중략)
 암논은 자리에 누워서 앓는 체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왕(다윗)이 문병 오자 청을 드렸다. "아버님, 누이 다말을 보내주십시오. 다말이 제 앞에서 빵 두어 개 손수 구워주는 것을 받아먹고 싶습니다." 다윗은 다말이 사는 궁으로 사람을 보내어 오라비 암논에게 가서 환자 입에 맞는 음식을 만들어주라고 일렀다. 다말이 오라비 암논의 궁으로 가서 보니 그는 정말 누워 있었다. 다말은 오라비가 보는 앞에서 가루로 반죽을 개어 환자가 먹을 빵을 빚어 구워냈다. 그리고 구운 빵을 오라비 앞에 차려놓았으나 암논은 먹을 생각은 하지 않고 방에 있던 사람들을 밖으로 나가라고 하였다. 시중들던 사람들이 다 물러가자 암논이 다말에게 말하였다. "그 빵을 이 방으로 가지고 들어와서 네 손으로 먹여다오." 다말이 손수 만든 빵을 들고 오라비 암논의 침실로 들어가서 그에게 먹이려고 다가가자 암논은 다말을 끌어안고 같이 자자고 했다. "오라버니, 이러지 마십시오. 제발 나를 욕보이지 마십시오. 이 나라에는 이런 법이 없습니다. 이런 바보짓을 하지 마십시오. 제가 이런 수치를 어디에 가서 숨기겠습니까? 그러면 오라버니는 이 나라에서 바보가 될 것입니다. 이제라도 아버님께 저를 달라고 말씀해 보십시오. 거절하시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애걸해도 암논은 듣지 않고 억지로 다말을 눕히고 욕을 보였다.
 그리고 나서는 다말이 몹시 싫어졌다. 욕을 보이고 나니 마음이 변해서 전에 사랑하던 그만큼 싫어졌던 것이다. 암논은 다말에게 "어서 나가!" 하고 소리쳤다. "오라버니, 너무하십니다. 이제 저를 내쫓으신다는 것은 방금 저에게 저지르신 일보다도 더 나쁜 일입니다." 하고 그가 말했지만 암논은 들은 체도 않고 시중 드는 하인을 불러 "이 계집을 내 앞에서 쫓아내고 문을 걸어라." 하고 명령하였다. 하인이 다말을 내보내고 문을 잠가버렸다. 다말은 시집 안 간 공주들이 입는 소매 긴 장옷을 입고 있었다. 다말은 머리에 먼지를 들쓰고, 걸치고 있던 장옷을 찢으며 손으로 머리를 감싸쥔 채 목놓아 울면서 돌아갔다.」9


 보다시피, 배다른 남매 사이에서 벌어진 기괴하고도 흉악한 사건에 대한 일화이다. 이 일화는 크게 세 단락으로 나눌 수 있는데, '암논은 다말을 사랑했다'는 발단 부분이 첫째, 다말이 암논에게 속아 침실까지 이동하는 과정이 둘째, 다말이 침실에서 내쫓기는 과정이 셋째이며, 특기할 만한 점으론 간음 장면 자체는 전혀 묘사되지 않았다는 게 있겠다. 대신 둘째와 셋째 단락 사이에 '욕을 보였다'라는 표현으로 간음을 에둘러 표현하고 있다. 고로 사건의 단초가 되는 첫째 단락을 제외하면, 일화는 크게 둘째 단락과 셋째 단락으로 나뉜다.


 이 텍스트를 포드와 히치콕은 과연 어떻게 연출할까. 포드는 둘째 단락을 아예 삭제하고 셋째 단락만을 연출할 것이다. 이것은 내 개인적인 추론이 아닌 실제로 포드가 취한 방법으로, 포드 스스로 가장 맘에 들어했다는 작품 〈웨건 마스터〉에서 유사한 장면이 등장한다.


 인디언 부족과 하룻밤을 같이 보내게 된 주인공 일행들, 밤 중에 모닥불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작은 축제를 벌인다(1,2). 그러다 난데없이 인디언 소녀가 일행의 리더 앞으로 뛰어와(3) 흙먼지를 들쓰고 옷을 찢으며 인디언 말로 절규한다(4). 소녀와 함께 온 인디언 남자는 옆을 가리키는데(5), 그곳에서 건달이 여러 사람에게 붙잡혀 끌려오고 있다(6). - {끌려온 백인 남성을 '건달'이라 부르는 까닭은, 수많은 이전 장면들에서 그가 계속해서 음흉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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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달과 인디언 소녀 사이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영화에선 나오지 않는다. 단란하게 축제를 벌이는 중에 '느닷없이' 인디언 소녀와 건달이 나타나 위 장면들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허나 그것이 얼마나 추례한 일이었는지 우리는 짐작할 수 있으며, 그 분노는 고스란히 범인으로 지목된 건달에게로 향한다. 포드는 셋째 단락의 처절함을 묘사하여 사건 전체를 요약·정리한 것이다. 둘째 단락이 삭제된 것이다.


 포드는 범죄의 과정이나 범죄 자체엔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범죄의 여파가 얼마나 끔찍하고 참담한지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진다. 활활 타오르는 폭력과 범죄의 불길이 아닌, 그것이 다 타고 남은 재에 집중한다. 굳이 〈웨건 마스터〉가 아니더라도 쉽게 볼 수 있는 포드만의 특징인데, 죽음을 대할 때에 유난히 두드러진다. 그의 영화에선(특히 서부극에선) 사람이 죽어도 절대 그 시신을 보여주지 않는다. 시체를 카메라로 찍어서 볼거리로 만들겠다는 생각을 결코 품지 않는다. 그 대신에 죽음에 대한 살아있는 사람들의 반응을, 그 슬픔과 노여움을, 그리고 죄책감을 보여준다.


 반면 히치콕은 위 성경 속 예화에서, 둘째 단락에 주목한다. 끔찍한 일이 벌어지진 않을까 노심초사한 상황 속에서 주연들이 과연 어떻게 행동하고 반응하는지를 주목하고, 보는 이로 하여금 손에 땀을 쥐게 만든다. 그렇다, 둘째 단락을 선택한 순간 서스펜스는 자연스레 뒤따라오는 것이다. 이 둘째 단락에 대한 가장 이상적이고 대표적인 사례론 〈이창〉이 있을 것이다. 〈이창〉의 주인공은 끔찍한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불안해하는 관찰자이자, 동시에 끔찍한 일을 벌이는 주동자로서, 예화에서 나온 암논과 다말을 모두 합쳐놓은 것 같은 복합적인 면모를 보인다.


 히치콕은 범죄를 대하는 태도가 포드와 정반대다. 그의 영화는 아예 전체 줄거리가 범죄과정인 경우가 다수이며, 주인공이 아무리 선역으로 등장하여도 타인의 범죄를 막기 위해 되려 범죄를 벌이는 모순된 행동을 한다. 그 죄의 순환고리는 거미줄이 되어 히치콕의 주인공을 휘감고, 주인공은 자신의 죽음과 대면하는 상황에 처한다. 포드가 죽음 이후의 감성을 다룬다면, 히치콕은 죽음 직전의 감정을 다룬다. 시체를 다루는 방법도 포드와 전혀 다르다. 포드는 시체를 기피하는 반면, 히치콕은 시체에 애호를 보인다. 그것은 과거에 대한 죄책 때문일 수도 있고(〈현기증〉의 사례), 끔찍한 광경을 직접 목격하고 싶은 '불구경'의 심정 때문일 수도 있다(〈싸이코〉, 〈새〉의 사례). 그 무엇이든 간에, 히치콕은 금기 위반의 아슬아슬한 감정을 계속해서 다루려고 한다.


 포드와 히치콕의 서로 상반된 태도는 아이러니하게도 둘 모두를 죽음 너머의 세계로 향하게 하였다. 그들은 동시대 감독들과 비교하여 유난히 '유령'에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그에 대한 접근법은 천지 차이였다.


 유령에 대한 히치콕의 접근은 다분히 심리적이고 강박적이다. 실제로 존재하던 사람이 죽어서 유령이 되었다기 보다는, 불가사의한 현상을 이해하거나 상황을 조작하려는 중에 사람들 머릿속에서 유령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유령은 사람들의 심리를 먹고 자라 현실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거대한 존재로 변화한다. 그리고 불쌍한 히치콕식 주인공들은 그 유령에 얽매여 점점 행동이 제약되는 상황으로, 종국엔 비좁고 가파른 공간과 상황에 갇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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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치콕 영화에서의 유령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 〈이창〉,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새〉, 〈싸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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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드 영화에서의 유령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 〈젋은 날의 링컨〉,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황색 리본을 한 여자〉, 〈황야의 결투〉

 

 이에 반해, 유령에 대한 포드의 접근은 초월적이고 가정적이다. 포드의 영화 속 주인공들은 사랑하는 이의 묘비를 보며 가슴 속에 쟁여놓은 애정어린 이야기를 술술 털어놓는다. 마치 묘비가 사랑하던 이의 얼굴인냥 바라보고 배시시 웃으며 대화한다. 우리는 그 장면들에서 묘비가 꼭 사람처럼 느껴지는 따스한 공기를 맡게 되는데, 묘비조차 '바라본' 포드의 숙련된 시야 때문이 아닐까 짐작하게 된다.


 몇몇 상황과 테마로 한정지어 포드와 히치콕의 차이가 어디서 오는지를 설명했다. 허나 이는 거의 모든 상황과 장면을 논외하여 이끌어낸 결론인지라, 내놓고서도 흡족하지가 않다. 그렇다고 그 모든 상황들을 조목조목 '바라봄/훔쳐봄' 도식과 대응시키봤자 동어반복을 수차례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혹 '바라봄과 훔쳐봄'이라는 시선의 도식을 넘어서는, 또 다른 발상이 필요한 건 아닐까?


 1부에서 포드와 히치콕을 각각 '바라봄'과 '훔쳐봄'으로 정의하고 그 자장 안에서 두 거장을 탐구했는데, 1부를 마치고서 한참이 지난 후에 그것이 '눈' 중심의 일정한 패턴이며, 또 다른 곳에도 패턴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아무리 눈이 영화에서 중요하다지만 2시간 내내 눈만 나오는 영화를 찍을 순 없는 노릇 아닌가. 그렇다면 눈 이외에 영화 속 요소들을 논의에 포함시키면 어떻게 될까? 이 질문을 던지고서야, 그들의 영화는 구조와 형식, 내용과 쇼트가 모두 일정한 패턴으로 형성되어있어, 전체구조와 세부구조가 같은 모양새를 띄어 일종의 '프랙탈 구조'를 형성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가 돼서야, 두 거장의 세계를 탐험하는 이 여정 속에서, '눈'을 넘어선 '영화'와의 접점을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6. 고깔과 숲

 

 ※ 이하 내용에선 꽤 많은 포드와 히치콕의 작품을 예시로 거론한다. 스포일러가 있는 것은 아니나, 아직 두 거장의 작품을 3~4편 이상 관람하지 않은 이들에겐 버거울 수 있으니 주의를 요한다.


 1부에서 미완된 내용이 또 하나 있었다. 왜 포드의 영화 안에선 모뉴먼트 밸리의 암석봉들이 사람처럼 느껴지냐는 것이었다. '모뉴먼트 밸리를 영화의 또 다른 주역으로 삼았기에 그러하다' 라고 답했지만, 충분한 대답이 아니었다. 1부에서 예시로 꺼낸 뭉크의 〈병실에서의 죽음〉도 도로 생각해보니 틀린 예시였다. 뭉크의 그림이 주는 감상은 사물이 사람처럼 느껴지는 게 아니라 사람이 사물처럼 느껴지는 것으로, 포드보다는 히치콕에게 어울릴 법한 예술적 직유였다.


 밸리의 암석봉에서 사람 느낌을 받았다는 명제를 뒤집어서 생각해보았다. '포드의 영화에선 사람이 암석봉처럼 느껴지는가?' 그렇다, 명제의 역도 참이다. 그럼 모뉴먼트 밸리의 미학을 암석봉에서만 찾으려는 시도는 그릇된다. 탐구의 범위를 넓혀, 포드 영화의 청사진을 들여다 봐야 한다.


 존 포드의 표면적인 카메라 사용법을 돌이켜보자. 첫째, 그는 카메라의 이동을 제한한다. 그가 만들어내는 화면은 항상 고정된 프레임과 앵글을 유지하며, 카메라를 움직이는 순간은 항상 손에 꼽는다. 움직이더라도 피사체의 움직임에 따라 움직이기에, 그 정적인 상태는 평온하게 유지된다. 둘째, 포드는 사람의 얼굴을 절대 클로즈업하지 않는다. 클로즈업을 하더라도 항상 어깨까지 화면에 담으며, 눈만 클로즈업한 장면은 포드의 영화에선 절대 나오지 않는다. '눈'을 그토록 중시했어도 그는 얼굴과 몸짓의 조화를 항상 신경쓰며 찍었다.


 포드에 대한 논의는 반경을 넓힌다. 그는 눈을 찍을 때 얼굴에 있는 두 동그라미를 생각하며 찍지 않고, 표정과 몸짓의 조화까지 신경쓰며 찍었다. 포드 영화에서의 몸짓을 생각해보자, 헨리 폰다의 여유로운 움직임, 존 웨인의 강단있는 손짓, 워드 본드의 굵직한 어수룩함. 그리고 거기서 드러나는 눈빛까지 생각에 포함시켜보았다. 그때 포드 영화의 포괄적인 구조가 머릿속에 문득 떠올랐다. 바로 '숲'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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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 평평한 땅에 좌우로 주욱 늘어선 나무들의 집합. 말로 표현하기 힘들어 그림까지 준비해왔다. 왜 나는 이를 포드 영화의 전체적인 골격으로 떠올렸느냐, 답은 갈래로 나뉜다.


 우선, 포드가 애용한 이야기 구조가 '숲'과 같다. 그는 단일 주인공을 설정하여 사건들을 연속적으로 배치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영화는 항상 시퀸스 단위의 에피소드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에피소드들은 저마다 분위기가 다르다. 어떤 에피소드는 코미디 같고, 어떤 에피소드는 로맨틱하며, 어떤 에피소드는 스릴러와 같다. 때문에 포드의 영화를 보고나면 영화를 몇 편을 본 것 같은 배부름이 남게 되는데, 이를 도식화하면 숲과 같지 않겠는가? 러닝타임은 평평한 땅이 되고, 각 에피소드는 나무가 되어 매끈한 하나의 영화, 하나의 거대한 숲이 완성되는 것이다. 그의 영화가 기본적으로 군상극이라는 점도 '집단'이라는 성질에서 숲과 유사하다.


 또한 화면을 만들어내는 방식도 숲과 같다. 그의 화면엔 소실점이 없다. 포드의 원근법은 카메라와의 거리에 의한 것이 전부로, 화면 속 물체가 큰지 작은지로만 구분되지 소실점의 유무로 판단되지 않는다. 고로 그의 배경과 풍경은 항상 단조롭고 평평하며 1차원적이다(선형적이다). 화면을 가로지르는 굵직한 수직선이나 대각선이 존재하는 경우가 그의 영화에선 극히 드물다. 또한 열린 프레임을 싫어했다. 화면 틀에 물체가 걸리는 걸 싫어했다. 어떤 화면을 잡아도 '반드시'라고 할 만큼, 화면 틀 안에 인물과 사물이 분명히 들어와있는 걸 선호했다. 닫힌 프레임을 구사할 땐 프레임 근처에 수직 피사체를 주로 두어서 좌우 프레임과 조화를 이루도록 하였다. 그럼 상하 프레임은 어찌했느냐, 굳이 힘들이지 않아도 우리의 위 아래엔 항시 뭔가 있지 않은가. 그게 천장이든 하늘이든. 결론적으로, 그는 배경과 풍경은 평평하게 다루려 노력하였기에 항상 수평적 구도를 띄었고, 인물과 사물은 화면 안에서 좌우 프레임과 균형을 이루기 바랐기에 수직적 형상을 띄었다. 수평적 기반에 수직적 존재들, 정말 '숲'과 같지 않은가. 그의 카메라가 사람 눈높이를 절대 벗어난 적이 없다는 것도 이 특징들과 조응한다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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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을 세분화하여 나무로 보아도 포드의 특징은 간명히 드러난다. 그의 영화 속 배우들의 움직임엔 다른 영화에선 볼 수 없는 패턴이 있다. 포드의 영화 안에서 그들은 가슴에서 시작하여 발까지 이어지는 몸통-다리 부분이 크게 움직이지 않는다. 대신 팔과 머리를 자주 움직인다. 나무의 줄기에 해당하는 부분은 덜 움직이고, 나뭇가지에 해당하는 부분은 자주 움직이는 것이다. 주로 머리는 표정과 시선을 담당하고, 팔은 사건의 동사를 담당한다. 몸통과 다리는 인물의 상태가 비정상일 때, 혹은 정말 결정적인 장면일 때만 움직인다. 지금 당장 기억나는 예시는 다음과 같다. 〈분노의 포도〉에서 존 쿠알른이 몸을 숙여 흙을 매만지는 행동,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에서 나온 바닥에 분필로 빗금을 긋는 놀이의 행동, 〈황야의 결투〉에서 나온 헨리 폰다 기둥 스탭(?) 등. 〈분노의 포도〉의 행동은 격한 슬픔 속에서 나왔고,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의 행동은 숙취에서 나왔으며, 〈황야의 결투〉의 스탭은 수직의 다리가 수평으로 변하여 팔의 역할을 대신해, 관객에게 유머를 선사한다.


 몸통과 다리가 완전히 수평이 되는 순간도 몇몇 있는데, 주로 인물이 죽었을 때 이 구도를 취한다. 포드의 서부극에서 죽거나 치명상 입은 이들의 몸이 어떤 구도인지 살펴보라. 이 '수직/수평' 이분법에 따라 포드의 영화를 보면, 전에는 읽어내지 못한 속뜻이 읽힐 수도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젊은 날의 링컨〉에서 헨리 폰다가 나뭇가지의 쓰러짐으로 자신의 미래를 결정하는 장면이 있겠다. 이 '수평/수직' 이분법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운명을 장난스럽게 결정했을 뿐더러, 은연 중에 자신의 죽음까지도 그 나뭇가지로 결정했다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니 헨리 폰다는 포드의 영화에서 독특한 지위를 점하고 있다. 〈젊은 날의 링컨〉, 〈황야의 결투〉 등에서 보인 헨리 폰다의 흐느적한 움직임을 '삶의 수직, 죽음의 수평' 도식에 대입할 경우,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벌이는 아슬아슬한 곡예가 되기 때문이다. 〈젊은 날의 링컨〉은 유난히 더 그러하다. 이 영화에서 헨리 폰다는 계속 의자에 앉거나 무릎을 꿇는다. 그리고 그는 영화의 쇼트와 어울려 죽음을 풍긴다.


 포드의 영화에선 수직이 단순한 수직이 아니다. 그에게 수직은 삶이며, 존재이며, 균형이고 정의다. 그리고 또 하나, '눈빛'이다. 위에서 포드는 눈빛을 찍을 때 절대 눈만 찍지 않았다고 하질 않았나. 때문에 포드 영화 속 '눈빛'은 얼굴의 두 작은 동그라미를 벗어난다. 얼굴 속 두 구슬을 벗어난 '눈빛'은, 존 포드의 카메라를 만나 수직 물체에 깃든다. 두 다리를 쭉 뻗고 서있는 사람들, 지붕과 층계를 떠받히는 기둥들, 그리고 모뉴먼트 밸리의 암석봉... 때문에 나는 암석봉들에서 시선을 느끼고 인격을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암석봉들은 '바라본다'. 하늘을 바라보고 땅을 바라보며 인물들을 바라보고, 객석을 바라본다. 물론 포드는 서부극이 아닌 영화를 더 많이 만들었고, 그 영화들에선 암석봉이 나오지 않는다. 서부극 외 영화에서 간단하게 수직의 성질을 파악할 수 있는 요소로는 '연인의 사랑'이 있겠다. 아무래도 눈빛을 중시한 감독이라 그런지, 포드의 영화에선 연인의 마주봄이 키스보다 더 달콤하고 낭만적인데, 개중에서도 '첫눈에 반하다'라 부를 만한 상황에 주목하길 바란다. 사랑이 시작되는 그 순간엔 언제나, 포드의 남자들은 수직 구조물과 함께 였다. 〈역마차〉의 존 웨인은 그림자 드리운 벽과 함께 였으며, 〈황야의 결투〉의 헨리 폰다는 여관의 기둥과 함께 였고, 〈말 없는 사나이〉의 존 웨인은 이니스프리의 푸르른 교목과 함께 였다.


 포드의 영화에서 드러나는 '나무'의 성질은 또 있다. 진짜 나무엔 근육이 없다. 나무가 움직이려면 외부의 영향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쉽게 볼 수 있는 외부의 영향으론 바람과 비가 있겠다. 그렇다, 포드의 영화에선 바람과 비가 감정의 지휘봉 역할을 톡톡히 한다. 바람의 예시론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의 웨딩베일 정도가 충분하겠다. 비는 〈모호크족의 북소리〉, 〈말 없는 사나이〉, 〈황야의 결투〉, 〈도망자〉 등에서 줄줄이 내리며, 그것은 하늘의 울음이 되기도, 작심의 세례가 되기도 한다. 빛과 어둠도 나무를 움직이게 하는(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자연 요소다. 짙게 깔린 어둠 속에 빛이 내리쬐면 그곳에 숨어있던 나무가 고스란히 제 모습을 드러내는 법이다.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와 〈리오 그란데〉에서의 모린 오하라,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에서의 리 마빈 등을 보라.


 또 존 포드와 나무에겐 흙과 땅이 매우 중요하다. 그들에게 흙과 땅은 단지 '걷기 위한 밑바닥'이 아닌, 모든 것의 어머니이자 탄생의 원천이며, 과거와 미래의 교차점이고, 죽음의 고향이다. 포드는 땅을 사랑했다. 그곳에 깃든 거룩함을 숭배했다. 그래선지 그는 카메라를 들고 부모의 고향인 아일랜드를 향했고, 모뉴먼트 밸리를 향했다. 밸리의 암석봉들을 보라, 땅과 흙이 수직으로 솟아 사람을 굽어보니 이 얼마나 신비한가.


 숲이라는 집단과 나무라는 단독자를 연결지어 포드의 영화에 빗댈 수도 있다. 그 빽빽한 나무들 틈에서 한 나무만 다른 움직임을 보인다면, 본능적으로 그에 시선을 집중하게 될 것이다. '저 나무가 왜 저러지? 저 나무 아래에 나무꾼이 있나?' 포드가 특정 다수 안에서 주인공을 강조할 때도 같은 방식을 썼다. 〈나의 계곡이 푸르렀다〉에서 주인공이 교실에 처음 들어가는 순간을 보자. 긴장감이 역력하여 주인공은 뻣뻣하게 곧추서있는데, 교실에 앉은 학생들은 일제히 (누군가의 지시라도 받은 것처럼)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뒷문에 서있는 주인공을 본다. 그 화면을 보는 관객은 간편하게 주인공과 학생들을 구분할 수 있게 된다. 구로사와 아키라가 유일하게 포드에게서 물려받은 것 같은 이 집단과 단독자의 구분은 수직성을 기초하므로 역시나 나무와 숲 도식에 맞는다.


 그리고 또 하나. 포드는 꽃을 좋아했다. 그의 영화에서 빠짐없이 꽃이 나온 건 아니다. 하지만 서정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장면엔 주로 꽃을 넣었다. 정확히는 꽃을 건네는 행위를 넣었다. 그 꽃을 받는 사람과 관객은 꽃을 통해 애정이 흐르는, 묘한 감상에 젖게 된다.

 

 사실 꽃은 내가 말한 나무와 숲 도식과 (같은 식물이라는 점을 제외하곤) 별 연관이 없다. 그럼에도 꽃이라는 포드 영화의 공통점을 언급한 이유는, 그 꽃을 도식에 강제로 대입해도 포드의 뜻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숲 속의 꽃'. 정말 숲을 샅샅이 뒤지지 않으면 찾기 힘든 고귀한 존재. 역사 속에서 사라져가는 개인의 초상으로, 꽃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 운문인가. 포드의 인물들에게 이보다 더 어울리는 수사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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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드의 〈말 없는 사나이〉와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어려운 도식은 아니지만, 그래도 포드 도식의 원형을 찾기까지 꽤 힘든 과정을 거쳤다 치자. 그럼 히치콕의 도식은 어떨까. 히치콕의 도식은 도저히 못 찾을래야 못 찾을 수가 없다. 그냥 대놓고 보여준다. 바로 '나선원'(나선과 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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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나선원과 히치콕 영화의 구조를 대응시켜보자. 원의 가장자리는 이야기의 시작이다. 단일 주인공은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그러다 모종의 사건을 만나면서 그 궤도는 붕괴하기 시작한다. 그는 원의 가장자리를 벗어나 나선으로 돌입한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가장자리는 복구되지 않으며, 점점 주인공은 운명의 나선에 따라 사건의 중심으로, 원의 중심으로 향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 주인공 스스로가 사건의 핵심이 되어버린다. 즉 히치콕의 영화는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나선원을 그리는 작업인 것이다.


 이 나선원의 근간은 주인공과 주변인들의 시선이다. 히치콕의 시선은 '훔쳐봄'이라 하지 않았나. 히치콕식 주인공이 '훔쳐보는 주체'고, 어떤 미지의 인물이 '훔쳐봄을 당하는 대상'이라고 일단 거칠게 정의해보자. 주인공은 그 미지의 인물의 동선과 의도를 파악하려 악을 쓰고 훔쳐볼 것이고, 미지의 인물은 주인공의 시선과 상관이 있든 없든 목표를 향해, 목적지를 향해 움직일 것이다. 어딘가로 향하는 누군가와 그를 뒤쫓는 주인공. 그 누군가는 목표가 있으므로 구심력이 될 테고, 주인공은 자기 윤리와 일상을 회복하기 위해(원의 가장자리를 회복하기 위해) 그를 뒤쫓으므로 원심력이 될 것이다. 즉 직각으로 교차하는 '훔쳐봄'의 시선은 각각 원심력과 구심력이 되어 자동으로 나선형의 플롯을 직조하게 된다. 그 형태가 원이 아닌 나선형이라는 것은 원심력에 해당하는 인물이 구심력만큼의 힘을 내지 못한다는 걸 의미하므로, 히치콕의 훔쳐보는 주인공은 결국 이야기가 진행될 수록 점점 입지가 좁아지고, 중심에 거의 이르렀을 즈음엔 극도의 불안과 긴장 속에서 전진하게 된다.


 이 나선원에는 두 가지 차원이 혼재한다. 하나는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공간이다. 앞문단의 설명은 시간에서의 진행을 의미했다. 이번엔 나선원을 히치콕 영화 속 공간이라 가정해보자. 그리고 주인공을 원의 가장자리에서 출발한 어떤 점이라 여겨보자. 고개만 돌리면 원의 중심을 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 그렇다면 원의 중심으로 이동하는 주인공은 얼떨결에, 영화 마지막 장면에 자기가 있을 공간을, 언젠가 도달할 최후의 스테이지를 목격하게 되지 않을까. 기시감을 일으키는 절정의 공간. 〈이창〉의 건너편 집,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의 러시모어, 〈싸이코〉의 저택 등이 그에 해당할 것이다.


 도식 자체에 시선을 불어넣은 포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히치콕의 도식에도 시선이 깃들어있다. 비교적 포괄적으로 사람의 상반신에서 시선을 느낀 포드와 달리, 히치콕은 심할 정도로 얼굴에 박힌 두 작은 동그라미에 집착했다. 얼굴이 앞을 향하고 있어도 눈이 옆을 향하면, 그의 영혼은 옆을 향하고 있다는 식이다. 굉장히 협소하고 편협하며 위험한 인식이었다. 사람의 인격이 두 눈에만 붙어있으니, 시선이 마주치지 않으면 히치콕의 주인공은 곧장 그를 사물 취급하거나 관찰대상으로 폄하하기 일쑤다. 그러니 주인공이 시선 마주치는 걸 두려워할 수 밖에. 히치콕 영화에선 사람 눈만큼 섬뜩하게 느껴지는 게 없다. 〈이창〉에서 건너편 이웃이 주인공(또는 카메라)을 직시할 때, 〈싸이코〉에서 베이츠가 카메라를 볼 때, 도리어 관객인 우리는 그들의 무엇을 보는가. (그래서일까, 주인공이나 카메라를 노려보는 인물들엔 하나 같이 눈망울이 크고 또렷한 배우들이 캐스팅되었다. 의도적인 캐스팅이었을까)


 〈싸이코〉의 하수구를 거론할 수도 있겠다. 하수구에선 죄의 결과가 주는 참혹함이 느껴지지, 시선이 느껴지진 않으니까. 대신 그에 연결되는 눈에선 원한이 느껴지긴 한다. 그것은 시선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주 큰 특징은 아니지만, 포드의 도식과 비교하여 히치콕의 도식은 동적이고 연속적이며 비선형적이다. 이는 카메라 활용법에 대입시킬 수 있는 특징으로, 히치콕의 카메라는 포드와 다르게 자주 움직이고 날아다니며, 물체와 풍경은 보이지 않는 화면 경계선 밖까지 뻗어나가 열린 프레임을 형성하고, 롱테이크가 많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론 뭔가 부족했다. 나선원 도식만으론 설명되지 않는 장면들이 많았다. 내가 도식 해석을 잘못한 건 아닐까, 혹시 나선원이 틀린 도식은 아닐까 염려하다가 도식이 단순한 2차원이 아니란 것을 깨닫게 되었다. 히치콕의 도식은 나선원이 아닌, 고깔이었다. 그 고깔을 계속 위에서만 보니 나선원만 보이고 어정쩡한 해석이 나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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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선원에 깊이가 생긴 게 무슨 대수인가 싶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겐 다르다. 지금까지 나선원 도식에 넣지 못한 요소들을 이 고깔엔 넣을 수 있다.


 고깔엔 높이가 있다. 위에서 밝힌 나선의 공간적 성질을 상기해보자. 히치콕의 주인공은 모두 '언급/목격' → '도달'의 과정을 거치는데, 도달할 공간에 닿지 않고서 목격하려면, 그 공간은 부득이하게 높다란 구조를 취할 수 밖에 없다.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의 러시모어, 〈싸이코〉의 저택 등을 생각해보자.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풍기며 높은 곳에 고고하게 자리잡고 있다. 고깔이 지닌 높이는 주인공이 이야기 하이라이트에서 겪을 위험을 상징하기도 한다. 히치콕의 인물들이 절벽 같은 곳에 두 손으로 매달려 낑낑대는 모습이 이에 해당된다. 그렇게 높이는 히치콕을 유혹한다.


 '높이'를 또 다른 말로 하면 '깊이'가 될 것이다. 히치콕 영화에서 드러나는 또 다른 고깔의 성질론 화면의 심도가 있다. 포드의 카메라는 원근을 최대한 억누르는 식으로 쓰였기에 심도가 얕았다. 배경과 풍경에 구조물을 잘 두지 않다보니 원근을 파악할 투시선이 잘 보이지 않으며, 아무리 멀리 있는 풍경도 그리 멀지 않게 느껴졌다. 반면에 히치콕의 카메라는 원근을 탐닉했다. 심도를 극한까지 끌어올려 멀리 있는 풍경은 최대한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으며, 현대적인 장소를 선호했기에 원근을 알아차릴 구조물도 화면 안에 촘촘했다. 그 화면에선 나선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지만, 고깔의 깊이는 쉽게 찾을 수 있다.


 고깔의 깊이에서 얻을 수 있는 또 하나의 히치콕 미학으론 부감 쇼트가 있겠다. 그의 영화를 본 사람들은 공감할 터인데, 영화가 진행되는 중에 결정적인 사건 이전이나 이후에, 두드러지는 수직 부감 쇼트가 자주 쓰인다. 히치콕이 고깔 도식을 절대 옆에서 보지 않고 위에서 내려다봐 나선원으로 활용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부감 쇼트의 반복적 사용이 간단하게 설명된다. 그에겐 부감 또한 나선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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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 〈현기증〉,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새〉, 〈싸이코〉

 

 히치콕의 고깔에 성(性)적인 해석을 덧붙일 수도 있지만, 그건 조금 심한 억지인데다 내 스스로 변태가 되는 것 같은 역겨움이 들어 붙이지 않겠다.

 

 


 어느 감독이건 간에, 한 감독의 작품들은 공통점과 차이점을 가진다. 차이점은 '발전' 내지는 '변화'라 포장되어 회자될 테고, 공통점은 감독의 특성과 결부돼 논의될 것이다. 포드와 히치콕의 작품에서 묻어나오는 공통점들을 모아 1부에서는 시선의 부호를 분석해내었고, 여기선 그 공통점들을 단번에 잇는 함수식을 끌어내보았다. 고깔과 숲이 그 도식이다.

 

 (이 도식에 도달하기 전에도 그 증거는 드문드문 내 생각을 스친듯 하다. 1부의 표현이다. - "존 포드는 인물의 개성을 드러내기 위해 가끔은 이야기 구조를 포기하며, 종종 비유적 이미지로 시적인 표현을 해낸다. 이에 반해 알프레드 히치콕은 순간의 활력이 죽을지언정 전체적 구조를 포기하지 않았고, 감각적 이미지보단 정보전달을 위한 이미지에 좀 더 치중했다.")

 


 처음에 나는 포드와 히치콕의 뛰어남에 혹해 둘을 영화사 최고의 자리에 먼저 올려놓고 생각을 시작했다. 형언할 수 없는 직관에 판단을 맡기고 무작정 결론부터 낸 것이었다. 헌데 둘은 놀라울 정도로 대칭적이고 상호보완적이었으며, 둘만 곰곰히 분석해도 영화의 반경이 한눈에 들어오는듯 했다. 그렇게 대책없이 직관을 좇다보니 고깔과 숲까지 오게 되었는데, 여기서 생각을 더 진전시켜보니 고깔과 숲은 포드와 히치콕이라는 두 이름을 영화의 양면으로 전환시키는 결정적인 열쇠였으며, 영화의 태생적 성질을 드러내는 단서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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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깔과 숲, 그리고 필름. 이들은 관념 속에서 하나다. 고깔은 다시 나선원과 깊이로 나뉘어 각각 기록된 운명과 시간으로 변화하며, 되감기고 풀리는 필름 릴에 따라 그 이야기와 세부적인 요소들을 드러낸다. 그 세부적인 요소들은 프렉탈 형태로 짜인 영화의 구조에 따라, 또 다시 나선원과 깊이를 보인다. 숲도 이와 같다. 허나 숲에는 운명이 없다. 1초에 24번 깜빡이는 불빛에 따라 순간적인 모습만을 보여주지, 전체가 지향하는 목적은 애초에 없었기라도 한 것처럼 절대 보여주지 않는다. 숲은 본질을 담지 못하고 실존이 되며, 그 찰나의 순간에 담기는 형상과 움직임은 또 다시 숲이 된다.


 포드의 영화는 미시적으로 사유에 봉사하며, 히치콕의 영화는 거시적으로 이론에 섬긴다. 즉 포드는 미시영화학이 되고 히치콕은 거시영화학이 된다. 지금까지 수많은 평자들이 히치코의 영화에서 '영화란 무엇인가'를 읽어왔지만, 포드의 영화는 소수의 평자에게만 대접받았다. 이는 양자의 영화 접근 방식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으로, 히치콕의 영화는 카메라와 필름릴에 기반을 두고 뻗어나가기에 '영화'로서의 접근이 수월했던 것이다. 크게는 고깔로, 작게는 원으로, 더 작게는 나선으로 압축되는 히치콕의 영화는 '영화에 대한 영화', 즉 메타영화로 쉽게 기능한다. 허나 존 포드는 그렇지 않다. 영화의 구성을 통해 사유했던 히치콕과 다르게 포드는 매쇼트 매순간 영화의 정수를 드러냄으로서 총체적인 영화에 대해 사유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자기 영화에 맞추려 했던 히치콕과 다르게, 포드는 자기 영화를 사람에 나란히 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것이다. 영화보다 사람을 중시하는 데 왜 그걸 '영화의 정수'라 부르느냐? 영화가 무엇을 담아야 하는지에 대해선 이미 위 문단에서 밝히지 않았나.


 국내에 많은 텍스트들이 이미 히치콕에 대해, 그의 '영화에 대한 영화' 접근법에 대해 세세히 분석했기에, 여기서는 포드에 대해서만 짧게 첨언하려 한다. 앞서 밝혔듯이 히치콕은 2시간으로 완결된 거대한 총체로서 '영화'라는 것을 사유하였다. 그의 영화는 각 사건들의 연계가 매우 긴밀하고 튼튼히 연결돼 있으며, 시간에 따른 공간의 변화와 인물의 심경변화를 살펴보면 명확한 기승전결 구도를 취하고 있다. 영화가 진행되는 중에 이야기 행로가 완전히 바뀌는 〈싸이코〉도, 노먼 베이츠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전체 구조를 살펴보면, 영화 중반의 하이라이트는 구조를 뒤엎는 반전이라기 보다 원래 테마를 바로잡고 더 강한 추진력을 얻기 위한 장치로서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반해 포드는 쇼트의 집합으로 영화를 이해하고 생각했다. 그는 쇼트를 만들 때 쇼트만으로 독립할 수 있도록 심열을 기울였으며, 그에 따라 포드의 쇼트는 영화의 완결 여부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 하나의 소세계가 되는 경지에 도달하였다. 물론 포드는 쇼트를 눈에 띄지 않게 잇는 법을 잘 알았다. 즉 편집점이 안 보이게 할 줄 알았다. 허나 포드는 편집점이 두드러질 때 발생하는 에너지를 더 사랑했고, 그때 쇼트가 가지는 막강한 힘을 숭배했다. 포드가 개인적으로 흡족한 작품인 〈젊은 날의 링컨〉, 〈웨건 마스터〉, 〈도망자〉 등을 보면 모두 이야기가 갑자기 끊기거나 비약적인 순간들이 존재한다. 그는 숲이라는 군집에서 개별적인 나무를 꼽는 걸 좋아했고, 각 나무가 주변을 밀어내고 당기며 내뿜는 피톤치드에 행복해 했다.


 그들이 '삶'을 대하는 태도 또한 고깔-숲-필름 도식에서 읽어낼 수 있다. 그들은 평생 감독으로서 살았기에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거대 영화산업과 항상 맞닿아 있었다. 영화에 깊은 관심을 지닌 이들은 그 할리우드라는 곳이 얼마나 혐오스러운 곳인지 알 것이다. 할리우드는 꿈을 품고 들어오는 그 모든 이들을 철저하게 도구화시킨다. 포드와 히치콕도 이를 잘 알았다. 하지만 그에 대응한 방식은 서로 달랐다. 포드는 회피했다. 모뉴먼트 밸리로, 아일랜드로, 바다로, 야외 세트장으로 끊임없이 떠났고, 스태프를 바꾸지 않고 같은 사람들과 지속적으로 작업하여 거대산업과 구분되는 가족 형태의 소규모 창작집단을 만드는 일에 주력했다. 포드는 '당신에게 서부극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좋은 사람들과 자연에 나가 작업할 수 있는 영화지. 맛있는 음식을 먹고 대초원에 텐트를 치고 자는 것, 즐거움을 주는 일이네.」10


 그렇다, 포드는 영화 만드는 일이 괴로움보단 즐거움이 되길 바랐고, 이 방식을 충실히 실천하기 위해 평생을 노력하였다.


 이에 비해 히치콕은 사람을 사물처럼 다루는 할리우드 시스템 안에서 꿋꿋이 살았다. 다른 곳으로 떠나지 않고 끝까지 할리우드에 남았다. 그리고 그 고통과 강박을, 자본주의와 현대사회의 타락을 영화 안으로 끌어들였다. 목적, 성취, 욕망. 그들은 히치콕 안에서 모터가 되어 주변을 끌어들였고, 돌고 도는 하나의 항성계를 만들어내었다. 때문에 고깔은 현대인의 도식이 될 수도 있다. 히치콕의 결과물은 한없이 아름답지만 그 과정엔 많은 희생이 담겨있었음을,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짐작으로 알 수 있다.


 무성영화가 사라진 이후에도 정점을 향한 포드와 히치콕의 여정은 계속됐다. 다른 여러 감독들도 이 여정의 길까진 도달했으나, 그들과 달리 포드와 히치콕은 그 여정의 끝에 도착해 무언가 깨달았다. 허나 서로의 깨달음은 같지 않았다. 오히려 같지 않았기에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두 가지 전혀 다른 답이 될 수 있었다. 이들의 답을 우리 삶으로 끌어와 되물을 수도 있다. 우리가 속한 세상은 정글과도 같다. 거대한 문명의 빛 속에서 갈등의 그림자를 짊어지고 우리는 살아간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세상을 받아들이고 문명적이지만 경쟁적인 삶을 사는 게 좋을까, 아니면 속세와 멀어져 매일 주어지는 일상과 햇빛에 만족하며 사는 게 좋을까. 고깔이냐 숲이냐, 그 선택의 갈림길은 지금도 우리 앞에 펼쳐져 있다.

 

 


7. 〈수색자〉와 〈현기증〉


 ※ 이 문단에는 〈수색자〉와 〈현기증〉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다. 여기에 오기까지 이미 많은 영화의 줄거리를 언급했지만, 이 두 영화는 타 영화에 비해 대단히 조심스러울 뿐더러 결말까지 세세하게 밝히기에, 이렇게 명시적으로 스포일러가 있다는 것을 밝혀 혹시 모를 불상사를 방지한다.


 정성일 평론가는 존 포드의 〈수색자〉, 히치콕의 〈현기증〉, 여기에 하워드 혹스의 〈리오 브라보〉까지 곁들이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영화에서 ‘고전주의’라고 할 만한 경계의 끝까지 온 다음 아, 영화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였을지도 모른다는 탄식을 자아내는 세 편의 할리우드 영화의 목록. 아마 반드시, 라고 해도 좋을 만큼 보아야 할 영화. 그래서 꼭 시네필이 아니라도 인간 된 도리로서 이 영화들만큼은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게끔 만드는 제목들.」11


 위 세 편의 영화는 공인된 할리우드의 정점이며, 영화사의 가장 높은 봉우리들이다. 저들에 대해 무어라 말하는 것조차 '감히 내가...' 같은 심정이 드는 무시무시한 이름들이다. 나는 개중 두 편을 위에서 밝힌 도식들을 이용해 이곳에서 가볍게 다루고자 한다.


 본격적인 내용에 앞서, 개인적인 소감을 먼저 밝히겠다. 나는 〈수색자〉와 〈현기증〉이 두 거장의 최고작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본 존 포드의 작품 중에선 〈수색자〉보다 그의 흑백 걸작들이 더 흥미로웠으며, 히치콕의 최고작은 아직 내가 보지 못한 작품들 중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혹은, 내가 그 두 작품을 도저히 감당하지 못하여 일부러 무시하는 걸 수도 있겠다. 〈수색자〉와 〈현기증〉을 각각 처음 봤을 때가 가물가물하게 생생하다. 그 둘은 '영화'라기 보단 영화를 넘어선 무언가, 또 다른 차원의 두 소우주처럼 느껴졌다.


 〈수색자〉와 〈현기증〉은 공통점이 많다. 둘 다 1950년대에 개봉했으며, 비스타비전으로 촬영되었고,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으며, 각자 커리어에서 유난히 이례적인 작품으로 손꼽힌다. 그리고 그 두 작품은 현재 세계 최고의 영화 리스트 등지에서 왕좌를 두고 경쟁하는 지위까지 올라오게 되었다.


 이 두 작품이 감독의 커리어에서 예외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다지 놀랍지 않지만,(대개 보면 거장들의 최고작은 자기 커리어를 배반할 때 자주 나온다더라) 그 예외성이 무엇으로부터 비롯됐는지 생각하면 아리송해진다. 〈현기증〉은 영화로 구현한 히치콕 자신의 고해성사와 같아, 이 작품을 거르고서 히치콕을 논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즉 〈현기증〉은 히치콕 미학의 중심으로 기능하기에 예외적이다. 히치콕도 이 작품을 만들 때 야심을 담아서 만들었고, 기획부터 개봉까지 자신이 계획했다. 그런데 〈수색자〉는 포드의 커리어 뿐만 아니라 그의 포괄적인 미학관에 있어서도 예외적이고 이례적인 작품이다. 포드가 야심을 담아 〈수색자〉를 만들었다는 증언은 그 어떤 텍스트를 둘러보아도 확인할 수 없으며, 애초에 기획도 포드가 아닌 제작자로부터 시작했다. 때문에 포드 미학을 탐구하는 가운데 〈수색자〉는 중심 역할을 하지 못한다. 차라리 변방이나 잉여에 비유하는 게 더 어울릴 정도다.


 〈현기증〉은 한 위대한 예술가의 야심과 미학이 똘똘 뭉친 아름다운 알맹이와 같다. 그 중심에는 욕망의 고백이 잠들어 있으며, 주변 요소들이 그를 원형으로 둘러싸 소용돌이를 이룬다. 때문에 양파와 같은 다층성을 〈현기증〉은 지니는데, 이를 고깔에 비유할 수 있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 일 것이다.


 〈현기증〉이 지닌 미학의 한 층위론 '진짜와 가짜의 경합'이 있을 것이다. 매들린과 주디라는 두 이름은 그에 대한 가장 으뜸되는 단서인데, 이야기 구조를 보아도 그 층위가 드러난다. 주인공 퍼거슨에겐 세 개의 공간이 의식을 찌르며, 그 첫째는 영화 첫 시퀸스에서 나오는 추락의 절벽이고, 둘째는 매들린이 떨어지는 종탑, 셋째는 엠파이어 호텔의 초록방이다. 첫째는 태생적 죄의식의 공간이다. 의도는 없었지만 죄책감을 가지게 된 공간이며, 퍼거슨의 행동원리가 발원한 곳이다. 둘째는 〈현기증〉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에서 태풍의 눈을 담당하는 공간이다. 가장자리에서 발원한 퍼거슨의 여정이 이 중심공간과 만나면서 영화는 한층 복잡해지고, 어딘가를 향하던 퍼거슨의 여정은 이곳으로 돌아가는 여정으로 변화한다. 셋째는 둘째의 환상이자 복제품이다. 허나 퍼거슨은 셋째를 통해 둘째로 다시 돌아간 듯한 환각을 경험하고, 잠깐이나마 그 아름다운 거짓에 취하게 된다. 그 유명한 퍼거슨과 주디의 키스를 돌이켜보자. 카메라와 세트가 주디와 퍼거슨을 감싸듯이 원의 형태로 움직인다. 〈현기증〉이라는 거대한 고깔의 중심이 호텔방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결국 그것은 퍼거슨의 환상일 뿐이다. 이후 주디가 사실 매들린이었다는 사실을 안 퍼거슨은 다시 둘째로 돌아가 진짜를 대면하려 하지만, 둘째 공간에 서려있는 추락의 저주는 퍼거슨을 비극으로부터 놓아주지 않는다. 고깔의 높이는 사람의 의지와 상관없이 사람을 떨어뜨려 죽인다. 그리고 우리는 그 '거짓된 소용돌이' 이야기를 통해서 영화를 보는 우리 자신과 영화산업의 끔찍함을 되돌아 보게 된다.


 설명한 바와 같이, 히치콕은 특정 시공간을 영화 전체의 중점으로 삼고 그 주변을 다듬는 식으로 플롯을 구성하였다. 〈현기증〉은 그에 대한 가장 이상적이고 모범적이고 아름다운 사례로, 분명히 히치콕의 중심이 된다.


 1부에서 언급한 히치콕과 해피엔딩과의 관계를 고깔 도식에서 이끌어낼 수도 있다. 히치콕의 영화 중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영화를 살펴보면, 결말로의 비약이 무척 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창〉에서 주인공이 추락하고 멀쩡한 장면과 바로 며칠 뒤로 건너뛰는 결말,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에서 위험천만한 절벽이 열차의 침대칸으로 도약하는 결말 등이 대표적인 해피엔딩인데, 마치 제작자가 나서서 각본을 수정하고 결말부를 재촬영한 것처럼 죄다 비약적이고 비연속적이다. 히치콕에게 어울리는 결말은 어쩔 수 없이 새드엔딩이다. 고깔을 휘감는 나선이 어디서 끊기는 질 살펴보자. 고깔의 중심이나 가장자리 끝에서 선이 끝난다. 히치콕의 영화는 던져져야 끝난다. 느닷없이 끝나야 영화 내내 흐른 맥이 끊기지 않고 자연스럽다. 이것이야말로 히치콕 스스로가 내린 추락의 저주는 아닐까.


 〈현기증〉에 대해 말하는 건 그나마 쉬운 일이다. 하지만 〈수색자〉에 대해 말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수색자〉는 그 주제와 동력을 도저히 파악할 수가 없다. 이든 에드워즈가 자신의 조카를 번쩍 들어올리며 "집에 가자"라고 말할 때 그 전율을 기억하는데도, 나는 아직도 내가 왜 감동을 받았는지 도저히 말로 설명하질 못하겠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수색자〉가 위대한 이유는 서부극이라는 장르를 해체하고 수정했다는 것으로, 이미 〈수색자〉를 해체한 여러 텍스트에서 마르고 닳도록 읊었던 내용이다. - "〈수색자〉는 이전 서부극들로부터 거리를 뒀으며, 이는 수정주의 서부극의 시작이 되었다." - 그리고 이 주제의 근거로 인종주의에 대한 영화의 태도를 수시로 언급해왔다. 하지만 이는 태그 갤러거를 비롯한 여러 평자들이 나서서 논파한 해설로 〈수색자〉에 대한 적절한 해설이 되지 못한다.


 〈수색자〉에 대해 해설한 텍스트들이 내게 미흡하게 느껴진 까닭은 많은 평자들이 〈수색자〉를 '서부극'이라는 장르 안에서 해설하려 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나는 〈수색자〉를 보며 서부극 같다는 느낌을 전혀 받지 못했다. 포드의 서부극은 항상 보편적인 서부극들과 거리를 두지만, 〈수색자〉는 특히나 예외적이었다. 그 예외성을 뒷받침할 한 가지 이유로, 이든 에드워즈로 대표되는 마초적 서부극 메인플롯과는 별개로 이 영화에선 마틴 폴리와 로리 저건슨을 중심으로 한 플롯이 존재함이 있다. 많은 평자들은 이를 간과하고 〈수색자〉를 평한다. 로저 이버트의 말을 빌린다.


 「〈수색자〉는 정말이지 2편의 영화처럼 보인다. (중략) 이 영화 속 영화는 우둔한 로맨틱 서브플롯으로, 그리고 보드빌 억양을 사용하는 스웨덴인 이웃 라스 저건슨(존 쿠알렌)과 메스코트처럼 취급받는 반편이 모스 하퍼(행크 워든)를 포함한 캐릭터들은 기분전환용 코미디로 끌려들어간다. 영화에는 뮤지컬 막간극까지 들어 있다. 이 두 번째 가닥은 흥미롭지 않다. 〈수색자〉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이들은 이 가닥을 걸러내고는 메인 스토리라인이 돌아오기를 끈기 있게 기다린다.」12


 〈수색자〉를 이든 에드워즈라는 인물에 대한 텍스트로 읽는 평자들을 향해 비수처럼 내리꽂는 지적이다. 왜 평자들은 이든은 보면서 마틴은 보지 않으려 하는 걸까. 나는 그를 〈수색자〉의 진중함을 부각시키려는 몸부림의 일종으로 본다. 가볍고 흥겨운 작품은 업신여기는 태도가 사람들에게 있으니, 그에 대한 반발심으로 진지함을 강조하는 거다.


 객관적으로 보면, 〈수색자〉에는 두 공간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하나는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데비를 찾는 이든과 마틴의 공간이고, 다른 하나는 저건슨 가족이 정착해 있는 텍사스 어딘가이다. 이 두 공간의 이야기는 텍사스의 어느 동네에서 동시에 시작하지만, 데비에 대한 수색을 기점으로 몇 년동안 역마처럼 돌아다니며 지내는 이든과 마틴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1차 산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저건슨과 동네 주민들에 대한 이야기로 양분된다. 그 균열의 중심에는 이든의 복수심이 깔려있지만, 동네 주민들에 대한 플롯은 그의 복수심과 큰 연관없이 진행된다. 포드의 도식인 '숲'을 대입해보자. 그는 플롯을 다룸에 있어 줄줄이 이어진 하나의 거대한 총체보단, 여러 개의 개별 시퀸스로 다루길 좋아했다. 그러면 이중 플롯의 진행이 이해가 된다. 이 이중 플롯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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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적인 소감을 꺼낼 수 밖에 없겠다. 나는 〈수색자〉의 결말부를 보며 이든의 작별에 감격하기도 했지만, 결말부의 모든 쇼트에서 매우 큰 인상을 받았으며, 개중에서도 위에 이미지로 꺼내든 두 쇼트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예시의 좌측 쇼트를 영화에서 처음 보았을 때 잠깐 의문이 들었다. 작은 이미지론 안 보이겠지만 영화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는데, 저 쇼트의 포커스는 말을 타고 복귀하는 사내들에 맞춰줘 있지 않고, 물을 마시는 말과 땅에 맞춰줘 있다. 그 순간 내가 '마을로 돌아오는 사내들'이라는 각본 상의 이야기를 뛰어넘는 영화의 메시지를 보았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우측 쇼트, 로리 저건슨이 자신의 연인 마틴을 향해 달려간다. 나는 우측 쇼트에서 화면 상의 이미지를 초월하는 형상을 보았다. 화면 자체는 분명 마틴을 향해 달려가는 로리 저건슨이다. 허나 그 반가운 환영의 달음질에서 나는 고대부터 시작된 인류사의 오랜 움직임을 보았다. 전란을 마치고 돌아온 고대 중국의 병사를 맞이하는 아내, 트로이에서 귀환한 오디세우스와 상봉하는 페넬로페, 그리고 중동 파견 임무를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온 미군을 환영하는 아내까지. 순식간에 쇼트 하나에서 그 모든 가상의 역사까지 목격하는 경이로운 체험을 겪었다. 그때 깨달았다. 아, 〈수색자〉는 땅에 대한 영화구나. 회복에 대한 영화구나.


 이 깨달음은 내가 〈수색자〉를 읽어내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수색자〉의 이중 플롯은 편집 순서에 따라 교차되며 이야기를 서술하지만, 사실 이 둘은 알게 모르게 경쟁하고 있던 것이다. 설명을 위한 예화로 6.25전쟁 당시 한 어머니의 이야기를 꺼내겠다. 그 어머니는 어느날 아침에 전쟁의 여파로 아들을 잃었다. 그런데 주저앉아 심히 슬퍼하지 않고, 쌀을 가지러 항상 들르던 곳에 어김없이 그날도 들렀다고 전해진다. 전쟁이라는 거대한 혼란이 주는 사건과 쌀을 가지러 가는 일상. 하나는 역사적 마찰·혼돈이 주는 특수한 사건이지만, 다른 하나는 인류가 있는 한 끊임없이 지속될 행동이다. 〈수색자〉의 이중 플롯은 이와 같다. 이든과 마틴의 여정은 '역사적 여정'이다. 악랄한 코만치의 여아 납치를 바로잡기 위해 나선 사내들의 여정이다. 저건슨네 가족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은 '일상적 흐름'이다. 부엌과 앞치마로 대표되는 인류사의 보이지 않는 물줄기다. 이 두 플롯은 각각 이든과 로리로 상징되며 마틴은 그 경계에 서서 활약한다.


 그 모든 혼란은 질서로 복구되며 끝내 '일상적 흐름'으로 귀결된다. 이는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진보로, 도적들이 일으키는 혼란을 다룬 〈7인의 사무라이〉도 같은 주제로 막을 내린다. 모든 권력과 영웅심리는 사그라들고, 일상이라 부를 수 있는 평온함 속에 시대는 잠드는 것이다. 관객인 우리는 이미 마틴과 로리가 일궈놓은 가정과 사회에 살고 있기에, 〈수색자〉는 다음 세대에 편입되지 못해 (혹은 스스로 편입되지 않고) 사람들에게 잊혀진 망령만을 바라보며 시간의 문을 닫고 끝을 맺는다.


 오슨 웰스는 존 포드를 극찬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그가 최고의 능력을 발휘할 때, 관객은 이 땅이 어떻게 만들어져 있는지 느낄 수 있다.」13


 〈수색자〉에서 포드는 별 다른 주제를 넣지 않았다. 최고의 능력을 발휘했을 뿐이었다. 〈수색자〉는 땅에 대한 영화며, 확립된 질서 안에서 사는 우리들에게 과격한 변증법의 역사를 겪게 해주는 경이로운 체험이다. 이 이상의 수식어는 현재로선 (적어도 내게서는) 나오지 않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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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 〈수색자〉 / 우측 〈현기증〉

 

 고깔과 숲이라는 도식이 어떻게 순간의 화면을 장악했는지 〈수색자〉와 〈현기증〉을 통해 쉽게 유추할 수 있다. 포드는 지나친 깊이를 싫어했다. 아무리 멀리있는 물체라도 가까이 보이는 걸 좋아했으며, 가까이 있어도 그 배경의 높이나 크기가 화면을 압도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히치콕은 정반대였다. 깊숙한 심도를 좋아했고, 배경이 관객을 압도하길 바랐다. 〈수색자〉에서 등장하는 실내공간(좌측 상단)과 〈현기증〉에서 나오는 실내공간(우측 상단)을 견주어보면, 실제공간과 깊이는 〈수색자〉의 실내가 더 크고 깊지만, 렌즈의 왜곡으로 우리는 〈현기증〉의 실내가 더 깊고 넓어보이는 착시를 경험하게 된다. 그 성질은 거대 렌드마크를 다루는 데에서도 보인다. 〈수색자〉의 암석봉들은 내내 인물과 함께하는 것 같고 〈현기증〉의 금문교는 저 멀리 꿈 속에 있는 듯 하지만, 사실 이 둘은 카메라로부터의 거리가 비등하며, 암석봉과 금문교의 높이 또한 비슷하다(암석봉의 평균 높이는 지면으로부터 200m 정도이며, 금문교의 높이는 해발 227m다). 배경과 풍경이 수평적인 걸 선호한 포드의 숲 성향과, 배경과 풍경이 소실점을 만들어내길 바란 히치콕의 고깔 성향의 차이로 볼 수 있겠다.

 

 


8. 〈도망자〉로 드러난 틈


 1부에서 이 글로 넘어올 즈음 나는 2편의 포드 영화를 더 보았는데, 1953년작 〈모감보〉와 1947년작 〈도망자〉였다.


 〈모감보〉는 당대 스타배우들을 기용한 불륜 로맨스 영화로, 포드답지 않은 플롯에 포드다운 연출이 돋보이는 영화였다. 그 간격 때문인지 '사랑과 전쟁'과 같이 욕망이 들끓는 형태의 영화가 아닌, 착한 사람들끼리의 옹기종기 모여 실수로 소동을 벌이는 형태의 영화가 되어버렸는데, 그래도 스타 배우들의 기막힌 매력과 어울려 쏠쏠한 재미를 선사하는 좋은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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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자 The Fugitive〉 (1947)

 

 〈도망자〉는 황홀했다. 허문영 평론가의 추천으로 보게 된 작품이었는데, 내가 좋아하는 포드의 흑백 걸작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끝내주는 작품이었다. 동시에 〈도망자〉는 내 사유에 조용히 균열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우선 작품의 무드가 내가 알던 포드의 무드와 크게 달랐다. 촬영감독 가브리엘 피구에로아를 포함한 스태프의 다수가 맥시코 사람이라 그런지 미국느낌이 물씬 풍기던 포드의 대표작들과도 확연히 달랐고, 주인공은 포드답지 않게 겁쟁이 중의 겁쟁이였으며, 플롯은 여느 히치콕 영화와 유사했다. 존 포드라는 이름이 없었다면 맥시코의 어느 재능 있는 감독이 만든 기괴한 걸작 정도로 판가름했을 지도 모르겠다.


 또한, 〈도망자〉는 '영화로 만들어진 신약성서'라 부를 정도로 지나치게 신약성서와 가까웠다. 헨리 폰다가 연기하는 신부가 성당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그것을 알아차렸는데, 영화가 진행되면서 그보다 더 나아가 성서의 구절구절을 형상화하는 것을 보았다. 마지막 결말까지 보고 나니 감격과 함께, 이 영화의 제작을 밀어붙인 포드의 종교적 과감함에 황당함이 섞인 감탄을 내뱉을 수 밖에 없었다. 1부에서 밝혔듯이,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나는 포드가 구약성서에 가깝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균열들은 내 사유를 재정립해야 할 의무를 던져줬다. 그러나 모두 부정적으로 다가온 것은 아니었고, 포드에 대한 내 생각을 넓혀주는 요소도 몇몇 있었다.


 포드의 영화를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설정상으로 구현된 시간대나 지역을 능가하는 힘이 그의 영화엔 있다. 그의 작품에서 주인공과 어머니가 나오면, 그 시대 그 지역에서 산 어머니와 자식이 보이지 않고 진짜 지금도 세상을 살고 있는듯한 일반적 어머니와 자식의 형상이 보인다. 〈도망자〉를 보고서 그것이 포드의 능력에서 우연히 비롯된 효과가 아니라, 그가 의도한 효과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화가 시작하며 워드 본드의 목소리로 다음과 같은 내레이션이 나온다.


 "이 이야기는 실화이며 시대를 초월한다. 성경에서 시작된 오래된 이야기이기도 하며,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반복되고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포드의 영화가 지닌 일반성을 이토록 잘 요약한 문장이 있을까. 이때 알았다. 존 포드는 무성영화를 통과한 여러 거장들처럼 대사 없이 이미지로 이야기하는 '순수영화'를 추구한 것을 넘어,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이야기와 형질을 지닌 '보편영화'도 추구했다는 것을. 그리고 〈도망자〉 이전에 본 포드의 영화를 되새겨보면, 그는 보편영화를 만드는 데에 확실히 성공한 것이 틀림없었다.


 괄목할 만한 요소는 더 있었다. 영화 중반에 이르면 신부를 수색 중인 맥시코 경찰과 그 신부를 숨겨주는 마리아 돌로레스 간의 심리전 시퀸스가 나온다. 상황 설명만 읽으면 '신부'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서스펜스 시퀸스 같지만, 영화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심리전 시퀸스가 진행되는 가운데 주요인물인 신부는 일찍 퇴장하고, 시퀸스는 서스펜스보단 유머와 기괴한 활력이 넘쳐났다. 시퀸스 종반에 이르면 마리아는 경찰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 춤을 추기 시작하는데, 춤이 화려한 것도 아니고 마리아가 성적인 매력을 풍기는 것도 아닌데 왠지 모르게 보는 관객조차 흥겹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살짝 데이비드 린치 영화 속 춤사위 같기도 했다.


 이 시퀸스 종반부 춤 장면에서 마리아는 이상한 반응을 보인다. 춤을 억지로 추는 것이기에 표정에 약간이나마 어둠이 깔려 있어야 했는데, 마리아는 진 켈리식 뮤지컬 영화의 여주인공처럼 정말 해맑게 웃으며 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춤을 능글능글하게 봐야 할 경찰들은 그 춤에 순진한 환호성을 지르며 뮤지컬 크루들로 순식간에 돌변한다. 눈치싸움이 되어야 할 장면이 뮤지컬 장면으로 바뀐 것이다.


 '고깔과 숲' 단락에서, 포드의 숲 도식을 영화와 대응시켜 살펴보며 나는 말했다. "포드가 개인적으로 흡족한 작품인 〈젊은 날의 링컨〉, 〈웨건 마스터〉, 〈도망자〉 등을 보면 모두 이야기가 갑자기 끊기거나 비약적인 순간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포드는 그 순간을 좋아했다. 쇼트와 쇼트가, 시퀸스와 시퀸스가 서로 '충돌'하면서 일으키는 스파크를 사랑했다. 그런데 이는 각기 다른 장면을 하나의 서사로 연결지으려는 관객의 본능에 의해 에너지를 일으키는 것이었다. 즉 그 순간들의 실질적인 편집은 철저하게 분리돼있지만, 관객들이 그를 연결지으려는 노력 속에서 쇼트의 의미가 무궁무진하게 피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도망자〉의 춤 장면은 달랐다. 쇼트와 쇼트는 분명 하나의 서사로 연결돼 있지만, 관객의 머릿속에서 춤 직전 장면과 춤 장면이 분리되는 환상이 발생한 것이다. '심리적 편집'이라 부를 이 기묘한 현상은 포드의 영화가 동시대에 피어난 철학과 어어질 수도 있다는 놀라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포드의 영화가 어떤 경지에 도달하는 순간들을 살펴보면, 영화가 자기 이야기를 까먹고 상황을 진행한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포드의 영화에선 그것이 마법같이 이뤄진다. 그 순간 관객은 뤼미에르가 처음 영사기를 돌리던 때로 돌아간다. 움직임 그 자체에 흥분하는 태초의 때로 회귀한다. '고깔과 숲' 단락에서 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숲에는 운명이 없다. 1초에 24번 깜빡이는 불빛에 따라 순간적인 모습만을 보여주지, 전체가 지향하는 목적은 애초에 없었기라도 한 것처럼 절대 보여주지 않는다. 숲은 본질을 담지 못하고 실존이 되며, 그 찰나의 순간에 담기는 형상과 움직임은 또 다시 숲이 된다."


 지나치게 은유적으로 서술된 문장이어서 읽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위 설명들과 연결지으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사람은 ~을 하기 위해 태어났다', '영화는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등은 모두 '본질'에 대한 답변들이다. 존재이유가 무엇이냐에 대해 직접적으로 답한 것들로, 행동을 이끄는 '명분'으로서 작용한다. 그렇다면 그 어떤 이유나 목적도 없이 존재가 존재하는 것만으로 자기를 증명하면 그걸 무엇이라 해야 할까. 이유나 명분이 사라지고 오롯이 '행동'만 남게 되면, 우리는 그것을 무어라 일컬어야 할까. 내게는 '실존'이라는 말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포드가 동시대 철학자들이 정립한 실존주의 사상에 매료되었다곤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포드가 자기 미학을 발전시키다보니 우연찮게 그 사상과 맞아 떨어졌을 가능성이 더 높다. 포드의 실존주의는 누벨바그의 실존주의와 다르다. 누벨바그는 가능한 모든 우연을 끌어들여 영화가 말도 안되는 상황까지 이어지도록 하지만, 포드는 몹시 영화적이다. 시나리오 작성 과정이나 주변 환경과의 조율 속에서 발생하지 않고,(몇몇 포드 영화는 그런 순간도 있지만) 오직 완성된 영화를 통해서만 그 실존성을 확인할 수 있다.


 마리아와 멕시코 경찰이 어우러진 뮤지컬 장면은 이전까지 쌓인 영화의 서사를 까먹고 혼자 논다. 그리고 그것은 지루하거나 혐오스럽지 않고 무척이나 흥겹다. 서사를 잊은 시퀸스의 순수한 오락성. 어쭙잖지만, 나는 그 순간을 '포드적 실존주의'라 부르고 싶다.


 아직 말로 정리하지 못한 생각들까지 포함하여, 〈도망자〉는 내게 많은 것을 준 영화였다.

 

 


9. 존 포드 vs 히치콕


 지금껏 무시해왔던 이 글의 제목에 대해 다룰 수 밖에 없겠다.


 내 글을 주욱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나는 존 포드 지지자다. 만약 포드와 히치콕 중에서 고르라면 간발의 차로 포드를 고를 생각이다.


 왜 포드인가. 지극히 주관적인 판단이지만, 그 근거를 대자면 세 가지 정도가 있겠다.


 첫째는 이론과의 관계 때문이다. 히치콕은 친이론적이다. 스스로 몇 가지 규칙을 만들어 체계화시켰고 이를 통해 영화 제작에 실천했다. 그래선지 트뤼포와의 인터뷰를 보면 일생동안 그 인터뷰만 준비한냥 철저하게 준비된 모습을 보인다. 허나 포드는 이론과 무관했다. 자기 본능을 최대한 영화에 밀착시키는 데에 주력했지, 납득할 만한 논리를 만드는 데 집중하지 않았다. 그렇게 본능과 직관으로 쌓인 실력으로 인해 영화는 끝내주게 잘 만들었지만 전문용어를 앞세운 인터뷰에선 한없이 답답한 답변만 늘어놓았다. 그렇다면 질문, 위대한 예술은 이론과 일대일 대응되는가, 이론을 능가하는가? 나는 예술이 이론을 능가하는 힘이 있다고 믿는 쪽이며, 히치콕보다는 포드가 그 믿음에 확신을 더 불어넣어준다.


 둘째는 포드의 장르적 종합성 때문이다. 작년 이맘 때 즈음 나는 존 포드의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에 대한 감상을 짧게 피력했는데, 그 글에서 포드의 신비함에 대해 다루며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포드의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에는 명확한 장르가 존재하질 않는다.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영화 자체가 모든 장르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지금처럼 장르가 세세하게 분화되기 전에 활동한 거장들은 장르의 유동성을 너무나도 잘 알았다. 채플린이 알았고, 히치콕이 알았으며, 르누아르가 알았고, 존 포드가 알았다. 원래 코미디적인 상황, 짜릿한 상황, 공포스러운 상황으로 나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연출에 따라 각 상황이 분위기를 가진다는 단순한 진실을, 웃음과 슬픔과 분노와 공포는 결국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를 이용하여 히치콕이 공포와 서스펜스로, 채플린이 코미디로, 르누아르가 풍자로 기울 때, 존 포드는 그 얇은 경계에 서서 활동했고, 이것이 존 포드와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가 여전히 신비롭게 다가오는 이유가 아닐까 나는 추측한다."


 나는 지금도 이 의견에 (거의) 동의하고 있으며, 이같은 포드의 종합적인 면모는 그를 정상에 올려놓기에 부족함이 없다 생각한다.


 셋째는, 히치콕이라는 사람에 대해 미세한 거부감이 일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히치콕의 옴짝달싹 못하는 상황들을 '관객의 윤리를 되묻는다'고 평하는데, 나는 그 히치콕의 질문 속에서 미약하게나마 사람을 업신여기는 뉘앙스를 느낀다.


 예술 작품에서 예술가의 개인적 성향을 읽어낼 수 있는 이들은 히치콕의 작품을 보며 느꼈을 것이다. 히치콕은 변태다. 그의 나긋한 말투와 교양, 그리고 우아한 정장이 그를 포장했지만, 그 내부에는 숨길 수 없는 검은 욕망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 흑심을 창작을 위한 질료로만 활용했으면 좋았건만, 히치콕은 그러하지 않았다. 〈이창〉에서 〈새〉로 이어지는 그의 대표작 커리어를 보고 있으면 히치콕이 점점 미쳐가는구나를 확연히 느낄 수 있다. 특히 〈현기증〉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위험이었다. 그 영화는 자기 욕망에 대한 고백이면서, 동시에 자기 죄에 대한 태연한 선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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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피 헤드런에 대한 이슈를 거론하지 않을 수가 없다.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크게 밝혀진 이슈로, 히치콕과 오랜 기간 작업한 금발 여배우 티피 헤드런이 히치콕으로부터 장기간 스토킹과 성희롱, 그리고 성추행을 당했다고 토로한 것인데, 그 시기를 회고하며 티피 헤드런은 '정신적 감옥'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으니 그 정도가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다.


 티피 헤드런과 히치콕을 둘러싼 이슈를 나는 소식을 접하기 전부터 예측하고 있었다. 나는 히치콕 영화를 개봉한 순서대로 보았는데, 〈새〉로 향하는 커리어를 보며 영화에서 느껴지는 어떤 정신의 힘이 점점 어두워지고 강박적으로 변한다는 것을 확연히 느꼈다. 그리고 그 끝에 자리한 〈새〉는 정말 무서운 영화였다. 그 영화에선 주변 사람을 장악하고 조종하고 싶어하는 심리가 강렬하게 느껴졌다. 티피 헤드런의 심경고백이 널리 알려질 때 나도 소식을 접했는데, 나의 첫 반응은 '이럴수가'가 아니라 '역시나'였다.


 친일에 친독재까지 저지른 시인 서정주는, 자신의 대표작 〈자화상〉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이는 과연 고백일까, 자기 죄에 대한 치기 어린 뻔뻔함일까. 그 답은 이미 창작자가 자신의 삶으로 직접 보여줬다 생각한다.

 


 물론 히치콕에게 잘못이 있다고 그의 작품을 모조리 외면하는 것은 몰상식한 행동이다. 그의 작품은 여전히 아름다우며, 관객에게 흥미를 안겨준다. 비록 사람은 안 좋았을지라도 작품은 좋았다. 그래, 내가 히치콕을 아직 제대로 만나지 못해서 포드를 한 수 위로 치는 걸지도 모르겠다. 내가 아는 히치콕은 대표작에 한정돼있다. 나는 그의 걸작을 아직 많이 접하지 못했다. 관람방법을 알지 못해서 그런 것이기도 하고, 극장에서 보고 싶어 기약없이 관람을 미뤄서 그런 것이기도 하다. 어떤 식으로든 그 숨겨진 걸작들과 인연이 닿았을 때, 히치콕이 다시 포드와 겨루는 이름으로 높아지길 조심스레 소원해본다.

 

 


10. 선진영화인 님께 답하기


 1부에서 선진영화인 님이 댓글로 날카로운 질문들을 던져주셨는데, 한창 부산한 중에 답한지라 매우 부실한 답글만이 댓글란을 가득 채우게 되었다. 이에 대한 반성의 의미로, 이곳에서 제대로 질문과 답을 써내려갈까 한다.


 Q)는 선진영화인 님의 질문이며, A)는 그에 대한 답변이다.


Q) 대사 없이 내용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존 포드와 히치콕이 위대하다는 말씀에는 죄송하지만 전혀 동의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모든 무성 영화는 죄다 걸작인가요? 물론 그렇게 말할 수도 있지요, 허나 대사의 등장으로 분명히 영화의 표현 범위가 더욱 넓어진 점 또한 사실 아닌지요?


A) 무성영화가 죄다 걸작은 아니라는 말은 1부에서도 이 글에서도 했으니 넘어가겠습니다. 대사의 등장으로 영화의 표현 범위가 넓어진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넓어진 영토가 그 사회의 교양을 판가름하진 않죠.


Q) 모든 해석은 개인의 자유지만 히치콕은 트뤼포와의 인터뷰에서 자신과 가톨릭과의 연관 관계를 부인하였지요. 말씀하신 대로 그의 개인사에서 생겨난 트라우마와 관음증을 모두 종교적으로 해석하는 건 다소 오해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A) 그들의 재능이 모두 가톨릭의 몫은 아닙니다. 하지만 두 거장에게 큰 영향을 끼친 건 사실입니다.


Q) 제 생각에 존 포드와 히치콕이 눈속임의 천재라는 건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이에요. 왜냐 하면 영화 찍는 사람들은 세트장과 촬영/조명 기구와 온갖 잡동사니들 사이에서 통일성 있는 영상을 만들어야 하는 사람들이잖아요. 아무리 하찮은 영화라도 찍는 쪽은 모든 기술을 총동원해야겠지요. 굳이 그 말을 써야 한다면 영화 감독은 전부 눈속임의 천재고,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또 지금까지의 모든 영화 작가들 중 저 둘이 제일 눈속임을 잘했다고 말한다면 그건 무수한 다른 작가들의 능력을 폄하하는 일일 테고요.


A) 하스미 시게히코가 오즈 야스지로와 포드를 칭찬한 표현을 인용합니다.


 「존 포드도 같은 경우지만, 영화에 만약 신이 있다면 그들(존 포드, 오즈 야스지로)은 그 신에게 사랑받은 사람들이다. 오즈와 존 포드의 영화를 보면 인간이 이렇게까지 훌륭한 영화를 만들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영화의 신으로부터 사랑받은 이 영화들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영화는 열심히 노력하면 아무나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있는데 그건 잘못된 것이다.」14


Q) 영화는 눈으로 보는 건데 중요한 건 뭘 보는게 아니라 어떻게 보는 거 아닐까요.


A) 저는 두 거장이 무엇을, 어떻게 보여줬느냐에 대해 1·2부에서 다루었습니다.


Q) 올려 주신 장면들에서 인물의 시야를 거론하신 것도 결국 편집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잖아요. 존 포드와 히치콕의 영화 속 사람들의 시선을 따라가며 자연스레 이야기가 진행되게 만든 바로 그 편집이요.


A) 두 인물이 대화하는 장면을 롱테이크로 한 쇼트에 담으면, 편집보단 화면 내에서의 미장센이 중요해지죠. 꼭 편집이 중요한 건 아닙니다.


Q) (위 질문에 이어서) 근데 뒤에서 모뉴먼트 밸리에 대해 언급하실때 보면 마치 뛰어난 사진가가 풍경 느낌이 살도록 찍었다는 듯이 말씀하셔서 저는 좀 의아했어요. 본문에도 나와 있듯이 수많은 감독들이 모뉴먼트 밸리를 거쳐갔지만 그 미학은 존 포드만의 것이잖아요. 그러면 당연히 포드의 편집이 중요하단 말일 텐데 편집 얘기가 거의 안 나온다는 건 지적할 만한 문제라고 생각해요.


A) 편집을 '쇼트를 자르고 연결하는 일'이라 한정지어 설명하겠습니다. 제가 말한 건 연기·숏 구성·촬영·편집을 모두 아우르는 포드의 포괄적 미학에 대해서 말한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편집에 대해 궁금하시다면 이 2부에서 그에 대해 어느 정도 서술했으니 참고해주세요.


Q) 대사가 영화의 표현 범위를 넓혔다는 것도 저는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고 있어요. 소셜 네트워크, 좋은 친구들, 만다라 같은 영화들 보면 대사량이 엄청난데도 영상하고 짝짝 붙으니까 재밌거든요. 앞의 두 영화는 정보가 엄청 많죠. 그래서 굉장히 빠른 편집에 말도 되게 많아요. 소셜 네트워크는 가끔 무슨 랩 듣는 기분마저 들지요. 그 덕분에 그렇게 복잡한 이야기를 두 시간 내외로 끊을 수 있는 거죠. 대사의 영화적인 면은 그런 복잡한 이야기를 할 수 있게 해주는 거라고 생각해요. 만약에 저 두 편을 무성 영화로 만든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게 제대로 되겠어요? 만다라는 그에 비하면 편집 속도는 느려요. 근데 또 이 작품은 승려들이 산천초목을 걷는 걸 멀리서 잡을 때 대사가 전해주는 감동이 있어요. 정성일 비평가 말대로 ㅜㅇㅠ ㅜㅇㅜ 풍경이 함께 고뇌하면서 막 슬퍼하는? 오묘한 정서가요. 잘만 편집한다면 대사는 설명 외에도 정서 전달 효과도 엄청나죠


A) 대사가 맛깔나면 그것도 좋죠. 하지만 사람 몸에서 손가락보다 심장이 중요한 것처럼, 영화에선 대사나 소리보다 화면과 이미지가 더 중요하단 것을 저는 주장한 겁니다.


Q) "영화의 시각적 효과는 모두 편집으로 생긴다" 고 생각해서 그렇게 말했는데, 여기에 동의하시나요? 아니면 의견이 다른 셈이니 어쩔 수 없지요.


A) 편집을 '쇼트를 자르고 연결하는 일'이라 한정지으면, 동의하지 않습니다.


Q) 영화란 게 장면들의 연계잖아요? 그러니까 이전 장면이 무엇이냐에 따라 다음에 보게 될 인상을 우리가 결정하게 된다는 거죠. 쿨레쇼프 효과 같은 건 저보다 잘 아실 테고, 모든 영화가 여기서 벗어나지는 않기 때문에 저는 위와 같이 주장하였습니다. 다른 영화들이 존 포드 영화와 달리 모뉴먼트 밸리를 배경으로만 둔다고 예를 들어 주셨는데, 허문영 평론가님의 존 포드 이야기 속 스틸컷들만 봐도 그냥 모뉴먼트 밸리를 배경으로 무심히 놓은 듯한 장면들이 있어서 아직 잘 동의가 되지 않습니다. 이 점에 대한 조금 더 추가적인 설명을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A) 모뉴먼트 밸리를 존 포드가 다루면 겉으로 보이는 암석봉을 넘어서는 이미지와 형질이 발생합니다. 다른 감독들은 만들어내지 못한 '무언가'가요. 그 무언가에 대해선 저도 잘 모르겠지만, 1부와 2부의 내용이 그에 대한 일정 수준의 답이 되길 바랄 뿐입니다.


 첨언할 게 있습니다. '이전 장면이 무엇이냐에 따라 다음에 보게 될 인상을 우리가 결정하게 된다'는 그 자체로 올바른 문장입니다. 허나 그 문장에 따라 '모든 시각적 효과는 편집으로 발생한다'고 결론짓는 건 조금 과격하게 느껴집니다. 그 결론에 따르면 롱테이크 쇼트도 귀하껜 편집의 일종이 될 텐데, 그러면 사전적 정의로서의 '편집'을 넘어서는 의미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너머의 의미는 논의의 대상이 되기가 매우 힘듭니다. 존재하는 것도 논하기가 벅찬데, 존재하지 않는 것까지 끌어다 논하다뇨.

 

 제가 선진영화인님의 문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걸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추가적인 연락 바랍니다.

 

 

 


11. 뉘우침


 쌓인 사유를 보니 심정이 바뀐다. 1부의 서문에서 포드와 히치콕을 '영화의 양대 주신(主神)'이라 부른 것을 취소해야겠다.


 내 후회의 질문은 3가지로 나뉜다. 첫째, '주신(主神)'이라는 표현이 과연 적절했냐는 것이다. 이 글의 1부를 쓸 때에도 긴가민가한 마음 가운데 '신(神)'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조금 과한 게 아니었나 싶다. 그 둘이 물론 뛰어나긴 하지만, '신'이라는 표현은 지나치게 숭배하는 말이었고 과하게 종교적인 단어였다. 존 포드와 히치콕 외에도 영화에 기여한 이름이 가득한데도 이 둘만 '신'이라 부른 것은 다른 영화인을 폄하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포드와 히치콕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기에 내 스스로 그 표현을 허락할 수도 있겠으나, 그러기엔 내 나이와 경험이 많지 않은 게 흠이다.


 둘째, 영화사 최고의 감독을 꼽는 시도가 과연 정당한 시도냐는 것이다. 영화에서 최고를 가리려 할 때마다 문득 드는 질문으로, 질문이 떠오를 때마다 오래전 아로새겨진 한 대화문이 내 생각을 휘감는다.


 「정성일_ 산만하게 질문한다고 했으니 다시 산만하게 돌아오겠습니다. (웃음) 봉준호 감독에게 한국영화는 김기영입니다. 여러 차례 김기영 감독님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셨습니다. 이를테면 다른 자리에서 다른 감독들로부터 자주 호명되는 유현목, 이만희, 하길종, 이장호의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봉준호 감독에게 임권택은 무엇입니까?


 봉준호_ 김기영 감독님을 한국 영화다, 한국 영화는 김기영이다 라고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이마무라 쇼헤이나 신도 가네토나 (아르튀르) 립스타인 같은 분들 중 한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김기영 감독님이 한국적이다, 한국 영화. (잠시 생각) 이를테면 일본 영화는 오즈다, 라는 식의 접근으로 김기영 감독님을 선택한 적은 없다고 생각해요. 그냥 너무 재밌는 거예요. 나를 미치게 하는 요소가 있어요. 이장호 감독님의 영화들, 〈바람 불어 좋은 날〉, 〈바보선언〉이나 〈과부춤〉 이런 것도 엄청나게 좋아합니다. 김기영 감독님의 영화 팬으로서, 팬심 이런 거는 압도적으로 큰 거는 사실입니다. 그분에 관해서 많이 수집했고 책이건 비디오이건. 하지만 김기영 감독님이 한국 영화고 충무로다. 일본 영화의 오즈다, 라고는 한 번도 생각 못했어요.」15


 어쩌면 정성일이 던진 우문을 봉준호가 현답으로 받아친 것처럼 보일 수 있겠다. 감독들 중에 위대한 이를 가려내 역사를 온전히 그의 몫으로 돌리는 것은 과격한 구분일테니까. 예술을 가려내는 것은 거대한 역사가 아닌 바로 나 자신이니까. 하지만 나 자신 안에서 존 포드가 최고인 것을 어찌할까. 다른 감독들이 시도와 노력, 추측한 답에서 끝나는 중에 혼자 해답을 찾아낸 감독이 나타난다면, 그에게 조촐한 왕관 하나 정도는 씌워줄 수 있지 않을까. 주관적 판단을 객관으로 정당화하느냐, 그저 주관으로만 냅두느냐. 정성일과 봉준호는 나와 상관없이 그들의 경력을 이어가겠지만, 나는 그 이름들이 판단의 갈림길처럼 들린다. 결론이 맺어지지 않은 이 고민 때문에라도, 나는 '신(神)'이라는 표현을 일단 물러야겠다.


 셋째, 내 생각에 의심을 던지는 두 거장을 그간 만났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 두 거장은 내가 앞으로 거쳐야 할 이름이기도 하였다.


 하나는 '오즈 야스지로'였다. 얼마 전까지 나는 오즈 야스지로를 이해할 때 존 포드와 엮어서 이해했다. 내 눈엔 분명히 오즈와 포드는 여집합보다 교집합이 더 큰 이름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해를 품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존 포드와 오즈 야스지로의 문법적 유사함 때문이었다. 이 두 감독이 배우를 찍으면 독특한 구도가 형성되는데, 다른 감독들의 화면구도와는 구분되면서 포드와 오즈는 서로 같은 구도를 공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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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드의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 오즈의 〈초여름〉

 

 그런데도 오즈를 '포드의 일부분'이라 이해한 이유는 무어냐, 이 구도를 얼마나 자유롭게 구사하느냐 때문이었다. 오즈는 규칙의 화신이었다. 그 규칙이 너무나 철저해 대표작 하나만 보아도 규칙 중 절반은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정도다. 반면 존 포드는 '카메라를 자주 움직이지 않는다'라는 점만 빼면 규칙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카메라는 제한된 움직임 속에서 자유로운 구도와 섬세한 깊이를 만들어내었고, 바로 이 점에서 규칙 많은 오즈는 포드의 문법에서 알짜배기만 취한, '이이토코토리(良いとこ取り)' 정신의 실천자처럼 보였다. 이로 인해 오즈는 매장면을 훌륭함으로 채울 수 있었지만, 영화의 또 다른 가능성을 희생해 그 성취를 얻은 듯 하였다.


 이같은 편견은 염두에서 태어날 때부터 반증의 찌꺼기를 품고 태어났는데, 그때가 오즈의 대표작 〈만춘〉과 〈초여름〉을 본 후였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론 오즈는 포드의 부분집합이었다. 하지만 〈만춘〉과 〈초여름〉이 나에게 준 경이로운 체험은 뭔가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표면적 촬영과 편집은 존 포드의 것과 유사했지만 뭔가 달랐다. 〈만춘〉에서 보여준 시선과 거리의 서스펜스는 포드적이면서 동시에 포드와 전혀 다른 식으로 수려했다. 특히나 〈초여름〉은 정말로 충격적이었다. 몇몇 장면은 어찌나 충격적인지, 그 조용한 영화관 안에서 혼자 육성으로 "어!" 하면서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두 영화가 준 충격이 존 포드의 것과 전혀 다른 종류의 충격이란 것을 깨달은 것은 나중이었다. 그 나중이 되서야, 오즈와 포드는 '교집합이 큰' 두 개의 전혀 다른 이름이란 것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차이를 명확하게 말과 글로 표현하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하겠다)


 다른 하나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였다. 이 사람은 조금 다른 차원에서 내게 사유의 미개척지에 대한 힌트를 주었다.


 영화언어를 다루는 방식으로 고전과 모던을 나눈다면, 나는 고전주의자다. 일반적인 영상문법을 넘어서 쇼트와 서사를 짜놓고, 관객에게 읽어내길 강요하는 영화를 나는 별로 안 좋아한다. 타르코프스키도 그 범위 안에 속해 있는 줄로만 알았다. 몇몇 작품을 찾아보고 나서야 타르코프스키도 고전적인 감독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는 고전적'이라는 한정적인 인식이었다.


 그러는 중에 〈거울〉을 보게 되었다. 길러놓은 안목은 있어서 단번에 러시아인이라는 공동체의 기억과 정신을 치유하기 위해 만들어진 영화라는 것은 알아차렸지만, 영화의 플롯이 '죽어가는 남자의 회상'이라는 것은 영화가 끝난 후 외부정보를 통해서야 알게 되었다.


 쇼트와 쇼트는 연결되지 않았고, 글로 정리될 서사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영화가 개봉한 당시의 러시아인들은 이 영화를 보고 무언가를 느꼈을 것이다. 찾아보니 실제로 당시 몇몇 관객들은 삶에서 몇 안 되는 진실한 시간을 〈거울〉을 통해 가졌다고 한다. 나는 그들과 같은 경험을 할 수 있을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영화는 온전히 그 당시 러시아인을 위해 만들어진 영화였다. 하지만 그러했기에 그 어느 영화보다 진실했다.


 〈거울〉의 진실함은 고전적인 명분에서 출발했지만 고전적인 방법을 거부하고서 태어났다는 데에 큰 충격을 주었다. 연결되고 이어지고 쌓이고 부딪히는 정보와 감흥들로 진실을 향해 나아가지 않고 관객의 뇌리를 직접 파고들어서 진실함을 끌어냈다. 시선으로 이어지고 쇼트로 이어지는 서사를 넘어, 영화가 관객이 지닌 사적 기억과 공명하며 에너지를 만들어내면, 그건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기적이라 불러야 하지 않을까. 〈거울〉은 기적 같은 영화였다.


 타르코프스키는 아무도 나아가지 않은 그 길을 당당하게 나아갔다. 도대체 무슨 믿음이 그 안에 있었던 걸까. 타르코프스키는 무엇을 보았던 걸까. 혹 '문법'이라고 다듬어진 현 영상언어들이 실은 그 기적을 무시하고서 만들어진 편협한 체계는 아닐까? 우리도 모르게 간과한 새로운 영상문법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내 상념의 호수에 조약돌은 던져졌고, 물결은 고요히 일었다. 이 또한 타르코프스키가 바란 기적이었을까.


 해석을 거치지 않고 직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깊이에 대해선 포드와 히치콕을 따라잡을 이가 드물다고 지금도 나는 판단한다. 그래도 이들에게 확신 넘치는 지지를 보내기 위해선 내 주장을 뒤로 하고 좀 더 많은 영화와 작가를 만나야 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위와 같은 이유에서, 나는 '신(神)'이라는 표현을 번복하려 한다.

 

 


12. 글을 마치며


 2부를 쓰기 전에 일이다. 지인에게 1부를 보여주며 조언을 구했는데, '너무 포괄적이다'라는 지적을 받았다. 나도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 얼른 이 널따란 범위의 글쓰기를 끝내고, 개별 작품에 대해 글쓰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래서 이번 2부는 내 안에 있는 '포괄적 견해'를 다 토해내듯이 썼다. 그 모든 걸 다 꺼낸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더 이상 두 거장을 비교·탐구하는 글은 쓰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싶다. 만약 쓰게 된다면 그땐 한 거장만을 다루게 될 것이다.


 고로 "존 포드 vs 히치콕" 글은 이 2부로 마친다. 3부는 없을 것이다. 대신 새로운 주제를 찾아내 글쓰기 생활을 이어갈 것이다.


 NEZORF님과 선진영화인님께 개인적으로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 이들은 나의 무책임한 글쓰기에 경종을 울려 책임을 부과해주셨다. 내가 비록 대단찮은 누리꾼 중 하나지만, 앞으로 글 쓸 때만큼은 전문 비평가에 못지 않은 책임감과 사명감을 가지고 쓰도록 노력하겠다.

 

 위대한 작품을 남겨 내게 사유를 던져준, 존 포드와 알프레드 히치콕에게도 감사의 뜻을 전한다.

 

 


ford_hitchcock.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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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스미 시게히코, 『씨네21』 417호
[2][14] 하스미 시게히코, 『씨네21』 418호
[3] 정성일, 『씨네21』 759호
[4] 소포클레스, 『오이디푸스 왕』, 민음사
[5][11] 정성일, 『영화천국』 48호
[6][10][13] 이후경 역, 『씨네21』 969호
[7] 정성일, 『말』 1995년 6월호
[8] 허문영, 『씨네21』 929호
[9] 「사무엘하」 13장 1~19절, 『공동번역성서』
[12] 로저 이버트, 윤철희 역, 『위대한 영화2』, 을유문화사
[15] 「주인공들이 너무 가여워요 - 봉준호, 임권택을 생각하(면서 자기 영화들을 돌아보)다 ①」, 이지영 녹취, KMDB

 

 

 

Q-brick Q-bri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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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리 큐브릭 팬 아닙니다. 그냥 이름만 갖다 쓴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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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
정성일 평론가가 KMDB에서 임권택 감독 주제로 허문영 씨와 대담하는 서문에서 그랬죠, 일단 직관적으로 깨달은 다음에 보다 깊은 수준의 소통이 가능하다고요. 오즈의 필로우 쇼트가 그냥 장면들의 연쇄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나는 뭘 해도 설득 못 시킨다고 그랬는데, 이 글을 보는 제 심정이 그렇습니다. 저는 말씀하신 것처럼 그렇게 열심히 영화적 사유를 넓혀 가고 배우려고 영화를 보지는 않거든요.
12:01
17.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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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brick 작성자
선진영화인

 답글에 앞서, 무려 석 달이 지나서야 답하는 것에 사과드립니다. "존 포드 vs 히치콕 2부"의 만만찮은 분량을 2주 덜 되는 기간동안 몰아쓰다보니, 글 자체에 신물이 나서 한동안 글을 열어보지 않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의욕을 상실했던 탓입니다. 다시금 의욕을 얻었으니 늦었지만 성실히 답하겠습니다.

 

 사유를 넓히고자 하는 것은 저만의 영화사랑법입니다. 선진영화인님께도 선진영화인님만의 영화사랑법이 있을 터고요. 저는 이 둘이 서로 상충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와 선진영화인님의 의견이 항상 일치하진 않을지언정, 그래도 최소한의 이해는 가능할 거라 생각해요. 말씀하신 정성일-허문영 대담도 '소통 불가능'보다는 '다른 의견과의 교감'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21:22
17.06.25.
2등
나선원의 도식, 고깔과 숲 등 되게 학문적인(?) 소리를 하실 때마다 기가 죽어요. 그러니까 쿨레쇼프 효과 같은 건 저보다 잘 아실 거라고도 말씀드린 거구요. 존 포드와 히치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에요. 저는 이 사람들이 영화를 어떻게 혁신시켰고 발전시켰는지 관심이 없어요. 그러다 보니까 큐브릭님의 글에 깊이 들어가지를 못하는 거죠.
12:10
17.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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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brick 작성자
선진영화인

 제 글에 깊이 들어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애초에 이 "존 포드 vs 히치콕 2부" 글은 영화의 근원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쓰여진 글입니다. '우리는 왜 영화에서 재미를 느낄까?', '영화란 무엇일까?', '존 포드와 히치콕의 작품은 왜 그리도 아름다울까?' 등등... 보통 사람들은 시계에서 바늘만 보면 그만이지만, 몇몇 사람들은 시계의 작동 원리까지 알고 싶어하는 법입니다. 저는 원리를 알고 싶어하는 사람이고, 이 글은 원리를 알고 싶은 또 다른 누군가를 위해 쓰여진 나름의 편지글이죠. 본문도 이를 알리고 있습니다. 첫번째 단락("왜 포드와 히치콕인가?") 끝마디 즈음 문장입니다.

 

 「나와 같이 호기심과 지적 갈증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이 글이 작은 도움 되길 바라며...」

 

 

 그리고. 나선원의 도식, 고깔과 숲 등은 학문적인 소리가 아니에요..ㅠㅜ 모두 제가 즉석에서 만든 단어들이고 이 글 안에서 모두 뜻이 설명돼 있으니, 뜻을 모르시겠으면 유심히 다시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21:23
17.06.25.
3등
아 물론 이건 제가 그냥 무식해서 이해를 못하는 거에요. 큐브릭님 잘못은 없어요. 저는 되려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하스미 시게히코도, 정성일도, 이 글에도 똑같은 점이 있어요. 셋 다 영화적 수행을 계속하려는 점과 그 소위 말하는 내공이 부족하면 굉장히 무시를 한다는 거에요. 저는 하스미와 정성일이 영화 작가들에 급을 매길 때마다 너무 불편해요. 물론 그 게 재미는 있어요.
12:15
17.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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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brick 작성자
선진영화인

 하스미 시게히코 글은 읽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정성일 평론가는 그 태도가 무척 공고하다는 것을 잘 압니다. '정말 전문적인 비평이 필요하다' 싶을 땐 정성일 평론가만큼 도움되는 사람이 없지만, 독자 수준을 너무 높게 잡아 오히려 많은 독자를 무시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죠. 저도 그런 거 싫어합니다. 그래서 제 글에서 계속 '쉽게 쓰려 노력한다' 하는 거고, 조금이라도 난해한 단어를 쓰면 그 뜻을 분명히 밝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노력만큼 글이 쉽게 쓰여졌는진 아직도 잘 모르겠네요.

 

 

 영화 작가들에 급을 매기는 일이... 딱히 기분 좋은 일은 아니죠. 성실하게 영화를 만든 사람을 순식간에 공장 제품처럼 다룰 수 있는 일이니까요. 그렇다 하더라도, 매주 개봉하는 영화들엔 좋은 영화와 나쁜 영화가 있습니다. 어떤 영화는 머리를 맑게 해주고 속에 쌓인 것을 풀어주는 반면, 어떤 영화는 피로를 더하고 관객을 짜증나게 합니다. 예시를 꺼내겠습니다. 아래 두 문장을 봐주세요.

 

 A: 좋은 말 할 때 서포터 내놔라 씨발련들아 안 주면 니네 애미들 싹다 죽여버린다
 B: 오, 온화한 감정이여, 부드러운 음향이여, 감동 어린 영혼의 선량함과 평온함이여…

 

 두 문장의 길이는 비등비등합니다. 바이트(Byte)를 측정했을 때 A문장은 74바이트, B문장은 78바이트로, 정보량만 놓고 봤을 땐 차이가 별로 없죠. 헌데 위 문장들이 사람에게 주는 감흥은 크게 차이납니다. (사람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아름다움과 올바름의 미덕은 B문장에 깃들어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건 제가 어떤 '틀'을 가지고서 판단한 게 아닙니다. 인간이 보편적으로 지닌 이성과 감성, 끝내 영혼이라 부를 수 밖에 없는 내면의 무언가에 호소하여 판단한 것이죠.

 

 그렇다면 같은 러닝타임을 가진 두 편의 영화는 어떨까요? 같은 러닝타임 안에서도 아무 감흥도 의미도 없는 농담만 지껄이는 영화가 있을 테고, 그 짧은 시간 안에 인생에 대한 숭고한 견해를 설파하는 영화가 있을 터입니다. 몇몇 감독들은 자신의 일생동안 후자에 해당하는 영화를 여럿 만들어내는 솜씨를 보일 거고요. 이 소수의 감독들은 '작가'라 불릴 수 있겠는데, 그중 몇몇 작가는 단순히 좋은 영화를 만드는 것을 뛰어넘어 영화 한 편에 인문과 사회의 거대한 역사를 담아내는 경이로움을 선보입니다.

 

 저는 그런 점에서, 비평 안에서 그 수많은 영화 작가들이 논의되고 구분되어야 하며, 높여질 사람은 더욱 높여지고 깊이 탐구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1:24
17.06.25.
그런데 히치콕이 트뤼포와의 대화에서 그랬잖아요. 화면의 효과를 자아내는 데는 어떤 정해진 형식도 없다구요. 오즈 야스지로도 영화에는 문법이 없댔죠. 그런데 존 포드의 황야의 결투가 구로자와 아키라의 7인의 사무라이보다 여차저차해서 더 훌륭하다, 라고 하시거나 아니면 1부에서 대화하는 사람들의 사진첩의 예시로 파고의 한 장면을 꺼내 드실 때도 저는 그런 기준이란 게 있나 의아해지구요.
12:20
17.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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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brick 작성자
선진영화인

 예술엔 그 어떤 기준도 없다는 게 흔한 중론입니다. 저는 그 중론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취향을 제가 멋대로 재단하겠다는 소리가 아니라, 예술에 있어서 어떤 기준은 있다는 거죠. 취향도 거기에 포함될 수 있을 테고요.

 

 가장 큰 기준으론, 제가 1부에서 말한 '윤리'의 문제가 있겠습니다. 그 어떤 메시지로 읽힐 만한 요지 없이, 2시간 내내 사람의 시체를 훼손하는 영화가 개봉하면, 우리는 그것을 '예술'이라 부를 수 있을까요? 만약 그런 영화가 개봉하면 사람들이 상영을 반대하겠죠. 상영의 자유를 억압하는 게 아니라, 관객의 입장에서 '우리는 반윤리적인 것을 보지 않겠다'고 의견을 내는 겁니다.

 

 가장 기초적인 기준인 '윤리'는 다른 누군가가 정하거나 강요한 게 아닙니다. 우리 안에 있는 양심의 발현일 뿐이죠. 이와 마찬가지로, 예술을 평가하는 다른 기준 또한 우리 안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정치성이 될 수 있고, '미학'이라 뭉뚱그려 말하는 것이 될 수도 있으며, 그냥 '재미있냐 없냐'를 따지는 단순한 취향이 될 수도,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지적 호기심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저는 1·2부를 통해 그 기준들을 분류하고 영화를 체계화하는 논리과정을 보여준 것이고요.

 

 〈파고〉와 〈7인의 사무라이〉에 대한 평가절하는 그 논리과정에서 다소 불가피한 선택이었습니다. 그 두 영화는 누구에게 내놓아도 손색없는 뛰어난 영화지만, 안타깝게도 영화사 최고걸작들에 비하면 불균질한 지라, 불가피하게 제 글에서 제외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어쩌면 그 선택이 부실한 논리과정과 잘못된 자기성찰 중에 나온 걸 수도 있습니다. 허나 그 선택의 결과가 아닌, 영화를 선별하고자 한 '시도'에 대해선 일말의 후회도 없습니다. 벽돌집 짓는 사람에게 불순물 섞인 벽돌은 내쳐질 따름이에요. 마냥 벽돌을 가지고 놀기 좋아하는 아이에겐 괜찮은 벽돌일 지라도요.

21:25
17.06.25.
본인 취향이라고 하시면 할 말은 없어요. 그런데 거기에 기준을 적용하시잖아요. 그러니까 저는 여쭙고 싶은 거에요. 알프레드 히치콕과 오즈 야스지로에게서 영화를 배운다는 사람이 과연 정해진 기준을 가지고 영화를 판단한다는 게 옳은 것인지를요.
12:26
17.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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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brick 작성자
선진영화인

 저는 계속해서 그 기준이 누군가 정해주거나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오로지 제 자신에게 깃들어 있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말인즉 어떤 기준을 '적용'하는 게 아니라, 어떤 영화가 주는 감흥이 더 복잡다단하고 경이로우며 감동적인지에 대해, 제 느낌과 취향을 구체화하는 과정일 뿐이라는 거죠. 만약 어떤 사람이 정반대의 생각을, 충분히 귀기울일 만한 논리와 함께 제시하면, 저는 기꺼이 그에 귀기울일 생각입니다. 히치콕의 말마따나 예술엔 그 어떤 외적인 기준이 없고, 오직 개개인의 마음 속에 깃들어 있을 뿐이니까요.

 

 돌려서 말하면, 어떤 영화가 훌륭한 영화인지 분간하는 과정이, 도리어 자신의 마음을 확인하는 자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같은 뜻에서 저는 본문에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첫번째 단락("왜 포드와 히치콕인가?") 끝마디 즈음 문장입니다.

 

 「...나 자신이 구도하기 위해 쓰는 글이자 영화라는 거대한 세계를 훑는 개인적인 순례기가 될 것이다.」

 

 

 

 그래도 2부 본문과 이 댓글로 글을 끝맺기엔 많은 아쉬움이 남네요. 소통에 실패한 듯한 자책감, 글을 제대로 완결짓지 않은 자격지심, 뭔가 더 말하고 싶은 충동 등... 아무래도 후속글을 써야할 것 같습니다. 가까운 시일 안에 3부 비스무리한 것을 써서 올릴 테니 많은 관심 바랍니다.

21:27
17.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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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야의 결투와 7인사무를 비교하신 부분은
존 포드의 노림수를 구로사와 아키라가 되려 배제한 것으로 보입니다..
영화의 톤에서 은연중에 묻어나는 테마를 위해서라고 하면 될련지요

12:43
19.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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